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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Management

또박또박 축적된 노력이 창조의 텃밭

정현천 | 75호 (2011년 2월 Issue 2)

과학자와 변호사의 차이에 관한 농담이 하나 있다. 둘 다 논리적으로 증거가 뒷받침하는 결론을 펼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변호사는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찾아가는 반면, 과학자는 증거를 토대로 결론을 찾아간다고 한다. 물론 우스갯소리이기 때문에 변호사들이 화를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농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과학의 경우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결론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계속 증거를 찾는 노력을 통해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성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바탕을 두는 창의성과 예술적인 창의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과학에 바탕을 두는 창의성은 하늘 아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축적의 과정이다. 축적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과학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준다. 미신이나 종교, 예술 등은 과학과 달리 지식의 누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의 것과 다른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과거의 것은 부정되거나 잊혀진다. 이에 비해 과학은 과거에 참이었던 것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좀 더 큰 틀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을 거듭한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움직인다는 천동설은 지동설이 나타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부정된 것이 아니다.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지동설의 입장에서도 그대로 쓸 수 있다. 다만 수많은 관측과 기록과 추론과 계산이 더해져서 인간의 눈에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새롭게 해석됐던 것이다. 뉴튼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신화이자 전설일 뿐이다. 뉴튼은 1676년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더 멀리 보아왔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썼다. 자신의 업적을 이루기까지 그 이전의 과학자들의 업적이 뒷받침됐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칭송한 것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것은 낡은 헛간을 헐고 그 자리에 고층 건물을 새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면서 새롭고 넓은 시야를 얻게 되면, 처음에 출발했던 지점과 그 주변의 각양각색의 풍경 사이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처음에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은 여전히 존재하며, 시야에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비록 그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장애를 극복하며 정상을 향하는 길에 얻은 넓은 시야에서 미미한 부분만을 차지할 뿐일지라도”라고 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의 천재의 직관은 순전히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축적된 자산을 물려받아 그 세대에서 꽃피게 된 일종의 시대정신의 발현인지도 모른다.
 
불편한 진실에 맞서는 용기와 인내
사실 모든 형태의 축적은 필연적으로 붕괴와 연결된다. 성냥개비를 계속 쌓다 보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아무리 거대한 부를 축적한 개인이나 기업, 국가도 영원히 존속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붕괴는 소멸로 연결되지만 때로는 질적 변화를 통해 전혀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 질적 변화가 혁신이고, 창의성의 발현을 통한 새로운 창조다. 개인이 쌓은 부는 질적 변화를 통해 기업이라는 형태로 변했으며, 기업 또한 그 내부구조와 사회에서의 역할을 계속 바꾸고 진화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존속을 시도해왔다.
 
축적의 과정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새로운 것을 받아 들고 단지 감탄만을 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번 원래의 상태와는 다른 한 발짝 한 발짝을 새롭게 내딛기 위해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인내가 필요하다. 스포츠 선수들은 연습생 시절 매일같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움직임의 패턴을 몸 속에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철학자들은 세상의 원리를 자기 논리 속에서 일관되게 구성하기 위해 흙구덩이에 발이 빠지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매일매일 똑같은 길을 산책하기도 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어떤 분야에서나 대가의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인내의 과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딪치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비록 그것들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무덤덤하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비틀스가 무명시절 함부르크에서 연주를 할 때 관객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해서 매끄럽지 않은 하모니와 박자의 실수들을 그저 그렇거니 하고 넘겨버렸다면 결코 세계적인 위대한 밴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패의 요인 하나하나는 민감하게 인지돼야 하고, 이유가 분석돼야 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하며, 얻어진 교훈들은 기억돼야 한다. 그래야 그것들은 성공을 향한 과정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에게 있어서나 조직에 있어서 실패의 경험이 거의 교훈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들추어내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은 실패의 쓰라린 기억을 빨리 잊고 싶어 하고, 조직에서는 하부의 실패 경험이 상부로 전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편하게 생각하고 자기 생각에 맞는 것만 보고 들으려 하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에 맞서는 용기와 인내’가 없으면 축적이 이뤄지지 않으며, 무엇인가가 축적된다고 해도 질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혁신과 창조는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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