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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 작품에서 읽는 경영학 인사이트

헤리티지와 ESG…
경영인이 뱅크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신형덕 | 395호 (2024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는 상업주의를 극도로 반대하는 작가지만 역설적으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선별된 작품만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고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그라피티 작품을 거리에 남겨 아무 대가 없이 대중이 향유할 수 있게 했다. 그 저항 정신은 부조리한 권위와 관행을 겨냥한다. 하지만 수많은 저항 예술가의 일탈적 메시지와 다른 지점이 있다. 신랄한 비판 속에서도 위트를 가미하거나 희망의 메시지를 더한다는 점이다. 공유가치 창출과 ESG 경영 등 의식 있는 경제·경영학자들이 부조리한 자본주의에 대해 내놓는 대안과 맥을 함께한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파괴적 접근 일변도가 아니라 비판 너머의 희망을 보는 접근법이다. 뱅크시의 작품에 담긴 공동체와 헤리티지에 대한 존중 역시 경영학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2024년 5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리얼 뱅크시’ 전시가 시작됐다. 뱅크시는 영국 출신 화가로서 50대의 남자로 추정될 뿐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2000년대 초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그라피티 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현재 생존 작가 중 가장 많은 1100만 명 이상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경매 최고 낙찰가는 250억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의 인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그 인기가 경영 분야에 주는 인사이트는 어떤 것일까? 이른바 ‘뱅크시 현상’을 경영학자의 시각으로 관전해 보기로 한다.

뱅크시_1

상업주의와 저작권

뱅크시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상업주의를 극도로 반대하는 작가이다. 예술 활동에 상업주의가 개입돼 그 가치가 오염되는 현상을 브랜달리즘(브랜드+반달리즘)이라고 스스로 표현할 만큼 예술 활동이 금전적 권력에 종속되는 것을 혐오했다. 선별된 작품만이 유명한 미술관에 전시되고 높은 가격에 판매됨으로써 작가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는 관행을 거부했다. 그는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그라피티 작품을 거리에 남겨서 아무런 대가 없이 대중이 향유하도록 하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의도는 여러 방면에서 상업주의적인 관행과 충돌했다. 누군가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이윤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허공에 뜬 그 가치는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마련이다. 뱅크시는 생계를 위해 2000년대 초반에는 길거리에서 작품의 포스터를 장당 1만 원 정도에 판매했다. 명성을 얻은 이후인 2004년 이후에는 판화 형식으로 한정된 수의 작품 포스터를 온라인에서 수백만 원대에 판매했는데 수년이 지난 후 모델 케이트 모스의 얼굴을 앤디 워홀의 형식으로 표현한 포스터의 가격이 경매에서 억대로 상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의 브리스틀 시의 어느 집 벽에 뱅크시가 작품을 남기자 집값이 4억 원에서 27억 원으로 뛰었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가히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스위프트노믹스’ 효과에 버금갈 만한 경제적 가치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예술의 대중적 향유를 추구하는 뱅크시의 의도와는 달리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고 있다.

최근 공연 티켓의 과도한 재판매 금액과 관련한 이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티켓 리셀링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플랫폼은 활성화된 지 오래다. 이를 잡아내려는 시도들도 꾸준하다. 가수 아이유의 공연 관계자들은 암표 가격이 과도하게 오르는 것을 우려해서 부정거래가 의심되는 티켓을 신고하는 것을 장려하는 암행어사 제도를 운영하다가 과도한 신고의 부작용에 직면하면서 이를 폐지했다. 미국의 미네소타주에서는 2025년부터 이른바 ‘테일러 스위프트 법’이 시행되는데 재판매자가 한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하지 못하게 규제한다.

지나친 상업주의를 배격하는 뱅크시의 가치관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지만 그것이 상업주의에 대한 방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저작권 및 유통의 관리는 여전히 필요하다. 뱅크시 본인도 2008년에 ‘페스트 컨트롤’이라는 저작권 관리 회사를 설립했다.

이렇게 가치를 창출하는 주체와 그 가치를 획득하는 주체가 분리되는 현상은 경영학에서 그리 생소한 일은 아니다. 창업의 예를 보자. 창업자가 멋진 사업 아이디어를 고안해 돈을 벌려 하면 중간에 그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사업자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을 연구한 샤론 알바레즈 피츠버그대 피트·조셉 M. 카츠 경영대학원 및 경영대학 의장과 제이 B. 바니 유타대 데이비드 에클스 경영대학원 교수1 는 창업자의 무형자산인 지식과 관련해 가치 창출(rent generation)과 가치 탈취(rent appropriation)는 분리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분리 기제(isolating mechanism)의 존재 여부에 따라 창업 기업의 영역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뱅크시도 결국 페스트 컨트롤이라는 분리 기제를 마련함으로써 그의 지적재산권이 상업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뱅크시_2
 

부조리함에 저항

뱅크시의 저항 정신은 부조리한 권위와 관행을 겨냥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5년에 제작된 ‘키스하는 경찰’이라는 작품은 영국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소수문화 중심지로 알려진 브라이턴 지역에 게시됐는데 두 명의 남자 경찰이 키스하는 모습을 담았다. 가장 보수적인 인물의 일탈적인 행동을 가장 개방적인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권위에 대한 저항의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영국 여왕을 침팬지로 그리거나 시위하는 사람이 화염병 대신 꽃을 던지는 이미지를 표현해 다소 과격하게 기존 질서와 관행에 대한 저항을 적극적으로 나타냈다.

