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비즈 타임스: 한국 근대 기업가의 초상 ① 박흥식

백화점에서 비행기 회사까지 … 풍운아 박흥식의 인생유전

182호 (2015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1926년 상경한 청년 박흥식은 근대 경성 비즈니스계의 기린아로 꼽혔다. 첫 사업인 쌀장사에서 인쇄업과 종이거래상으로 기민하게 전환한 것은 기미년 3·1운동 이후 변화하는 정국을 맞아 급증하는 출판 언론 수요를 간파한 덕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축적한 자본을 발판으로 20대 후반에 대형 잡화상화신상회를 인수해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고, 현대와 유사한 형태의 마케팅을 창의적으로 도입해 선발주자인 일본 백화점에 맞서 경쟁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위기는 허무하게 찾아왔다. 항공기 제조사를 설립하라는 일본 정부의 지시가 발단이었다. 해방 이후 그는 일본의 전쟁에 동조했다는 심판을 받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으로 생각해야 할 기업인의 운명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편집자주

DBR은 근대에 기업을 일군 국내 경영자들을 소개하는경성 비즈 타임스를 연재합니다. 근대사의 흐름과 중대한 판단의 고비 속에서 근대 경영 선구자들이 내린 결정과 이에 따른 결과는 후대 경영인들에게 많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현대 기업의 초기적 틀을 갖추고 이 땅에 출현한 근대적 기업의 역사를 대략 100년 안팎으로 볼 때, 그 초기 무대를 장식한 기업의 구성과 운영 및 기업 환경, 그 속에서 명멸한 기업인의 분투기는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기업과 인간의 경영에 대해 새롭게 성찰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1949 111, 박흥식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3일 전 종로 2가 화신백화점 4층 사장실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된 몸이었다. 구정을 3주 앞둔 주말 오후의 번잡한 백화점을 포위하고 벌어진 그의 체포는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새해 들어 반민특위가 문을 연 지 3일 만에 처음 잡아들인 반민족행위자 1.

이 이유만으로도 여론이 떠들썩했다. 광복을 맞이한 지 4년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5개월째였다. 그가 체포되기 전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첫 연두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에 대한 배상금 요구 문제와 남북통일 등 시국 현안에 대해 담화를 발표했다. 해방 이전과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를 통틀어 20년 가까이 최대의 재력과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며 기업인의 대명사로 불려온 박흥식이 한시적 특별조직의 조사관과 대면해 앉은 장소는 중앙청 2.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청사이자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한 귀퉁이였다.

 

그에 대한 심문은 처음부터 비행기 회사에 집중됐다. 특별법 제47,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가 그에게 적용된 주 혐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아직 만들어내지도 않는 비행기, 그리고 실제 탄생하지도 않았던 그 회사는 무엇이었을까. 정부 수립 이후 처음 민간항공사로 발족한 대한국민항공사가 국내 취항을 목표로 4인 규모의 미국산 여객기 수입을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때였다. 그날을 시작으로 2월 말까지 5주간에 걸쳐 진행된 10차례의 신문을 종합한 조사보고서는 박흥식의 범죄 사실로 다음을 맨 위에 꼽았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하였다.’

회사를 경영한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진술과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 전말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5년 전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 단계에 이른 1944, 일본 정부는 항공 전력 확대를 위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창설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박흥식에게 맡겼다. 박흥식은 그해 10월 조선총독으로부터 항공기 제조사업 허가를 받았고 12월 육군 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아 생산책임자로 취임했다. 전년도 10월에 처음 조선군사령관으로부터 사업제안을 받은 지 근 1년 만이었다. 화신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사업이 절정을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제조업은 그때까지 그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유통을 중심으로 시종일관 형성돼온 그의 사업군에는 비행기는 물론 공업이라는 단어조차 스며들 틈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방대한 규모의 방위산업체가 마치 빙산과도 같이 흘러든 것이다.

 

 

 

보신각 앞에서 바라본 1958년의 화신백화점

 

비행기는 조선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의 지도하에 경기도 안양의 공장 부지와 주변 일대를 활용해 제작하기로 했다. 폭격기 같은 것이 아니고 목제 경비행기였다. 자본금 5000만 원 가운데 2500만 원이 불입됐다. 총 사업예산은 무려 1800만 원이어서 부족한 금액 8300만원을 융자받기로 했다. 1944년도 조선총독부 예산이 19억 원 규모였다. 주식 100만 주 중에 그는 16만 주를 인수했다. 본사는 화신백화점 본점 내에 두었다. 1945 6월 기준 650명에 이르는 직원은 대표 박흥식과 그의 화신계열사 측근 두어 명 외에는 전원 일본인이었다. 재무와 기획과 기술 등 모든 분야를 일본인 실무자들이 장악했다. 지금껏 숱한 회사를 운영해왔지만 이렇게 많은 일본인이 고용된 적은 없었다. 민족기업을 표방한 마당이어서 일본인은 아예 없거나 간혹 대외교섭상 필요에 따라 한두 명 정도만 이사진에 앉히는 게 전부였다. 이처럼 기업 본부에 압도적인 숫자의 일본인이 배치돼 실무를 맡았다는 것 자체가 이 회사의 성격과 주체를 시사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그곳은 전시 일본의 막바지 국책사업의 한 갈래였으며 박흥식은 그곳의 현지 책임경영자로 선임된 민간 CEO와도 같은 존재였다.

 

 

본부와는 대조적으로 현장 공장의 직공은 전원 조선인이었다. 그 당시 약 1700명이 있었는데 4회에 걸쳐 모집한 이들 공원의 지원율은 61에 달했다. 한창 규슈와 사할린 등 전선으로 징용과 징병이 보내지던 당시에 방위산업체 등의 근무자는 국내 현직장에서 징용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정됐기 때문에 지원자가 쇄도했다. 해방 직전에는 2800명선에 이른 이들 사원과 공원 중에는 유력자와 명망가의 자제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애국선열의 후손, 독립운동자의 가족도 있었다. 이들은 청탁이 오는 대로 우선 채용했다. 징용 대상으로 전전긍긍하는 화신그룹 사원들은 비행기회사에 겸임 발령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채용된 지원자들은 한 달간 군사기본훈련을 이수한 뒤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 공장과 만주봉천의 비행기회사로 가서 실습을 받았다. 앞으로 공장 직공을 5000명선으로 늘리고 1945 9월 말에는 시제품을 낼 목표로 작업이 진행되던 중 전쟁이 끝났다. 결국 비행기는 한 대도 만들어지지 못한 채 8·15를 맞았다. 사업으로 본다면 박흥식 생애 최악의 국면이었다.

