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영원한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

하정민 | 52호 (2010년 3월 Issue 1)

마라톤은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마라토너는 대회 3, 4달 전부터 식이 요법을 병행하면서 하루 수십 킬로미터씩 달리는 지옥훈련을 이겨내야 한다. 또 마라톤은 인간의 몸 전체에 고루 충격을 준다. 너무 많이 뛰면 무릎과 발목이 약해지고 결국 스피드가 떨어진다. 세계 유명 선수들이 공식 대회에서 불과 15회 정도만 완주하고 은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공식 대회에 무려 43회나 출전해 41회를 완주한 선수가 있다. 2009년 10월 데뷔 20년 만에 은퇴한 이봉주 선수다. 1990년 전국체전에서 마라토너로 데뷔한 그는 20년 후 같은 대회에서 우승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불혹(不惑)을 눈앞에 둔 마라토너의 대회 참가 자체가 뉴스였는데 그는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는 짝발이면서 평발이다. 마라토너에게 치명적인 신체 조건이다. 왼발이 오른발보다 작아 뛸 때마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평발이라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력 낭비도 심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라톤에서 선천적 천재성보다 후천적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 결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2001년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턴마라톤 우승,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및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연패 등을 이뤄냈다.
 
‘봉달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봉주 선수는 치열한 승부 근성과 집념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성공 비결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마라톤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적이 없지만 그 덕에 계속 도전해야겠다는 목표 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힘든 훈련도 참았다는 것. “마라톤을 즐기지 못했다면 진작에 은퇴했겠지만 달리는 게 좋아서 그냥 뛰다 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며 “스트레스 해소법조차 가볍게 뛰면서 음악을 듣는 일”이라고 말했다.
 
2009년 10월 전국체전 우승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은퇴를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작년 1월부터 3월까지 시합을 준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몸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때에는 어떻게 운동해야 제가 의도한 시간대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실제 결과도 그랬거든요. 하지만 작년 초에는 의도했던 시간대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에도 은퇴를 생각했다 번복한 적이 있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는 느낌이 드니까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물론 더 하고 싶단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특히 은퇴 경기였던 전국체전에서 우승하니까 여기저기에서 ‘아직 후배들 중에서 따라올 사람도 없는데 선수 생활을 좀 더 하는 게 낫지 않냐’고 하시더군요. 약간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선수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되거든요.

왜 욕심을 부리면 안 되나요. 승부 근성이 원동력 아닙니까.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페이스를 제대로 지키면서 뛰는 겁니다. 페이스가 한 번 말리기 시작하면 절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어요. 초반에 스퍼트를 올리다 후반에 축 처지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선수들은 끊임없이 연습하기 때문에 자기 페이스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 알아요. 그러나 막상 경기를 하면, 그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리다 나쁜 결과를 맞이하죠. 선두와 거리가 벌어졌다고 갑자기 속도를 내면 한 번에 나가떨어질 뿐이에요. 서서히 몸을 끌어올리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야죠.
 
20년 동안 마라톤을 해보니 너무 잘하려고 욕심을 부릴 때 항상 역효과가 나더군요. 일단 당장 자기 기록에서 1초를 앞당기는 게 가장 중요해요. 1초가 모여 나중에 1분이 되고, 10분이 되는 거지 욕심을 부린다고 당장 기록을 5분, 10분씩 줄일 수는 없거든요. 빨라도 안 되고, 느려도 안 되고 항상 적절한 페이스를 유지해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시합 전에 ‘오늘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은데’라고 느꼈던 대회에서 대부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금메달을 딴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 대표적 예입니다. 방콕이 워낙 덥고 습한 곳이라 몸이 무거웠는데 오히려 결과가 좋았어요. 반면 시합 전 몸 상태가 좋다고 느끼면, ‘오늘 뭔가 한번 해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일을 그르칠 때가 많았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때 간발의 차이로 은메달을 땄습니다.
그때 적정 페이스를 유지했는데 상대 선수가 너무 잘한 건가요,
아니면 좀 더 욕심을 부렸다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까요.
저는 다른 선수들보다 스피드가 부족한 편입니다.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슈아 투과니 선수가 엄청나게 치고 나갔어요. 그때부터 간격이 벌어졌는데 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간격을 좁혀나가려고 했죠. 조금씩 간격을 줄이긴 했지만, 끝내 따라잡지는 못했어요. 결과적으로는 3초 차이로 은메달을 땄습니다. 100미터만 더 남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었겠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전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했고, 좋은 성적을 냈으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그 대회가 제가 오랫동안 뛸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겁니다. 저도 제가 선수 생활을 20년이나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때 은메달을 땄기 때문에 금메달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고,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1등을 했더라면 지금까지 못 왔을지도 몰라요. 비록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요. 운동선수는 항상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을 처음 시작할 때 제 꿈은 국가대표가 되는 거였어요. 국가대표라는 꿈을 이루니 우승을 하고 싶었고, 국내 대회 우승을 하니 국제 대회 우승이라는 목표가 생겼죠.
 
조금만 유명해져도 초심을 버리는 선수들이 많아요. 초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저 역시 ‘이번 대회가 끝나면 다음 대회에서는 이번 대회 기록보다 1초를 줄여보겠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한 발씩 전진한 게 쌓이고 쌓였기 때문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한 대회가 끝나면 바로 다른 대회에 초점을 맞추고, 그 대회가 끝나면 또 그다음 대회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시시각각 목표를 세워보세요. 그러면 한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요. 자신을 단련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죠.