뱅크시는 자서전에서 그가 성장기에 겪었던 일들에 대해 서술했다. 11세 때 연루된 교내 폭행 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고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체제와 관행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의 권리에 대해 사회에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됐을 것이다. 부조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활동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어 2017년 서안지구 베들레헴에선 호텔을 운영하며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묻는 견해를 표출했다. 2015년에는 다른 설치 예술가들과 연대해 영국에서 디스멀랜드라는 놀이동산을 36일간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이곳엔 위선적인 행복을 비판하는 여러 조각이 전시됐다. 특히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를 연상시키는 마차가 뒤집어진 곳에 공주 복장의 인물이 쓰러져 있는 조각물이 놓였다. 비평가들은 이 인물이 영국 왕실과 관련된 의혹의 죽음을 맞이한 다이애나 공주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 정신은 단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단순한 공격일까? 우리가 보아 온 많은 저항 예술가의 일탈적 메시지와 뱅크시 작품에서의 일탈적 메시지는 다소 성격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제 치하에서의 우리나라의 지식인이나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했던 서방의 지식인의 경우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는 염세적 성향을 표현하고자 자기 파괴적이거나 환상의 세계를 좇는 등의 환락적 또는 도피적 성향의 예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뱅크시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본인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권위와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위트를 가미하거나 희망의 메시지를 첨가하는 편이다. 즉 파괴적 저항이라고 하기보다는 풍자와 설득에 가깝다.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부조리한 속성에 대한 경제 또는 경영학계의 대응 역시 이와 유사하다. 1990년대 소비에트의 몰락으로 인해 체제 경쟁은 이미 종료된 것처럼 보였으나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문제점은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현대의 지성으로 꼽히는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와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자본주의의 심화가 경제적 정의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 와중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갈등은 국제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 해결책은 결국 상대를 악마화하고 권력을 탈취하는 것일까? 세계 경제를 자유시장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주도했던 미국에서는 자국우선주의가 발흥하고, 유럽 국가 사이의 장벽을 없애기로 노력하던 영국은 그 체제에서 탈퇴했다. 다국적 기업의 환경 파괴는 지속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한 시위대는 WTO 회의가 열리는 곳마다 거리를 점거하고 있다.

그러나 주주 자본주의 시대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한 관행들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자구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자선 활동에서 시작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은 공유가치 창출과 ESG 경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적어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는 시도는 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연구 중 마이클 E. 포터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교수와 마크 R. 크레이머 FSG 이사2 의 공유가치 창출 개념은 자본주의의 수호를 위한 공동 노력을 펼칠 것을 직접적으로 제안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기업 소유주만 배불리는 관행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후진국이라고 해도 자연을 맘대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기업 이기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공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조리한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희망을 제시한 뱅크시와 같이 의식 있는 경영·경제학자들은 부조리한 자본주의에 대해 개선된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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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대한 철학


뱅크시가 풍자나 비판만을 그의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다. 버스 정류소 지붕을 무대 삼아 그 위에서 춤추는 남녀를 그리기도 했고, 비스듬히 기운 빗물 파이프를 미끄럼틀 삼아 비눗방울을 불며 내려가는 소녀를 그리기도 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일상에서의 소소한 재미를 소재로 삼아 공공장소에 그려 놓았다.

그러나 뱅크시가 실천한 공동체에 대한 존중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2020년에 제작된 ‘게임체인저’라는 작품일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영국의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이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 그는 영국 사우샘프턴 종합병원 벽에 이 그림을 걸어 뒀다고 한다. 이 그림이 병원을 더 밝게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이 그림을 보면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옆에 놓인 바구니 안에는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이 있고, 아이는 한 팔을 들고 하늘을 나는 듯한 간호사 인형을 들고 놀고 있다. 기존의 슈퍼 히어로를 능가하는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는데 바로 질병의 확산을 막아 주고 있는 간호사들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보면 가상의 세상을 그린 상업적 영화의 영웅을 조금 뒤틀어 풍자하고 현실 속 진정한 영웅의 희생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시위하는 사람이 꽃을 던지는 모습(작품명 ‘꽃 던지는 사람’)이나 베트남전쟁에서 도망가는 소녀의 양손을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 캐릭터가 잡고 걷는 거친 이미지(작품명 ‘네이팜’)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표현으로 의료진을 위로한다. 즉 비판보다는 위로의 메시지가 더 돋보인다.

