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1의 성장 및 글로벌 전략

품질에 대한 확고한 철학, 끝없는 혁신… 기계산업 불모지에서 세계 1등 꿈 실현

149호 (2014년 3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절삭공구 전문업체인 와이지원은 현재 엔드밀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영세 공업사 수준이었던 창업 초창기때부터 이 회사는월드 베스트를 목표로 삼았다. 하자가 있는 물건은 아무리 헐값에라도 판매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국제 기준보다도 엄격한 자체 품질규격을 정해놓고 제품 생산에 힘써 왔다. 또한 와이지원은 사업 초창기부터 해외 생산기지 및 판매법인 구축에 주력해 왔다. 그 결과 현재 7개국에서 10개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판매 법인만전 세계 21곳에 달한다. 1981년 설립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수차례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와이지원은 초경합금 엔드밀의 확산을 주도한엑스파워’, 난삭재(難削材) 가공에도 적합한 엔드밀 ‘X5070’, 고정밀 절삭가공 트렌드에 걸맞은 고정밀 소경 엔드밀 등 성장의 고비고비마다 획기적인 신제품을 내놓으며 지속적인 성장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 결과 와이지원은 연간 수출액만 2억 달러가 넘는 중견 기업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서석윤(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 정희정(서강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1등 합시다!”

 

절삭공구의 일종인 엔드밀(금형 가공 등에 쓰이는 공구) 분야 세계 최고 기업인 와이지원(YG-1) 임직원들의 아침 인사다. 매일 오전 750분이 되면 송호근 회장부터 말단 생산직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와이지원 전 직원들은 건물 옥상에 모여 이 구호를 외친다. 세계 최고를 다짐하는 이들의 결의는 인천 본사를 비롯해 안산, 광주, 충주 등 국내 7곳에 있는 모든 사업장에서 함께 이뤄진다. 1982 1014일 창립기념식 때부터 30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의식이다.

 

창업 때 다졌던 결의는 허황된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회사는 현재 엔드밀 분야 세계 시장 점유율 1, (나사산을 만들어 주는 공구) 시장 3, 드릴(구멍을 뚫어주는 공구) 분야 6위 등(이상 와이지원 자체 추정순위) 절삭공구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재 와이지원은 미국, 중국, 인도, 터키, 독일, 캐나다, 일본 등 7개국에서 10개 공장을 가동하며 전 세계 75개국으로 제품을 수출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호주, 싱가포르, 브라질 등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판매법인만 21곳에 달한다. (그림 1)

 

2012년 와이지원은 2790억 원(연결 재무제표 기준)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74%를 수출로 벌어들였다. 연간 수출액만 약 2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글로벌 항공 업체 보잉, 일본의 대표 자동차 기업 도요타, 프랑스 고속전철 TGV로 잘 알려진 알스톰, 애플아이폰협력업체인 대만 폭스콘 등이 모두 와이지원의 고객이다. 작년 한 해에만 폭스콘에 700만 달러어치 제품을 수출했다. 기계산업 불모지나 다름없던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절삭공구 업계의 거인으로 성장한 와이지원에 대해 DBR이 집중 분석했다.

 

샐러리맨에서 창업가로 변신

송호근 회장이 엔드밀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77년 대학 졸업 후 모 대기업 절삭공구 사업팀에 취직하면서부터다. 당시 국내 절삭공구 산업은 매우 낙후돼 있었고 제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송호근 회장도 선진 기술 도입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입사 1년 후 기술제휴를 맺은 미국 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림1 와이지원 해외 생산법인 및 주요 판매법인 현황 (2013 기준) 

19개월간의 미국 생활 동안 송호근 회장은 절삭 공구 산업은 제조업 생산이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핵심 기초산업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자동차, 전기전자, IT, 조선, 기계, 항공 산업 등 대부분 제조업에 필요한 게 절삭공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송호근 회장은 절삭공구가 반드시 선진국에서만 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라는 점도 깨닫게 됐다. 절삭공구가 대표적인소모품이기 때문이다. 절삭공구는 분당 수만 번씩 회전을 해 가공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개 2∼8시간마다 새 제품으로 바꿔줘야 한다. 당연히 가격 경쟁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침 미국을 비롯해 독일, 일본 등 기계산업 선진국에선 인건비 상승에 따른 생산성 저하로 절삭공구 산업의 경쟁력이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추세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저렴한 인건비에 숙련공들의 기술력을 더해 가격 대비 양질의 제품을 내놓는다면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송호근 회장은 한국 본사로 돌아와 절삭공구, 특히 소경(小徑) 엔드밀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직경 0.8∼3.0㎜짜리 소경 엔드밀의 경우 원자재가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불과 3%밖에 되지 않아 높은 부가가치를 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경영진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고 하기보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었다. 프로젝트는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고 심지어 외국 바이어로부터 어렵게 받아 놓은 25만 달러어치 주문 역시 갖가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생산을 미루다 급기야 2년 후엔 납품하기 어렵다며 손을 들어버렸다.

