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HR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나라를 무시하고 명나라를 기리는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숙종은 책봉국이라면 응당 취해야 할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껄끄러운 상황이 일어날 때면 와병을 핑계로 대며 사신 영접을 피했고, 환자처럼 누워 있다 침상에서 칙서를 받곤 했다. 영조는 달랐다.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면 최대한 예를 갖춰 환대했다. 영조의 달라진 태도는 청에게 ‘조선이 법과 원칙을 준수한다’는 신뢰를 심어주기 충분했다. 이로 인해 그는 뇌물로 점철된 외교가 아니라 정도에 따른 외교를 펼쳐나갈 수 있었고, 그 결과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조선 외교정책의 핵심은 사대교린책으로 요약된다. 즉,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책을, 일본과 여진 등 주변 국과는 교린책을 썼다. 사대관계에서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보냈고, 중국은 조선에 책봉을 하고 조공에 대한 사례를 보내왔다. 반면 교린관계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나라, 혹은 그렇지 않은 나라를 대상으로 국가 간의 국서 교환, 약간의 통상을 하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를 무너뜨렸다. 또한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세력교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책봉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명나라의 정통을 이었다는 ‘조선 중화주의’ ‘소중화 의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효종 때에는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을 치자는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고, 숙종 때부터는 임진왜란 때 우리에게 군대를 파견해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한 대보단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조선이 명나라의 부활을 바랐다고 해도 현실에서 강국은 청나라였다. 강국도 보통 강국이 아니었다. 군사능력에서 청과 명은 수준이 달랐다. 이미 17세기에 청나라는 영국, 유럽도 두려워한 초강대국이었고 군대는 혈기가 넘쳤다. 대외전쟁을 자제하던 명나라와 달리 청은 여차하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윽박지르는 사나운 국가였다.
겉과 속이 달랐던 조선의 대청(對淸) 외교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와 공식적으로 외교·복종관계를 맺었다.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인 사신단을 끊임없이 보냈고 청에서도 보내오면서 외교와 무역관계를 지속했다. 대개 청나라의 사신이 책봉국에 가면 그 나라의 영접사가 국경까지 가서 맞이하는 건 물론 왕이 도성 밖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정작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반청 감정이 높았다. 더욱이 살아 있는 청나라보다는 이미 죽어 없어진 명나라에 경의를 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왕(숙종)이 아프다는 핑계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러 나가지 않은 것이었다.
1685년(숙종 11)에 조선인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청나라 영토로 들어가 산삼을 캐다가 중국 관리를 해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청에서는 사신을 파견했다. 이 사신단을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데 숙종은 병을 핑계로 성 밖까지 나가지 않았다. 다만 양해를 구해 겨우 편전에서 황제의 편지를 받도록 허락을 얻었다. 숙종은 처음엔 관대를 갖추고 앉아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갑자기 걱정이 됐다. “꾀병을 부려 영접하러 나가지 않았는데 너무 건강해 보이면 안 된다” “병이 심한 것처럼 보여야 하니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청나라 사신을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왕이면 조명도 다 끄고 어두침침하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게 정말 환자처럼 누워 있다가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막상 그렇게 하다 보니 이건 더 위험한 방법이었다. 상대국의 칙서를 누워서 받다니.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떠나 우호적인 동등한 국가 간이라고 해도 이런 행동을 하다가는 요즘에도 인터넷에서 한바탕 소동이 날 것이다.
청나라 사신도 이 광경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참에 오해가 생겼다. 숙종은 끙끙 앓다가 일어나는 척하며 칙서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질 무렵이 되면서 방이 무척 어두웠으나 숙종은 계속 어두운 곳에 있어서 눈이 익숙해져서 글씨가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밖에서 들어온 청나라 사신은 방이 어두워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심기가 상했던 그는 숙종이 글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방에서 칙서를 읽는 모습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이렇게 어두운 데서 뭣을 보겠다는 것이냐” “칙서를 읽기 싫어서 보는 척만 하는 것 아니냐”며 노발대발했다. 숙종은 부랴부랴 촛불을 가져오게 했고 다시 칙서를 받드는 예를 거친 다음 황제의 편지를 읽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질문, 답변, 연관 아티클 확인까지 한번에! 경제·경영 관련 질문은 AskBiz에게 물어보세요.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Click!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