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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과 아폴로의 컴퓨터비전 입찰경쟁

사업가의 열정, ‘죽은 협상’ 살리다

박헌준 | 10호 (2008년 6월 Issue 1)
Case
선 “워크스테이션 OEM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컴퓨터비전 “더 좋은 파트너 아폴로를 택하겠다”
 
1983년 7월 선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 이하 선)의 창업자인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는 중대한 과업을 완수해야 했다. 바로 경쟁사인 아폴로(Apollo)사가 컴퓨터비전(Computervision)에게 워크스테이션을 공급하는 계약 체결을 막는 것이다.
 
네 젊은이의 의기투합으로 탄생한 선
선은 1982년 6월 26∼27세의 네 젊은이가 창업한 직원 40명의 작은 회사로 이제 월 매출액이 100만 달러를 기록했을 뿐이다. 이와 반대로 아폴로는 1980년 산업계 베테랑들이 설립한 회사로 새로운 워크스테이션 시장에 진출, 컴퓨터비전의 주요 경쟁사들에게 고성능 제품을 이미 공급하고 있었다.
 
워크스테이션은 PC와는 전혀 다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보통 PC는 컴퓨터 사용량이 많지 않은 ‘라이트 유저’를 주 고객으로 한다. 반면 워크스테이션은 컴퓨터로 복잡한 작업을 하는 대학과 연구소 등 ‘파워 유저’가 주 공략 대상이다. 특히 당시 컴퓨터공학부에 등록하는 학생 수가 폭증함에 따라 많은 대학이 네트워크에 기초한 워크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산업계에서도 워크스테이션은 CAD(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와 CAE(컴퓨터를 이용한 엔지니어링)에 활용됐다. 초기 CAD/CAE 소프트웨어들은 미니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연동돼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워크스테이션 기반 제품이 속속 등장했다. GM이나 보잉 같은 CAD/CAE 사용 업체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따로 구매하거나 OEM 업체로부터 주문 제작한 시스템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OEM 업체 중 마켓리더 노릇을 하던 컴퓨터비전(Computervision)과 데이지(Daisy), 인터그래프(Intergraph) 등은 자체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OEM 업체들은 ‘시스템 통합(SI)’ 회사였다. 그들은 CAD/CAE 소프트웨어만 자체 개발하는 데 주력했고 하드웨어는 다른 회사에서 구매했다.
 
아폴로는 주요 OEM 업체인 Mentor Graphics, Calma, Autorol과 대부분의 소형 OEM 업체에 워크스테이션을 납품하고 있었다. 이 시장에서는 사실상 경쟁사가 없었다. DEC, IBM, 프라임(Prime) 등 미니 컴퓨터나 메인 프레임 업체들은 워크스테이션을 생산하지 않고 있었다. 미니컴퓨터 업체들은 그들의 기존 사업영역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결국 가격과 성능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당시 아폴로의 유일한 경쟁자는 휴렛팩커드(HP)뿐이었다. 새로 출범한 선과 같은 군소업체는 아직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업체들은 재정적으로 열악했고, 제록스 PARC연구소 설계에서 나온 매우 광범위한 사양으로 디자인된 유사한 워크스테이션을 판매하고 있었다.
 
대기업과 경쟁하겠다는 야심
선의 창업자이자 CEO인 비노드 코슬라는 1980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CAE 시스템 업체인 데이지(Daisy) 창업에 동참했다가 워크스테이션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공동 창업자들을 규합해 회사를 차렸다. 비노드 코슬라는 카네기 멜론 시절의 동창생이며 CAD 전문가인 앤디 벡톨샤임을 데려와 개발을 맡겼다. 또 스탠퍼드 MBA를 함께 다닌 스콧 맥닐리를 영입, 회사 운영을 맡겼으며 UC버클리 공대 대학원생이던 UNIX 전문가 빌 조이도 합류시켰다. 당시 자신의 기술을 6건이나 라이센싱해주고 있던 앤디는 코슬라에게 기술 라이선싱을 더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기술이 아니라 앤디 자체를 원했고 창업지분의 반을 제공하면서 파트너가 돼달라고 제안했다.
 