 

대기업 생활에 한계를 느낀 송호근 회장은 회사에서 독립해 직접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25만 달러어치 주문을 냈던 바이어들에게 아직도 제품 구입 의사가 있는지를 묻자 여전히 필요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인플레이션 탓에 바이어도 그간 마땅한 구입처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예전 가격 그대로 제작해 주겠다고 하니 흔쾌히 송호근 회장의 손을 잡은 것. 1981 12, 송호근 회장은 양지원공구(현 와이지원) 간판을 내걸고 창업에 나섰다. 이듬해 4월엔 인천에 공장을 마련했고 6개월 뒤인 1014일 첫 완제품 생산 성공을 기념해 창립기념식을 열었다.

 

송호근 회장을 포함한 창업 멤버 16명은 비록 시작은 초라해도 언젠가 절삭공구 분야에서만은 최고가 되겠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세계 1등이 되겠다는 의지를 모아와이지원은 세계 시장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 품질 가격 납기 맞춰 세계 시장 제패하자! 규율 질서, 안전 정돈, 품질 능률. 우리들은 이 신성한 직장 와이지원 공장에서 사원의 긍지를 갖고 우리들 자신, 우리들 직장, 그리고 우리들 조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고자 엄숙하게 다짐하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성실하게 근무한다라는 결의문도 16명이 모여 함께 작성했다. 창업 멤버들의 중지를 모아 완성된 이 결의문은 이후 와이지원의 기업 강령으로 자리잡았다. 창업한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매일 아침 와이지원 전 직원들은 “1등합시다!”라는 구호 뒤에 이 기업 강령을 함께 외치며 하루를 연다.

 

사업 초창기부터 해외 시장 공략

창립기념식 이틀 뒤인 1982 1016, 송호근 회장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승부를 내려면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령 국내 시장에서 1등이 된다고 한들 국제 무대에 나설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우물 안 개구리 노릇을 하다가 큰 코를 다치지 않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큰 물에 뛰어드는 게 낫다고 봤다.

 

 

Mini Box 1: 최고의 품질이 아니면 내놓지 않는다

 

