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Minds
Article at a Glance- 전략, 혁신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장군은 프랑스, 미국, 중국에 연이어 승리를 거둔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대단한 장군이다. 그가 구사한 전략을 두고 사람들은 ‘대전략’이라 부르기도 한다. 손자병법 등에 정통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가 놀라운 전략을 구사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뛰어난 독창성, ‘승리에 대한 믿음’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교세라를 비롯한 일본의 교토 기업들이 보여주는 힘 역시 특유의 독창성과 직원들에게 심어주는 자부심, ‘승리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경우는 70%가 넘었지만 약소국이 기존 전쟁과 다른 방식으로 싸운 경우 승률이 63%로 올라갔다. 언더독 기업들이 약소국의 승리방식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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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창조와 혁신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예술가, 문학가, 학자, 엔지니어, 운동선수 등 창작가들의 노하우는 기업 경영자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의 노하우를 소개합니다.
1953년 5월 프랑스는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을 인도차이나 지역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베트남 북쪽 국경 근처에서 점점 세력을 넓혀오고 있는 베트민(Viet Minh·베트남독립동맹·越盟)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베트남의 독립항쟁은 베트민의 주도로 점차 격화되고 있었다. 베트민은 험준한 산악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북쪽 국경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바르 장군은 베트남 북부지역을 치밀하게 조사한 후 11월에 북서부에 위치한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점거했다. 그곳에 있던 베트민 군대를 몰아내고 3개 사단 병력 1만5000명을 주둔시켰다. 디엔비엔푸는 북부 산간지역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라오스로 통하는 주요 통로이자 중국과 연결된 보급로가 만나는 길목이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보급로가 끊어진 베트민이 반드시 반격할 거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디엔비엔푸는 200m 높이의 산들이 지름 3㎞의 작은 분지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으므로 베트민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완벽한 지형조건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공수부대는 분지 주변의 산등성이에 사방으로 포병대를 빼곡히 배치해 천혜의 요새를 구축했다. 나바르 장군은 베트민 군대가 디엔비엔푸를 공격해 와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첫째, 프랑스 정보 부대는 베트민의 병력이 5만 명을 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 중 일부 부대만이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것이므로 3개 사단을 배치한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다고 봤다. 둘째, 재래식 무기에 의존하고 있는 베트민군의 화력은 프랑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약하다고 판단했다. 재래식 대포는 사정거리가 짧아 디엔비엔푸의 지휘본부를 공격할 수 없다고 봤다. 셋째, 베트민군은 험준한 산악에서 전투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충분한 보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언제라도 항공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서방 언론 역시 ‘인도차이나에서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며 프랑스의 승리를 낙관했다.
강대국들을 차례로 격파한 전략가, 보응우옌잡 장군
1954년 3월13일 오후 5시 드디어 베트민 군대가 디엔비엔푸 공격을 개시했다. 첫날부터 전쟁 양상은 프랑스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베트민군은 가공할 화력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포병기지를 집중 공격했다. 대포는 보이지도 않고 수백 발의 포탄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왔다. 프랑스군의 눈에는 마치 숲이 포탄을 토해내는 것만 같아서 어디에다 반격을 해야 할지 몰랐다. 포격이 시작된 지 한 시간 만에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베트민 보병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땅속에서 나타났다. 총격이 오갔으나 새까맣게 밀려드는 베트민군의 규모에 압도돼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포병기지는 7시간 만에 프랑스 병사들의 무덤으로 변했다. 무전으로 현지 상황을 보고받은 나바르 장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싸우던 베트민 군대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강한 군대로 변모해 있었다.
이 전투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베트남의 국민 영웅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武元甲) 장군이다. 잡 장군이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고 강대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비결은 결정적인 때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에 현대식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적에 비해 자원이 열악한 상황에서 대등한 싸움을 하려면 한 시점에 힘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잡 장군은 끝까지 신중을 기했다. 디엔비엔푸로 무기와 식량을 다 옮긴 후에도 완벽한 기회를 기다렸다. 베트민을 도와주기 위해 파견된 중공군 장교는 한국전쟁에서 유용했던 인해전술을 활용해 일시에 전투를 끝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잡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공격한다는 걸 명심해주시오. 성공이 확실한 경우에만 공격할 것이오.”
그는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우기를 기다렸다. 비가 오면 프랑스 공군의 네이팜탄이 축축해진 정글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테고 비행이 힘들어 보급이 어려워진다는 점을 노렸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단일 전투로 프랑스가 경험한 최대 규모의 패배였다. 이 전투로 잡 장군은 프랑스 식민 지배의 사슬을 끊었고 그의 이름을 세계사에 등장시켰다.
