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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보는 다양성

비잔틴제국?무굴제국?당나라…거대제국의 바탕엔 늘 ‘열린文化’가 있다

백종율 | 114호 (2012년 10월 Issue 1)

 

 

 

서론

1000년 전 고려의 수도 개경은 수십만의 인구를 거느린 국제도시였다. 수없이 드나드는 다양한 사람들-사신, 상인, 여행자-을 위해 객관(客官)들이 생겼다. 특히 사신들을 위한 객관은 나라별로 전문화돼 있었다. 송나라 사신은 순천관에, 요나라 사신은 영선관에, 여진 사신은 영은관, 흥위관 등에서 머물렀다. 교역 대상국도 다양해서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아라비아, 인도, 태국, 베트남의 배, 물자,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히 이슬람 상인들은 고려 말에는 개경에 집단거주지를 이뤄 자신들의 언어와 복식을 사용하고 모스크까지 지었다. 이들은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중요 국가 행사에 공식 초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다양성은 19세기 말에 서구 열강과 일본이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제외하면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개경의 모습은 19세기와 비교될 수 없는 발전적인 것이다. 차이는 분명하다. 개경처럼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다양화, 개방, 관용은 발전의 기반이지만 19세기처럼 통제를 상실한, 나아가 강요된 그것은 몰락과 수치의 상징이 된다. 이제부터 다양한 문명 속에서 다양성의 예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비잔틴(Byzantine)제국

흔히 동로마제국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비잔틴제국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서양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고유명사 비잔틴이 일반적 어휘가 되는 과정에서 ‘byzantine’복잡한’ ‘비밀스런이란 의미를 갖게 됐을 정도다. 4세기 초 거대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면서 이름을 갖게 된 이 문명은 476년 서로마제국이 지도에서 사라진 후에도 1453년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s)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000년 가까이 유지되면서 부침을 거듭했다.

 

적어도 세 가지 상이한 요소들-기독교, 로마 제국의 조직과 행정,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지적 유산-이 독특하게 결합한 것이 비잔틴이었다. 따라서 이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활력과 창의력을 지니고 있다. 이 문명의 힘은 역설적으로 1204년 가톨릭 십자군에 의해 수도 비잔티움이 철저히 파괴됐을 때 비로소 알려졌다. 제국 곳곳에서 여러 형태로 문명이 부활한 것이다. 트레비존드(Trebizond) 제국, 니케아(Nicaea) 제국, 에피루스(Epirus) 등이 이후로도 200여 년 동안 이들이 이어가고자 노력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로 비잔틴 문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은 그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다양성에 관한 한 비잔티움은 동시대의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세계의 중심이었다. 일단 언어를 보면 공식 언어는 그리스어였지만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1 에는 세계 각지의 민족들이 모여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문화적 정체성에 유난히 집착했던 유대인들조차 히브리어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면서 그리스 문명과 철저히 융화됐다.

 

물론 차별과 박해가 없을 수 없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기독교(Christianity)의 보편성에 반하는 선민의식을 고수해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2  7세기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했고 8세기의 레오3세도 세례받을 것을 강요했다.3  10세기에 전염병이 만연했을 때는 희생양이 돼 개종 아니면 추방을 강요당했다. 이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닥칠 때마다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러한 박해와 일상 속의 사소한 충돌이 심심치 않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유태인들에 대한 태도는 관대한 편이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내의 수십 개 도시에 교회(synagogue)를 짓고 근처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했다. 농사는 물론이고 상업, 은행업, 고리대금업 등에서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으며 비단 짜기, 가죽 무두질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민족을 보면 비잔틴제국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했던 군대는 온갖 용병들의 집합소였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아르메니아(Armenia)4 인들이었지만 1034년에는 노르웨이왕 하랄드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가 전통 무기인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바이킹 부하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나타나 정예부대인 바랑기아 근위대(Varangian Guard)에서 10년 동안 제국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이슬란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 용병들까지 속속 몰려들었다. 생각해보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먼 길을 걸어온 이들의 외모와 독특한 무기만으로도 제국의 비주얼 다양성(visual diversity)은 시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한 외국인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황제 이하 제국 상류층의 태도와 역량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개방적 정신을 낳았다.

 

비잔티움의 경제에 다양한 이방인들이 찾아든 것은 당연했다. 특히 10세기 말부터 제국 비잔티움의 시장은 외국인으로 북적였다. 이들이 정착해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 무렵 지식인들이 쓰는 본토 그리스어보다 간편한 구어체의 그리스어가 발달하면서 아랍, 시리아, 베니스, 피사 등 다양한 상인들의 공용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출신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제국의 시민으로 여기며 세금을 내고 제국의 보호와 법률의 혜택을 받았다. 이들은 10%의 상거래세(kommerkion) 10%의 관세 같은 다양한 세금을 내면서도 제국 곳곳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비잔티움은 절대 통제가 느슨한 제국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들은 국가에 필수적이지만 달리 말하면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화약, , 소금, 철 같은 물품은 수출하지 않는다는 보수적 전통을 고수했다. 하지만 외국 문화와 민족에 대한 개방성은 제국의 유지와 발전에 너무도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주 수입원인 토지세와 인두세 외에 이처럼 교역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세수를 기반으로 황제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인재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여 황실의 위엄과 제국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5

 

비잔티움에서 기독교(그리스 정교, Greek Orthodox Church)가 차지한 절대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적 요소는 삶의 곳곳에 남아 있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성상(icon) 앞에서 기도하면서 향을 피우고 밤낮으로 불을 밝혀 놓는 풍습은 기독교 이전 고대의 숭배 방식이었다.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황제의 초상에도 경배를 표했으며 집안에 이교 신들의 성상을 갖춘 가정들까지 있었다. 화가들은 기독교 성상을 그릴 때 이교 신을 모델로 삼았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는 고대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모델로, 그리스도는 제우스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이처럼 비잔틴인들이 고대의 신화, 특히 교회가 혐오한 에로틱한 주제들에 매료된 경향은 12세기 이후까지도 계속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성 가운데 일부는 비잔틴 고유의 특징들이기도 하지만 다른 번영한 제국들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 측면들이 존재한다. 우선 비잔티움이 다른 중세 국가들보다 외부에 대해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을 이뤘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부터 북쪽의 바이킹(Vikings), 동쪽의 마쟈르(Magyars), 남쪽의 무슬림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서 이방인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낀 서부 및 중부 유럽과 비잔티움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또한 비잔틴 황제들에게 특히 외래인은 어느 세력과도 결탁해 있지 않다는 정치적 이점이 있었다. 황제들은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용병과 궁정의 관리로 그들을 채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비잔티움이 이방인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금전적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수한 순례자를 포함한 외부인들은 제국 내의 잘 갖춰진 병원, 오락시설, 숙소 등과 같은 편의시설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이처럼 외부인을 향한 (오만함이 아닌) 적극적인 개방성 덕분에 가능했다. 비잔틴이 다양성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유익은 자체적,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모순의 해결이었다. 용병(傭兵)은 그 대표적 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나 루소(Jean-Jacques Rousseau)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용병제는 비잔틴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택한 현실적 방안이었다. 다양성은 이처럼 한 조직과 사회의 필수조건을 가장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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