1982년 송호근 회장이 43일간의 마라톤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양지원공구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터져 있었다. 선적을 끝내고 통관 검사까지 마친 소경 엔드밀 제품에서 사소한 결함이 발견된 것. 송호근 회장은일단 납품을 하고 나중에 가격을 조정하는 선에서 적당히 합의할 수 있는 사소한 결함이었지만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처음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심 끝에 23000달러어치 초도 물량 전부를 회수했다고 말했다. 제품 생산을 위해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며 공장에서 살다시피 한 지난 6개월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송호근 회장은정말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다다행히 부친께서 당신의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주신 덕택에 다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바이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문제의 제품을 정품 가격 대비 60%에 사주겠다고 했다. 양지원공구 브랜드가 찍혀 있는 것도 아닌 무상표 제품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돈을 받고 팔아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 흔쾌히 응했다. 이게 문제가 됐다. 그해 말 외국에서 만난 또 다른 바이어가 가격 협상을 하면서양지원공구보다 훨씬 싸고 질도 좋은 한국산 물건이 있다며 제품을 보여줬는데 바로 몇 달 전 헐값에 팔아 치운 불량품이었던 것. 이 사건 이후로 양지원공구에선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는 물건은 절대 팔지 않고 반드시 폐기처분한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현재 와이지원은 독일공업규격(DIN), 일본공업규격(JIS), 미국공업규격(ANSI) 등 국제 품질수준보다 훨씬 엄격한 자체 검사 기준을 통해 높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ANSI의 엔드밀 허용 오차 수준이 0.0015인치(0.0381)라면 와이지원의 경우 이보다 더 작은 허용 오차(0.0254)를 정해놓고 품질 관리를 한다는 것. 똑같은 물건을 두 번 만들 바에는 조금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30년도 전에 뼈저리게 얻은 덕택이다. 송호근 회장은결과적으로 사업 초창기 두 번의 쓰라린 경험이 최고의 품질을 지향하는 와이지원의 철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완벽한 품질을 추구하는 건 물론이고 당장의 금전적 이익에 눈이 멀어 하자가 있는 물건을 팔아 와이지원의 명성을 훼손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는 데 전 직원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출장은 경비만 따져보더라도 웬만한 중소기업이 감당하기엔 매우 버거웠다. 설립한 지 1년도 안 된 양지원공구가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신규 바이어를 발굴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가지고 있는 제품이라곤 달랑 소경 엔드밀 한 품목밖에 없는 상황에선 많은 주문을 받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게 뻔했다. 송호근 회장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미국 출장길에 양지원공구의 제품뿐 아니라 3%의 수수료 수입을 약속받고 국내 관련 공구업체 10여 곳의 제품 샘플도 함께 챙겨 떠나기로 한 것. 경쟁사의 주문을 받아다 주는 대신 커미션으로 출장비를 충당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떠난 미국 출장길에서 송호근 회장은 꼬박 43일간 23개 도시를 누비며 고객 발굴에 나섰다. 가진 것이라곤 미국 거래처로부터 입수한 5000개의 공구상 리스트와 45㎏에 달하는 절삭공구 샘플 가방이 전부였다. 송호근 회장은공구상 리스트에 명시돼 있는 업체에 일일이 편지를 보낸 것은 물론이고 미국 현지 전화번호부에 기재돼 있는 공구상이란 공구상에는 모조리 전화를 걸어 상담을 청했다차를 타고 길을 가다가도공구(Tools)’ 간판만 걸려 있으면 무조건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한 거래처를 방문하면 그들의 사무실에 비치된 경쟁사 카탈로그를 몰래 훔쳐보고 새 업체와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뉴욕, LA, 시카고 등 당시 미국에 나가 있던 15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관을 찾아가 주인 없이 쌓여져 있는 의뢰 상담 사례도 전부 뒤졌다고 밝혔다. (‘최고의 품질이 아니면 내놓지 않는다참조.)

 

 

와이지원은 1980년대부터 유럽, 북미, 일본 등 기계산업 선진국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회에 참가해 왔다. 요즘에도 1년에 50여 개의 해외 전시회에 단독 부스를 마련하고 제품을 소개한다. 사진은 2013년 독일 하노버에서 개최한 ‘EMO 2013’에 참가한 와이지원 부스 모습.

 

 

2005년 신축한 와이지원 송도중앙기술연구소 전경.

 

이후에도 양지원공구는 1985년 시카고 지사를 설립하는 등 미국 시장 공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뉴욕에 있는 공구 바이어들은 송호근 회장에게한국계 유태인(Korean Jewish)’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다. 뉴욕의 공구 바이어들은 주로 유태인들이 많았는데 송호근 회장이 바이어들끼리 누가 누구랑 친하고 앙숙인지까지 파악할 정도로 유태인 공구상 계보를 줄줄이 꿰고 영업을 한 통에 얻은 별명이었다.

 

글로벌 시장 공략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 시장 진출을 마음먹은 1987년엔 21일 동안 12개국을 돌아다녔다. 그때 자동차로 운전한 거리만도 총 12000㎞에 달한다고. 아침은 프랑스에서 맞이하고 점심은 스위스에서 보내고 저녁은 독일에서 마무리하는 식의 강행군이었다. 송호근 회장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1년에 절반 이상은 해외 출장을 다녔다한 번 나가면 2∼3주는 기본이고 한 도시에 하루 이상 머무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고 말했다. 이어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1년 중 4개월 정도는 해외에 나가 있다지금까지 누적된 항공 마일리지가 500만 마일 정도 된다고 밝혔다.

