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가 두려워…’ 압박감이 실수 낳는다

40호 (2009년 9월 Issue 1)

김 회장은 음료회사와 제지회사 중심의 기업을 물려받은 2세 경영자다. 사람들은 그가 선친의 덕을 보기는 했지만 그 자신의 능력도 뛰어난 똑똑한 기업인이라고 인정해왔다. 그런데 최근 김 회장이 급격한 자금 사정의 악화로 보유 회사와 부동산을 처분하고 있다. 급기야 채권단의 압력에 밀려 본사 사옥까지 매각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김 회장이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그는 불황의 영향이 적은 음료업과 제지업을 고수해 유동성 위기를 피할 수 있었고, 그때 확보한 현금으로 헐값에 나온 빌딩과 토지를 인수했다. 또 인터넷 버블이 붕괴됐을 때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코스닥의 알짜 기업들을 저가에 인수했다. 어느새 그룹의 외형이 꽤 커졌다. 그러나 김 회장은 여전히 재계 서열이 낮다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 Y유통이 매물로 나왔다. 김 회장은 Y유통을 인수하게 되면 회사 규모를 단숨에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Y유통을 인수하기로 결심한 데는 현재 주력 사업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불안감도 큰 몫을 했다. 음료업은 저출산 때문에 수요가 정체될 것으로 보였다. 코카콜라와 같은 미국의 음료 기업은 해외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국내 음료 브랜드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제지업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김 회장은 새로운 성장 동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Y유통이 매물로 나왔다.
 
김 회장이 Y유통 입찰에 뛰어들었을 때 재계에서는 의외로 여겼다. 그는 다들 자신을 우습게 여기지만 모두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입찰가는 점점 올라갔다. 일단 인수전에 발을 들여놓고 나니, 자기 결정을 합리화하는 증거들만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우려하는 시선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Y유통을 인수하던 날, 김 회장은 자신이 제대로 된 사업가가 된 듯해 뿌듯했다. Y유통 인수를 계기로 제2의 창업을 이뤘으며, 비로소 창업자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느꼈다.
 
호황이 이어지면서 Y유통은 기대 이상의 실적을 냈다. 성공에 고무된 김 회장이 다음번 인수 타깃으로 노린 것은 오프라인 유통회사인 Z사였다. 참모들은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될 것이라며 오프라인 매장을 인수하려는 김 회장을 말렸다. 하지만 그는 Y유통과 Z사가 가져올 시너지 효과가 그러한 기우를 상쇄하고도 남을 거라며 인수 결정을 합리화했다. 과거에 본인이 인터넷 회사의 지분도 소유하고 경영을 했던 경험도 있으니, Y유통과 Z사를 기반으로 인터넷 쇼핑몰 사업에 뛰어들면 옥션이나 인터파크에 버금가는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김 회장은 현금을 긁어모아 높은 가격에 Z사를 인수했다. 금융 위기는 단기간에 끝날 것이니 오히려 지금이 적절한 매수 시점이며, 앞으로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 후 악몽과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경기 침체로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Y유통과 Z사의 적자가 누적됐다. 이자 비용이 치솟았고, 자금 압박이 심해졌다. Y유통과 Z사를 재매각하려 해도 불황에 유통업체를 인수할 회사는 없었다. 김 회장은 궁여지책으로 아버지 때부터 이어오던 음료기업과 제지기업을 싼값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짜 기업의 매각 후에도 유동성 위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외환위기 때 싸게 매입했던 본사 사옥마저 급히 팔아야 했다.
 
김 회장은 과거 위기 때 자신에게 헐값에 부동산을 매각한 기업인들과 알짜 정보기술(IT) 회사를 매각한 기업인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은 그들보다 똑똑하고 현명하기 때문에 성공했노라고 자평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자신의 신세가 그때 곤란을 겪었던 기업가들과 똑같았다.
 
