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과 아폴로의 컴퓨터비전 입찰경쟁
Case
선 “워크스테이션 OEM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컴퓨터비전 “더 좋은 파트너 아폴로를 택하겠다”
1983년 7월 선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 이하 선)의 창업자인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는 중대한 과업을 완수해야 했다. 바로 경쟁사인 아폴로(Apollo)사가 컴퓨터비전(Computervision)에게 워크스테이션을 공급하는 계약 체결을 막는 것이다.
네 젊은이의 의기투합으로 탄생한 선
선은 1982년 6월 26∼27세의 네 젊은이가 창업한 직원 40명의 작은 회사로 이제 월 매출액이 100만 달러를 기록했을 뿐이다. 이와 반대로 아폴로는 1980년 산업계 베테랑들이 설립한 회사로 새로운 워크스테이션 시장에 진출, 컴퓨터비전의 주요 경쟁사들에게 고성능 제품을 이미 공급하고 있었다.
워크스테이션은 PC와는 전혀 다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보통 PC는 컴퓨터 사용량이 많지 않은 ‘라이트 유저’를 주 고객으로 한다. 반면 워크스테이션은 컴퓨터로 복잡한 작업을 하는 대학과 연구소 등 ‘파워 유저’가 주 공략 대상이다. 특히 당시 컴퓨터공학부에 등록하는 학생 수가 폭증함에 따라 많은 대학이 네트워크에 기초한 워크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산업계에서도 워크스테이션은 CAD(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와 CAE(컴퓨터를 이용한 엔지니어링)에 활용됐다. 초기 CAD/CAE 소프트웨어들은 미니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연동돼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워크스테이션 기반 제품이 속속 등장했다. GM이나 보잉 같은 CAD/CAE 사용 업체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따로 구매하거나 OEM 업체로부터 주문 제작한 시스템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OEM 업체 중 마켓리더 노릇을 하던 컴퓨터비전(Computervision)과 데이지(Daisy), 인터그래프(Intergraph) 등은 자체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OEM 업체들은 ‘시스템 통합(SI)’ 회사였다. 그들은 CAD/CAE 소프트웨어만 자체 개발하는 데 주력했고 하드웨어는 다른 회사에서 구매했다.
아폴로는 주요 OEM 업체인 Mentor Graphics, Calma, Autorol과 대부분의 소형 OEM 업체에 워크스테이션을 납품하고 있었다. 이 시장에서는 사실상 경쟁사가 없었다. DEC, IBM, 프라임(Prime) 등 미니 컴퓨터나 메인 프레임 업체들은 워크스테이션을 생산하지 않고 있었다. 미니컴퓨터 업체들은 그들의 기존 사업영역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결국 가격과 성능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당시 아폴로의 유일한 경쟁자는 휴렛팩커드(HP)뿐이었다. 새로 출범한 선과 같은 군소업체는 아직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업체들은 재정적으로 열악했고, 제록스 PARC연구소 설계에서 나온 매우 광범위한 사양으로 디자인된 유사한 워크스테이션을 판매하고 있었다.
대기업과 경쟁하겠다는 야심
선의 창업자이자 CEO인 비노드 코슬라는 1980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CAE 시스템 업체인 데이지(Daisy) 창업에 동참했다가 워크스테이션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공동 창업자들을 규합해 회사를 차렸다. 비노드 코슬라는 카네기 멜론 시절의 동창생이며 CAD 전문가인 앤디 벡톨샤임을 데려와 개발을 맡겼다. 또 스탠퍼드 MBA를 함께 다닌 스콧 맥닐리를 영입, 회사 운영을 맡겼으며 UC버클리 공대 대학원생이던 UNIX 전문가 빌 조이도 합류시켰다. 당시 자신의 기술을 6건이나 라이센싱해주고 있던 앤디는 코슬라에게 기술 라이선싱을 더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기술이 아니라 앤디 자체를 원했고 창업지분의 반을 제공하면서 파트너가 돼달라고 제안했다.
비노드 코슬라는 선의 CEO로서 전략적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1982년 초부터 6월 말까지 비노드 코슬라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면서 선의 전략적 원칙을 설정했다. 코슬라는 IBM이나 DEC와 경쟁하고 싶어했다. 다른 실리콘밸리 회사들처럼 틈새시장에서 생존하려한 게 아니었다. 코슬라의 꿈은 컸다. 대기업과 경쟁하는 게 훨씬 힘든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나 워크스테이션 시장의 리더인 아폴로는 선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선은 여러 업체가 사용하던 제록스 PARC연구소의 이더넷을 채용한 데 반해 아폴로는 고유의 도메인 네트워크를 개발했다.선은 범용 운영체제인 UNIX를 채용한 데 반해 아폴로는 고유의 운영체제 개발에 투자했다. 선은 아폴로와는 달리 직접 생산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실리콘밸리의 공급자 네트워크에 의존했다.