사회에서의 기업의 역할도 이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작가의 본업은 본인의 예술적 혼을 담아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 기업의 본업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나 기업이나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다. 본업을 이용해서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에 희망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창업자인 러브 켈러허는 본인이 몸담은 사회의 구성원에게 활기와 희망을 준 경영자로 유명하다. 그는 직원들이 행복하기를 원했고 구성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그의 경영 방식은 ‘펀 매니지먼트’라는 이름이 부여될 정도로 특별했다. 저가 항공사의 효시로서 사우스웨스트 이후 많은 저가 항공사가 탄생해 저비용 사업 모델을 모방했지만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노동 분쟁을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조직문화를 모방하는 건 불가능했다.

많은 학자는 이 독특한 조직문화의 출발점을 창업자 허브 켈러허가 가졌던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철학이라고 분석한다. 그의 어록 중에는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결속된 회사가 더 든든한 회사입니다”가 있다. 처벌이나 금전적 보상 등으로 성과를 유도하는 회사가 아니라 사랑과 행복으로 뭉친 조직에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회사를 꿈꾼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00년에 발간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서적에 등장하는 개념이 떠오른다. 제프리 페퍼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로버트 I. 서튼 스탠퍼드대 공과대학 경영과학 교수가 발표한 책 『생각의 속도로 실행하라(원제 The Knowing-Doing Gap)』는 기업 내에서 추진하는 전략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두려움을 이용한 경영’이다. 성급한 경영진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당근보다는 채찍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즉 직원들에게 긍정적 유인을 제시해 자발적 행동을 유도하기보다는 처벌 등 부정적 유인을 제시하고 이를 회피하도록 만드는 식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이 방식은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원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과 연대 의식을 조성할 여유를 빼앗는다. 결국 조직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게 된다. 만약 뱅크시가 영국의 이곳저곳에 그려 놓았던 그림과 같은 일상적이고 소소한 그림들이 회사 담벼락 여기저기에 위치한다면, 그리고 그 그림들이 공동체 의식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할 수 있다면 이러한 예술적 요소에 의해 조직의 결속감이 한결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헤리티지에 대한 태도

대부분의 경우 뱅크시의 원본 작품들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담벼락에 그려진 그라피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해당 지역의 특징과 문화적 배경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지역의 문화적 유산과 강하게 연결돼 있는데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우리는 헤리티지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경주 첨성대는 신라의 과학적 헤리티지를 상징하고, 한글은 백성을 위하는 세종대왕의 사랑의 헤리티지를 담고 있다.

뱅크시의 작품은 지역적 헤리티지를 십분 활용한다. 앞에서 소개했던 ‘키스하는 경찰관’ 작품이 영국에서 가장 개방적 문화를 지닌 브라이턴의 한 술집 벽에 그려졌거나 유도복을 입은 한 어린아이가 푸틴 비슷한 외모를 가진 거구의 남자를 시원하게 넘기는 그림이 우크라이나의 보로디안카라는 도시에서 폭격에 무너진 벽에 그려진 것을 보면 현장을 배경으로 던지는 메시지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이 현장에서 분리됐을 때에는 그 의미와 가치가 다소 줄어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러한 작품의 이미지를 컴퓨터에서 다운받아 책상 앞에 붙여 둔다면 작품 자체의 예술적 아우라는 감상할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동은 얻기 힘들 것이다.

뱅크시는 이러한 현장성에서의 헤리티지조차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미술작품의 가치가 인정받는 하나의 방법은 소위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인데 이러한 미술관에서 전시될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정통성의 헤리티지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상업적 명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의 상업화를 혐오하는 뱅크시는 고상한 미술관의 헤리티지를 비꼬고 싶었고, 이에 미국의 MoMA, 영국의 테이트, 프랑스의 루브르와 같은 정상급 미술관에서 도둑 전시를 감행한다. 다른 기존 전시물 사이에 본인의 작품을 몰래 걸어 두었던 것이다. 어떤 작품은 몇 시간 만에 발견돼 철거됐지만 어떤 작품은 놀랍게도 수일 동안 당당히 벽에 걸려 있기도 했다.

또 하나의 헤리티지 파괴의 행동은 미술품 경매장에서의 낙찰과 동시에 파쇄기로 작품을 갈아버리는 퍼포먼스에서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경매장은 미술품의 가치가 새롭게 매겨지는 장소인데 엉뚱하게도 가치가 매겨지는 즉시 파괴하는 장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고 경매 낙찰자에게도 미리 공지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억 원이나 하는 그림이 절반 정도 파쇄기로 갈려버리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과연 미술품의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반쯤 남은 그 작품의 가격이 3년 후 무려 301억 원으로 뛰었다는 것이다.