 

권력의 독

“비행기회사는 기업으로서 채산이 맞는 사업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업가인 당신이 이 사업을 왜 기획하셨습니까.”

“내 사업이라면 도저히 손을 댔을 리가 없습니다.”

 

조사관과의 문답에서 보듯 비행기사업은 박흥식으로서는 처음부터 원치 않는 제안이었을 수 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강요나 다름없는 것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권유로 시작했지만 종래에는 명령에 가까운 압력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조선군사령관과 참모장이 번갈아가며 회유하고 강압하기를 6개월, 속히 수락하라는 재촉은 태평양전쟁의 급박한 전황과 비례해 강도를 더해갔다. 전국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화신그룹의 젊은 직원들이 전선으로 끌려가는 마당이었다. 원치 않지만 거부하고 빠져나갈 처지도 못됐다는 것이 그가 처한 딜레마였다.

 

그는 그동안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업에서 거의 완승을 거뒀지만 권력을 상대로 하는 단 한번의 사업에서는 완패하고 말았다. 그 한번의 실패가 재기불능의 무덤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치의 독은 심각했다.

 

그는 그 시대의 여느 기업가가 흔히 그러했듯 통치권력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체제 내에서 경제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그로서는 피치 못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권력과의 밀착 관계가 사업상의 난관을 물리쳐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거부하기 힘든 압박으로 다가오는 일도 있었다. 비행기회사는 그 정점이었다.

 

오진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1 비행기 사업으로 그의 사업적 에너지는 크게 소진됐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화신백화점 등 그의 주력기업의 외형은 여전했다. 문제는 무형 자산에 큰 손상을 입은 것. 비록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최전성기에 찾아든 시련과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를 경성 비즈니스계의 총아로 자리매김해준 고객의 일부는 해방이 되자 그를 친일 거두로 지목했다.

 

 

 

1930년대 중반 새 화신백화점의 신축공사 모습

 



불같이 일기 시작한 사업

1943년경이 절정이었습니다.”

 

박흥식은 40년대의 마지막 해에 반민특위 조사실에서 어언 30여 년에 걸친 사업 역정에 관해 그렇게 술회했다.

 

박흥식에게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은 사업이 불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그것은 동시에 박흥식의 고객인 민족 대중의 욕망이 불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는 말도 된다. 그는 1920년대를 거치며 국민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1차 세계대전의 상흔 위에 화려하게 돋아난 서구와 일본의 경제 정치 문화의 부흥기는 1929년의 대공황을 겪고 1930년대에 들어서서도 꺾일 줄 몰랐다. 세계자본주의의 첨단으로 떠오른 백화점은 박흥식의 오랜 관심사였다. 하지만 경험과 자본이 불충분한 여건에서 처음부터 새로 창립하는 편보다는 부담 없이 유사업종의 재래업체를 모태로 확대 개편하는 쪽을 택했다.

 

박흥식은 1931년 세계대공황의 여파 속에 자금난에 시달리던 종로의 유력 잡화상 화신상회를 인수해 주식회사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일본군은 압록강 너머 만주로 침공해 들어갔던 시기였다. 이어 1932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백화점의 체계에 근접한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로부터 다시 두 달 뒤 박흥식은 바로 옆집에 어깨를 맞대고 들어선 4층짜리 경쟁업체 동아백화점을 전쟁 같은 혈투 끝에 제압하고 합병했다.

 

박흥식은 여러 모로 기존 화신상회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신식 양옥으로 증개축한 사옥의 1층 도로변에 쇼윈도를 냈다. 경성의 가로에서 처음 보는 최신 스타일이었다. 거기서부터 이미 백화점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미쓰코시백화점을 비롯,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백화점들을 염두에 뒀음이 분명했다. 건물과 설비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출근부라고 하는 것이 마련돼 아침마다 직원들이 여기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제대로 이행하는 사람이 없어 근무 기강 확립에 오랜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점포의 영업시간도 오전 9시부터 밤 10시로 정했다. 문 열고 닫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던 당시 종로 상가로서는 천지개벽 같은 조치였다. 날이 밝으면 문을 열고, 자정 이후라도 오가는 사람 있으면 점포 문을 닫지 않은 채 졸면서 일하고, 볼일이 있으면 마음껏 들락날락하는 기존 근무 방식에 익숙해온 점원들의 반발이 컸다. 화신상회의 전 주인이자 현 경영 회장을 맡은 종로 상인의 대부 신태화부터가장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며 젊은 오너 사장 박흥식의 개혁조치에 반대할 정도였다. 상점이 기업으로 변신하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진화과정이었음을 다들 수긍하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종로 상가에 개혁의 바람을 몰고 온 박흥식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신기하게도 화신상회 인수 3개월 만에 금과 은을 필두로 상품 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정계 개편에 따른 경제정책 전환으로 금본위제에서 이탈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여기에 만주사변의 여파에 따른 통화팽창이 가세해 근래 보기 드문 호경기가 찾아왔다. 금과 은을 깔고 앉은 화신상회의 자금사정은 급속히 호전됐다.

 

‘염가(廉價) 양품(良品)’ 전략

의욕적으로 출범한 백화점사업은 처음부터 강력한 경쟁상대와의 싸움으로 시작됐다.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재개장하는 8개월간의 공백기 사이에 유사한 사업을 했던 동아백화점이 바로 옆 건물에 오픈한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최신 최대 최고의 백화점을 표방하고 나선 상대는 잡화점계의 원조 격이라 할 최남이었다. 일본 유학 후 회사원과 은행원 경력을 거쳐 웅대한 포부로 소매잡화상으로 독립한 그는 전국에 점포를 늘리고 마침내 파고다공원 옆의 대잡화점 동아부인상회까지 인수해 전국 대도시에 지점망을 확충한 백전노장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마침내 미쓰코시백화점을 벤치마킹하면서 처음부터 백화점 상호를 달고 출범한 업체였다. 모든 면에서 화신상회보다 한 수 위라는 세평이었다. 어떤 전략을 선택해야 답이 될 것인가. 이런 경우 방법은 딱 하나. 전면전뿐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상대방 역시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다. 백화점 사업에 경륜도 깊었고 건물도 화신보다 더 높은 4층 규모에 연면적도 넓었다. 진열장 배치는 색달랐고 직원 수도 많았으며 매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도록 훈련도 했다. 특히 매장 점원의 절반 가까이가 여성으로 채워졌다. 박흥식은 훗날 두 업체의 사활을 건 대결을 용호상박의 전쟁이라 표현하며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상대는 우선 아리따운 여점원을 대대적으로 모집해 진열대 앞에 세워놓고 오가는 손님들을 끌기에 열을 올렸다. 제법 효과가 있는 성 싶었다. 여기에 맞서 나는 방법을 달리했다. 가장 좋은 상품을 가장 싸게 사서 가장 싸게 파는 방법이었다.”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이 정공법은 이미 서울에 올라와 처음 시작한 종이사업인 선일지물주식회사 때부터 실행한 일관된 전략이었다. 사실 그의 지금을 있게 한 최선의 방침이기도 했다. 싸고 좋은 물건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느냐, 이것이 언제나 관건이었다. 이 영업 전략을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 빼어들기로 결정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한 것이었다.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본사에는 카운터파트인 상품경리과를 신설해 그날그날의 매출을 신속 정확히 파악하도록 했다. 그러기 위해 레지스터 계산기까지 처음 도입했다.