이 같은 승부사였지만 잡 장군은 군인 출신이 아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였고 신문을 발행하는 언론인이었다. 잡은 1911년 8월25일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안싸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중학생 신분으로 항불 학생운동에 가담해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하노이대에 들어가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이후 하노이에서 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해 투옥되기도 했다. 대프랑스 항쟁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직후 탄압이 심해지자 29세가 되던 1940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호찌민을 만난 잡은 우리 나라의 상해임시정부에 해당하는 베트남독립동맹인 베트민을 창립하는 데 동참했다. 호찌민은 가장 믿을 만한 동지인 잡에게 베트민 군대를 창설하도록 주문했다. 군인들은 대부분 베트남 북부지방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언어를 쓰며 베트남 독립에는 별 관심도 없이 산속에서 편안히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잡은 이들을 설득해 베트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애국심 강한 군인으로 육성했다. 이 병사들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디엔비엔푸 전투로 프랑스가 물러난 후 제네바 협상이 열렸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북베트남과 미국의 동맹인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됐다. 이후 잡 장군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한 미군과 오랜 기간 전쟁을 치렀다. 어떤 장수도 상상하지 못할 독창적인 전략을 펼쳐 1973년 미군을 베트남에서 내쫓았다. 1979년에는 캄보디아 침공을 빌미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잡은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중국에 승리했다. 잡 장군은 20세기 최고 열강인 프랑스, 미국, 중국을 차례로 격파했다. 베트남은 20세기 내내 전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발전이 덜된 약소국이었다. 부족한 물자와 취약한 군사력으로 미국 같은 초강대국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군과 싸우며 우리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세 가지를 피했어요. 우선 적들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그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잡 장군은 <손자병법>을 끼고 다녔다. <손자병법>의 총론이자 철학이 소개된 첫 편인 시계(始計) 편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공기무비(功其無備)하고 출기불의(出其不意)하라.’ 적이 준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생각지도 못했을 때 출격하라. 잡 장군은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강대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변칙과 창의적인 전략으로 승리했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잡에게 미국의 장군들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땅굴을 파고 있는가?”라며 비아냥거렸다. 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략이란 당신들은 못하고 우리만 하는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은 당신들 방법대로 싸워라. 우리는 우리 식으로 싸우겠다.”
미군은 게릴라전에서 괴롭힘을 당했지만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잡 장군은 미군의 생각을 넘어서는 대전략을 구사했다.
미국을 이긴 비결
1968년 1월31일 자정, 잡 장군은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구정에 맞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인 베트콩이 연합해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 관공서, 국가 시설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8만 명이 넘는 병사가 동원된 대규모 공세였다. 그때까지 잡 장군은 전면전을 피하는 전략을 써왔기 때문에 기습 초반에 미군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병력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85만의 남베트남 정규군과 54만 미군을 포함해 183만 명의 병사를 기습으로 모두 무찌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주일 이내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제압됐다. 3만2000명이 전사했고 5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 총사령관인 웨스트멀랜드(William Westmoreland) 장군은 구정 공세의 승리로 북베트남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보고했다. 그는 구정 공세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기습했으나 연합군의 반격으로 퇴각해 독일을 패배로 이끈 벌지 대전투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이번 기회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워싱턴에 수십만 명의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그림 1)
미군 사령부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이 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돼 갔다. 사이공(現 호찌민 시)에 있는 미 대사관 역시 구정 공세 목표였다. 1월31일 새벽 수류탄으로 담벼락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19명의 자살특공대가 침입해 대사관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해병대에서 대규모 병력이 출동해 불과 6시간 만에 게릴라들을 모두 제압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됐다. 6시간 동안 공격을 받는 사이 대사관에 있던 취재기자들이 이 짧은 전투를 목격하고 기사를 써댔다. 특종을 노렸던 기자들은 전투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첫 뉴스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그중에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는 자극적인 오보도 있었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이전까지 베트남 전쟁은 커다란 전투 없이 진행되는 지루한 전쟁이라 미국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를 계기로 베트남이 텔레비전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기자들이 베트남을 취재하면서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TV 뉴스의 간판 앵커가 베트남에 다녀와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결국 미국 내 여론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구정 공세가 끝난 지 두 달 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60%가 미군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전국적으로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1500만 명의 젊은이들의 징병이 보류됐다. 