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2014년 SK텔레콤이 기획/설계하고 SK브로드밴드가 판매한 셋톱박스 ‘비박스(B box)’는 여러 모로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외형부터 고급스러운 조명등 이미지였고 리모콘에도 터치스크린과 충전식 배터리가 제공됐다. 홈 모니터링, 화상전화 등 ‘스마트 홈 허브’ 기능도 추가됐다. 하지만 출시 첫해부터 디자인은 전통적인 셋톱박스의 형태로 되돌려졌고 브랜드는 서서히 사장됐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파격적 디자인에 따른 단가 상승, 발열, 안전 우려 등 제조 측면에서의 어려움
2. 회사 내부의 다른 프리미엄 제품과의 경쟁
3. 고급 소비자 접점 확보의 어려움과 유통채널의 차별화 부재
지난 2014년 7월, DBR 157호는 그해 1월 SK텔레콤이 출시한 셋톱박스 B box(비박스)의 사례를 케이스 스터디로 게재했다. 상업적 성공을 판단하기 이른 초기 제품이었지만 그 자체로 혁신성이 높고 문제의식과 제품 개발 과정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DBR은 “1∼2년 후 상업적 성과를 판단할 수 있는 시점에서 성공 혹은 실패 요인을 분석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2년여가 지난 2016년 11월 DBR 212호에서 이 사례를 재조명한다.
DBR 157호에 실렸던 케이스스터디
기획비박스는 케이블 TV 셋톱박스 기능에 홈 모니터링 기능, 인터넷 기능 등을 추가해 가정의 통신/엔터테인먼트 허브 역할을 하도록 기획된 상품이었다. 외관은 매끈한 백자 도자기 느낌으로 만들고 무드 조명 기능을 갖췄다. TV 장식장에 처박아두는 셋톱박스가 아니라 ‘밖으로 꺼내놓고 싶은 인테리어 소품’을 목표로 했다.
이 제품은 2012년 초부터 기획됐다. 당시 SK텔레콤은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휴대폰 시장과 유선 인터넷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차세대 성장을 위한 상품 기획을 하다보니 다음 격전지는 홈(home)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회사가 가진 유무선 인프라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판매와 운영을 맡게 되는 자회사 SK브로드밴드(broadband)의 브랜드 정책에 맞춰 ‘B box’가 됐다.
가정에 인터넷/통신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무수히 존재했다. 삼성전자 등 소비자 가전기기를 만드는 회사들은 인터넷 기능이 부착된 냉장고나 인터넷 기능을 갖춘 ‘스마트 TV’ 등을 출시하며 이 시장을 선점하려 노력해왔다. 반면 SK텔레콤은 자회사 SK브로드밴드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던 인터넷 TV, 즉 셋톱박스를 홈 허브의 주인공으로 삼기로 했다. 셋톱박스를 홈 허브로 부각시킬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자사가 보유한 유무선 통신망과 무수한 서비스들을 이용해 다양한 신규 사업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단, 이때까지 물리적 실체가 있는 소비재 제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기획하고 제조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는 광통신망 등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고 휴대폰과 인터넷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에서는 탁월했지만 자체적으로 휴대폰이나 셋톱박스 같은 소비자용 하드웨어 기기를 제작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를 기획부터 외주업체에 맡길 수는 없었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뿐 아니라 팬택, 삼성전자, 인터넷 포털 업체 등 내외부에서 다양한 인력을 데려와 정예 프로젝트 팀을 구성했다. 또 전문 UX(user experience) 디자인 업체인 플러스엑스와도 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