 

 

경매시장 누비며 기계 설비 매입

송호근 회장이 미국, 유럽 등 선진 시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닌 이유는 비단 고객선 발굴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엔드밀 등 절삭공구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공작기계를 최대한 싸게 구입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1980년대만 해도 대부분 국내 공구업체들은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컴퓨터 수치 제어) 장비가 아닌 수동 공작기계로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국제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CNC 공작기계는 필수였다. 아무리 우리나라 기능공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장비 차이에서 발생하는 품질 및 생산성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CNC 공작기계는 대당 최소 수십만 달러는 소요되는 고가의 장비다. 양지원공구 같은 신생 중소기업이 제 값을 다 주고 새 장비를 구입하다가는 초기 투자비도 문제지만 엄청난 감가상각비 부담 때문에 경쟁사 대비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CNC 장비 구입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송호근 회장은 고급 장비를 구매할 방법을 고민하다 중고 기계를 싸게 살 수 있는 경매 시장에 주목했다. 부도가 나서 갑자기 급매물로 기계 설비를 내놓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미국이든 유럽이든 장소를 막론하고 달려갔다. 이때 와이지원의 엔드밀을 구입한 현지 바이어들을 적극 활용했다. 송호근 회장은경매 시장에 나온 물건 중 좋은 기계를 골라 낙찰을 받으려면 언어 장벽도 없고 장비업계도 잘 아는 현지 전문가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았다낙찰가의 10% 정도 수수료 수입을 챙겨줄 테니 양지원공구를 대신해 입찰에 참여해 장비를 사 달라고 바이어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바이어들이야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양지원공구는 정밀도가 우수한 CNC 장비를 저렴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었다. 송호근 회장은대당 50만 달러가 넘는 고가 장비를 20%도 안 되는 싼 값에 낙찰받은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Mini Box 2: 고객 불만도 고객 만족으로 바꾸는 기회로 전환

 

1991년 대만의 바이어가 양지원공구의 제품에 문제가 있다고 항의를 해 왔다. 90%는 품질이 우수한데 10%는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송호근 회장은 원인을 규명하고자 기술팀 직원들과 해외영업 본부 직원들을 데리고 즉시 대만으로 향했다.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엔드밀의 날에 버(burr, 엔드밀 절삭 가공 후 접합면에 생기는 쇠 찌꺼기)가 남아 있는 걸 문제 삼은 것이었다. 가공 작업의 정석대로 절삭유를 적절히 쏘아 주면서 작업을 하면 자연스럽게 벗겨졌을 테지만 생산성을 높이겠다고 절삭유 없이 무리하게 작업을 하다 불거진 문제였다.

 

문제점을 파악했지만 송호근 회장은 엔드밀 사용회사의 작업 방식을 탓하지 않고 바이어를 통해 새로 5000개의 샘플을 무료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한발 더 나아가 송호근 회장과 대만으로 파견 나간 직원들은 바이어의 재고 창고에서 23일 동안 칫솔을 들고 제품을 일일이 닦아가며 버를 제거해 줬다. 송호근 회장이 한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직원들은 꼬박 일주일 동안 이 작업에 매달렸다. 송호근 회장은이후 양지원공구를 대하는 바이어의 시선이 달라졌다불과 몇 십만 달러씩 하던 주문량이 이듬 해 100만 달러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양지원공구는 사업 초창기부터 기계산업과 관련된 전시회란 전시회는 모두 참가했다. 1983년 미국서부기계 및 공구박람회(WESTEC)에 첫 제품 출품을 시작으로 하노버 유럽국제공작기계전시회(EMO), 시카고 국제공작기계박람회(IMTS), 도쿄 국제공작기계전시회(JIMTOF), 프랑크푸르트 유럽금형전시회(Euromold) 등 굵직굵직한 전시회에 빠짐없이 참가했을 정도다. 사업 초창기인 1980년대에만 해도 1년에 많게는 10여 개의 국제 전시회에 참가했다. 절삭공구 산업 자체가 전형적인 B2B 산업인 만큼 전문 박람회에 참가해 부스를 마련하고 바이어 발굴에 나서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송호근 회장은 심지어 물건을 구입하러 전시회에 참가한 일반 바이어뿐 아니라 물건을 팔러 전시회에 부스를 마련한 경쟁 절삭공구 업체로부터도 주문 계약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일본 회사로부터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납품을 받고 있는 독일 공구회사 부스에 찾아가일본 업체보다 싼 가격에 제품을 공급해 줄 테니 양지원공구와 계약을 맺자는 식으로 영업을 했다. 이렇게 양지원공구는 바이어 발굴은 물론 영업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 제품 개발 아이디어를 얻는 창구로 전시회를 적극 활용했다.

