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Minds
편집자주
창조와 혁신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예술가, 문학가, 학자, 엔지니어, 운동선수 등 창작가들의 노하우는 기업 경영자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의 노하우를 소개합니다.
1910년 6월1일 수많은 고위관리들과 영국 시민들이 런던의 템스강에 모여 남극으로 떠나는 테라노바호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런던을 떠난 후 보름 동안 해군 범선이 테라노바호를 예인해 영국 해안을 돌았다. 포틀랜드 부두에서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 전함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테라노바호가 가로질러 나갈 길을 만들었고 갑판 위에 도열한 군인들이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영국인들은 이번 탐험을 이끌고 있는 해군 대령 스콧(Robert Falcon Scott)이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할 것을 확신했다.
20세기 초는 각국이 극지방 탐험 경쟁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던 때였고 강대국 영국이 다른 나라를 월등히 앞서나가던 시점이었다. 영국은 이미 지난 10년 동안 두 번에 걸쳐 남극에 탐험대를 출항시켰다. 1901년에는 스콧이 이끄는 디스커버리호를 통해 무려 2년 동안 남극에 머물면서 지형을 탐사했으며 1907년에는 스콧 밑에 있던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 님로드호를 타고 남위 88도 23분, 즉 남극에서 불과 180㎞ 떨어진 곳까지 정복하고 돌아왔다. 두 번의 탐사를 통해 남극 지방의 지형이나 지질에 대한 자료가 충분히 쌓였고 남극점으로 가는 안전한 루트를 개척했다. 이로 인해 남극 탐험은 영국인들 간의 경쟁이 됐다. 또 영국은 왕립지리협회를 통해 남극 탐험에 폭넓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탐험가가 정부와 후원자를 찾아 다니며 부족한 자금을 조달했지만 영국은 왕립지리협회에서 모든 준비를 해놓고 탐험가를 모집했다. 여기에 이미 남극 탐험 경험도 있고 여행기를 출판해 유명해진 스콧이 뽑힌 것이다. 영국은 거금을 들여 모터썰매를 개발한 후 노르웨이의 산악지대에서 실험을 했다. 남극 지방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 생물학자, 지질학자, 기상학자 등 12명의 과학자들도 탐사에 동행했다. 이처럼 준비를 철저히 했으니 영국인들은 이번 탐사의 성공을 굳게 믿었다. 국민적 여망을 담고 스콧과 60여 명의 대원들은 모터썰매 3대, 조랑말 19마리, 시베리아산 개 33마리를 태우고 남극으로 향했다.
스콧이 영국을 돌며 선상 퍼레이드를 하던 6월7일 밤, 노르웨이의 아문센(Roald Amundsen)도 남극을 향해 프람호의 닻을 올렸다. 그는 스콧과 달리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조용히 출항했다. 그 이유는 북극 지방을 탐사한다고 후원자들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문센도 처음에는 북극 항로를 개척하면서 북극점을 정복하려 했으나 1909년 가을 미국인 피어리가 북극을 정복했다는 소식에 목적지를 갑작스럽게 바꾼 것이다. 이 사실을 친형과 일등항해사에게만 알리고 남극 탐험을 혼자서 준비했다. 출항 후 한참 지난 후에야 노르웨이 국왕과 언론,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목적지 변경을 알렸다. 심지어 대원들도 오랫동안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콧이 남극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자료, 풍족한 자원과 최신식 장비를 등에 업고 탐사에 나섰던 데 반해 아문센은 그린란드산 개 100마리와 약간의 식량만 준비했다. 부족한 식량은 현지에서 사냥을 통해 해결할 셈이었다. 스콧은 매우 과학적이었으나 남극에 대한 지식이 적었던 아문센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남극 탐험이라는 고도의 불확실한 모험에서 어떻게 아문센이 막강한 스콧을 이길 수 있었을까?