여기에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보도로 불공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베트남 전쟁에서 전장에 투입된 미군은 열 명 중 한 명꼴이었다. 대부분은 도시에서 총 한 번 쏴보지 않고 제대했다. 문제는 흑인이나 가난한 백인들이 주로 전쟁터로 내몰린다는 것이었다. 전사자 통계에서 흑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새로운 사회갈등이 생겨났다. 결국 존슨 행정부는 국민들의 압력에 전쟁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 전쟁을 확장하려는 웨스트멀랜드 장군을 해임했다. 지지도가 떨어진 존슨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정권은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점차 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1973년에는 베트남에서 발을 뺐다. 미군이 물러나자 전쟁은 손쉽게 끝났다. 1975년 4월30일 남베트남 정부의 항복으로 잡 장군은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구정 공세는 주요 도시와 관공서에 대한 타격이 목표가 아니었다. 잡 장군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을 섬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적의 싸울 의지를 없애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군 병사들의 싸울 의지를 없애기 위해 게릴라전을 고안했다. 게릴라전은 심리전으로 공격 대상과 장소가 불분명해 미군 병사들을 공포스럽게 만들어 전투 의지를 꺾었다. 더 중요한 게 장군들의 의지를 꺾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 내 정치상황에 영향을 줘 반전 분위기를 조성하기로 했다. 구정 공세를 일으킨 1968년은 미국의 대선이 있는 해였다. 곧 선거전이 시작돼 미국 사회가 정치의 계절로 들어갈 시기였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잡 장군은 구정 공세가 미디어의 관심을 이끌어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방위가 철통 같은 대사관이나 미군 기지를 골라서 공격한 것이다. 미국의 뉴스에 나오는 게 목표였다. 미군은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했지만 잡 장군은 전쟁을 더 크게 바라봤다. 웨스트멀랜드 장군은 훗날 이런 인터뷰를 남겼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소. 중대 단위로는 타격을 입은 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맞붙은 곳에서는 모두 이겼소이다. 언론이 국민들에게 우려를 심어주지만 않았어도 이긴 전쟁이었소. 정치적인 결정만 아니었다면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단 말이오.”
웨스트멀랜드 장군은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투의 합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잡 장군은 베트남 전쟁을 미국 내 정치와도 연결해 크게 바라봤다. <전쟁론>을 쓴 프로이센의 군사학자인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라는 통찰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몇몇 학자는 잡 장군의 이런 전략을 ‘대전략’이라고 불렀다.
부족한 자원과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 잡 장군은 적과 다른 방법으로 싸웠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속전속결로 끝내기도 했다. 1979년 중국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 국경을 침공했을 때 잡은 국방부 장관으로 이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이례적으로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이 전투로 3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자 중국은 신속하게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중국은 베트남과의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배하게 된 베트남을 상대로 힘의 우위를 보여주려고 했다. 잡 장군은 중국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중공군의 예상과 다르게 맹렬하게 공격했다. 중국 정부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베트남의 저력을 알고 있는 중국은 추가 피해를 막고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조속히 끝낼 수밖에 없었다.
승리에 대한 믿음이 승리의 원동력
잡 장군의 독창적인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1967년 여름 북베트남 정부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우연히 하노이 근처 홍하 델타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다. 북베트남 고고학계는 정부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벌였다.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고조되던 때로 이틀이 멀다 하고 북베트남에 폭격이 가해졌다. 그래서 주로 밤중에 조심스레 작업을 수행했다. 고고학계는 이 유물이 기원전 200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유적 발굴을 바탕으로 베트남이 청동기문화 이래 4000년 동안 독립적인 역사를 발전시켜온 유구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4000년을 이어온 민족이 고작 몇 십 년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는 베트남 병사들에게 필요한 신화였다. 베트남은 수천 년 역사에서 수없이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왔다. 그때마다 자력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쳤다. 잡 장군은 병사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하는 일이면 무엇이건 마다하지 않았다. 잡 장군에게는 수천 톤의 폭탄이나 수백만 발의 탄환보다 병사들의 믿음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폭격의 위험에도 이 작업을 강행한 것이다. 사실 승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구정 공세가 가능했다. 통신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100여 군데가 넘는 지역에서 한날한시에 동시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8만 명이 넘는 병사들에게서 정보가 새나오지도 않았다. 이길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수많은 배신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처럼 잡 장군은 전략가이기 이전에 베트남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준 리더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생 사랑받았다. 작년 10월4일 잡 장군이 102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그를 존경했던 베트남 국민들은 슬픔에 잠겨 애도했다. 하노이 시내에 있는 장군의 저택 주변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조문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