 

 

초경합금 엔드밀엑스 파워로 외환위기 극복

양지원공구의 글로벌 행보는 끝없이 이어졌다. 1985년 미국 시카고에 현지 사무소 설립을 시작으로 1992년엔 미국 아칸소 주에 엔드밀 생산공장을 인수, 현지 법인을 차렸다. 이어 1996년엔 영국 정부로부터 무상 보조금 500만 달러를 지원받아 북아일랜드에 생산 공장과 함께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1990년까지 100억 원대에도 못 미치던 매출액은 1996 296억 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양지원공구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1997년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였다. 당장 원자재를 구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예전엔 외상으로 들여오던 원자재를 미리 돈을 보내줘야 구입할 수 있게 됐지만 은행 상황이 악화돼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 같은 위기에도 양지원공구는 1997 316억 원, 1998 441억 원, 1999 497, 2000 614억 원(이상 개별 재무제표 기준) 등 해마다 눈에 띄는 매출액 신장을 기록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 위기에 내몰린 상황에서 양지원공구가 이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초경합금(cemented carbide)을 원재료로 만든 고속 절삭용 엔드밀 신제품엑스파워(X-Power)’의 공이 컸다.

 

엔드밀은 다양한 공작기계에 부착해 금속을 깎고 매끈하게 다듬을 때 사용하는 공구다. 절삭 작업의 생산성은 공작기계의 회전 속도에 크게 좌우된다. 분당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작업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회전 속도가 높아질수록 공구 손상과 마모가 심해지고 작업 과정에서 엄청난 열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절삭공구가 안정적으로 절삭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외부 충격에도 쉽게 쪼개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높은인성(toughness)’을 가져야 하고 고온에서도 안정적으로경도(hardness)’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부분 업체들은 고속 절삭용 엔드밀의 재료로 고속도강(high speed steel)을 사용했다. 절삭 과정에서 온도가 약 300도 이상 올라가면 경도가 떨어지는 탄소강(carbon steel)과 달리 고속도강은 절삭 온도가 약 600도까지 올라가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속도강은 인성도 강해서 고속 절삭 가공에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물론 고속도강보다 훨씬 경도가 높은 초경합금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구 업체들은 이를 엔드밀 재료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려 1200도의 고열에서도 안정적인 경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초경합금의 최대 장점이지만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고 인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성이 약하면 절삭 작업 시 공작기계의 회전이 조금만 불안정해도 날이 금방 부서져버린다. 아무리 좋은 명검도 훌륭한 장수를 만나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초경합금이 최대 성능을 내기 위해선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공작 기계의 정밀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당시 공작기계의 성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절삭공구 제조업체 대부분은 고속 절삭을 위해선 고속도강을 쓰는 게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 칭다오에 있는 와이지원 중국법인(QNCT· Qingdao New Century Tool) 공장 전경.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공작 기계 산업이 발전하면서 장비의 정밀도가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 기계 성능이 높아지면서 단순 절삭뿐 아니라 정밀 절삭까지 가능해 진 것. 송호근 회장은 이 같은 공작 기계 산업의 트렌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절삭공구에서도 고속도강이 아닌 초경합금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초경합금의 경우 무려 1200도의 고온에서도 안정된 경도를 유지할 수 있어 고속도강을 이용할 때보다 분당 회전 수를 2∼3배 높이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트렌드를 읽어낸 건 일본과 스위스 경쟁업체 두세 곳뿐이었다. 하지만 이들 업체는 초경합금으로 만든 엔드밀을 일반 고속도강 엔드밀 대비 3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팔고 있었다. 아무리 성능이 좋더라도 그래 봤자소모품인데 기존 제품보다 3배 이상 비싼 돈을 지불하려는 바이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에 따라 송호근 회장은 일본과 스위스 경쟁업체의 제품을 벤치마킹한 제품을 만들되 가격은 경쟁사의 절반 수준으로 내놓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일본, 스위스 업체의 초경합금 제품에 비하면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이지만 웬만한 고속도강 엔드밀 제품과 비교하면 최소 30% 이상 높은 가격대였다. 심지어 양지원공구의 기존 고속도강 엔드밀 제품과 비교하면 무려 5배나 높은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이런 저가 전략이 결과적으로 회사에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1998년 양지원공구가 첫선을 보인 엑스파워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초경합금이라는 차별적 소재에 더해 열에 대한 내구성을 한층 높여주는 TiAlN 코팅 기술까지 적용해 절삭유(coolant, 절삭 가공 작업 중 열을 식히기 위해 사용하는 윤활유) 없이도 사용 가능한 획기적 제품을 경쟁사 대비 훨씬 낮은 가격에 내놓은 덕택이었다. OEM 납품도 아니고 와이지원 자체 상표가 붙어 있는 ‘Made in Korea’ 제품이었는데도 주문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1999년 매출액 497억 원 중 12%가 엑스파워 판매만으로 거둔 성과였다.