 

고학력 인텔리 상인 최남이 이끄는 동아백화점의 일방적인 승리로 점쳐지던 여론과 달리 2개월간 지속된 출혈경쟁의 결과는 박흥식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조선의 백화점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화신상회의 1934년 신문 광고.

 

승패를 가른 요인은 두 가지로 분석됐다. 첫째, 점원 감독직원이 여점원들에 대해 성적 농락을 한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서 화신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동아백화점이 나름 기발한 착상에 힘입어 시도한 여점원 가두 홍보전략이 백화점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역효과를 낳은 것이다.

 

둘째, 화신상회가 상품권을 증정하는 사은행사를 벌인 것이 대성황을 이루면서 경쟁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상품권은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게 해 더욱 인기가 좋았다. 수시로 벌이는 경품 할인 대매출로 양측이 입은 손해는 화신이 8만 원, 동아가 7만 원이었다. 자본금의 1할은 까먹을 작정을 하고 달려든 투전(投錢), 혹은 전투(錢鬪)였다.

 

보다 공격적으로 목표에 집중하는 화신의 박흥식과 대조적으로, 동아의 최남은 출혈을 감내하면서까지 오랜 지구전을 펼 만한 성격이나 처지가 안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단독으로 자금과 회사운영을 끌고나가는 화신과 대조적으로 동아는 여러 전주(錢主), 즉 자금원의 의견에 영향을 받는 처지라는 점이 그 배경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자본전과 두뇌전의 치열한 공방 끝에 화신상회는 동아백화점을 합병해 짧은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유일의 조선인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두 사옥을 국내 최초의 육교로 연결하면서 업장 규모와 직원 수는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통합 화신상회는염가(廉價) 양품(良品)’이라는 근본방침을 재천명했다. 그리고 역동적 마케팅을 펼쳤다. 자유반품제, 무료 배달, 방문판매 등 최신 마케팅 기법이 구사됐다. 신제품 출시를 알리는 카탈로그도 고객들에게 발송했다. 1930년대 중반, 백화점의 광고비는 매출의 6%에 달했다.

 

 

반일 정서에 기대 민족의

백화점이라는 기치로 성장해온

화신상회가 백화점의 횡포에 따른

중소상인 몰락의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연쇄점을 들고

나온 것은 대단한 순발력과

치밀한 연구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도시 인구 증가로 백화점 수요 늘어

1934년 박흥식은 주식회사 화신상회의 상호를 주식회사 화신으로 바꿔 체제의 개혁을 꾀했다. 그리고 사장, 전무 밑에 구매·영업·조사 등 5과를 배치해 조직을 정비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연쇄점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체인스토어 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써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 상품 유통과정을 단순화해 생산지에서 직접 다량 구입해 중간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소매상에 공급하는 시스템이었다. 연쇄점을 통한 공동구매가 일본인 중간상인의 이윤을 배제하고 싼값으로 우량상품을 대중화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미묘한 목적이 깔려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4대 백화점들은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해 상품권을 대량 발행하고 할인 행사를 수시로 실시하는 판매전략으로 고객을 흡수했다. 이에 따른 중소상인들의 타격이 심각해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중소 소매상들이 백화점에 갖는 공포심도 대단히 커졌다.

 

백화점 규제책이 나오면서 과다한 판촉전을 자제하라는 촉구가 잇따랐다. 상품권에 대한 단속법이 만들어져 3원 미만의 상품권 발행은 금지됐고 총발행액도 제한됐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말 평양에 첫 지점을 열지만 판촉전에 대해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신은 중소상인 문제를 상품권 규제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문제의 본질은 일본인 대상업자본과 조선인 중소상업자본가와의 관계라고 규정하고 중소상인이 단합해 연쇄점을 만들어 공동구매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화신을 놓았다. 반일 정서에 기대 민족의 백화점이라는 기치로 성장해온 화신상회가 백화점의 횡포에 따른 중소상인 몰락의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연쇄점을 들고 나온 것은 대단한 순발력과 치밀한 연구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이슈를 비즈니스 기회로 판단하고 사업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현대 경영계의 화두인 공유가치 창출(CSV) 전략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업적 가치도 확보하려면 만만치 않은 도전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당시 화신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지방 소상인들의 자금력이 취약하다는 점. 화신은 여기서 혁신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지방의 소상인들로 주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했다.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배려해주면서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는 방식이었다. 연쇄점과 화신 본사, 은행 3자가 함께 남의 돈을 이용해 이득을 보는, 당시로는 절묘한 사업 회전 방식이었다.

 

박흥식의 인재 영입 전략도 돋보인다. 그는 이 사업을 위해 주식회사 화신에 연쇄점과()를 신설해 전국망의 컨트롤타워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에 외부인사를 영입했다. 책임자에는 주요한을 임명했다. 일찍이 3·1운동 직전 동인지 <창조> 창간호에 한국 최초의 자유시라 일컬어지는불놀이를 발표한 주요한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뒤 영입됐다. 또 핵심 브레인으로는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석사인 이긍종을 임명했다. 일찍이 박흥식이 보통학교를 마치고 진학을 포기한 후 고향 인근에서 처음 쌀장사에 몸을 담은 지 두 해 째이던 1918, 이긍종은 메이지대에 입학했다. 거기서 법률을 공부하고 다시 미국에서 경제학 석사를 취득하고 돌아와 경성도서관 종로분관의 관장을 지냈고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그는 특히 1934년에 열린 조선경제학회 제6회 통상(通商)보고회에서연쇄점 이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구발표를 한 연쇄점 전문가였다. 그 회의의 역대 발표자는 이여성, 백남운 등 대표적 지식인과 경제학자들이었다. 화신 연쇄점의 구상과 착수, 운영이 어떤 계기와 과정으로 이뤄졌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지금의 초등학교 격인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박흥식이 교류하고 채용하고 영입한 인물들의 면면은 최고 학력자들로 가득했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 혹은 당대의 실력자들을 초빙해 일을 맡기는 방식은 오래도록 지속된 그의 경영 스타일이었다.

