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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본 극한 환경에서의 인재 육성

대변혁기 여말선초 vs. 개화기 임금의 의지 外에도 필요한 건 많다

김준태 | 221호 (2017년 3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첫 번째 산업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극도의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극한 환경’은 사람들이 처음 경험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은 수백 년 전의 선조들은 경험했을 수 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역사를 들여다보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지난 600여 년 동안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이 건국되던 ‘여말선초’,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 치하로 들어가던 ‘개화기’라는 극한 환경이 존재했다. 그때 고려의 인재 교육 시스템은 어떤 결과를 낳았으며 개화기의 인재육성 방식과 리더십은 어떤 실패를 만들어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400년 조직이 망하면서 만들어 낸 ‘혁신 기업 조선’, 그 혁신 기업 조선이 한때 ‘소중화’로 불릴 정도로 융성했다 비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은 현재 극한 환경에 처한 기업들에 큰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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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르지만 유학(儒學)에서 ‘인적자원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은 존재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과업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동일한 본성을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각자가 가진 기질의 차이로 인해 그 본성을 온전하게 구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교화(敎化)’를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줌으로써 자신 안에 내재된 가능성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유학의 핵심 이념이다. 1600여 년 전부터 국가 차원의 고등교육기관을 설립1 해 인재양성에 주력한 것도 바로 이 ‘교화’의 완수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성한 인재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이후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과 성균관(成均館),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지며 변함없이 계승돼 왔는데 고려 말 성리학이 유입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주자(朱子)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2 에서 학교가 잘 운영되면 자연히 좋은 정치가 펼쳐지고 나라도 융성해진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에게 각자가 가진 역량과 자질을 깨닫게 하고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도[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를 가르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외부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계발이 고도의 정합성을 가지고 가족과 사회,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구조를 통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됐다.

물론 이것은 이상에 가깝다. 실제로 인재 교육은 국정운영과 행정실무를 담당한 인적자원을 공급하는 데 치중됐고, 학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활용되곤 했다. 다만 공동체를 올바로 다스리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구성원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며 특히 구성원의 내적 역량을 최대로 만드는 것이 그 첩경이라는 인식만큼은 확고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조는 위기나 혼란 상황일수록 더욱 강해졌는데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본성은 곧 우주만물의 이치[理]와 합일하는 만큼 온전하게 발현될 수만 있다면 어떤 변화에도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내외적 환경이 급변해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기존 가치관이 전도되며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던 시기일수록 무엇보다 인재육성에 집중했던 것은 그래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력이 언제나 성공하고 뜻대로 진행됐던 것만은 아니다. 역사의 길목마다 리더들은 시대적 과제를 담당하고 개혁의 동력이 돼 줄 인재를 키워내고자 했지만,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경험한 적이 없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닥칠수록, 더욱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는데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 여말선초와 개화기를 검토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였던 이 시기, 선조들이 행했던 인재경영을 복기함으로써 극단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또 다른 전환을 맞고 있는 오늘을 위한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무릇 역사를 돌이켜보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변동이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공동체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고 기존 질서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치란성쇠(治亂盛衰)3 의 분기점을 맞이하는 것이다. 달라진 국제질서, 소빙하기(Little Ice Age)와 같은 이상기후나 천재지변, 기술과 사상의 진보도 역사의 변동을 이끌어낸다. 여러 요인이 한 번에 밀려와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이러한 전환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낯설게 다가온다.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을 가야 한다는 불안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 더욱이 변화의 크기와 방향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혼란이 가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용감하게 전진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시간을 허비했을 때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여말선초와 개화기는 어떠했을까? 나라가 망했다는 점에서 비록 고려는 실패했지만 이 시기에 고려가 키워낸 인재들은 대내외적인 도전과제를 해결하고 사회경제질서를 혁신했으며 새로운 가치이념에 기반을 둔 국가를 건설했다. 이에 비해 개화기 조선이 키워낸 인재들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명확한 비전이 없었을 뿐 아니라 타이밍을 놓쳤고, 이들을 뒷받침해줘야 할 리더와 지배층도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권상실이라는 치욕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말선초

