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환경에서 어떤 것이 원본이고, 다른 것이 원본을 모방했는가 하는 인과적 선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변형된 것들이기 때문. 원본은 단지 ‘원형(prototype)’, 즉 변형을 위한 일종의 플랫폼 형태에 불과할 뿐 우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선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모방한 ‘복제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하고 있는가. 아니,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관계도 ‘상사성(서로 비슷함, similarity)’을 띤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로봇은 분명 인간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형태의 독립된 존재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라차리니는 왜 디지털 작업을 했는가?
정육면체 모양의 방에 들어서면 사방의 벽은 물론 천장과 바다까지도 온통 흰색뿐이다. 다만 사방의 각 벽면에는 중앙에 하얀 해골이 하나씩 걸려 있다. 이 작품은 로버트 라차리니(Robert Razzarini)가 2001년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주최한 ‘비트스트림(Bitstream)’이라는 전시회에서 설치된 것으로, 작품명은 말 그대로 ‘스컬(해골·Skull)’이다. 레진으로 만들어진 이 해골이 사람의 두개골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이 해골은 어딘가 모르게 기이하게 변형된 형태를 띠고 있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해골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홀바인(Hans Holbein)의 ‘대사들’(1533)을 떠올릴 것이다.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 하단 중앙에는 그 유명한 왜상(anamorphosis)이 존재한다. 얼핏 보면 이 왜상은 말 그대로 ‘왜곡된 상’(distorted image)처럼 기이하게 보인다. 이 왜상의 정체는 정면이 아닌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고 바라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된 이 그림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다른 그림을 볼 때와 달리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몸을 이동해 하단의 중앙에 있는 이 왜상의 정체를 확인하려 든다. 이윽고 이들은 온전한 형태의 해골을 발견하고는 만족감을 나타낸다.
홀바인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라차리니의 해골을 보면서 자연스레 이 그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변형된 형태의 해골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이 유사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홀바인의 해골이 2차원의 평면에 그려진 회화의 이미지라면 라차리니의 해골은 3차원의 조각 작품이라는 점이라는 정도가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두 작품의 차이는 2차원적 이미지와 3차원적 이미지라는 시각적 차원의 문제에 불과할까?
홀바인의 그림은 정면에서 보면 왜곡된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오른쪽에서 보면 멀쩡한 해골의 모습이 나타난다. 원래 ‘왜상(歪像·anamorphosis)’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기이한 형태를 띠지만 특정한 관점이나 광학적 장치를 이용할 경우 지극히 정상적인 사물의 모습으로 복원되는 이미지이다.
<그림 1>에서 보듯이 바닥에 펼쳐진 이미지는 매우 기이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림의 상단 중앙부에 원통형의 거울을 올려놓으면 그 거울에는 멀쩡한 건물의 모습이 드러난다. 왜상은 항상 복원력을 전제로 하며, 특정한 원형의 이미지를 전제로 한다. 홀바인의 그림에서 해골이 왜상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원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라차리니의 ‘해골’은 복원의 시점 따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전시를 보러 온 적잖은 관객들이 몸을 비틀거나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어 올려다보는 등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해골을 관찰한다. 홀바인의 해골을 떠올리고 정상적인 해골의 이미지가 보이는 특정한 시점을 찾으려는 행위다. 그러나 관객의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라차리니의 해골은 어느 곳에서 봐도 관객들이 생각하는 원형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원의 시점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라차리니의 해골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왜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지닌다. 미술에서 왜상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물을 과학적이고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눈에 보이는 대상의 원근감을 기하학적 원칙에 따라서 정밀하게 나타내는 회화의 기술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근법이 ‘소실점’이라는 기준, 즉 하나의 특정한 시점을 전제할 경우에 성립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정한 시점을 살짝 바꾸어 놓으면 일상적인 눈에는 왜곡된 형태로 보이지만, 또 그 특정한 시점만 찾아낸다면 복원이 가능한 왜상의 창조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왜상을 뒤집어진 원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박영욱imago1031@hanmail.net
- (현)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저서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