 

3차에 걸쳐 전국 1000곳에 연쇄점을 설치한다는 사업계획이 1934 615일 신문 광고를 통해 대대적으로 발표됐을 때 가장 놀란 것은 4대 일본 백화점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발표에 따른 충격은 자못 커 보였다.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신문들은 이 소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방방곡곡 중소상인들의 공포심 역시 컸다. 이들에게 연쇄점은 어떤 면에서 백화점보다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백화점은 그래봐야 큰 도시에 지점 하나 정도지만 연쇄점은 군 단위, 심지어 큰 지역은 읍 단위까지 침투하는 저인망 네트워크였기 때문이다. 1000곳이라는 연쇄점 숫자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전국에 분포한 전통시장 중에서 변동성 없이 착실히 유지되는 상설시장의 개수를 파악해 도출한 수치였다. 그것은 과거 그가 지물거래상을 운영할 때부터 파악하고 활용한 전국 시장의 그물망 구조이기도 했다.

 

 

1차로 점포망 350곳을 모집하기로 하고 한 달 동안 응모를 받은 결과 4600여 건의 신청이 들어왔다. 131의 경쟁에서 전형심사 끝에 입점자를 낙점했다. 그해 11월에 이들 1차 연쇄점들이 일제히 개점했다. 3000만 원이라는 거대한 운영자금은 우여곡절 끝에 식산은행으로부터 융자받았다. 유례없이 까다로운 심사 끝에 거액의 대출을 결정한 은행 측은 화신계()라는 독립부서를 신설해 전용 창구를 만들 정도였다. 조선 산업계의 돈줄을 쥔 식산은행이 겁을 낼 만큼 큰 자금이었다. 훗날 일본 정부의 총력 지원 끝에 박흥식이 설립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자본금이 5000만 원이었던 것에 대비해보면 얼마나 큰 액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1935년 화신그룹의 연간매출액 가운데 전국 연쇄점망을 통해 판매된 상품 총액은 연간 800만 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화신백화점 서울 본점의 연간 매출은 400만 원이었다. 하루 매상 1만 원을 올리는 백화점보다 한달 평균 매상이 2000원인 연쇄점 350곳의 매출이 두 배 높은 셈이었다. 연쇄점은, 말하자면 게릴라 백화점이었다. 잡지 <삼천리>는 이렇게 썼다.

 

“조선에서 백화점을 한다 할 때 누구나 염려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제 백화점을 위태하게 생각하는 이가 없어졌다. 또 이 미국식 연쇄점 계획을 발표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불가능하리라, 실패하리라 하였다. 이제 연쇄점도 시험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조선은 지금 도시인구가 격렬히 집중되고 있는 중이다. 서울도 100만 명이 될 날이 머지않고, 대구, 부산, 평양이 모두 40, 50만을 헤아릴 날이 꿈이 아니게 되었다. 일본을 볼지라도 상공업 발전에 따라 도쿄 700만 명, 오사카 500만 명, 나고야 300만 명에 달한다. 이 세 도시 인구가 벌써 6000만 명으로 전국 인구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다. 이 추세가 지금 조선으로 옮아오고 있다. 백화점은 농촌을 상대하는 장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도시를 상대로 한다. 도시인구가 증가하는 한 백화점의 전도도 양양하다.”

 

위기와 대응

이처럼 1930년대 전반을 질주하던 박흥식에게 중반 들어 큰 위기가 찾아왔다. 1935 1 27. 구정을 8일 앞둔 일요일 대목에 손님이 운집한 화신상회에 불이나 서관은 전소되고 동관도 대거 탔다. 피해액은 자본금의 절반에 육박했다. 화신상회를 인수할 때 치른 금액보다 컸다. 걱정이 돼 묻는 기자들에게 만 32세의 박흥식은 이렇게 답했다.

 

“불행 중 다행은 인명 피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화재보험에 들어 있는 관계로 큰 손해는 없습니다. 건물은 응급 개축하면 곧 쓸 수 있을 것이므로 영업상에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점원 400여 명이 실직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는 조선화재, 일본화재, 조일화재, 요코하마화재보험 등에 약 30만 원의 보험이 있었다. 재고상품의 피해가 약 35만 원선, 집기 등속의 피해가 15만 원 정도로 추산됐다. 재산 피해는 그렇다 치고 당장 영업 재개가 문제였다. 저녁 7시 반에 발화한 불은 1시간여 만에 진화됐다. 4시간여 지나 새벽 1시에 긴급 중역회의를 소집한 박흥식은 1주일 안에 백화점 문을 다시 열겠다고 공언했다. 건물은 물론 상품이 몽땅 타버린 마당에 나온 이 발언을 임직원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복안이 있었다.

 

임시매장은 어디에 열 것인가. 동관 바로 옆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쓸 작정이었다. 그렇게 임시 운영을 하면서 불탄 건물의 보수공사를 진행할 계획이 섰다. 공사의 속도는 인부의 수에 비례할 것이므로 동원 가능한 일꾼을 죄다 불러모으면 1주일 안에 못해낼 것도 없었다. 예산은 부차적 문제였다. 하루라도 빨리 문을 여는 것이 고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길이었다. 그것은 곧 신뢰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신용, 즉 고객의 신뢰를 상실하면 끝이라는 신념은 그의 사업 초창기 때부터 지켜온 또 하나의 수칙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재난 건물 응급 복구는 1주일보다 하루 앞당겨 끝나 매장을 다시 열었다. 그는 평소 자주 쓰는 표현대로 비상상황에서지체 없이결정하고지체 없이실행에 옮겨지체 없이원상으로 돌아갔다.

 

 

<삼천리> 잡지는 당시 박흥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어떤 큰일이든지 10분을 넘기지 않고 전체를 판단해 버리므로 사무를 몹시 신속히 처리한다. 또 아무리 난해한 설명이라도 몇 마디만 들으면 능히 깨닫고 파악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업을 세밀한 숫자 위에 기초를 둔다.”