 

엑스파워는 전 세계 시장에 양지원공구 브랜드를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양지원공구는 1999년 회사명을 와이지원(YG-1)으로 변경하고 OEM 주력에서 탈피해 자체 브랜드를 키워 나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끝없는 제품 혁신 통해 성장 지속

획기적 신제품인 엑스파워 이후로도 와이지원은 시장의 니즈에 맞는 신제품을 잇따라 적시에 내놓으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대표적인 예가 2001년 특허기술을 적용해 만든 컨스탄트 볼엔드밀, 2003년 출시한 고속·고경도강용 ‘X5070’ 엔드밀, 2006년 내놓은 직경 0.1㎜ 크기의 고정밀 소경 엔드밀 등이다.

 

엔드밀은 용도에 따라 여러 형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날카로운 날이 소라 껍데기처럼 빙빙 비틀려 돌아가는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가운데 볼엔드밀(ball endmill)은 날끝 부분이 공처럼 둥글게 돼 있는 제품이다. 날끝이 평평해 2차원 범용 가공에 주로 쓰이는 스퀘어엔드밀(square endmill)과 달리 볼엔드밀은 금형 가공 등 3차원 가공이나 모서리를 다듬을 때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볼엔드밀은 3차원 가공 작업의 특성상 스퀘어엔드밀에 비해 날의 마모가 심하고 작업 속도를 빠르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늘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다. 와이지원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구면상(球面上)에 배치돼 있는 칼날의 헬리스각(helix angle, 비틀림각)을 어느 위치에서나 일정하게 만드는 기술(구형절삭공구 기술)을 적용해 제품의 내구성은 물론 가공 속도까지 대폭 높이는 데 성공한 것. 컨스탄트 볼엔드밀로 불리는 이 제품은 난도가 높은 3차원 가공 작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 덕택에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구형절삭공구 기술은 2001년 국내 특허를 취득한 것은 물론 미국, 싱가포르, 중국, 유럽, 캐나다, 일본 등 10개국에서도 특허를 획득했을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2003년엔 티타늄, 인코넬 등 피삭재(被削材)의 특성이 점점 난삭(難削)화 돼가는 트렌드에 따라 그에 맞는 제품인 고속·고경도강용 엔드밀 제품 X5070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와이지원의 대표 히트작인 엑스파워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엑스파워의 원재료에는 입자 크기가 0.5(마이크로미터) 수준인초미립자초경합금을 사용했다면 X5070 0.2㎛ 수준의나노초경합금 소재를 적용했다. 입자 크기가 훨씬 작아져 엑스파워와 같은 수준의 인성을 유지하면서도 경도는 한층 높여 난삭재 가공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한 게 특징이다. 형상적 측면에서도 칼날의 곡률반경을 최소화해 날이 잘 깨지지 않도록 했고 TiAlN 코팅 기술까지 적용, 생산성 제고는 물론 환경오염 최소화 효과까지 볼 수 있어 고객사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2006년엔 날 부위 지름이 불과 0.1㎜밖에 안 되는 고정밀 소경 엔드밀도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공 장비가 고속화하고 고정밀 가공이 증가함에 따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고정밀 소경 엔드밀 자체 개발에 나선 결과 이룬 성과였다. 품질은 글로벌 경쟁사에 뒤지지 않는데도 가격은 30% 정도 낮춰 해외 바이어들은 물론 전자 및 전기 소형 부품, 기판 및 소형 금형 분야에서 국내 업체들의 수입 대체 수요를 대거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이렇게 각 시기별로 신제품을 적시에 내놓으면서 와이지원은 매출액 정체를 겪을 때마다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2002년엔 9·11 사태 여파로 전년 대비 매출액이 약 10% 줄었지만(2001년 매출액 744억 원→2002 673억 원), X5070 등 신제품에 힘입어 2003년 곧바로 상승세로 돌아섰고(2003년 매출액 861억 원), 전년 대비 매출액이 약 2% 감소한 2006(2005년 매출액 1077억 원→2006 1055억 원)엔 고정밀 소경 엔드밀 등 신제품 출시를 통해 와이지원의 기술력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한 단계 높아지면서 곧바로 견고한 성장세(2007년 매출액 1283억 원)를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그림 3)