성공에 대한 믿음은 기업에도 필수적이다. 잡 장군처럼 남들이 택하지 않는 전략을 펼쳐야 하는 기업일수록 더욱 필요하다. 규모와 자원의 열세를 극복하고 거대 기업을 상대로 승리한 기업이 일본 교토지방에 몰려 있다. 교세라, 닌텐도, 일본전산, 옴론, 니치콘, 무라타 제작소, 호리바 제작소, 시마즈 제작소 등 이들을 교토 기업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경영방식 역시 독창적이다. 첫째,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한다. 교세라를 비롯한 많은 교토 기업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을 꺼린다. 교토 기업은 대기업의 계열사가 아니라 벤처기업에서 출발해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됐다. 창업 초기부터 은행 차입이나 모기업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현금흐름 회계를 기준으로 사업을 운영한다. 회계상 이익이 아니라 실제로 들어온 현금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손익계산서의 이익이 아무리 높더라도 자산을 늘리거나 대규모 감가상각을 통해서 창출한 이익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업에 대한 철학이 확고해 본업에 충실하다. 교토 기업 경영자들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다. 핵심 기술을 발전시켜 본업에 계속 집중하고 있다. 물론 여러 제품을 아우르는 기업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하나의 핵심기술에서 파생한 제품을 개발한 것이다. 교토 기업 경영자들은 교토 같은 시골이 도쿄 같은 대도시보다 본업에 집중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직원들이 회사를 소중히 여기며 한눈 팔지 않고 일에 열정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토 기업은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아 일본 시장으로 들어온 경우가 많다. 자국인 일본에서는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이름 없는 기업이라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선입견이 없는 해외 시장에서는 오랜 기간 축적한 제품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셋째, 직원들의 성공 체험을 중시한다. 교세라는 아메바 경영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운영한다. 본사, 공장 모두 20명 규모의 아메바로 나뉘어 독립채산으로 운영된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 아메바처럼 하나의 조직은 둘로 나뉜다. 아메바 단위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진다. 자연스럽게 아메바 조직의 직원들은 경영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또 작지만 책임하에 일을 하다 보면 성공 체험을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 옴론의 분권 경영 역시 아메바 경영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요컨대 교토 기업의 경영방식은 성공에 대한 직원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게 핵심이다. 보수적으로 기업을 운영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심어준 후, 본업에 충실해 한 분야에서 최고라는 자신감을 싹 틔우고, 작은 성공 체험으로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현하게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공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다.
부족함의 가치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잡 장군을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에 비견될 정도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중 한 명이라고 극찬했다. 어떤 이는 나폴레옹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나폴레옹이 비슷한 나라와 싸워 이긴 반면 잡 장군은 보잘것없는 군사력으로 세계 최강대국을 잇따라 물리쳤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잡 장군은 군사력에서 열세였으므로 창의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활용해 목적을 달성한다. 소유한 자원이 변하면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족하면 꾀를 낼 수밖에 없다. 잡 장군에게 부족함은 형벌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보스턴대의 정치학과 교수인 아레귄-토프트(Ivan Arreguin-Toft)가 1800년부터 1998년까지 비대칭적인 전쟁, 그러니까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197개를 분석했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디엔비엔푸 전투, 베트남 전쟁, 중월전쟁 모두 들어가 있다. 강대국의 승률은 71%였다. 약소국이 이긴 경우도 29%나 됐다. 그러나 약소국이 강대국과 전면전을 하지 않고 반대 전략을 택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약소국이 이길 확률이 63%로 올라간다. 강대국과 정면으로 맞섰을 때는 24%밖에 이기지 못했다. (그림 2) 상식적으로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의문이 든다. 결과가 이럴진대 자원이 부족한 나라나 거대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언더독(underdog) 기업은 잡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남과 다른 승부를 펼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를 실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레귄-토프트가 분석한 197개 전쟁에서도 약소국이 잡 장군처럼 남과 다른 전략을 사용한 것은 27번에 지나지 않았다. 이기는 방법을 왜 쓰지 않는 걸까?
창의적인 전략은 머릿속에서 한두 시간 고민해서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므로 더 힘들고, 더 불확실하다. 게다가 열세에 몰릴수록 사람들은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바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강자와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 패한다. 몰리고 힘들수록 독특한 방법을 써야 하는데 대부분 그 방법은 실행이 어렵고 힘들다. 모호함은 더 커지고 결과는 더 알 수 없다. 그래서 남과 다른 전략을 택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이다. 믿음이 독특한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어렵고 힘든 길을 의심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자 1965년 북베트남의 한 신문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쟁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놀랍게도 북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을 이길 것이라고 답했다. 그들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 전쟁은 지지 않으면 이기는 전쟁입니다. 아마 2000년까지 가면 우리가 승리하지 않겠어요?”
이런 생각이 잡 장군의 독창적인 전략을 승리로 만들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촉> <3불 전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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