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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울릉도 지키고, 서북지역 챙기고… 강단 있는 재상 남구만, 국가의 힘 키우다

김준태 | 182호 (2015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HR

 

 

 재상 남구만은 영토경영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세종 때 개척된 이후 사실상 버려지다시피 했던 북쪽의 땅을 활용할 방법을 항상 강구했다.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고 반대하던 많은 이들에 맞서 활용방안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의견이 일부 수용될 때마다 그의 주장은 옳은 것으로 입증됐다. 그는 서북지방 출신 인재를 홀대하던 당시의 관습에도 반기를 들었다. 1인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른 이들은 반대를 할 때에도 언제나우리가 버려둔 것 중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인가, 우리가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인력은 없는가를 고민한 그에게서 현대 기업의 2인자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1 국어 교과서에도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 이 시조는 숙종 때 두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지었다. 바로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남구만은 소위 소론의 영수로 불린다. 그래서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과 소론이 편찬한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는 각기 남구만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전하지만 두 기록 모두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는고단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송준길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높은 명망을 얻었고” “문재(文才)가 있고 필법이 뛰어나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강개(剛介)하다는 것이다.2

 

특히 그는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훗날 정조는근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1634∼1684)와 약천 남구만을 으뜸가는 거장으로 꼽는다. 호방하고 웅건한 식암의 책론(策論), 명백하고 적절한 약천의 소차(疏箚)는 응당 관각(館閣)3 의 나침반이자 지표일 것이다4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함께 거론된 김석주조차 대제학의 직임을 사양하며오늘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에는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저작들을 공부하여 계속 문한(文翰)5 을 맡아 이 시대의 원로가 된 분이 있으니, 문사(文詞)가 풍부하고 막힘이 없으며 재주와 학문의 빛남이 신보다 절대적으로 나은 자가 있다고 남구만을 추천할 정도였다.6

 

남구만은 효종 7(1656)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한 이래 도승지, 대사간, 대제학, 형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함경도 관찰사로 나아가 북방에 대한 경험도 쌓는다. 군사업무에 밝아 병조판서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관직을 맡으면 직분을 다하여 있는 곳마다 대단히 성과가 있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7 병조판서 시절 그는 부패한 서리8  (胥吏)들을 대거 축출하는 등 숙정작업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송시열은지금 병조판서 남구만이 도태한 서리가 100명에 달하는데, 이자들이 들고 일어나 무고하고 비방하고 있지만 그 이익이 실로 작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모든 관청에 명하시어 (남구만의 조치를) 따르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리며 높이 평가한 바 있다.9 이후 남구만은 숙종10(1684) 우의정10 , 이듬해 좌의정11 을 거쳐 숙종13(1687) 영의정에 제수된다.12

 

남구만은 관료 초년 시절부터 임금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을 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영의정이 돼서도 변하지 않았는데, 장희빈의 후원자이자 숙종이 총애하던 동평군이 국정에 개입하자 이를 강경한 어조로 탄핵하다가 함길도 경흥 땅으로 위리 안치됐다. 이때 숙종이 얼마나 분노했던지 당장 신속히 압송해 유배지에 도착하는 날짜를 보고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13  이어 숙종 15(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강릉에 부처됐고, 숙종 20(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됐다.14

 

영의정으로서 남구만이 남긴 업적은 정책 분야에서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선, 남구만은 나라의 영토를 빠짐없이 관리하고 경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역사지리 분야에 관해 변증(辨證)하는 글을 유독 많이 남긴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남구만은 함경도 관찰사 시절, “(이주를 희망하는 백성이 많아) 아침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고을을 만들 수가 있는데 대체 무엇을 꺼려하여 만들지 않는단 말입니까. 여연(閭延) 등 폐지된 4군은 모두 넓은 들인데다 비옥한 토지입니다. 그런데도 버려져 있으니 실로 매우 애석합니다. 조정에서 만약 한꺼번에 여러 군을 모두 회복하기 어렵다고 여긴다면 우선 별해(別害)에 군()을 설치하고 후주(厚州)에 진()을 두어 백성들이 모이길 기다린 다음 차례로 설치해 나아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15 라며 세종이 조선의 영토로 개척했지만 조정의 무관심으로 인해 버려진 4군을 다시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동안 방치했던 땅을 활용해 갈 곳 없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해줌으로써 국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자는 목적이었다.