비노드 코슬라는 선의 CEO로서 전략적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1982년 초부터 6월 말까지 비노드 코슬라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면서 선의 전략적 원칙을 설정했다. 코슬라는 IBM이나 DEC와 경쟁하고 싶어했다. 다른 실리콘밸리 회사들처럼 틈새시장에서 생존하려한 게 아니었다. 코슬라의 꿈은 컸다. 대기업과 경쟁하는 게 훨씬 힘든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나 워크스테이션 시장의 리더인 아폴로는 선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선은 여러 업체가 사용하던 제록스 PARC연구소의 이더넷을 채용한 데 반해 아폴로는 고유의 도메인 네트워크를 개발했다.선은 범용 운영체제인 UNIX를 채용한 데 반해 아폴로는 고유의 운영체제 개발에 투자했다. 선은 아폴로와는 달리 직접 생산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실리콘밸리의 공급자 네트워크에 의존했다.
 
힘겨운 시장 개척
당시만 해도 선은 제품을 파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 설익은 제품을 기꺼이 사주겠다는 고객이 많지 않았다. 비노드 코슬라는 목표 고객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정했다. 바로 대학과 OEM 생산업체다. 우선 대학은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성능만 좋으면 비싼 가격이라도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또 OEM 생산업체, 즉 데이지(Daisy)나 컴퓨터비전 같은 회사도 목표 고객이었다. 물론 많은 OEM 생산자들은 선의 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선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선은 결국 첫해 현실적 고객 집단으로 대학을 선정했다. 첫해 판매 목표를 미국 대학의 50대 컴퓨터 공학부로 정했다. DEC가 이미 높은 기술력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대학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선은 1982년 6월 이후 1년이 지나서야 선은 대학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선이 주류업체가 되기 위해서는 OEM 시장에 진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OEM 시장에서 선은 많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82년 12월 드디어 선은 OEM 비즈니스에 진입할 기회를 포착했다. 컴퓨터비전이 자체적으로 워크스테이션을 제작하지 않고 OEM 구매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수많은 신생업체가 값싼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해 저가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업체들은 아폴로나 선 같은 업체의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컴퓨터비전이 50만 달러에 판매하는 CAD시스템을 10만 달러 이하로 팔았다. 컴퓨터비전은 시장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해야 했다.
 
1982년 8월 컴퓨터비전 창업자인 마틴 앨런(Martin Allen) 사장은 CEO 직위를 전 하니웰(Honeywell) 부사장 짐 베렛(James Berret)에게 물려줬다. 코슬라는 컴퓨터비전과의 계약을 추진하기 위해서 DEC로부터 베테랑 경영자인 오웬 브라운(Owen Brown)을 판매와 마케팅 책임자로 영입했다. 오웬 브라운은 컴퓨터비전 같은 큰 회사를 대상으로 영업하기 위해 사장 직함을 요구했고 코슬라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몇 달 후, 컴퓨터비전 워크스테이션 입찰이 시작됐는데 경쟁은 아폴로와 선으로 압축됐다. 선은 컴퓨터비전의 친구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였다. 반면 아폴로사의 친구들은 대부분 영업직이나 관리자였는데 그들 중 몇몇은 컴퓨터비전이 사업영역을 전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폴로와의 입찰 경쟁에서 밀려
1983년 7월 비노드 코슬라의 사무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전화는 컴퓨터비전 구매부에서 걸려온다. 그들은 입찰에 응해준 것에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컴퓨터비전은 다른 벤더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비노드 코슬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계약을 담당한 오웬 브라운은 미해군예비역 훈련을 받으러 2주간 휴가를 낸 상태였다. 회사의 미래가 달린 계약이 진행중인데 아무리 해군예비역 훈련이라지만 휴가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코슬라는 직접 그 일을 맡았다. 그는 Fedex를 이용해서 컴퓨터비전의 주요 임원 30∼40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이 컴퓨터비전 사업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하겠다고 말했다. 퇴근을 포기한 코슬라는 아내에게 사무실로 옷을 가져오라고 해서 보스턴행 밤 비행기를 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컴퓨터비전 본사의 로비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만나려고 했으나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코슬라는 4시간 동안 50통이 넘는 전화를 건 후에, 평소 친분이 있던 판매 마케팅 담당 부사장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컴퓨터비전은 이미 오래 전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이미 컴퓨터비전 본사에는 유럽지사 기술자들이 아폴로로부터 워크스테이션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계약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몇몇은 정치적인 이유로 코슬라를 회피하는 듯 했다. 전화를 해주겠다는 판매담당 부사장의 약속을 얻고 나서야 코슬라는 보스턴 사무실로 돌아와 샤워와 면도만 하고 컴퓨터비전의 연락을 기다렸다.
 