두려움에 판단 그르쳐
많은 기업인들이 기업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2018년부터 대한민국의 절대인구가 감소한다고 한다. 이번 불황 이후에 올 호황이 예상보다 빨리 사그라지고 다시 불황에 빠진다면, 그때 고령화의 여파는 심각할 것이다. 이번에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 경기 침체의 신호가 됐다. 하지만 다음 불황은 한국과 대만의 고령화와 중국의 초로화로 인한 아시아발 경제위기에서 촉발돼 미국과 유럽으로 번질 수도 있다. 경제성장률 저하에 따른 자산 가치 하락이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전반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앞으로 채 10년도 안 남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업 구조가 송두리째 바뀔 것이며, 어떤 기업도 그 여파를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똑똑한 기업인일수록 이런 상황이 자꾸 눈에 들어와 불안과 초조에 빠지기 쉽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뭔가 다른 산업에 진출해야만 하고, 1분 1초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강박감을 가져온다. 이런 생각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기업인들은 기존 사업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또 신규 사업의 가치를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해 턱없이 높은 인수 비용을 지불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한번 발을 담그면…
차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특정 차종을 선택하면 길거리에서 그 차종이 자꾸 눈에 띄고, 사람들이 그 차종을 선호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본인이 임신을 하거나 배우자가 임신을 하면 갑자기 임산부들이 많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기업인이 어떤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결정이 회사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증거들만 자꾸 보인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런 증세는 더 심해진다. 똑똑한 사람들은 누가 반대를 하면 그 반대 의견을 반박하는 논리를 끝까지 찾아낸다. 윗사람의 권위와 치밀한 논리 앞에서 반대론자들은 꼬리를 내리게 마련이다.
잘못된 인수합병(M&A)을 실행한 기업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 “우리가 그때 A기업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경쟁자가 인수했을 것이다. 우리가 A기업을 인수해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경쟁 기업이 인수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다.” “실수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다. 이번 M&A를 통해 우리는 큰 교훈을 얻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따라서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합당할지 몰라도 옆에서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대며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합리화한다.
 
희소성과 승부욕이 만날 때
홈쇼핑을 보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가격에 이렇게 좋은 품질의 물건을 구입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TV 화면에는 초단위로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고 있다. 지금 바로 그 제품을 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M&A를 추진하는 기업인들도 비슷한 심리를 갖기 쉽다. 이렇게 좋은 매물은 앞으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게 된다. 경쟁자가 있으면 승부욕까지 생긴다. 매물이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남보다 먼저 갖고 싶다는 승부욕이 만나면, 인수 가격이 점점 올라가게 된다. 뭔가 꼭 사고 싶고, 남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이미 게임은 끝난 셈이다. 높은 인수 가격은 시너지 효과, 전략적 투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등의 미사여구로 합리화된다. 그 매물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살 기회가 열려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심리적 요소를 통제해야
최근에 M&A 후유증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대기업 가운데 형제 경영 체제로 유명한 그룹이 있다. 형제간의 갈등이 있고, 뭔가 크게 업적을 남겨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경쟁이 있다. 그런 과정 중에 무리한 M&A가 추진됐을 수도 있다. 과거 2세 경영인들이 창업자의 주력 사업인 제조업을 버리고 유통업, 금융업, 건설업, 자동차업, 전자업과 같은 신규 사업에 진출했다가 도산한 사례가 있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기존 사업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새로운 사업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게 만들었다.
 
의식적, 무의식적 욕심이 없다면 성공한 기업가가 될 수 없다. 강한 성취 욕망은 기업인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다. 기업가에게 뭔가 이루고자 하는 욕망과 더 커지고자 하는 욕망, 경쟁자를 물리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이 숨겨진 열등감을 만나게 되면 기업인을 파멸에 이르는 선택으로 이끌 수도 있다. 불안감 때문이든, 흥분감 때문이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본인의 심리적 상태를 자문해봐야 한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기업을 운영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계신 독자 분들에게 상담을 해드립니다. 최명기 원장에게 e메일을 보내주신 분들의 사례 중 적절한 것을 골라 이 연재 코너에서 조언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물론 소속과 이름은 익명으로 다룹니다. 이번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필자는 중앙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았으며, HSM(Health Sector Management)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부여다사랑병원 원장과 경희대 경영대학원 의료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