 

와이지원이 이렇게 소비자 니즈 및 수입 대체 수요가 큰 제품을 적시에 내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꾸준한 기술 개발 노력 및 연구개발(R&D) 투자 덕분이다. 와이지원은 외환위기 시절인 1999년에 공구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전담 연구원들이 기술 개발에 매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엑스파워, 컨스탄트 볼엔드밀, X5070, 고정밀 소경 엔드밀 등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와이지원은품질경쟁력 최우수 50대 기업(1999년 국립기술원)’ ‘정밀기술 1등급 업체(1999년 산업기술시험원)’ ‘기술 경쟁력 최우수 기업(2000년 중소기업청)’ ‘품질경쟁력 우수기업(2001년 산업자원부)’ 등 여러 기관으로부터 일찌감치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와이지원 공구연구소는 2005년 송도중앙기술연구소로 확대 개편됐다. 1999 15명으로 출발했던 연구소 인력은 2013년 말 기준 82명으로 늘어났다.

 

 

 

송호근 회장은현재 송도중앙기술연구소에선 1000배율의 현미경으로 절삭 날을 점검하고 0.005㎜ 오차까지 잡아낸다최첨단 장비로 하루 24시간 제품 테스트를 하며 신제품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생산·판매·물류 네트워크 구축

2000년대 들어 와이지원의 글로벌 경영은 더욱 강화돼 왔다. 2000년 독일 판매법인 설립을 시작으로 2001년엔 싱가포르와 호주 판매법인, 2005년 프랑스와 폴란드 판매법인을 세웠다. 중국과 인도의 경우 각각 2001년과 2002년에 현지 공장을 세웠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 시장에서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적자 상태에 빠졌거나 경쟁력이 떨어진 기업을 주 타깃으로 삼아 M&A에도 적극 나섰다. 2002년 프랑스 공구업체 코라이를 인수했고 2006년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기업인 리걸 벨로이트의 절삭공구 사업 부문과 영국 절삭공구 제조 판매사인 하이드라 클락슨을 사들였다. 이어 2008년엔 캐나다 절삭공구 업체인 미니컷을, 2012년엔 일본 절삭공구 업체인 산쿄(三協)공구를 각각 인수했다. 특히 미니컷은 1980년대에만 해도 와이지원이 OEM 방식으로 제품을 납품했던 고객사였고, 산쿄의 경우 선진 절삭공구 기술을 배우기 위해 와이지원 직원들을 연수생으로 파견했던 업체였다. 하지만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완전히 입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와이지원이 전 세계 각지에 판매 법인과 생산 공장을 세우고 기업 인수에도 적극 나선 이유는 각국 시장에서 요구하는 제품을 적기에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3) 절삭공구는 와이지원이 생산하는 품목 수만 따져도 8만여 가지에 달할 정도로 전형적인다품종 소량 생산품목이다. 따라서 전 세계 각지에 생산 및 유통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게 송호근 회장의 생각이었다. 송호근 회장은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와이지원 회사들은 국제적인 분업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인수 회사(코라이)의 기계 설비는 모두 중국 생산기지인 칭다오 공장으로 넘겼다. 대신 프랑스 회사는 판매 법인(와이지원 유럽) 겸 물류센터 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해 인도, 터키 등 저렴한 인건비가 강점인 아시아 생산 공장에선 범용 기술이 요구되는 초반 공정을 맡고 이를 미국 등 선진국에 반제품 형태로 수출해 완제품을 만든다. 그 결과 경쟁사 대비 20∼30% 이상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실제 이런 방식을 통해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 공구회사 리걸 벨로이트를 인수한 후 6개월 만에 흑자 기업으로 전환시켰다.