자 그러면, 우선 여말선초로 가보자.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성균관이 중영(重營)됐다. 고려의 최고학부이자 국학(國學)4 으로서 성종(成宗) 때 설치된 ‘국자감’을 충선왕(忠宣王)이 ‘성균관’으로 개칭했고, 공민왕이 ‘국자감’으로 다시 바꾸었다가 공민왕 11년(1362) 성균관이라는 명칭으로 고정된다. 그런데 ‘중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성균관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는 열에 한둘도 안 되고 선배와 노유(老儒)들이 모두 죽어 육경(六經)5 이 실낱같이 겨우 전해질 뿐이다”라고 말하는 안향(安珦)6 과 “요즘 성균관에서 힘써 가르치고 깨우치지 않아서 여러 생도들이 학업을 버리고 있다”7 는 충숙왕(忠肅王)의 발언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고려가 거듭된 전쟁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기 때문으로 특히 무신정권기와 몽고의 침입 등을 거치면서 국가 교육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관리임용제도의 문란도 한몫을 하는데 과거시험이 부정으로 얼룩지고 음서(蔭敍)8 와 특채가 만연하다 보니 “벼슬에 오른 자가 급제한 자가 아니고 급제한 자가 국학을 거친 자가 아니게 되어” 사람들은 굳이 국학을 이수하려 들지 않았다. 인재 교육과 관료충원 시스템이 분리돼 버린 것으로, 이는 곧 관리의 역량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건전한 경쟁도 이뤄지지 않아 국가 전체가 건강함을 잃어버렸다.



공민왕의 성균관 중영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시도된 것으로,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내침과 김용·덕흥군의 반란 등을 겪으면서 미뤄졌다가 1367년,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공민왕은 이색(李穡, 1328∼1396)을 지금의 총장 격인 대사성에 임명해 성균관 운영을 책임지게 하고 학문과 능력으로 조야의 존경을 두루 받던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에게 교관을 겸직하도록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색이 배움의 법식을 정비하고 매일 명륜당(明倫堂)9 에 앉아서 경전을 나눠 수업하니 강의가 끝날 때마다 함께 토론하느라 지루함을 잊을 정도”였고 “이 소식을 들은 고려 각지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서로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되니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비로소 흥기하게 됐다”고 한다.10

하지만 이런 희망찬 시작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을 둘러싼 환경은 암울하기만 했다. 신돈의 개혁이 실패했고 점점 무기력해갔던 공민왕도 암살됐다.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우왕은 폭정을 일삼는다. 권문세족의 발호는 극에 달했으며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백성들은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흉년과 기근으로 민생은 파탄이 났지만 국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고려의 국교인 불교도 백성들의 의지처가 돼주기는커녕 부패와 타락으로 오히려 백성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한반도를 노략질해 왔고 14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규모와 빈도가 더욱 커지고 잦아져 한 번에 수백 척이 침입할 정도였던 왜구도 나라를 위기로 내몰았다.11 왜구가 수도 개경을 위협해 천도가 논의될 정도였다.

원명(元明) 교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국제질서도 뒤흔들린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가 분열됐고 제국의 중심이었던 원나라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압도적인 힘이 사라지고 나면 그 여파가 사방에 미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각축이 벌어지는 법이다. 동북아는 말 그대로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세상이 불확실하다는 것만 확실할 뿐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던 그런 시대였고, 깊은 절망과 혼란의 시대였다.