경영학에서도 헤리티지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는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명품의 가격이 왜 그리도 높은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명품의 원재료나 제조 기술 등이 워낙 좋아서 품질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판매 후 서비스의 질이나 또는 재판매 가격이 높아서 경제적 투자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역시 명품의 높은 가격에는 역사적 유산, 즉 헤리티지가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비범한 장인이 개발했던 특별한 비법이 해당 제품의 차별성을 만들었고 거기에 조직과 자본이 힘을 더하면서 현재의 명품 제조 기업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스토리텔링이 큰 힘을 발휘하는데 예를 들어 소가죽으로 만드는 제품의 경우 소의 품종이나 사육 환경 등 특별한 소가죽이 태어나게 한 탄생 신화에 대한 스토리는 이 명품만이 가지는, 모방하기 힘든 헤리티지를 구성하게 된다.

헤리티지는 물리적인 제품만이 아니라 관광 등 무형적 서비스에서도 큰 힘을 발휘한다. 볼거리와 먹을거리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에는 현장 특유의 역사적 유산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는 그 자체로 야경이 화려하고 멋진 건물이 많은 근사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초창기 도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던 마피아 보스 ‘벅시 시걸’의 스토리가 더해지면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된다. 미국 워싱턴 DC 부근에 있는 오래된 식당인 ‘페킹 고메 인(Peking Gourmet Inn)’에 가면 맛있는 오리고기도 맛볼 수 있지만 세계 각국의 정상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방문했던 사진이 벽에 가득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전통이 깃든 식당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연기자나 가수의 사인, 또는 방송에서 소개됐던 사진을 가득 걸어 놓은 식당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곳에 가면 여기는 맛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경영학 분야에서의 이러한 헤리티지는 반드시 오래된 전통을 계승하거나 고급스러운 어떤 것을 추종해야만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뱅크시가 지역적 헤리티지를 활용하면서도 기존의 헤리티지를 파괴하면서 성장했듯이 기업도 추종과 파괴의 양면성을 통해 헤리티지를 활용할 수 있다. 스트리트 문화와 관련된 브랜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앞에서 명품의 예를 들었지만 1854년에 설립된 루이뷔통은 오랜 전통을 가진 명품 중의 명품 브랜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업이 2017년에 당시 고작 23년 차 기업이자 스트리트 브랜드였던 슈프림과 협업해 제품을 출시했다. 하이패션 기업과 스트리트 패션 기업의 협업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이 놀랐는데 성과도 워낙 좋아 다시 한번 놀라움을 줬다. 2017년에 발생했던 또 하나의 사건은 1917년에 설립된 럭셔리 브랜드 기업인 스페인의 발렌시아가가 스트리트 브랜드인 베트멍 출신의 뎀나 바잘리아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해 최초의 어글리 슈즈인 ‘트리플 S’를 출시한 것이다. 젊은 세대가 부담 없이 착용하는 것으로 생각되던 스니커즈를 명품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대담한 시도였고, 이는 큰 성공을 가져왔다. 루이뷔통과 발렌시아가 입장에서는 헤리티지의 파괴와 진화를 통해 경쟁력을 획득했고, 슈프림 입장에서는 헤리티지의 덧입힘과 활용을 통해 경쟁력을 획득했다.


예술과 경영

뱅크시 전시를 계기로 그가 가졌던 상업주의와 저작권에 대한 거부감,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 공동체에 대한 철학, 헤리티지에 대한 태도가 미술이 아닌 경영 분야와 갖는 접점에 대해 살펴봤다. 예술 향유의 기회가 차별 없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을 원하는 뱅크시도 최소한의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창업 기업의 지적재산권을 다른 기업이 탈취하는 것을 막는 분리 기제를 떠올리게 한다. 부조리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사상은 공유가치 창출을 추구하는 경영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전쟁과 질병에 지친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근무 환경에서의 즐거움을 중시하고 채찍보다 당근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영인, 경영학자의 소신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헤리티지를 활용하면서도 파괴하는 것으로 예술적 경지를 넓혔던 그의 예술가적 소양은 스트리트 문화와 명품 문화의 혼종을 통해 기업의 위상을 높였던 경영자들의 역량과 다름이 없다. 이 정도면 예술과 경영은 거의 한 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 신형덕

    신형덕shinhd@hongik.ac.kr

    홍익대 경영대학 교수

    필자는 서울대에서 경영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전략경영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버지니아주 조지메이슨대를 거쳐 2006년 홍익대 경영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된 분야는 전략경영, 국제경영, 창업, 문화예술경영이다.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장,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 『잘되는 기업은 무엇이 다를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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