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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본 극한 환경에서의 인재 육성

대변혁기 여말선초 vs. 개화기 임금의 의지 外에도 필요한 건 많다

김준태 | 221호 (2017년 3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첫 번째 산업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극도의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극한 환경’은 사람들이 처음 경험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은 수백 년 전의 선조들은 경험했을 수 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역사를 들여다보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지난 600여 년 동안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이 건국되던 ‘여말선초’,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 치하로 들어가던 ‘개화기’라는 극한 환경이 존재했다. 그때 고려의 인재 교육 시스템은 어떤 결과를 낳았으며 개화기의 인재육성 방식과 리더십은 어떤 실패를 만들어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400년 조직이 망하면서 만들어 낸 ‘혁신 기업 조선’, 그 혁신 기업 조선이 한때 ‘소중화’로 불릴 정도로 융성했다 비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은 현재 극한 환경에 처한 기업들에 큰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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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르지만 유학(儒學)에서 ‘인적자원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은 존재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과업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동일한 본성을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각자가 가진 기질의 차이로 인해 그 본성을 온전하게 구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교화(敎化)’를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줌으로써 자신 안에 내재된 가능성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유학의 핵심 이념이다. 1600여 년 전부터 국가 차원의 고등교육기관을 설립1 해 인재양성에 주력한 것도 바로 이 ‘교화’의 완수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성한 인재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이후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과 성균관(成均館),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지며 변함없이 계승돼 왔는데 고려 말 성리학이 유입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주자(朱子)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2 에서 학교가 잘 운영되면 자연히 좋은 정치가 펼쳐지고 나라도 융성해진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에게 각자가 가진 역량과 자질을 깨닫게 하고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도[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를 가르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외부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계발이 고도의 정합성을 가지고 가족과 사회,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구조를 통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됐다.

물론 이것은 이상에 가깝다. 실제로 인재 교육은 국정운영과 행정실무를 담당한 인적자원을 공급하는 데 치중됐고, 학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활용되곤 했다. 다만 공동체를 올바로 다스리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구성원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며 특히 구성원의 내적 역량을 최대로 만드는 것이 그 첩경이라는 인식만큼은 확고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조는 위기나 혼란 상황일수록 더욱 강해졌는데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본성은 곧 우주만물의 이치[理]와 합일하는 만큼 온전하게 발현될 수만 있다면 어떤 변화에도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내외적 환경이 급변해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기존 가치관이 전도되며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던 시기일수록 무엇보다 인재육성에 집중했던 것은 그래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력이 언제나 성공하고 뜻대로 진행됐던 것만은 아니다. 역사의 길목마다 리더들은 시대적 과제를 담당하고 개혁의 동력이 돼 줄 인재를 키워내고자 했지만,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경험한 적이 없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닥칠수록, 더욱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는데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 여말선초와 개화기를 검토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였던 이 시기, 선조들이 행했던 인재경영을 복기함으로써 극단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또 다른 전환을 맞고 있는 오늘을 위한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무릇 역사를 돌이켜보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변동이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공동체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고 기존 질서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치란성쇠(治亂盛衰)3 의 분기점을 맞이하는 것이다. 달라진 국제질서, 소빙하기(Little Ice Age)와 같은 이상기후나 천재지변, 기술과 사상의 진보도 역사의 변동을 이끌어낸다. 여러 요인이 한 번에 밀려와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이러한 전환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낯설게 다가온다.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을 가야 한다는 불안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 더욱이 변화의 크기와 방향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혼란이 가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용감하게 전진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시간을 허비했을 때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여말선초와 개화기는 어떠했을까? 나라가 망했다는 점에서 비록 고려는 실패했지만 이 시기에 고려가 키워낸 인재들은 대내외적인 도전과제를 해결하고 사회경제질서를 혁신했으며 새로운 가치이념에 기반을 둔 국가를 건설했다. 이에 비해 개화기 조선이 키워낸 인재들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명확한 비전이 없었을 뿐 아니라 타이밍을 놓쳤고, 이들을 뒷받침해줘야 할 리더와 지배층도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권상실이라는 치욕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말선초

자 그러면, 우선 여말선초로 가보자.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성균관이 중영(重營)됐다. 고려의 최고학부이자 국학(國學)4 으로서 성종(成宗) 때 설치된 ‘국자감’을 충선왕(忠宣王)이 ‘성균관’으로 개칭했고, 공민왕이 ‘국자감’으로 다시 바꾸었다가 공민왕 11년(1362) 성균관이라는 명칭으로 고정된다. 그런데 ‘중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성균관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는 열에 한둘도 안 되고 선배와 노유(老儒)들이 모두 죽어 육경(六經)5 이 실낱같이 겨우 전해질 뿐이다”라고 말하는 안향(安珦)6 과 “요즘 성균관에서 힘써 가르치고 깨우치지 않아서 여러 생도들이 학업을 버리고 있다”7 는 충숙왕(忠肅王)의 발언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고려가 거듭된 전쟁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기 때문으로 특히 무신정권기와 몽고의 침입 등을 거치면서 국가 교육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관리임용제도의 문란도 한몫을 하는데 과거시험이 부정으로 얼룩지고 음서(蔭敍)8 와 특채가 만연하다 보니 “벼슬에 오른 자가 급제한 자가 아니고 급제한 자가 국학을 거친 자가 아니게 되어” 사람들은 굳이 국학을 이수하려 들지 않았다. 인재 교육과 관료충원 시스템이 분리돼 버린 것으로, 이는 곧 관리의 역량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건전한 경쟁도 이뤄지지 않아 국가 전체가 건강함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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