성균관에 모인 젊은 인재들은 이 같은 극단의 시대와 온 몸으로 마주했다. 이들은 치열한 토론과 고민 끝에 ‘공공성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를 실현해 줄 관제개혁, 토지개혁, 윤리개혁의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고려는 이들의 개혁 의제를 채택해주지 못했다. 그것을 지원해 줄 리더십도, 조직의 관심이나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재들의 상당수는 새로운 리더(이성계)를 찾아 고려를 저버리게 된다. 기업이 아무리 인재를 육성하더라도 그 인재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인재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심지어 인재들이 다른 기업으로 이탈하거나 직접 경쟁자가 되는 기업을 창업할 수도 있다. 고려 말 성균관의 인재들이 대거 반(反)고려의 대열에 선 점은 오늘날의 기업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고려의 입장에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도출한 의제와 정책이 새로운 문명을 열어 조선왕조를 창업하는 기틀이 됐고, 조선의 기본 법제가 됐다는 점에서 성균관에서의 인재 육성은 결국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성균관은 선진 문물과 최신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었다. 원나라는 고려에게 억압과 지배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원나라 유학을 통해 국제적인 시야를 갖추고 세계 각지의 문화를 마음껏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인들에게 새로운 학문이었던 성리학도 마찬가지다. 안향과 백이정(白頤正), 이제현(李齊賢), 이곡(李穀), 백문보(白文寶), 이인복(李仁復) 등이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공부해 고려로 전파했고, 이제현의 제자이자 이곡의 아들인 이색도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색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제현이 원나라의 수도에서 지내며 대유(大儒)들과 교류해 “보는 것이 바뀌고 듣는 것이 새로워지는 가운데 자신을 절차탁마하면서 계속 변화시켜 나갔다”12 고 한다. 원나라가 지적 성장과 도야를 이루게 해줬다는 것이다. 성균관은 이러한 학자들의 안목과 학문이 계승된 곳으로 고려의 젊은 지식인들은 성균관에서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다.

둘째, 성균관의 교육 방식이다. 아무리 해외에서 최신 학문을 배워온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승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균관은 1) 학문과 관직에서 동시에 역량을 발휘하고 있던 사람들이 교관이 된 점 2) 집중적인 코칭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교육의 성과를 발휘했다. 정도전의 술회에 따르면 “목은 이 선생이 일찍이 가정(아버지 이곡)의 교훈을 이어받고 북으로 중원(원나라)에 유학하여 올바른 사우(師友)와 연원(淵源)을 얻어 성명(性命)ㆍ도덕의 학설을 궁구한 뒤에 귀국하여 여러 선비들을 휘하에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래서 그를 보고 흥기한 이가 많았으니, 오천 정공달가(鄭公達可, 정몽주)ㆍ경산 이공자안(李公子安, 이숭인), 반양 박공상충(朴公尙衷, 박상충)ㆍ영가 김공경지(金公敬之, 김구용)와 권공가원(權公可遠, 권근), 무송 윤공소종(尹公紹宗, 윤소종)들이며, 나같이 불초한 자도 또한 그분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13 이색이 젊은 선비들을 모아 성리학을 가르쳤고, 그 선비들 중 관직에 나아가 능력을 발휘하던 이들이 성균관의 중영과 함께 교관이 돼 다시 생도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이색과 교관들은 강단에서 실시하는 정규수업 외에도 일대일 교육, 토론 등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김구용의 경우 휴가를 받아 집에 있을 때에도 질문을 하기 위해 찾아온 생도들을 기꺼이 맞이했다고 한다.14 치국에 나설 인재들을 양성하는 성균관에 있어서 이론교육만으로는 그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 힘들다. 성균관은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는 노하우를 가진 스승을 배치하고, 그 스승들이 적극적으로 코칭에 나섬으로써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성균관의 운영자들이 가진 미래 비전이다. 아무리 전환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환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방향을 정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끝내 길을 잃는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당시 고려는 건국 후 400여 년간 누적돼 온 폐단이 드러나고 체제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대내외적 환경은 위중했고 고려 문명의 지도이념이었던 불교도 생명력을 상실했다. 공민왕을 비롯한 이색 등 지성들은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성균관이 전초기지가 되고 성리학이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고려의 문제점이 일상성과 공공성을 상실한 데 있다고 진단했다. 초월적이고 출세간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일상생활에서의 실천 공부를 확립함으로써 이상과 현실, 진리와 실천이 합일된 사회를 구축하고자 노력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통치자와 국가 체제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사회 전반을 일신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를 대표로 하는 신흥무인 세력과 손을 잡았는데15 동북면16 에서 활동했던 이성계는 중앙정계의 정쟁과 구습에 물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려의 북쪽 국경을 방어하면서 원, 명, 여진족이 각축을 벌였던 힘의 소용돌이를 목도한 인물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 고려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공동체가 극단으로 내몰리던 그때 이처럼 시대의 변화를 읽은 두 세력이 힘을 합치게 된다.