어떻게 20년 동안 한결같이 달릴 수 있습니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나요.
물론 힘든 시간이 있었죠. 부상과 슬럼프도 있었고, 시드니 올림픽 때는 다른 선수와 부딪혀 넘어지기도 했고, 소속팀이 없었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목표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식이 요법은 조금 힘들었어요. 사람 몸은 체내에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다음에 더 많이 저장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때문에 에너지원인 탄수화물을 완전히 고갈시켰다 다시 채우는 극한적인 식사법을 택했습니다. 보통 시합 1주일을 남겨놓고 하루에 6, 7끼를 양념하지 않은 고기, 계란, 물만 먹어요. 온몸에 힘이 다 빠져 걷기조차 힘들지만 훈련을 이어가야 해요. 그런 식으로 체내 탄수화물을 완전히 없앤 후 탄수화물만 집중 섭취하는 겁니다. 그 와중에 몇 십 킬로미터를 뛰어야 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죠.
 
하지만 힘들다고 투덜거려봐야 달라질 게 있나요? 또 포기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잖아요. 20대 때 친하게 지냈던 동료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운동이 끝나면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로 ‘힘들어 죽겄어. 도저히 더 못 하겄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요. 이상한 게 그 친구가 연습 때는 성적이 괜찮은 데 시합 때는 한 번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더군요. 말이 씨가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라톤은 즐기면서 즐겁게 해야 합니다. 기록을 단축시키겠다는 목표도 가지고, 우승하는 모습도 상상하면 잠시 힘든 걸 못 참아낼 이유가 없어요.
 
마라톤은 코스, 날씨, 장소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굉장히 많은 운동입니다. 습한 날씨가 싫다고, 고산 지대가 싫다고 시합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와 같은 주요 대회 성적은 정말 하늘에서 정해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세계 기록을 보유한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승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즉, 일단 자신이 준비할 건 다 준비해놓고, 최선을 다한 후, 모든 여건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스포츠가 마라톤입니다.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 해주고 싶어요. 운동을 하는 건 솔직히 본인을 위해서 하는 거지,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불편하고 힘들어도 참아야죠. 요즘 선수들이 정신력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선수들이 그냥 달리는 듯 보여도 경기가 펼쳐지는 2시간 동안 치열한 신경전과 전략 대결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전략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감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는 자신감은 욕심을 부리면서 오버페이스를 하라는 게 아니라 경기를 즐기라는 뜻입니다. 저는 계속 선두에서 뛰는 편입니다. 앞에서 제가 주도해가면서 뛰어야 자신감이 생기거든요. 국제 대회에 나가보면 기록이 쟁쟁한 선수, 동양인보다 신체 조건이 월등한 선수들이 많아요. 하지만 전혀 위축된 적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시합 때마다 신체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는 없잖습니까. 때문에 항상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당당할 수 있고, 실제로도 좋은 성적이 나온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세뇌시켜야 합니다. 어차피 다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시합에서 뛸 때마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후배들에게도 그런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마지막 경기였던 작년 전국체전 때 사실 저는 우승을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뛰어보니 후배들이 너무 소극적으로 경기를 하더군요. 서로 눈치만 보고, 어느 한 사람 치고 나가려는 선수도 없고, 거의 제가 주도하다시피 한 경기였죠. 그러면 전반적인 기록만 나빠질 뿐입니다. 앞에 선수가 몇 명 있건 말건 나는 내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뛰어야 해요. 저는 경기 중에 시계도 거의 안 봅니다. 시계를 자주 보면 불안해지거든요. 생각을 비우고 경기에 임해야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과거 “달리면서 달린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죠.
그 정도로 극한 몰입이 가능해진 게 언제부터인가요.
1994년 이후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제가 계속 2시간 10분대를 뛰다가 처음으로 국내에서 2시간 9분대 기록을 냈어요. 그전에는 항상 2시간 10분대 기록을 냈는데 1분을 단축시키는 게 너무 어려웠거든요. 막상 그 벽을 깨니까 그제서야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점을 스스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임계점을 돌파하니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나 할까요. 그 후에는 장소나 몸 상태에 큰 관계없이 항상 그 정도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일반인들은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고통스러운 순간을 참고 운동을 계속하다 보면 고통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지면서 운동을 계속하고 싶어지는 심리)를 많이 언급하는데 사실 선수들은 그 기분을 잘 몰라요. 더 달리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러너스 하이 단계를 넘어서서, 달리는 걸 잊을 정도의 단계에 도달해야만 하니까요.
 
평발과 짝발이라는 불리한 신체 조건을 지녔습니다.
약점을 의식한 적은 없나요.
신체 조건이 불리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 때서야 제가 평발이란 걸 알았어요. 특별히 발이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도 별로 없고요. 심폐 능력도 마찬가지에요. 분명 타고나는 요인도 있지만 결국 만들어지는 거예요. 강한 훈련을 하면 폐활량도 그에 맞춰 늘어나니까요. 마라톤은 선천적인 천재성보다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종목이에요. 신체 조건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불리하다면 남들보다 더 노력하면 되죠.
 
목표 의식을 계속 강조하셨는데, 은퇴 후 목표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국내 남자 마라톤 최고 기록이 제가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 7분 20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그 기록을 깨는 선수를 양성하고 싶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