 

이는 경제나 안보적 측면에서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남구만은 병조판서 시절 다시 4진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16 대사간 유상운이그 지역은 가로로 수백 리를 뻗어 있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지금 만약 진을 설치한다면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며 농토를 개간해야 하는데, 신설하는 진을 가지고 적을 막을 수는 없기에 이는 도리어 적에게 길을 열어 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 또한 토지를 개간하면 초피(貂皮)와 산삼(山蔘)을 얻던 이익도 끊어지게 됩니다라고 반대하자북쪽 지역의 초피와 산삼은 주로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고을에서 생산되는데, 삼수·갑산에 고을을 설치한 지는 수백 년이 지났지만 그 이익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17 그리고 강변으로 왕래하는 길이 한둘이 아닌데, 적이 어찌해서 꼭 4군을 거쳐서 오겠습니까. 적의 길을 열어준다는 말도 옳지 않습니다. 사람을 모집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방비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숙종 23(1697),

4군의 회복 문제가 다시 거론되자

신하들이 모두 반대했는데,

이때 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4군을 만드는 것은 이익이 적고

지키기도 어렵다며 남구만이

사리에 어두워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격하시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남구만의 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숙종 23(1697), 4군의 회복 문제가 다시 거론되자 신하들이 모두 반대했는데, 이때 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4군을 만드는 것은 이익이 적고 지키기도 어렵다며 남구만이 사리에 어두워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격하시킨다.18 영토경영에 대한 인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그의 주장이 일부 채택돼 무산부(茂山府)가 새로 설치됐는데 이후 경제적, 안보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남구만은 울릉도의 영유권을 지켜내기도 했다. 숙종 20(1694), 조선 백성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19 를 무단으로 침범해 어업활동을 했다며, 이를 금지해달라고 요구하는 대마도의 사신이 부산에 도착한다. 예조는 국경을 넘은 것이 유감이라며 엄격히 단속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대마도의 사기극이었다. 울릉도에 배를 정박해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울산 지역 어부들을 자신들이 납치해 놓고, ‘죽도란 표현을 사용해 마치 다른 섬인 것처럼 조선 조정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죽도에서의 어업금지를 약속한 예조의 외교서한을 가지고, 조선이 울릉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한 것처럼 왜곡할 심산이었다.

 

담당 부처인 예조가 이런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영중추부사였던 남구만이 나섰다. “신이 일찍이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읽었사온데왜놈들이 의죽도(?竹島)를 점거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라는 대목이 있사옵니다. 지금 왜인의 말은 그 해독이 너무나 큰데도 전일 예조에서 답변한 서계20 는 매우 모호하였으니 마땅히 서계를 회수하고, 저들이 조선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책망해야 합니다.신라 때 이 섬에 나라가 있었는데 토산물을 바쳐왔으며 고려 태조 때에도 섬사람들이 방물을 진상했습니다. 우리 태종 때 왜적이 하도 이 섬을 노략질하는 근심이 커서 안무사를 파견해 백성들을 육지로 들이고 그 땅을 텅 비워 뒀으나 지금 왜인들이 이 섬에 들도록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朝宗)의 강토를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21

 

남구만은죽도는 곧 우리 울릉도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땅에 가는 것이 어찌 국경을 범한 것인가라며 일본의 조치를 비판하는 답서를 발송하도록 조치하고, 관리를 파견해 울릉도의 형편을 살펴보게 했다. 백성을 이주시킬 만한 여건이 되는지, 군사기지를 설치할 상황이 되는지를 확인해 대일본 방어대책을 세우자는 것이었다.22 이후 그는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강원도 고을인 삼척지방 수령이 정기적으로 울릉도를 시찰하도록 주청했는데, 뱃길이 험하다고 시찰하기를 꺼려한 수령을 파직시키도록 하는 등23 울릉도를 지키는 일에 시종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어부 안용복이 조선의 관리를 자처하며 일본 호키주[伯耆州] 번주로부터 일본 어민이 울릉도에 들어간 일에 대한 사과를 받아온 사건에 대해서도 관직을 사칭해 함부로 외교문제에 개입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하나의 쾌사(快事)며 안용복의 공을 칭찬한다. 덕분에 안용복은 유배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24

 

