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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가보지 않은 길

김현진 | 296호 (2020년 5월 Issue 1)
미국의 스타트업 ‘페어 테라퓨틱스’가 선보인 중독 치료용 애플리케이션(앱) ‘리세트’는 인지행동치료법을 텍스트, 비디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콘텐츠에 적용함으로써 환자들이 앱을 통해 알코올, 마약 등에 대한 충동 억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2017년 9월 소프트웨어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인허가를 받으면서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치료제가 된 이 앱은 12주간 사용하면 중독을 완화하고 기존 치료 프로그램에 대한 순응도를 높이는 것으로 검증됐습니다.

한편 ‘알킬리 인터랙티브’는 아동의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태블릿 PC 게임을 개발해 화제가 됐습니다. FDA 승인을 통과하면 최초의 질병 치료용 게임이 될 전망입니다. 가상 현실(VR) 콘텐츠로 진통제 기능을 발휘하는 기술을 개발 중인 기업도 있습니다.

이 사례들은 최근 헬스테크 분야에서 가장 ‘핫’한 것으로 꼽히는 디지털 치료제(Digital therapeutics)입니다. 디지털 치료제란 인공지능(AI), VR, 블록체인 등의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환자를 치료하는 것으로 복용용 알약인 1세대 신약, 주사제인 2세대 신약, 세포 치료제인 3세대 신약에 이어 질병의 예방, 관리, 치료 용도로 쓰입니다. 디지털 치료제를 비롯, 기술과 의료 정보의 융합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기술, ‘헬스테크’는 올해 초 열린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0’ 행사에서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꼽히는 등 이미 인류의 미래 신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비전 부족과 규제 등에 부딪혀 기대보다는 속도감 있는 발전이 이뤄지지 못했던 분야이기도 합니다. 이런 헬스테크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일상을 잃게 한 ‘코로나 쇼크’ 덕에 비약적 발전을 기대할 만큼의 모멘텀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전 세계 확산을 세계보건기구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보다도 앞서 경고한 기업은 캐나다의 작은 AI 스타트업 ‘블루닷’이었습니다. AI 기술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개발된 진단 키트 설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 코로나19 치료제 후보 물질 발굴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기는 각종 규제의 문턱을 낮추는 데 이미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올 2월, 정부가 이전까지 금지됐던 원격의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면서 비대면 진료 관련 서비스 확대가 급물살을 타게 됐습니다. 2003년 의료인들 간 원격의료를 허가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고도 더디게 진행됐던 서비스가 위기 덕분에 마중물을 맞게 된 셈입니다.

실제로 원격의료 한시 허용 이후, 국내 헬스케어 플랫폼 ‘케어랩스’는 원격의료 지원 앱 서비스를 선보여 19만 명에 달하는 방문자 수를 끌어모았습니다. 코로나19 의심 증상 환자들, 기저질환자, 영유아 부모 등 감염병 취약 계층이 전화 진료 등을 통한 원격진료 서비스에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헬스테크가 향후 의료 서비스에 ‘대세’가 될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진행 중인 의료소비주의와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공공적 기능, 민감성 등을 들어 공급자 중심, 보수적으로 운영됐던 의료 서비스가 소비자들이 좀 더 통제력 및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스트셀러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염병이 역사를 바꿨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류 역사가 기술 발달이란 톱니바퀴와 함께 맞물려 가고 있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으로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이 더욱 급증할 것임을 생각하면 ‘코로나19’발(發) 위기는 보건 관리와 관련된 인류 역사를 바꾸며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재촉하게 될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새로운 길이 어떤 방향일지, 그 여정에서 어떤 기회를 찾아야 할지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를 통해 탐색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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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편집장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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