남극은 스콧의 생각과 달랐다
합리적인 스콧은 왕립지리협회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매우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아문센이 오로지 개썰매 하나에만 의지한 데 반해 스콧은 다양한 이동 수단을 준비했다. 우선 이번 탐사를 위해 체인을 단 모터썰매를 개발했다. 무겁고 속도가 느린 게 단점이지만 대원들의 체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추위에 잘 견디는 몽고산 조랑말은 빠르면서도 힘이 세서 짐을 옮기는 데 효과적이었다. 다만 개에 비해 산세가 험준한 곳에서 이동이 힘들고 극지방까지 갈 정도로 추위에 강하지 않다는 게 약점이었다. 조랑말은 셰클턴이 지휘한 두 번째 탐험에서 시험 삼아 써봤는데 짐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랑말을 대폭 늘려 중간 지점까지 활용할 계획이었다. 여기에다 전통적으로 극지방에서 활용하는 개썰매 팀과 스키 장비를 장착하고 직접 썰매를 끌고 가는 팀을 구성했다. 네 가지 이동 수단은 각기 속도가 달라 체계적인 이동 전략을 세워야 했다. 팀을 나눠 스키를 타는 조가 먼저 출발하면 속도가 느린 모터썰매가 뒤를 잇는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짐을 가장 많이 실은 조랑말이 이동을 시작하고 속도가 가장 빠른 개썰매가 마지막으로 출발한다. 스콧은 여러 번의 시행을 통해 각각의 이동 수단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해 목표 거리당 이동 시간을 산출했다. 이에 따라 출발시간을 배분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같은 시간에 목표 지점에서 만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복잡한 전략을 세운 이유는 가능한 한 많은 짐을 옮기면서도 대원들의 힘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수개월 이상 소요되는 여정은 식량이나 연료 등 물자가 많을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로해진 대원은 모터썰매를 타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극지방에 가까운 곳까지 최대한 많은 대원과 물자를 이동시킨 후 체력 상태가 가장 좋은 대원을 뽑아 남극점을 정복할 계획이었다.
아문센은 스콧과 무엇이 달랐나
아문센이 남극 정복에 성공한 첫째 이유는 가장 중요한 본질, 추위를 이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오랫동안 북극점 정복을 꿈꿔왔다. 선박회사를 경영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아문센은 31세가 되자 상속받은 유산으로 형제들의 반대에도 배를 구입하고 후원자들을 구해 북극 탐험에 나섰다. 4년 가까이 걸린 이 탐험에서 최초의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기상조건이 맞지 않아 북극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북극 정복을 위한 생존방법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배를 돌려 귀국하지 않고 극지방에서 에스키모들과 함께 생활하며 겨울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아문센과 친해진 에스키모 가족은 그에게 풍속과 관습을 가르쳐줬다. 그는 에스키모의 생존방식을 완벽히 습득할 때까지 극지방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3시간 만에 이글루를 짓는 법을 배웠고 개와 교류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이외에도 모피 옷의 장점과 썰매의 활주부를 얼려 매끄럽게 타는 법을 알아냈다. 이런 훈련 덕분에 남극에 도착하자마자 그린란드산 허스키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개 18마리가 썰매 세 대를 끌고 첫 번째 식량저장고를 설치하기 위해 길을 나섰을 때 아문센은 스키를 잘 타는 대원에게 앞서서 달리라고 지시했다. 허스키들은 무리를 이끌 지도자가 있어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문센은 탐험 내내 대원들도 에스키모 개들과 직접 경험을 쌓고 추위를 이기는 능력을 기르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식량을 많이 준비하지 않은 것도 에스키모처럼 물개나 바다표범, 펭귄을 잡아먹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스콧은 남극 탐사에서 계획한 업무 중심으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뽑았다. 심지어 모험을 해보고 싶다며 돈을 내고 항해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기병대 대위로 조랑말을 잘 다룰 것 같아 대원으로 받아줬다. 과학자들은 탐사에는 ‘젬병’이었다. 가령 동물학자들이 부화 단계에 있는 황제펭귄의 알을 얻기 위해 탐사에 나섰을 때 책임자인 스콧도 따라 갔다. 그들 중 스키를 탈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손수 썰매를 끌었다. 하루에 1∼2마일밖에 전진하지 못해 5주가 지나서야 겨우 황제펭귄의 알을 가지고 기지로 돌아왔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재전쟁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영환경이 급변해 시스템이나 제도로는 대응이 불가능하고 사람의 임기응변 능력이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지식근로자와 경영진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적합한 인재를 찾기는 점점 힘들다고 한다. 