이 밖에도 남구만은 나라 안에 소외된 지역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당시 조선에는 서북인(西北人)25 을 차별하는 문화가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 명시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인 관행으로 존재했다. 남구만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다. 신이 서북 지방 출신의 인재들을 거두어 등용해야 함을 성상께 우러러 아뢴 것이, 모두 합하면 거의 수십 차례에 이릅니다. 신이 어찌 서북지역을 따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거나 일신에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다만 훗날 우리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경우, 서북 지방이 첫 번째로 적의 침공을 받는 곳이 될 터이니, 이 지방 사람들의 마음을 나라에 굳건히 매어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북 지방의 사람들을 등용하고자 하는 것은 서울과 삼남 지방 모두에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가 아닙니다. 서북 지방 사람이 서울과 삼남 지방 사람보다 낫다고 여겨서도 아닙니다. 조정에서 준걸을 불러모으는 방도에 있어 인재를 빠뜨린다는 한탄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26 서북 지역은 국가안보를 수호하기 위한 최전방 기지이므로 이 지역의 인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면려해야 하며, 또한 소외되는 지역 없이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국가가 가진 역량을 남김없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구만에게 주목할 두 번째는 정치보복을 끊어내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1680년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 1610∼1680)과 윤휴(?, 1617∼1680), 1689년에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각각 상대 당파에 의해 사약을 받은 이래, 서인과 남인은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돼 버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구만은 줄곧 온건한 입장을 견지한다. 허적의 서자 허견의 비행과 윤휴의 잘못을 탄핵하는 등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27 의 단초를 열었다는 이유로 그 자신이 남인으로부터 큰 고초를 겪었지만역적 허견을 참한 다음에는 다시 사람 죽이는 길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근래에 탄핵해 귀양을 보낸 사람이 이미 많으니 지금부터는 죄가 크고 매우 심한 자 이외의 무리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지극히 옳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갑술환국(甲戌換局)28 직후에도나이가 많고 오랫동안 조정을 위해 일한 점을 참작하시어 은전을 베풀어 달라29 고 주청하여 남인계 대신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죄를 입은 사람들을 모두 너그럽게 처결하여 석방할 것을 청30 하는 등 정치적으로 패배한 반대파들을 포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세자(훗날 경종)의 외숙인 장희재에 대한 처벌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장희재는 남인정권의 실권자로 서인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살려둘 경우, 나중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다시 권력을 잡아 서인에게 보복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서인(그중에서도 노론)은 장희재를 제거하고 나아가 장희빈까지 축출하고자 했는데 남구만은 이로 인해 세자의 위치가 불안해질 것을 우려해 홀로 장희재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불만스러워하고 답답해 하여 모두 말하기를장희재가 범한 죄가 이 얼마나 지극한 죄인데 왕세자의 지친이라 하여 용서해 주는가?”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론을 신이 어찌 감히 수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건대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31 고 말했다.그러자 남인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발끈했다. “이때 기사년의 화를 입은 집안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원수를 진 원한이 이미 심각하였으나 통쾌하게 보복하지 못했던 것은 남구만의 지론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으로, 화를 입은 집안의 자제들이 이 사람에게 노여움을 옮기는 경우가 진실로 적지 않았다32 고 한다. 특히 노론은 강경했는데 이전까지 남구만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입장을 바꿔골수에 맺힌 원수처럼 보았다33 그럼에도 남구만은역적을 비호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34 장희재에 대한 처벌수위를 감경시켰고, 남인들에 대한 은전(恩典)을 강조했다. 얼마 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모해한 죄로 사약을 받고 장희재도 죽임을 당하면서 남구만은 이 두 사람을 두호한 죄로 파직되고, 아산현으로 유배됐지만35 남구만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남구만이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반대당을 보호하려고 했던 이유는 유혈보복의 악순환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상황이 갈수록 심화된다면 조정은 더 이상 하나 된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큰 피해를 입고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측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상대방도 여기에 감동해 화합의 단초를 열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이다.남인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세자를 계속 지켜준 것도 그래서이다. 세자에게 잘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정치적 이유로 인해 세자의 자리가 위협받는다면 이후에도 유사한 상황이 계속 벌어질 수 있고, 이는 국가의 안정을 저해하게 된다는 것이 남구만의 판단이었다. 이는 그의 사후 더 이상 남구만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어지면서, 노론과 소론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 이상 가는 극단적 대결양상을 보이고, 왕위승계 문제로 정국이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졌음을 볼 때, 매우 정확한 예측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하나의 조직이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에 방치된 자원이나 소외된 구성원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당장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활용방안을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폐기하고, 출신이나 성향을 이유로 특정인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그만큼의 힘을 자발적으로 줄이는 것이고 그만큼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이는 조직 전체 차원에서 매우 불행한 일이다. 조직 내 갈등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건강한 경쟁에 따른 갈등도 효과적인 관리가 필요한 법인데, 하물며 권력투쟁을 위한 갈등은 조직의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전멸을 추구한다면 다양성이 차단되고 분열이 가속화된다. 조직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토경영과 소외지역 해소를 통해 나라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내고자 했던 남구만의 역할을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극단적인 공격과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갈등을 해소하고, 구성원들의 화합을 추구했던 그의 노력은 오늘날 2인자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향후 연재할 두 차례 글에서는 숙종대와 영조대의 재상들을 모아 장단점을 분석하고 유형화할 예정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김준태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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