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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성향의 변화

귀족의 시대에서 대중의 시대로··· 유행과 디자인이 탄생했다

조승연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를 뒤흔든 전체주의의 두 가지 형태, 파시즘공산주의를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쟁이다. ‘소비사회라는 관점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귀족들이 즐기던 까다롭고 난해한의례적 소비값비싼 소량 제품위주의 의복과 액세서리 등 소비재 산업을 만들어냈지만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대중을 위해 다량 생산된 제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물건을 더 많은 이들에게 팔기 위해유행산업디자인이 만들어졌으며 전쟁 전후에애국적 소비가 최초로 등장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역사상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하던 귀족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예견하지 못했다. ‘가장 성공적이고 화려한 순간에 미래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100년 전의 세계 전쟁이 여전히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다.

 

1차 세계대전과 귀족의 몰락

1) 전전(戰前) 귀족의 소비행태

“평민들에게는 전투 중에 전사하는 것이 큰 비극이겠지만 우리 귀족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퇴장이야.”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귀족인 기사계급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죽는 영광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다. 이 말은 1937년 프랑스를 휩쓸던 흑백영화의 대작, 장 르노와르 감독의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에서 주연인 유럽 장교가 남긴 명대사다. 영화위대한 환상은 포로수용소로 개조된 한 독일 귀족의 성에 갇힌 프랑스 공군대원과 성의 주인이자 포로 감시 책임자인 독일 귀족 간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프랑스 장교 보엘뒤와 독일 포로수용소 책임자인 폰 라폰스타인은 기사도 전통이 유지되던 가문에서 자란 유럽 귀족 계급의 후예들이었다. 독일 귀족인 폰 라폰스타인은 보엘뒤가 비록 적국 포로이지만 자기의 성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니 만큼 대접을 제대로 하려 했다. 그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흰 장갑과 정장을 보내 귀족다운 차림으로 식사할 수 있도록 하고 정찬 코스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눴다. 두 사람은 비록 적이지만 식사 중에 프랑스나 독일 등 국가 정체성보다 훨씬 오래된 유럽의 귀족이라는 공통된 문화 배경을 공유해 자국의 평민들보다 오히려 서로간에 훨씬 대화가 잘 통했다. 이들은 심지어 두 집안이 오래 전에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먼 사돈 지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각기 베를린과 파리에서 근무할 때, 귀족들이 자주 모이던 한 음식점에서 종종 밥을 먹었고, 심지어 같은 웨이트리스를 유혹한 경험까지 있었다. 둘 다 깊은 문학적 소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고,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돌아가면서 구사해 언어 장벽조차 느낄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비즈니스가 활성화되면서 사업으로 돈 번 신흥 계급인부르주아들이 득세하게 된 유럽에서 곧 귀족계급이 몰락할 거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폰 라폰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전쟁을 독일이 이기건, 프랑스가 이기건, 확실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의 세상에는 폰 라폰스타인과 보르뒤 같은 가문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죠.”

 

몇 달 후 포로인 보르뒤는 부하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독일군 장교인 폰 라폰스타인은 탈출하다 들킨 보르뒤에게 신사답게 경고를 한 후 권총을 발사했다. 보르뒤는 그의 총알에 맞아 죽어 가면서내가 당신이라도 나라를 지켜야 하는 기사도의 원칙에 따라 나를 쐈을 것이라며 자기를 죽인 사람에게 끝까지 기사도의 예를 다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바로이 전쟁에서 죽는 것이 평민들에게는 비극이겠지만 귀족들에게는 적절할 때 퇴장하는 것이지요였다.

 

서기 750년경 망해버린 서로마를 대신해 유럽을 통일하고 첫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쓴 샤를마뉴 대왕 수하의 기마 대원 자손들은 유럽에서귀족(L’aristocratie)’이라는 특이한 무사계급을 형성했다. 이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도 도시의 상인 계급인 부르주아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사회 중심축을 차지해 왔다. 이들은 생산적인 계급인 부르주아들과 달리 전쟁과 정치만이 주 임무여서 노동을 천시했다. 그래서 평화 시에는 의복이나 식사 의례, 오페라나 클래식 음악 같은 것에 대해서 논하며 복잡하고 난해한 문화를 만들어 소비했다. 의상과 말투, 호칭까지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복잡한 형식을 붙여 철저히 타 계급과 격리돼 살았다. 신흥 중산층들인 부르주아들은 그런 귀족들이 부러워 그들의 소비 방식을 자기 방식으로 들여와 소화했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주 소비 패턴은 귀족들이 즐기던의례적 소비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소비 생활을 선도해온 귀족적 소비의 대표적인 예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의류업이었다. 프랑스의생오노레 가(Rue Saint-Honoré)’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프랑스 의류업은 귀족 여성들의 성장기에 맞춰 치르는 여러 의례에 맞춘 상품을 내놓아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유럽 귀족들은 영토 분쟁과 전쟁을 줄이는 차원에서 자녀들의 정략 결혼을 당연시했다. 정략 결혼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귀족들은 결혼 시장의 국제 네트워크를 타고 일년을 봄/여름(printemps été, 즉 불어의 봄과 여름의 첫 글자) 시즌과 가을/겨울(automne hiver, 즉 불어의 가을과 겨울의 첫 글자) 시즌으로 나눠서 각기 다른 도시로 이주해 거기서 보냈다. 이들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그 도시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부인의 소개를 받아 사교계에 진입하고 약 6개월간 그 도시의 문화생활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자녀들의 혼인 상대를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소문난 의상 전문가를 찾아가 그 도시의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의 권유에 따라 결혼을 앞둔 자녀를 위해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의상을 구입했다. 파리는 유럽 귀족들이 가장 즐겨 방문하는 인기 사교 지역이었다. 그 덕분에 파리 의상실들이 유럽 내에서 가장 성업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파리의 의류업체들은 매년 P/E 시즌 한 번, A/H 시즌 한 번, 총 두 차례씩 신상품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파리 생오노레에 입점한 의류업자들은 여자가 16세가 되면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내보내 신랑감을 찾도록 하는 행사에 쓸데뷔용 드레스나 귀족들 특유의 화려한 장례식, 성탄 미사 드레스 등 특정 의례용 의류들을 발명해 비즈니스를 활성화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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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승연

    -(현)오리진보카 대표
    -(현)문화전략가
    -UnfroZenMind 외부 상임이사
    -국제 마케팅 리서치 참여
    -<피리부는 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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