힘겨운 시장 개척
당시만 해도 선은 제품을 파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 설익은 제품을 기꺼이 사주겠다는 고객이 많지 않았다. 비노드 코슬라는 목표 고객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정했다. 바로 대학과 OEM 생산업체다. 우선 대학은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성능만 좋으면 비싼 가격이라도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또 OEM 생산업체, 즉 데이지(Daisy)나 컴퓨터비전 같은 회사도 목표 고객이었다. 물론 많은 OEM 생산자들은 선의 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선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선은 결국 첫해 현실적 고객 집단으로 대학을 선정했다. 첫해 판매 목표를 미국 대학의 50대 컴퓨터 공학부로 정했다. DEC가 이미 높은 기술력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대학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선은 1982년 6월 이후 1년이 지나서야 선은 대학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선이 주류업체가 되기 위해서는 OEM 시장에 진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OEM 시장에서 선은 많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82년 12월 드디어 선은 OEM 비즈니스에 진입할 기회를 포착했다. 컴퓨터비전이 자체적으로 워크스테이션을 제작하지 않고 OEM 구매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수많은 신생업체가 값싼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해 저가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업체들은 아폴로나 선 같은 업체의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컴퓨터비전이 50만 달러에 판매하는 CAD시스템을 10만 달러 이하로 팔았다. 컴퓨터비전은 시장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해야 했다.
1982년 8월 컴퓨터비전 창업자인 마틴 앨런(Martin Allen) 사장은 CEO 직위를 전 하니웰(Honeywell) 부사장 짐 베렛(James Berret)에게 물려줬다. 코슬라는 컴퓨터비전과의 계약을 추진하기 위해서 DEC로부터 베테랑 경영자인 오웬 브라운(Owen Brown)을 판매와 마케팅 책임자로 영입했다. 오웬 브라운은 컴퓨터비전 같은 큰 회사를 대상으로 영업하기 위해 사장 직함을 요구했고 코슬라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몇 달 후, 컴퓨터비전 워크스테이션 입찰이 시작됐는데 경쟁은 아폴로와 선으로 압축됐다. 선은 컴퓨터비전의 친구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였다. 반면 아폴로사의 친구들은 대부분 영업직이나 관리자였는데 그들 중 몇몇은 컴퓨터비전이 사업영역을 전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폴로와의 입찰 경쟁에서 밀려
1983년 7월 비노드 코슬라의 사무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전화는 컴퓨터비전 구매부에서 걸려온다. 그들은 입찰에 응해준 것에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컴퓨터비전은 다른 벤더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비노드 코슬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계약을 담당한 오웬 브라운은 미해군예비역 훈련을 받으러 2주간 휴가를 낸 상태였다. 회사의 미래가 달린 계약이 진행중인데 아무리 해군예비역 훈련이라지만 휴가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코슬라는 직접 그 일을 맡았다. 그는 Fedex를 이용해서 컴퓨터비전의 주요 임원 30∼40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이 컴퓨터비전 사업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하겠다고 말했다. 퇴근을 포기한 코슬라는 아내에게 사무실로 옷을 가져오라고 해서 보스턴행 밤 비행기를 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컴퓨터비전 본사의 로비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만나려고 했으나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코슬라는 4시간 동안 50통이 넘는 전화를 건 후에, 평소 친분이 있던 판매 마케팅 담당 부사장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컴퓨터비전은 이미 오래 전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이미 컴퓨터비전 본사에는 유럽지사 기술자들이 아폴로로부터 워크스테이션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계약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몇몇은 정치적인 이유로 코슬라를 회피하는 듯 했다. 전화를 해주겠다는 판매담당 부사장의 약속을 얻고 나서야 코슬라는 보스턴 사무실로 돌아와 샤워와 면도만 하고 컴퓨터비전의 연락을 기다렸다.
“만나주기는 하겠다”
마침내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컴퓨터비전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선은 직원 40명의 작은 회사다. 제품은 아직 완성단계에 와 있지도 않다. 물론 선의 기술은 높이 사지만 대량 생산 능력이 부족하고 게다가 아폴로의 워크스테이션은 이미 업계 표준이다. 그래픽 분야는 오히려 경쟁력 있고 있는데다 선에 비해 재정상태도 좋고 경영진도 훌륭하다.”
절망적인 말이 이어졌다. 다만 짐 베렛 사장은 비노드 코슬라를 잠시 만나주기는 하겠다고 말했다. 과연 비노드 코슬라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코슬라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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