 

박흥식은 이후 화신백화점이라는 상호의 새로운 백화점을 출범시킬 계획을 하고 건물 설계를 조선 최초의 현대 건축가인 박길용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2년여 공사 끝에 화신백화점이 신축돼 제2의 도약에 나서게 됐다. 그러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격화되는 정세 속에서도 시류는 여전히 박흥식의 편이었다. 지하층에서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서구식 최첨단 시설과 물품을 설치하고 진열한 신축 화신백화점은 염복규 교수의 논문 제목처럼민족과 욕망의 랜드마크2 같은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서울에서 처음 선보이는 에스컬레이터까지 장착된 네오 르네상스풍 6층 건물의 내부시설은 일본과 유럽의 백화점에 못지않았다. 지하의 식료품매장에서부터 각층 매장의 진열대와 쇼윈도, 5층의 대식당과 6층의 그랜드홀. 영화관, 사진관, 미용실, 화랑, 운동 오락 시설, 그리고 옥상정원과 전광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설과 상품은 설비와 구성면에서 현대 백화점의 원형을 이룬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화신백화점 2층 신사복 매장의 여름 옷 세일 광고. 5월 한 달간 예약가격으로 사전 판매하며 상품금액의 5%에 해당하는 사은품을 증정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일상 속 욕망의 거부할 수 없는 최첨단을 건드리는 박흥식의 백화점은 상승가도를 질주했고, 그럴수록 박흥식의 혜안은 빛나보였다. 더구나 화신백화점은 광고에서조선의 백화점아니면조선인의 백화점이라는 타이틀을 활용함으로써민족 마케팅을 벌이는 수완을 보였다. 이미 앞서 진출해 경성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의 4대 백화점과의 벅찬 경쟁 앞에서민족보다 더 강력한 광고 카피는 아마 그 시절에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애국적으로사업을 벌이는 방법도 달리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인 독점 넘어 신문용지 사업 진출

1926년 상경해 설립한 종이회사가 지물포 수준을 훌쩍 넘어 그토록 성공한 것도 무엇보다 시류를 꿰뚫어 보고 올라탄 덕이었다. 1920년대 출현한 민간신문들에 착안해 그 많은 신문용지를 일본이 아닌 서구에서 일본보다 싼 가격에 직수입해 국내 신문사에 독점공급하기에 이른 것은 어디까지나 시세를 읽는 그만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박흥식이 만 23살에 신문용지 거래에 뛰어든 것은 서울에 처음 선일지물이라는 종이거래상점을 설립한 지 1년이 지난 1927년이었다. 이미 대담한 판매방식을 동원해 창립 한 해 동안 전국 수백 곳의 출판사와 인쇄소에 거래를 트는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지물업 중에서도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종이거래는 떠오르는 큰 사업이었다. 일본의 대표 기업들이 대거 진을 치고 관공서와 일본인 경영 회사 및 신문사에 용지를 독점 공급하며 대호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신문용지의 거래규모는 워낙 커서 웬만한 일본 지물상들도 엄두를 못내는 정도였다.

 

신문용지를 공급하는 일본 제지업체들은 국내에 공동판매기구를 두고 지정된 특약점을 통해서만 판매하는 담합을 맺고 있었다. 독과점체제였는데 박흥식 같은 개인 사업자에게 나눠 줄 신문용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도쿄로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 본사에 직수입 거래를 신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허무하게 돌아 나오던 그의 머리에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종이를 일본에서만 가져올 생각을 했지?”

 

 

순간, 북유럽에선 양질의 종이가 다량 생산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음 행선지는 그 자리에서 정해졌다. 도쿄 주재 스웨덴 대사관이 바로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웨덴 대사관의 상무관은 그의 제안을 듣고 선선히 본국의 제지회사와 연결해줬다. 때마침 스웨덴 쪽의 종이 값은 일본 종이의 절반가량으로 떨어져 있었다. 견본을 받아보니 품질은 일본산 못지않았다. 출국에서 귀국까지, 짧은 시간에 믿지 못할 일들이 거짓말처럼 착착 진행됐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스웨덴발 신문용지 두루마리들이 인천 부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스웨덴산 종이를 받겠다는 신문사들이 없었다. 좋은 조건임에도 다들 일본 거래상 연합을 의식해 거래선을 바꿀 엄두를 못내는 것이었다. 철저히 공급자 중심 시장이다 보니 수요자인 신문사가 향후 용지 공급에 불이익이라도 받게 될까 몸을 사렸다. 힘들게 한 후발 신문사를 설득해 거래를 트는 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스웨덴발 신문 용지는 계약대로 착착 도착해 인천항에 쌓여갔다. 체류 화물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일단 신문사 한 곳에서 거래가 성사되자 다른 곳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총독부 관영 신문인 매일신보까지 주문을 해왔다. 일본 종이에 지지 않은 품질인데다 훨씬 싼 가격에 공급됐기 때문이었다. 일본 본토의 신문사에서도 제안이 왔다. 이 돌파구 하나로 그는 경성의 비즈니스계에서 일약젊은 명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일본 거래상들이 반격을 시도했다. 그들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어느 날 스웨덴 거래선이 계속 공급을 할 수 없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는 이번엔 캐나다에서 공급원을 찾았다. 그때부터 오랫동안 캐나다 회사와 거래를 이어갔고 그 회사는 높은 실적에 감사한다며 박흥식에게 최신형 고급 승용차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매출과 수익은 놀라운 규모였다.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이익금을 얻어 자기자본 대비 수익률이 30%를 웃돌았다. 25만 원의 소자본에 불입자본 6만 원, 은행차입 5만 원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은 이후 두 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기까지 상승을 지속했다. 화신상회를 인수할 자금은 그 초기 두어해 사이에 형성됐다. 선일지물(鮮一紙物). 상호 그대로 조선제일이 된 그의 종이거래회사는 그렇게 화신그룹의 기원이 됐다.

 

 

 

 

화신백화점의 모기업인 선일지물과 선광인쇄의 1934년 신년 기념 신문 광고

 

미래를 읽는 눈이블루오션비결

그는 천운의 사나이로 통했다. 이는 시류를 읽는 천부적인 감각과 일에 대한 집중력이 어우러져 낳은 결과였을 것이다.

