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 기술이 파괴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전 세계 대부분 언론사들이 닷컴 기업을 자회사로 설립했습니다. 자체적으로 생산한 콘텐츠를 TV나 신문 외에 인터넷으로도 전달하며 신기술을 활용한 가치 창출에 열을 올렸습니다. 따라서 미디어 회사들은 인터넷이 촉발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일찍부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미디어 회사 가운데 기술 변화의 파고를 뛰어넘어 꾸준히 성장한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미디어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워싱턴포스트처럼 매각되거나 트리뷴컴퍼니처럼 파산보호 신청을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찍부터 인터넷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요.
애벌레, 번데기 모델이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언론사들은 기존 가치창출 활동은 이전과 똑같이 전개했고 다만, 새로운 콘텐츠 전달 통로로만 인터넷을 활용했습니다. 물론 이는 비용 절감과 고객 가치 향상을 가져왔지만 기업의 가치창출 활동 자체를 혁신해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낸 스타트업 기업들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포털 업체는 검색을 통해 정보의 통로를 장악하면서 여러 소소의 뉴스를 한곳에 모아 전달해 플랫폼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어 소셜네트워크 업체들은 지인들이 편집한 뉴스를 유통하는 전혀 새로운 모델로 고객 가치를 극대화했습니다. 기존 언론사들이 더 큰 애벌레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 스타트업들은 가치 창출 과정을 완전히 새롭게 재조직화하는 번데기 모델로 변태에 성공했기 때문에 시장을 장악한 것입니다.
금융업을 바라보면 미디어 업계의 경험이 떠오르면서 묘한 데자뷔를 느낍니다. 금융회사들도 온라인 서비스를 강화하는 등 나름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계속 애벌레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존 활동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하면서 인터넷을 단편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미디어 산업은 생산품이 100% 디지털화된다는 측면에서 디지털 파괴를 가장 심각하게 경험한 업종입니다. 은행도 실물 거래보다는 대부분 전자 거래가 이뤄진다는 측면에서 디지털 파괴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신규 진입자를 철저히 막아준 규제 ‘덕분에’ 그나마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언제까지 규제가 산업을 보호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글로벌 경쟁 압력으로 인해 일시에 획기적으로 규제가 풀릴 확률이 높고 결국 많은 금융 기업들이 도산할 것입니다. 특히 자산 규모 경쟁을 벌이던 거대 금융 회사들이 더 위험합니다. 덩치가 크고 관료화된 조직들이 변화를 꾀하기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틈을 새로운 혁신 모델로 무장한 기업들이 차지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위협을 인식하고 지금 수행하는 가치창출 활동이 애벌레 모델인지, 변태를 가능케 하는 번데기 모델인지 구분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경영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도식 혁신을 소개한 <주가드 이노베이션>이란 책에는 “서구 기업들이여 긴장하라, (인도 기업들에겐) 역경이 앞에 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도의 어려운 환경이 혁신의 원동력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실제 둔덕이 많은 인도의 비포장 도로 덕분에 자전거 앞바퀴가 받은 충격을 뒷바퀴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혁신이 인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급정거할 때의 동력을 활용하는 하이브리드차 기술에 버금가는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금리, 파괴적 혁신 기업의 등장, 규제 완화, 탈중개화 트렌드 등 수많은 역경을 혁신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금융업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DBR의 디지털 파괴 전략 시리즈 4번째 주제는 금융 산업입니다. 한국 금융 산업의 경쟁력은 80위권으로 우간다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과감하게 변태에 도전하지 않으면 몰락하는 금융회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가 혁신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남국 편집장·국제경영학 박사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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