그런데 불확실성과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로 갈린다. 개선과 개혁으로 체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는 한편 혁명으로 시스템 자체를 아예 리셋(reset)할 수도 있다. 성균관 내부에서 소위 ‘온건파’ 사대부와 ‘혁명파’ 사대부로 갈린 것도 이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인데 후자가 역사의 승자가 되기는 했지만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문제다. 다만 불교에서 성리학으로의 사상 전환은 세계적 조류였는데17  고려의 건국이념은 불교였기 때문에 고려라는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는 이를 따라가기 힘든 면이 있었다. 원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고려의 기득권 세력과 기존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도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혁명파는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아예 불확실성을 명분으로 새 왕조 건설의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혁신의제가 도출되더라도 혁신의제를 실천할 수 없는 환경일 때 기존의 조직이 무너지고 조직 자체가 재설계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개화기

다음으로 개화기를 살펴보자.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크고 작은 위기가 수없이 닥쳤고 여러 차례 변화가 일어났지만 개화기만큼 큰 충격은 없었을 것이다. 중국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믿음은 진즉에 붕괴됐고, 극진히 섬겼던 천자의 나라는 서구열강의 힘 앞에서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오랑캐라고 천시했던 일본이 발전한 문물을 앞세워 조선을 위협하는 것도 큰 충격이었다. 영길리(영국), 법국(프랑스), 미리견(미국) 등 존재조차 몰랐던 나라들이 조선으로 밀려왔는데 이들이 전한 서구의 과학기술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1883년 미국에 보빙사로 다녀온 민영익(閔泳翊)이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되돌아왔다”고 탄식했을 정도다. 이때 조선이 접한 철도와 자동차, 거대한 증기함선, 전화, 전등은 현대의 우리가 처음 스마트폰을 만난 것 그 이상의 신세계였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되돌아왔다”

― 1883년 미국 보빙사 방문 후 조선에 귀국한 민영익의 말


이러한 변화를 맞아 조선 내부에서는 무엇보다 교육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는데 일본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열강이 조선에 통상교섭을 요청했지만 조선의 관리들은 그 업무를 맡을 최소한의 지식조차 없었던 까닭이다. 1882년 지석영이 올린 상소를 보자.18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는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외교라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하고 시국에 어둡습니다. 교린(交隣)19 하거나 연약(聯約)20 하는 것이 모두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외무(外務)21 에 마음을 쓰는 자를 보기만 하면 대뜸 사교(邪敎)에 물들었다고 지목하며 비방하고 침을 뱉으며 욕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서로 동요하면서 의심하고 시기하는 것은 시세(時勢)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니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 어찌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 막힌 소견을 열어주고 시무를 환히 알 수 있도록 각국의 인사들이 저술한 책을 수집해 정밀히 연구하게 하소서. 각국의 수차(水車), 농기(農器), 직조기(織組機), 화륜기(火輪機), 병기(兵器) 등을 구매하여 그 기술을 터득하게 하소서.”



김옥균도 비슷한 건의를 한다. “지금 천하의 형세는 날로 변하고 달로 바뀌어서 잠시 동안도 안심할 수가 없사옵니다. … 오늘 우리 조선국에서 영국이라는 이름을 아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나이까? 설령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라도 영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망연히 대답하지 못하는 자가 왕왕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어떤 것이 와서 내 몸뚱이를 물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나를 무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존망을 논하는 데도 어리석은 사람의 꿈속 이야기와 같은 것은 결코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 사태가 이미 이와 같사온데, 폐하께서는 무슨 계획이 있으셔서 망국의 임금이 되는 것을 면코자 하시옵니까? … 지금 온 세계는 산업을 발전시키며 누가 생산이 많은지를 경쟁하고 있습니다. … 널리 학교를 세워서 사람들의 지혜를 개발하여 방책으로 삼으소서.”22

