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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보는 다양성

비잔틴제국?무굴제국?당나라…거대제국의 바탕엔 늘 ‘열린文化’가 있다

백종율 | 114호 (2012년 10월 Issue 1)

 

 

 

서론

1000년 전 고려의 수도 개경은 수십만의 인구를 거느린 국제도시였다. 수없이 드나드는 다양한 사람들-사신, 상인, 여행자-을 위해 객관(客官)들이 생겼다. 특히 사신들을 위한 객관은 나라별로 전문화돼 있었다. 송나라 사신은 순천관에, 요나라 사신은 영선관에, 여진 사신은 영은관, 흥위관 등에서 머물렀다. 교역 대상국도 다양해서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아라비아, 인도, 태국, 베트남의 배, 물자,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히 이슬람 상인들은 고려 말에는 개경에 집단거주지를 이뤄 자신들의 언어와 복식을 사용하고 모스크까지 지었다. 이들은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중요 국가 행사에 공식 초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다양성은 19세기 말에 서구 열강과 일본이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제외하면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개경의 모습은 19세기와 비교될 수 없는 발전적인 것이다. 차이는 분명하다. 개경처럼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다양화, 개방, 관용은 발전의 기반이지만 19세기처럼 통제를 상실한, 나아가 강요된 그것은 몰락과 수치의 상징이 된다. 이제부터 다양한 문명 속에서 다양성의 예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비잔틴(Byzantine)제국

흔히 동로마제국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비잔틴제국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서양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고유명사 비잔틴이 일반적 어휘가 되는 과정에서 ‘byzantine’복잡한’ ‘비밀스런이란 의미를 갖게 됐을 정도다. 4세기 초 거대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면서 이름을 갖게 된 이 문명은 476년 서로마제국이 지도에서 사라진 후에도 1453년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s)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000년 가까이 유지되면서 부침을 거듭했다.

 

적어도 세 가지 상이한 요소들-기독교, 로마 제국의 조직과 행정,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지적 유산-이 독특하게 결합한 것이 비잔틴이었다. 따라서 이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활력과 창의력을 지니고 있다. 이 문명의 힘은 역설적으로 1204년 가톨릭 십자군에 의해 수도 비잔티움이 철저히 파괴됐을 때 비로소 알려졌다. 제국 곳곳에서 여러 형태로 문명이 부활한 것이다. 트레비존드(Trebizond) 제국, 니케아(Nicaea) 제국, 에피루스(Epirus) 등이 이후로도 200여 년 동안 이들이 이어가고자 노력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로 비잔틴 문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은 그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다양성에 관한 한 비잔티움은 동시대의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세계의 중심이었다. 일단 언어를 보면 공식 언어는 그리스어였지만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1 에는 세계 각지의 민족들이 모여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문화적 정체성에 유난히 집착했던 유대인들조차 히브리어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면서 그리스 문명과 철저히 융화됐다.

 

물론 차별과 박해가 없을 수 없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기독교(Christianity)의 보편성에 반하는 선민의식을 고수해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2  7세기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했고 8세기의 레오3세도 세례받을 것을 강요했다.3  10세기에 전염병이 만연했을 때는 희생양이 돼 개종 아니면 추방을 강요당했다. 이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닥칠 때마다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러한 박해와 일상 속의 사소한 충돌이 심심치 않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유태인들에 대한 태도는 관대한 편이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내의 수십 개 도시에 교회(synagogue)를 짓고 근처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했다. 농사는 물론이고 상업, 은행업, 고리대금업 등에서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으며 비단 짜기, 가죽 무두질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민족을 보면 비잔틴제국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했던 군대는 온갖 용병들의 집합소였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아르메니아(Armenia)4 인들이었지만 1034년에는 노르웨이왕 하랄드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가 전통 무기인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바이킹 부하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나타나 정예부대인 바랑기아 근위대(Varangian Guard)에서 10년 동안 제국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이슬란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 용병들까지 속속 몰려들었다. 생각해보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먼 길을 걸어온 이들의 외모와 독특한 무기만으로도 제국의 비주얼 다양성(visual diversity)은 시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한 외국인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황제 이하 제국 상류층의 태도와 역량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개방적 정신을 낳았다.