그만큼 업의 본질에 적합한 사람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스콧의 사례는 불확실성 시대 기업의 인재 등용에 중요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스콧은 애초에 복잡한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립지리협회는 섀클턴의 탐험 이후 남은 180㎞ 정복에만 자금을 지원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학문적 탐사를 목표로 해야 했다. 영국의 경험과 탐험 경쟁이 스콧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스콧은 돌아오는 길에 지질학 탐사를 위해 행군을 중단하기도 했다. 무려 15㎏짜리 광석을 기지로 가져가려고 썰매에 싣기도 했다. 스콧 일행은 저장기지에서 불과 18㎞ 떨어진 곳에서 죽었다. 하루 거리도 안 됐다. 만약 남극점 정복에만 집중했더라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복잡한 환경일수록 단순함이 최고의 전략이 된다. 단순해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빠르게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 단순함은 혼란을 막고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넷째, 아문센의 탐험대는 겸손함을 유지했다. 추위를 이기는 것에 집중하고 단순한 목표와 전략을 선택했지만 아문센은 탐험을 쉽게 보지 않았다. 항상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철저히 준비했다. 평소에 대원들에게 바지 단추 하나라도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개를 100마리씩이나 데리고 온 것도 필요하면 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문센은 남위 80도와 82도 사이에 식량저장고를 세 개나 설치했지만 스콧은 80도에 커다란 저장기지 하나만 세웠다. 또 아문센은 탐험대 전원이 예비용 스키를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반면 스콧의 대원들은 예비용 스키를 준비하지 않았다. 탐험 도중 측량기사의 스키가 고장났다. 한 사람의 스키만 없어도 행군의 보조가 맞지 않아 전체에 피해가 갔다. 결국 나머지 대원들도 스키를 버리고 행군했다. 아문센의 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불확실성을 연구해온 경영학자 와익(Karl Weick)은 2000년 5월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발생한 산불 사례에서 통찰을 얻었다. 소방관들은 큰 산불을 방지하기 위해 군데군데 작은 산불을 내 목초들의 연결을 막는다. 이때도 산불 방지를 위해 관목을 태우던 중이었다. 불이 대부분 꺼졌다고 생각해 피곤해하는 소방관들을 퇴근시켰는데 작은 불씨 하나가 살아나 점점 번져나갔다. 급기야 주변 지역의 모든 소방 인력으로도 막을 수 없게 돼 2주에 걸쳐 10억 달러의 피해를 초래한 세로 그란데(Cerro Grande) 화재로 이어졌다. 와익은 기업이 예상치 못한 위험에 빠질 때도 이와 똑같은 모습이라고 경고한다. 큰 위험은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성과 예기치 못한 위험에 잘 대처하는 기업은 항상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작은 불씨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자신감과 확신이 있더라도 상황의 역동성 때문에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느껴 조심스레 접근한다. 이들은 잘나갈 때도 겸손하다.
머리보다 체질이 더 중요
아문센은 어린 시절 아침이면 어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덜덜 떨며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극지방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쓴 여행기나 탐험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다. 아문센도 이런 책을 보며 북극을 정복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북극으로 항해를 떠나 선배 탐험가들이 겪었던 고난을 체험하고 영웅이 돼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17세 때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서쪽에 위치한 산악지대로 겨울 행군에 나서기도 했다. 자신이 고통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관심은 북극에 가 있었다. 3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애도 기간이 지난 후 곧바로 서부 고원을 가로지르는 스키 여행을 감행했다. 이후 겨울만 되면 더 추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극지방과 비슷한 추위를 몸소 체험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추위에 강한 체질로 서서히 단련돼갔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촉> <3불 전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