“만나주기는 하겠다”
마침내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컴퓨터비전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선은 직원 40명의 작은 회사다. 제품은 아직 완성단계에 와 있지도 않다. 물론 선의 기술은 높이 사지만 대량 생산 능력이 부족하고 게다가 아폴로의 워크스테이션은 이미 업계 표준이다. 그래픽 분야는 오히려 경쟁력 있고 있는데다 선에 비해 재정상태도 좋고 경영진도 훌륭하다.”
 
절망적인 말이 이어졌다. 다만 짐 베렛 사장은 비노드 코슬라를 잠시 만나주기는 하겠다고 말했다. 과연 비노드 코슬라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코슬라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Analysis
비노드 코슬라가 컴퓨터비전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비전은 선이라는 작은 회사에 자신의 미래를 걸 수 있을까.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선과 코슬라의 미래는 컴퓨터비전과의 워크스테이션 공급계약에 달려있었다. 코슬라는 동아비즈니스리뷰(DBR) 8호(5월1일자)에 실었던 케네콧사나 지난 호(9호)의 콩코드사 헨리 아이버슨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선의 사례는 기술경영과 기술전략 그리고 기업가정신과 관련해 매우 유용한 교훈을 던져준다. 연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의 협상 워크숍과 딜 워크숍에서는 이 사례를 MBA 학생들과 토론하고 팀별로 논점과 제안을 검토한 뒤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과 선의 코슬라가 돼 실제로 협상을 하는 ‘역할 연기 실습’을 한다. 창업 초기 선은 모험적이고 신뢰성 면에서 요구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대학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곧 물량이 큰 기업 시장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해야 기술개발과 엔지니어링 그리고 판매지원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역할 연기 실습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선의 창업자인 코슬라는 1955년 생으로 14세에 미국 인텔사의 설립 소식을 신문에서 읽으며 신기술에 대해, 그리고 내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에 대해 막연하지만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도 최고 대학인 인도델리공과대학(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두유 제조 및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가 재원 부족으로 그만두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의 여러 공대에서 석사 과정의 문을 두드리던 그는 전액장학금을 제공한 카네기 멜론을 선택했다. 그리고 카네기 멜론 공대에서 의료생명공학을 공부하면서 실리콘밸리를 향한 꿈을 키웠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나 사회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첫해 응시에 낙방한다. 그리고 약간의 직장 경험을 가진 후 다시 응시했지만 두 번째도 입학을 거절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코슬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입학담당관에게 전화해 따져 물었다. 결국 입학대기자 명단에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코슬라는 그 후 거의 매일같이 전화를 하면서 입학사무처 직원들과 친해졌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등록마감일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입학담당관에게 전화를 한 코슬라는 오늘 짐을 싸서 무조건 스탠퍼드로 떠나겠다고 말하며 입학을 호소했고 입학담당관은 다음날 마침내 그에게 입학을 허락했다. 이때 코슬라는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얻는다. 어느 날 행글라이딩을 하던 코슬라는 다음과 같은 모토를 본 후 평생 신조로 삼았다. “성공이란 감히 꿈을 꾸고 또 그것을 실행에 옮길 만큼 바보이면서 그것을 현실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온다.”
 
상대에게 확실한 이익과 명분제공
코슬라는 이 딜이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협상 목표를 미리 준비했다. 딜의 설계를 창의적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최종 목표를 결정해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에게 ‘노-딜 옵션(협상이 깨졌을 때의 대안)’보다 선호할 수 있는 제안을 내놓았다. 선이라는 IT업계의 ‘태양’이 오늘날 건재하는 것을 보면 코슬라의 제안이 성공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코슬라가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협상 전술보다는 협상 셋업과 딜 설계에 대한 창의적 접근 때문이다. 코슬라에게는 시큼한 레몬을 맛있는 레모네이드로 바꾸는 상상력과 드라마틱한 제스처가 필요했다. 과연 그는 어떻게 협상 셋업을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갔을까.
 