 

비잔티움의 경제에 다양한 이방인들이 찾아든 것은 당연했다. 특히 10세기 말부터 제국 비잔티움의 시장은 외국인으로 북적였다. 이들이 정착해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 무렵 지식인들이 쓰는 본토 그리스어보다 간편한 구어체의 그리스어가 발달하면서 아랍, 시리아, 베니스, 피사 등 다양한 상인들의 공용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출신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제국의 시민으로 여기며 세금을 내고 제국의 보호와 법률의 혜택을 받았다. 이들은 10%의 상거래세(kommerkion) 10%의 관세 같은 다양한 세금을 내면서도 제국 곳곳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비잔티움은 절대 통제가 느슨한 제국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들은 국가에 필수적이지만 달리 말하면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화약, , 소금, 철 같은 물품은 수출하지 않는다는 보수적 전통을 고수했다. 하지만 외국 문화와 민족에 대한 개방성은 제국의 유지와 발전에 너무도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주 수입원인 토지세와 인두세 외에 이처럼 교역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세수를 기반으로 황제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인재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여 황실의 위엄과 제국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5

 

비잔티움에서 기독교(그리스 정교, Greek Orthodox Church)가 차지한 절대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적 요소는 삶의 곳곳에 남아 있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성상(icon) 앞에서 기도하면서 향을 피우고 밤낮으로 불을 밝혀 놓는 풍습은 기독교 이전 고대의 숭배 방식이었다.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황제의 초상에도 경배를 표했으며 집안에 이교 신들의 성상을 갖춘 가정들까지 있었다. 화가들은 기독교 성상을 그릴 때 이교 신을 모델로 삼았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는 고대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모델로, 그리스도는 제우스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이처럼 비잔틴인들이 고대의 신화, 특히 교회가 혐오한 에로틱한 주제들에 매료된 경향은 12세기 이후까지도 계속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성 가운데 일부는 비잔틴 고유의 특징들이기도 하지만 다른 번영한 제국들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 측면들이 존재한다. 우선 비잔티움이 다른 중세 국가들보다 외부에 대해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을 이뤘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부터 북쪽의 바이킹(Vikings), 동쪽의 마쟈르(Magyars), 남쪽의 무슬림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서 이방인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낀 서부 및 중부 유럽과 비잔티움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또한 비잔틴 황제들에게 특히 외래인은 어느 세력과도 결탁해 있지 않다는 정치적 이점이 있었다. 황제들은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용병과 궁정의 관리로 그들을 채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비잔티움이 이방인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금전적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수한 순례자를 포함한 외부인들은 제국 내의 잘 갖춰진 병원, 오락시설, 숙소 등과 같은 편의시설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이처럼 외부인을 향한 (오만함이 아닌) 적극적인 개방성 덕분에 가능했다. 비잔틴이 다양성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유익은 자체적,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모순의 해결이었다. 용병(傭兵)은 그 대표적 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나 루소(Jean-Jacques Rousseau)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용병제는 비잔틴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택한 현실적 방안이었다. 다양성은 이처럼 한 조직과 사회의 필수조건을 가장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2. 무굴(Mughal)제국

16세기 초 인도는 힌두나 무슬림 군주가 다스리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곳에서 칭기즈칸의 후손인 자히루딘 무하마드 바부르(Zahir ud-din Muhammad Babur) 1526, 델리(Delhi) 왕조의 마지막 술탄을 물리치고 300여 년간 인도를 지배하게 되는 무굴(Mughal)제국을 세운다. 하지만 탁월한 정복자 바부르는 뛰어난 통치자는 아니어서 새로운 정권 수립 후 필수적인 개혁을 등한시한 채 4년이라는 짧은 통치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530, 바부르의 장남 후마윤(Humayun) 23세의 나이에 광대하지만 불안정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스스로 뛰어난 전사는 아니었지만 전쟁 경험이 풍부하고 지적이며 경건하고 무엇보다 성실했던 이 젊은 군주는 북인도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망명길에 오르는 등 쓰라린 좌절 끝에 1555년 델리에 다시 입성했다. 제국의 영토는 되찾았지만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개혁은 여전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군사적 성공 외에 그가 이룬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였다.