 

지물판매업이 대성공을 거두기에 앞서 상경 이전, 고향에서 인쇄소를 경영한 것부터가 이미 타고난 사업 안목의 싹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지주였던 아버지를 이어 농사일을 하는 대신 그는 고향에서 가까운 서북 제일의 무역항 진남포로 나가 미곡거래를 하는 것으로 만 13살부터의 사업인생을 시작했다. 하나밖에 없는 형이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재학 중에 한일합방 반대 시위로 경찰에 붙들려갔다 온 뒤 급사하고 6년 뒤 아버지마저 일찍 작고하자 박흥식은 생애 첫 학교 졸업 후 가장이 됐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타지로 나가는 것을 어머니가 극구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소년 박흥식이 미곡상을 벌이고 머지않아 곧 쌀이 부족해지고 쌀값이 폭등하는 시절이 도래했다. 1918년부터 1년여 사이 집중적으로 이윤을 축적한 그는 제법 큰 미곡상이 됐다. 그리고 1920년이 되자 세계대전 종전의 여파로 경제공황이 들이닥쳤다. 땅값이 급락하는 이 시기를 틈타 당시 17세의 박흥식은 농지를 사들였다. 그해 박흥식은 항구의 객주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에 자본금 5만 원을 들여 인쇄소를 차렸다. 평소 객주생활 중에 오가며 눈여겨봐둔 업종이었다. 조선의 빛이라는 뜻을 담아 선광(鮮光)이라 상호를 단 인쇄소는 4년 뒤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지물주식회사로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서울의 상인 및 주요 은행과 거래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인쇄와 종이. 이 사업은 3·1운동 이후 변화하는 정국을 맞아 급증하는 출판 인쇄 수요를 간파한 데 따른 것이었다. 세상에는 만세 부르는 사람이 있고, 만세 부르도록 종용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 그 만세가 불러온 새 국면을 직시하고 새 사업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신문, 잡지를 비롯해 각종 서적들이 갑자기 쏟아져나왔고 그에 비례해 용지의 소비량이 늘어났다. 지금껏 보던 조선식 재래 종이와는 판이한 서양식 신식 종이였다. 필사의 시대가 끝나고 인쇄의 시대가 본격 도래한 것이었다.이미 본국에서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발 빠르게 신사업에 대거 뛰어들었다. 하지만 조선인은 이런 세상이 생소하기만 했다. 다행히 일본인의 무대는 서울에 집중돼 지방의 작은 읍 단위까지 손을 뻗치지는 못했다. 박흥식이 이 틈을 타고 들어간 것이었다.

 

박흥식은 말하자면 아무도 유심히 쳐다보지 않는 사물, 상상하지 않는 변화상을 자신의 상품과 사업으로 선택해 뛰어든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일견 황량한 벌판처럼 보이지만 실은 경쟁자 없는 유리한 옥토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블루오션같은 것이었다. 그의 최초의 본격적인 사업이자 첫 회사는 이처럼 일반의 눈에는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업종으로 시작했다.

 

박흥식은 거기서 통신판매를 실시했다. 전국을 연결하는 통신판매는 미국에서는 널리 보급된 제도였지만 조선 땅은 불모지였다.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통신판매를 고안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모은 자금 25만 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지물거래업을 벌인 것이 그의 경성 비즈니스의 시작이었다. 쌀농사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쌀장사를 시작하고, 미곡을 거래하던 중 인쇄업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인쇄업을 하며 연관 분야인 지물업으로 건너가고, 곧 종이 중에서도 당시 가장 큰 사업 아이템이었던 신문용지로 옮아가고….

 

이처럼 단계별로 축적돼온 박흥식의 사업세계는 1930년대를 맞아 백화점 사업으로 변신 도약하며 급상승 기류를 탔다. 그리고 그 기세는 1940년대로 들어서서도 멈추지 않았다.

 

백화점의 상승과 연쇄점의 몰락

만주를 거쳐 중국 대륙 전역으로 확산 일로를 걷던 전쟁은 마침내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흉흉한 시국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대중에게 한번 지펴진 욕망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전시 체제하 통제경제 속에 중소 상공업자와 무역회사의 영업이 제한을 받는 것과 반비례해 대형 유통조직으로서의 백화점은 이들을 대행하는 독점적 창구 역할을 당국으로부터 부여받으며 가일층 번창했다. 예를 들어 일본 정부에서 생필품의 통제를 강화해 조선총독부에 상품 배급을 할당하면, 그 할당량을 조선총독부는 유통망의 대표격으로 백화점에 몰아주는 식이었다. 그 양이 종전의 2배반이었다. 중소업자들에게는 불평등이었고 영업부진과 폐업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백화점에는 역설적으로 전쟁이 준 선물이었다. 그것은 선택과 결정의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상품 배급의 길이 막힌 그의 연쇄점사업은 중소업자들와 더불어 몰락했다.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고갈되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이 연쇄점이었다. 경기가 점차 위축돼가면서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됐고, 전시통제 강화로 상품 배급이 중단되자 물자 품귀로 마침내 1943년에 문을 닫았다.

 

 

그런 와중에도 주력기업 화신백화점은 유지됐다. 취급 상품의 절반이 국산품이어서 일본산 수입 의존도가 연쇄점(일본 수입품 비중 80%)에 비해 크게 낮은 점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사대천왕처럼 군림하던 경성의 일본 백화점을 하나씩 추격한 후발 화신백화점은 1942년경에 이르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야 두 백화점에 거의 근접하는 영업실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해 연말 박흥식은 도쿄로 건너가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 참가했다. 일왕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그는 유일한 조선인 대표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전쟁은 격화했고 징용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박흥식에게도 무언가 징발할 것이 찾아들었다. 비행기공장 설립 운영에 대한 요구사항이 전달된 것이 그해, 1944년이었다.

 

내부의 적

“그 외에 할 말은 없습니까.”

 

1949년 반민특위의 조사 이후 특별검찰부에서 최종 심문을 마친 박흥식은 검찰관의 추가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시 역대 총독이 중추원 참의 등 공직을 권유하였으나 솔직히 말하면 항일이나 배일이 아니고 시종일관 경제계에 진출한다는 신념으로 사절했던 것입니다. 그 전시하에 총독, 군사령관, 참모장 등 요인들이 수십 차례 초대해 비행기회사를 경영할 것을 권유하면서 부득이하게 경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물리치고 거절하지 못하였던 것은 후회입니다만, 당시 형편이 부득이했다는 것은 양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2800명의 직원이 현 직장에서의 징용 형식을 밟아 해외 징용을 면하였고, 비행기는 한 대도 만들어 보낸 일이 없습니다. 또 항공 관련 기계와 물자가 조선 내에 들어오게 되었으므로 국가 민족에게 해는 없었을 줄로 압니다.”