대외통상과 외교 업무가 중시되는 상황을 맞아 국제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고, 아울러 서구의 과학기술을 배우게 함으로써 국가의 식산흥업에 이바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면 망국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고종도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것 같다. 고종은 “치화(治化)를 다시 새롭게 하려면 먼저 선입관을 깨버려야 한다”며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농민, 공인(工人), 상인(商人)의 자제들도 신학문을 학습하라는 교서를 내렸다.23 영선사(領選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여 발전된 문물을 배우고 오게 했고, 1883년 8월에는 외교통상과 해관 업무를 담당할 인력을 양성하는 동문학(同文學)을, 1886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육영공원에서는 수학과 각국의 역사와 언어, 국제법과 군사학, 의학, 농업, 지리, 천문, 기기(機器)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24

하지만 이 시기의 인재 교육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 ‘경본예참(經本禮參)’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유지하고 그 정신을 강화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습득하겠다는 것으로, 본질은 놔둔 채 기교만을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전과 세계관을 갖추고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운다는 것도 요원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고종은 갑오개혁(1894∼1896)을 계기로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2525:: 를 반포하고 전면적인 교육 개혁을 시도한다. 고종은 “세상 형편을 돌아보면 부유하고 강성하여 독립하고 웅시(雄視)한26 나라들은 모두 그 나라 백성의 지식이 개명(開明)되어 있다. 지식이 개명함은 바로 교육이 잘 이루어진 덕분이니 교육은 실로 나라를 보존하는 근본이라 할 것이다. … 짐이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들 신하와 백성이 학식으로 나라를 중흥시키는 공로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모든 신민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너의 덕성, 너의 체력, 너의 지혜를 기르라. 왕실의 안전이 신민의 교육에 달려 있고 나라의 부강도 신민의 교육에 달려 있다”며 교육을 담당하는 부처인 학무아문을 독립시키고 합리성과 실용위주의 교육에 나섰다. “돌이켜 보건대 시국은 크게 바뀌었다. 모든 제도가 다 함께 새로워져야 하지만 영재의 교육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다”27 라는 박정양의 말대로 분야별 전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금세 제동이 걸렸다. 전통교육을 ‘허문(虛文)의 학문’이라고 비판했다가 유림의 극심한 반발을 산 것이다. 고려가 불교를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조선도 국시인 유학을 버릴 수 없었고, 결국 고종은 유학교육과 성균관을 중시하는 조칙을 내리는 것으로 한걸음 물러난다. 여기서 고종은 조선의 문물과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지 않고 일상의 학문에 힘쓰지 않은 탓으로 성리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일용평상지도(日用平常之道)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8 다시 ‘경본예참’ 교육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처럼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교육정책이 원칙을 잃고 표류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한 이래 1884년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개입,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거하기까지 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1895년,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유례없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후 수립된 친일내각은 섣부른 단발령 공포로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다. 1898년에는 안경수가 고종의 퇴위음모를 꾸미다가 사형에 처해졌고 역관 김홍륙은 고종을 독살하려다 발각돼 역시 처형됐다. 이처럼 혼란이 거듭됐지만 고종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1898년 9월18일 최익현(崔益鉉)은 “폐하께서는 이렇게 된 까닭을 규명해 보셨습니까? … 폐하께서는 물욕에 마음이 끌리고 욕심이 습관이 되셨습니다. 부드러우나 강단이 부족하고 자잘한 일은 잘 챙기면서도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엔 어둡습니다. 아첨을 좋아하고 정직을 꺼리시며 안일함에 빠져 노력할 줄 모르십니다. 지난 30년 동안 위에서 하늘이 견책하였으나 깨닫지 못하셨고, 아래서 백성이 원망하였으나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란이 있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고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물욕에 마음이 끌리고 욕심이
습관이 되셨습니다. 부드러우나 강단이 부족하고 자잘한 일은
잘 챙기면서도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엔 어둡습니다.”