 

‘토털 툴링회사로 제2의 도약 추구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와이지원 역시 2009년엔 매출액이 줄고 영업이익 및 순이익 모두 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송호근 회장은 이와 관련, “유럽 쪽 수출이 급감한 것도 실적 저하의 원인이긴 하지만 인력 및 설비 투자를 강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송도중앙기술연구소의 경우 2008 20명이었던 연구 인력을 2009 50명으로 한 해 동안 무려 2.5배나 늘렸다. 절삭공구 품질 향상 및 신제품 개발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자체 개발 제품의 성능 테스트를 비롯해 공구 제작 기술 부문의 R&D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세계 공작기계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 내수시장 공략을 위해 중국 제2공장에 대한 설비 증설을 결정하고 2008 125억 원, 2009 120억 원 등 2년간 총 200억 원이 넘는 투자를 단행했다. 불황기에 투자해야 호황기에 빛을 볼 수 있다는 투자 철학을 실천한 것이다.

 

이런 뚝심 있는 투자 결과 와이지원은 2010년 매출액과 영업이익 모두 예년 수준을 회복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핵심 원재료 및 소재도 부분적이나마 자체 생산에 성공했고 고가의 CNC 장비 국산화에도 성공, 원가 절감 효과를 누리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심지어 2012년엔 이스라엘 절삭공구업체인 이스카(워런 버핏이 최고경영자(CEO)로 있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가 대주주인 절삭 공구 전문회사 IMC그룹의 자회사)로부터 21% 할증된 가격에 지분 투자(지분 10%, 투자액 312억 원)까지 받아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체 제품의 80∼90% OEM 제품이었지만 현재 와이지원의 제품은 자체 브랜드 제품이 전체 매출액의 과반수를 넘고 있다. 브랜드뿐 아니라 제품군 측면에서도 변화가 컸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엔드밀 단일 품목이 전체 매출액의 80∼90%를 차지했지만 이후 드릴과 탭 등으로도 제품군을 점점 확장해 왔다. (그림 4) 2013년 기준으로 전체 매출액에서 엔드밀이 차지하는 비중은 48.7%며 드릴과 탭이 각각 20.8%, 18.9%를 차지한다. (그림 5) 와이지원은 향후 탭 비중을 점점 늘려나갈 방침이다. 탭은 자동차 엔진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수요가 다양하다. 아이폰 제조사인 폭스콘에만 1㎜ 전후의 탭 제품을 한 달에 9만 개씩 납품할 정도라고. 엔드밀이나 드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정밀성이 요구돼 마진이 비교적 높은 것도 탭 사업을 확대하려는 이유다.

 

와이지원은 향후 스탠더드 제품(국가별 공업 규격에 따라 제품 사양이 정해져 있는 제품) 외에 스페셜 제품(정해진 규격이 아니라 고객사별로 요구하는 사양에 맞춰 주문 제작된 제품) 시장으로도 확대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현재 송도중앙기술연구소에 있는 기술센터 외에 오는 6월 미국에도 기술센터를 신설할 예정이다. 클라이언트의 주문이 들어왔을 때 단기간 내 샘플을 제작해 주기 위해서는 제품 성능 점검을 24시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셜 제품의 경우 지금껏 주력해 왔던 솔리드 타입 절삭공구 외에 인서트 타입 제품도 자체 생산한다는 목표다. (그림 6) 솔리드 타입 공구는 공작 기계에 부착되는 자루(shank) 부분부터 피삭재와 맞닿는 날 부위까지 초경 재질을 이용해 만들지만 인서트 타입의 경우 자루 부분에는 값싼 탄소강을 사용하고 날 부위만 초경으로 만들어 자루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제작된다. 대개 정밀 절삭 작업에는 자루부터 날까지 통으로 초경을 사용하는 솔리드 타입이, 대충 많이 절삭하는 황삭(荒削)이나 강도가 높은 난삭재 중삭(中削) 가공에는 인서트 타입이 주로 쓰인다. 인서트 타입 시장으로의 본격적 진출을 위해 와이지원은 충주공장에 대한 시설 투자(2011 350억 원, 2012 244억 원)에 힘쓰고 있다. 송호근 회장은인서트 타입의 경우 생산을 위해선 초기 시설 투자가 많이 들어가지만 원재료비나 가공비를 따져 보면 솔리드 타입보다 부가가치가 훨씬 높다제품군 확대는 물론 절삭공구의 원료 및 소재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명실공히토털 툴링(total tooling)’ 회사로 거듭난다는 목표라고 말했다.

 

이방실 기업가정신센터장 smile@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