 

금전적으로만 보면 그가 치명적 손해를 봤다고는 할 수 없다. 광복 이틀 뒤부터 열흘간 박흥식은 조선군사령관과 참모장을 만나 보상금 타협에 들어갔다. 비행기회사는 당국의 정책으로 설립한 회사인 만큼 청산자금을 달라고 했다. 패전국으로서 군수회사에 보상금을 지출한 예는 없다며 거절하는 그들을 붙들고 애원하다시피 하여 돈을 받아냈다. 해방된 경성에서 그는 8월 말에야 비로소 해방됐다.

 

그의 비행기회사는 어느새 반민족적 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쑥대밭이 돼 있었다. 기계는 조각조각 뜯겨 정처 없이 흩어졌다. 1만 대가 넘는 그 최첨단 고급 기계들은 끝내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군 전투부대 사령관을 방문해 한 달 동안 매일 세 차례씩 조르고 졸라 받아온 천문학적 금액의 기계설비였다. 귀국길에 그가 탄 평양항공대장의 전용기가 만주 상공에서 추락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비행기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완비된 공장은 신생 조국의 산업발전에 거대한 원동력이 되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있다. 그러나 동포들이 다들 그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해방은 됐으나 독립 정부는 구성하지 못한 혼돈의 시기에 새로운 생활환경이 펼쳐졌다.

 

신탁통치 찬반에서부터 좌와 우로 편 가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더니 이내 조선공산당의 노동자 조직이 발족됐다. 금속, 철도, 교통, 토건, 섬유 등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이 구성되고 그 산하에 1000개가 넘는 지부가 생겨나 노동자와 무산계급의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운동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들을 영도할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된 11월과 이에 맞서는 우익진영의대한노동총연맹(노총)’이 결성되는 다음해 3월 사이에 박흥식은 사업 구상을 제대로 해볼 여유마저 얻지 못했다. 혼돈의 시기는 생활은 물론 사업 환경도 뒤바꾸어 놓았다. 전평 소속이라는 사람들이 화신백화점 사장실로 찾아와 그의 기업과 재산을 내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들은 해방 전까지 그의 직원으로 있던 사람들이었다. 몇 개월 사이에 변신해 이렇게 들이닥친 것이었다. 고용원의 피땀을 착취한 재산이니 환수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사장실에 감금되며 압력을 받기도 했다. 백화점 1층의 쇼윈도와 외벽에는 그를 지탄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노동자의 착취자 박흥식을 처단하라” “반민족자요, 전범인 박흥식을 인민의 이름으로 단죄한다

 

사업 환경은 이중으로 나빠졌다. 경영 환경도 나쁜데 정치사회적 환경마저 악화돼갔다. 산별노조와 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두 명칭은 인민의 권력을 상징하는 완장처럼 떠오르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실직자인 인민대중의 처지는 전보다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화신에서 서무과장을 지내던 직원이 박흥식 압박을 지휘하고 있는 듯했는데 하루는 사장실로 들어와박 사장의 생명과 재산은 제가 다 맡았습니다자금을 좀 대주시오라고 한 적도 있다. 해방 이전까지 화신 계열의 종업원들은 그 어떤 기업체보다 가장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해왔기에 박흥식이 느낀 실망과 충격은 더욱 컸다.

 

 

물리적인 압박에 몸으로 버티자 그들은 다시 법망을 이용한 압력을 구사했다. 그를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상품을 매점매석해 폭리를 취했다는 혐의를 씌우기도 하고 조선비행기회사의 해산 때 받은 정리금을 착복했다는 고발도 있었다. 다들 회사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 의한 고발이었다. 해방 반 년 만인 1946 2, 그는 구속수감됐다. 그리고 여러 차례 공판 뒤, 76일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해방된 신생 조국에서 박흥식은 생애 처음 영문 모를 죄목으로 고발돼 파렴치범 취급을 받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3년 뒤 제헌국회에서 특별법으로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다시 구속되면서 민족의 죄인 신세로 법정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1938년 화신연쇄점 광고. 불황기에 안정적 수익을 안겨다줄 연쇄점 사업에 전국의 점주를 추가 모집한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다.

 

해방 이후 궁핍기의 경영

반민특위에서 피의자 심문이 끝난 뒤 박흥식은 관대한 처분을 바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관용을 받는다면 30년간 경험한 것을 신생국가 경제재건에 전부 바칠 각오올시다.”

 

100일 넘는 구속수감과 병보석 끝에 그는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백화점을 비롯한 박흥식의 기업군은 해방 이후에도 일부는 살아남아 운영을 계속했다. 새로 창업되는 회사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박흥식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내수는 빈약했고 유통은 부진했다. 무역을 주력으로 삼는 전략으로 화신무역을 독립시켜 전진 배치함으로써 겨우 명색을 유지하고, 전통의 화신백화점은 지하매장의 식품부와 원예부를 직영이 아닌 위임 경영으로 넘겨 축소 내지 긴축 경영체제로 들어갔다. 대신 옷감을 짜서 의복을 짓는 흥한피복을 창설해 처음으로 제조업에 나섰다. 해방 이후 부족했던 기성복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광복 이후 초창기 경찰제복 역시 여기서 납품됐다.

 

하지만 하향세는 대세로 굳어졌다. 홍콩 등지를 돌며 무역활동을 벌이던 화신무역의 2000 t급 화물선이 북한에 강제 나포된 일은 뼈아픈 기억의 하나다. 정부 수립 직전 717일에 수립된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이 배를 강탈해가며 내세운 명목은친일파 박흥식을 처단하기 위해 그의 재산을 압수한다였다. 빌려 쓰는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피해보상금은 막대했다.

 

돌아보면 1944년의 비행기 사업 착수는 그의 사업 세계의 절정기에 찾아온 최대의 복병이자 결정적 국면이었으며 그의 사업인생의 변곡점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 사례는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해도, 그 이후 새 자유 독립 대한에서 출현한 후배기업가들 역시 달라진 환경에서도 흔히 겪곤 하는 문제의 원형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정치권력은 멀리하면 얼어 죽기 십상이고, 가까이 하면 타 죽기 십상이라는.

 

1950년대 이후 박흥식이 거쳐간 한국의 시류는 이 점에서 여전히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박흥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지 5개월 뒤인 1950 2월 일본을 방문했다. 정부 차원에서 파견된 민간무역단의 고문 자격이었다. 1년 전에는 친일파라 몰리던 사람이 올해는 국익을 위해 일본으로 특파됐다.