비노드 코슬라는 짐 베렛 사장이 1982년 8월에 신규 영입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규 영입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짐 베렛 사장이 이미 실무 부서는 물론 자신을 포함한 책임자들이 결정해 놓은 사안을 뒤집으려면 어떤 근거나 큰 이익이 있어야 했다. 코슬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 딜을 성공시키기만 하면 모든 면에서 선에게 이득이 됐다. 우리가 워크스테이션 공급계약을 따내는 것보다는 아폴로의 공급계약을 막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아폴로는 워크스테이션 OEM 비즈니스에서 커다란 고객을 이미 세 곳이나 확보하고 있었다. 컴퓨터비전은 CAD 비즈니스에서 가장 큰 업체였다. 아폴로가 컴퓨터비전과 워크스테이션 공급계약을 최종 체결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워크스테이션 업계에서 아무도 선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슬라는 협상의 배수진을 치면서 동시에 상대방에게 확실한 이익과 결정 변경의 명분 및 논리를 제공했다. 즉 상대방의 ‘배트나(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인 아폴로와의 공급계약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렸다. 배트나란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 협상을 결렬시키고 걸어 나갈 때 갖고 있는 ‘워크 어웨이(walk-away) 옵션’을 말한다. 코슬라는 선의 배트나 즉 ‘워크 어웨이 옵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주고자 했다.
   



“우리 기술 몽땅 주겠다 로열티 없이”

그는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나는 당신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기술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 기술을 몽땅 드리겠습니다. 로열티 없이, 어떤 수수료도 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회사 기술진의 절반을 컴퓨터비전으로 보내겠습니다. 컴퓨터비전이 이 기술을 배우고,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컴퓨터비전 내부에도 워크스테이션의 아웃소싱 방침을 싫어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의 기술을 갖고 내부 생산하게 되면 이 사람들이 크게 환영할 것입니다. 당연히 컴퓨터비전이 아웃소싱을 하지 않고 사내에서 직접 생산하면 수백만 달러의 영업이익이 증가할 것입니다. 아폴로의 워크스테이션보다 훨씬 좋은 최고의 기술을 획득하고 내부 축적도 가능할 것입니다.” 코슬라의 이 엄청나고도 획기적인 제안을 접한 짐 베렛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코슬라에게 “그럼 선은 어떤 대가를 바라나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한 코슬라의 대답은 바로 이어졌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컴퓨터비전의 짐 베렛 사장은 딜메이킹 후 높은 협상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선의 비노드 코슬라를 압박해 기술 제공을 받아냈다고 사내 임원들에게 말했다. 이런 짐 베렛 사장에 대한 정치적 배려도 중요한 성공 요소였다.
 
차세대 기술 구입할 수 밖에
비노드 코슬라는 이런 가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컴퓨터비전이 궁극적으로 선의 워크스테이션 기술을 잘 활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직접 만들어낸 기술이 아니면 그 기술의 미묘한 상세내역과 노하우를 다 알기 어렵다. 알아도 그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어렵다.
 
컴퓨터비전 엔지니어들이 만약 워크스테이션 생산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기술의 진화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2∼3년 후면 컴퓨터비전은 선으로부터 차세대 기술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비전도 선과 계약하는 이상 불공정계약을 맺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선의 워크스테이션 기술에 접근한 컴퓨터비전은 선이 이 시장에서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컴퓨터비전은 모든 워크스테이션을 자체 생산하려고 할 것이며, 로열티를 낮추더라도 어느 정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폴로와의 공급계약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컴퓨터비전이 선의 기술적 지원으로 워크스테이션을 생산하고 나면 그들 나름대로 디자인을 수정하거나 약간의 변경을 시도하겠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계약 초기에는 한동안 컴퓨터비전이 자체 개발을 시도하면서 선에게서 차세대 기술을 구입하려 하지 않겠지만 워크스테이션 OEM 비즈니스에서 다른 벤더들이 선의 워크스테이션을 구입하기 시작하면 업계 표준이 될 것이다.”
 
비노드 코슬라는 1985년 선을 떠난다. 후임자인 스콧 맥닐리가 그 후 20여 년간 CEO로서 선을 성장시켰고, 2006년부터는 젊은 조나단 슈바르츠가 선을 이끌고 있다. 선을 떠난 코슬라는 1986년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벤처캐피털 회사인 클라이너 퍼킨스(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의 제너럴 파트너가 되었으며 2004년 코슬라벤처스라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할 때까지 벤처캐피털리스트로서 명성을 날린다.
 
비노드 코슬라는 ‘앙트레프레너’, 즉 기업가는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열정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딜 메이커는 세상이 끝난 듯한 절망의 날들을 무수히 겪으면서도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말한다. 비즈니스 딜에서는 앙트레프레너 딜, 사업가적 딜이 중요하다. 사업가로서 돈을 벌겠다는 집념보다는 창조적 딜메이커가 되어서 내 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소명의식, 열정을 가져야 한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방문 연구교수도 겸하고 있다. <Academy of Management Journal> 등 저명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실었으며 한국협상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협상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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