― 1898년 최익현이 고종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최익현은 “부디 중전께서 그처럼 흉악한 변을 당하신 까닭은 무엇인지, 국가의 사세가 점차 위망(危亡)으로 치닫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무슨 도리를 잃었기에 역적이 자주 일어나며, 무슨 계책을 실수했기에 적들의 침해와 모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십시오. 어찌하여 정사와 법령은 확립되지 않는지, 어찌하여 백성의 삶은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성찰하십시오. 반복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척연하게 반성하고 두려워하여 잘못을 숙청하고 나라를 혁신해 내실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충언을 올렸지만 고종은 달라지지 않았다. 리더와 조직의 총체적 난국으로 효과적인 인재 교육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때도 여말선초처럼 대전환의 흐름을 인식하고 여기에 대비할 것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집단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조직화하지 못했으며 이성계처럼 물리적인 힘을 제공해주는 실력자도 없었다. 개화파 스승과 제자, 선후배 간에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코칭이나 지도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섣부르게 일을 벌였고, 어설프게 외세의 힘을 빌리다가 수구반동을 초래하며 상황을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국권을 빼앗기고 36년간 치욕적인 일제치하를 겪게 된 것이다.



두 극한의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상 여말선초와 개화기 사례는 우리에게 생각해볼 과제들을 던져준다. 전환기의 특징은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있다. 일반적인 수준의 변화는 체질의 개선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겠지만 사상과 문명이 교체되고 국제질서가 뒤바뀌며 시스템의 재설계가 요구될 정도의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기존 질서의 ‘붕괴(breakdown)’를 감수하고서라도 ‘돌파(breakthrough)’하겠다는 의지와 전략이 필요하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재다.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창조력을 발휘해야 하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사람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여말선초와 개화기는 극단의 시대, 거대한 전환을 맞아 공히 이를 헤쳐나갈 인재 육성을 시도했다. 임금이 나서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끝까지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 임금에 의해 방치되거나 무력화된 탓에 성균관과 육영공원 등은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런데 두 시기의 내용과 결과는 달랐다. 고려의 성균관은 인재들이 개혁 네트워크를 형성해 자체적인 육성에 나섰고, 유력자와 원로 지성들이 여기에 협력했다. 공동체 내부에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라는 개별 기업의 측면에서는 실패했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재개발과 그 인재들이 제시한 개혁안을 실행함으로써 조선이라는 새로운 혁신 기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에 비해 개화기는 인재들 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못했다. 공동체 내부에 변화를 추구하고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실력자들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러한 기획도 체계화되지 못했다. 극한 환경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CEO뿐 아니라 기업 내부에도 미래 비전에 동의하고 혁신을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 형성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론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 밖에도 여말선초와 개화기가 주는 시사점이 있다. 고려가 실패하고 조선이 성공한 것은 정도전, 조준 등 혁명파 성리학자들의 노력 외에도 리더인 이성계가 전환의 시대에 알맞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문명의 필요성을 이해했고, 이를 위한 혁명파 사대부의 설계를 받아들였다.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체계(infrastructure)를 확립한 것이다.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인재 육성에 집중했는데, 이와 같은 비전과 체계 속에서 구성원들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투자함으로써 조선왕조가 500년을 지속할 수 있는 기초를 닦는다.

개화기 때 조선이 청나라의 쇠퇴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점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전혀 다른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는 환경이 도래하면 기존의 강자들이 갑작스레 몰락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의 덫과 경직성에 빠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설계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서구열강의 힘을 무시했고 결국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그들의 교육정책도 한몫을 했는데 근본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서구 기술의 껍질만 얻으려 했던 것이다. 조선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았음에도 혁신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경본신참, 동도서기라는 이름으로 청나라의 잘못된 교육정책을 이어받았다. 극한 환경 속에 있는 현대의 기업들도 잘못된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 ‘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One Point Lesson


1 고려는 비록 망했지만 고려가 마지막에 만들어놓은 인재 플랫폼인 ‘성균관’이

제대로 작동하면서 ‘혁신 국가 조선’이 탄생했다. 강대국, 경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국가로 다시 탄생한 셈이다. 인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류하며 스스로 문제점을 찾고

혁신방안을 고민하도록 하는 플랫폼과 인프라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2 ‘개화기’의 극한 환경에서 고종은 ‘신문물 습득을 위한 교육강화’라는 방향을 잡았으나

기득권 세력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 4차 산업혁명과 극도의 불확실성이 만들어내는

지금의 극한 환경에서 새로운 지식과 방법론을 습득하고 혁신하려는 리더는 조직 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타협을 통해서든, 압박을 통해서든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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