 

3개월간의 체류 후 귀국한 지 16일 뒤 6·25전쟁이 발발했다.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경성의 5대 백화점 위치가 그려진 1993년 지도.

 

해방 이후 세 번 구속

‘하늘이 내린 재운이라던 박흥식의 사업운도 이제 더는 따라주지 않을 것 같은 시대 분위기가 이어졌다. 전쟁의 막바지인 1953 2월에 흥한방적을 인천에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전후 시대의 사업에 재시동을 걸었다. 온통 폐허가 된 나라는 앞으로 오랫동안 복구와 재건이 주된 과제가 될 듯했다. 의식주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점점 퇴보해가는 기이한 시대였다. 돈벌이가 될 곳은 무역과 방적 두 곳밖에 없어보였다. 화신무역은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돌며 정부 구매를 대행하는 데 전력하는 수준이었고, 화신백화점은 전쟁으로 파괴됐다. 백화점 내 상품은 전쟁 초기에 약탈당했고 건물은 뼈대만 남았다. 그것을 겨우 개보수해 처음 개점한 것이 1956년이었다. 직영할 여건이 못돼 임대운영으로 돌렸다. 유입되는 상품이 없고 받아 줄 내수도 없었다. 화신백화점이라는 살아 있는 유물 속에서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의욕적으로 설립한 흥한방적은 정치인 출신으로 영입한 사장의 자금관리 문제로 조기에 문을 닫고 말았다. 조선비행기회사 이래 해방 후 피복과 전쟁 후 방직업에 이르기까지 몇 안 되는 제조업은 죄다 단명했다. 그가 초기부터 적극적인 관심으로 치밀한 검토하에 단계적으로 일궈온 성공 사업군과 달리 이들 제조업은 경험 없는 업종을 당시의 상황 논리에 맞춰 착수하게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박흥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견문과 아이디어에 바탕한 신사업 구상을 끊임없이 꺼내놓았다. 자동차공장 건설 계획을 영국, 미국과 교섭하고, 원자력발전소 계획을 입안한 것은 비록 성사되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범상치 않은 발상이었다. 그의 발상은 기발했으나 통치권력자나 사업파트너로부터 늘 현실성이 없다거나 시기상조라는 반응만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의 의견이 잘 먹히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 자체가 그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반증이었을 수도 있다.이상하게도 해방 전의 조선총독보다도 해방 후의 군정청장관은 물론이고, 정부 수립 이후의 제1공화국, 2공화국의 최고통수권자들은 그의 의견을 잘 흡수하지 못했다.

 

4·19로 들어선 제2공화국 정부에서 그는 여러 기업인들과 함께 부정정치자금 유입설에 연루돼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소환됐다. 1960 9월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그 정권이 5·16으로 소멸한 뒤 그는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회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았다. 1961 7월이었다. 그리고 구속됐다. 해방 이후 벌써 세 번째였다. 일찍이 겪었던 반민특위에 비하면 경미한 사안이었지만 그것이 사업에 주는 위협과 공포는 언제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별히 모난 짓을 하지 않아도 정치권력과의 길항관계는 언제나 기업주의 주변에 어른댔다.

 

마르지 않는 사업구상

5·16 이후 박흥식과 이병철 등 13명의 주력 기업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경제인협회는 7년 뒤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했다. 1968, 60대 중반의 박흥식은 여전히 정력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업군은 그렇지 못했다. 7년 사이에 박흥식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정부가 제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부응하는 사업으로 응모해 1962년 설립된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는 외자 조달 부진과 전력난으로 2년 뒤 겨우 기공식을 갖고 2년 반에 걸쳐 공장을 준공했으나 불경기까지 겹치는 바람에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손을 떼면서 68년 주채권은행으로 넘어갔다. 이는 그의 사업적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고갈시킨 악재였다. 이병철과 정주영 같은 후배 기업인들이 어느새 거세게 약동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전기와 전자, 의류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기업을 운용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3공화국이 대단원을 마무리하고 난 1년 뒤, 1980 10월에 그의 계열사들은 300억여 원의 연쇄부도를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그는 꺼져가는 기업을 다시 일으켜 재창업하는 꿈으로 1980년대를 보냈다. 화신백화점 뒤 공평빌딩에 마련한 사무실에 규칙적으로 출근하며 노후를 보냈다. 평생을 일하는 낙으로만 살면서 취미도 갖지 못했던 그는 매일 오후 서너 시에 센베이 세 쪽과 인삼차를 먹는 것을 낙으로 노년을 보냈다.

 

담보로 잡힌 화신백화점 건물은 매각됐고 1986년 한보그룹을 거쳐 1987년 삼성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뒤 도심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지은 지 꼭 50년 만에 철거됐다. 박흥식은 이 시기 부채탕감에 보태기 위해 57년간 살았던 가회동 집을 팔고 이사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됐다. 화신백화점 부지는 올림픽 기간 중 임시주차장으로 이용됐다. 도심의 그 공터는 수년간 방치되다 1995년 삼성 계열사의 빌딩이 착공됐다. 조선총독부의 기억을 담은 중앙청도 그해 철거됐다. 그 한 해 전, 박흥식은 운명했다. 향년 91세였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라는 복병과 마주쳤던 그해로부터 꼭 50년이 지나 있었다. 그가 숨진 날짜는 62년 전 인수한 화신상회가 근대적 백화점으로 재단장하여 오픈하던 날짜와 같았다.

 

삼성과 현대의 창업주를 위시한 후배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며 경영권을 계승하는 데 비해 박흥식의 화신은 그와 함께 당대로 막을 내렸다. 홀로 일어나 화려하게 꽃을 피운 뒤 속절없이 사라지는 기업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하지만 190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20세기를 꽉 채운 역동적 생애 끝에 장학재단 하나만을 남겨놓고 표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박흥식은 유독 그 명암이 뚜렷했다.

 

박윤석작가·저널리스트 unomonoo@gmail.com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 신문의 역사에 관해 연구했다. 동아일보에서 20년간 기자로 일했다.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 근대 및 근대 신문에 대해, 서울시립대에서 동아시아 근현대와 한국문학에 대해 강의했다. 저서로 한국의 현대를 이루는 바탕으로서의 근대를 추적한 <경성 모던타임스> 등이 있다.

 

참고문헌

오진석,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 , 동방학지 118, 2002

염복규, <민족과 욕망의 랜드마크박흥식과 화신백화점>,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6, 2011

박흥식, <재계회고>, 한국일보사, 1981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194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천리, 동아일보 등.

 

 

동아비즈니스리뷰 289호 Boosting Creativity 2020년 1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