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눈부신 성취는 직립 보행을 하며 두 손을 자유롭게 쓰기 시작한 시기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 줄 아는 존재가 됐고, 그로부터 수십만 년, 100여 만 년의 시간이 흐른 뒤 호모 파베르들은 그 능력으로 지구라는 별의 주인 자리를 차지했다. 인간의 제작능력은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체의 개발에까지 미치고 있다.
한편으로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 역시 호모 파베르가 된 그 시점에 싹튼 것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인간의 도구 제작능력과 그로 인해 형성된 인류의 문명 자체를 재앙으로 여기기도 한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 원인은 인류 문명의 자체적 모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문명에 대한 절대적 긍정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부정도 옳지 않다. 인류 문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류의 생존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구를 만드는 능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도구는 생존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그 제작 능력 자체가 이미 인간의 본유적 능력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도구 제작 능력은 고귀하고 자연스럽게 부여된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 능력만을 확대한 나머지, 인간의 더욱 중요한 본성인 성찰과 반성 능력을 도외시하거나 축소한 데 있다. 도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오늘날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 답을 알려준다.
주거 수단으로서의 집, 교통수단인 자동차, 생활의 편의를 위한 가구·가전·장신구 등 모든 물건들이 도리어 사람의 주인이 된다. 주객전도의 대표는 단연 돈이다. 교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화폐는 순식간에 왕좌를 차지했다. 형이하적이고 구체적인 도구뿐만이 아니다. 기업·사회·국가와 같은 집단,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가는 사상·제도·이념 등과 같은 추상적인 도구도 어느새 보이지 않게 사람들을 지배한다. 이쯤 되면 ‘도구적 인간’이란 말은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구의 도구가 된 인간’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것, 신기한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까이 두고 즐기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어쩌면 도구는 이러한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다양하게 진화돼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물의 본래성을 잊어버리고 그 새로움의 재미만 즐긴다면 결국 도구의 노예가 될 것이다. 도구의 노예가 되는 것을 고대인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에 정신이 팔려 본뜻을 잃는 것이라 했다. 주나라가 건국되자 서쪽 변방에 있는 여(旅)라는 이민족이 키가 4척이나 되는 큰 개를 축하 선물로 보내왔다. 주나라의 태보(太保)였던 석(奭)은 왕이 개의 신기함에 정신을 빼앗겨 국정을 소홀히 할까 염려해서 경계했다.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 인간 본유의 능력이라면, 그 노예 상태를 거부하거나 벗어나는 것 또한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능력이다. 물론 도구 제작 능력이 중시되는 산업사회에서 완물상지의 경계가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발전과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도구의 노예가 아닌 도구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도구적 인간’이 돼야 하는 것이다.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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