 

예술과 문학을 사랑했던 후마윤은 델리에서 쫓겨나 있던 시절 페르시아문화를 접하고 이에 매료됐다. 당시 페르시아는 사파비(Safavid)제국의 타흐마스프(Tahmasp) 1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한때 몰두했던 예술에 대한 흥미를 점차 잃어버리고 대신 엄격한 무슬림이 되고자 했다. 이에 후마윤은 페르시아 예술가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그는 최초의 무굴 미술학교를 열었고 이 학교는 페르시아풍 양식에서 점차 발전해 악바르 황제 때에 자유로운 양식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후마윤의 비극적 죽음으로 아들 악바르(Akbar)가 즉위한 것은 1556년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뤘고 그 바탕 위에 개방과 관용을 더해 향후 100년 동안 위세를 떨치게 될 제국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개방성은 이미 선조들에서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중앙아시아는 원래부터 다양한 문화, 종교, 사상이 만나는 곳이었다. 바부르 역시 무슬림이면서도 다른 종교에 매우 관대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후마윤 역시 델리로 돌아온 후 대부분의 시간을 점성술, 지리, 수학 공부에 쏟으면서 별자리 관찰에 각별한 열정을 보였다.

 

악바르의 개방과 관용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 수피즘(Sufism)6 이었다. 후마윤이 죽기 얼마 전 아들의 스승으로 임명한 바이람 칸은 어린 왕자에게 페르시아어 교사를 붙어줬는데 그를 통해 악바르는보편적 관용주의라는 수피즘의 원칙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상을 악바르는 현실에서도 깨우치게 된다. 1567년 황제 악바르는 인도 북서부 라지푸트에 기반을 두고 오랫동안 제국을 위협해온 힌두인들의 요새 치토르를 포위했다. 4개월 남짓한 지루한 공격 끝에 마침내 황제의 군사들이 요새 안으로 진입하자 힌두인들은 마지막까지 격렬히 저항했고 다급해진 황제는 학살을 명령했다. 그러자 여자와 아이들은 라지푸트의 전통에 따라 적을 피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고 미처 뛰어들지 못한 자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었다.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악바르는 이 참극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라지푸트를 점령하자마자 악바르는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원수에서 동맹으로 변모시키고자 관용정책을 실시한다. 여러 명의 라지푸트 공주와 결혼해 자신을 계승할 자한기르를 낳았고 공주들에게 자신의 거처 안에 지은 작은 사원에서 원하는 대로 예배를 올리도록 허락해줬다. 라지푸트 왕과 왕자들을 자신의 궁궐로 초대해 머물게 하며 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점차 무굴제국을 인정하고 제국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제국 안정에 큰 보탬이 됐다.

 

악바르는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어린 시절부터 권력은 누구와도 나눠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은 그는 실무를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네 명의 장관이 각각 재정, 군사, 법과 종교, 왕실 업무를 맡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기존 이슬람문화에 외부 문화, 특히 선진 페르시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인도의 오랜 분열 전통이 통일된 언어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한 황제는 페르시아어를 궁정의 공식 언어로 채택했고 달력에는 이슬람 기원인 헤지라를 페르시아 기원 일라히로 표기하도록 했다. 나아가 원래 무슬림이었던 자신의 이슬람에 대한 헌신이 부족함을 비난하는 이슬람교 지도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국교로서 이슬람의 지위를 박탈하는 정책을 감행했다.

 

무엇보다 과감한 개방성이 나타난 것은 종교와 예술 분야에서였다. 우선 그는 스스로를 무슬림으로 칭하면서도 불교도나 힌두교도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비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되던 인두세(jizyah)를 폐지함으로써 무슬림들을 더 이상 특권을 가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무굴 예술가들로 하여금 아버지가 페르시아에서 초청해온 예술가들로부터 세밀화 기법을 배우도록 하는 한편 힌두 예술가들과도 교류하도록 했고 서구의 작품까지도 관찰하도록 함으로써 서서히 페르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창적인 양식이 탄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이처럼 문화적 창의성에 열심이었던 악바르는 (우리의 관점으로는) 놀랍게도 문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위대한 군주들이 그랬듯 서적을 중시하고 도서관을 지었으며 저작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인도 문화와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인도 문학들을 산스크리트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지적 열정도 남달라 이슬람교의 여러 집단이 모여 토론할 수 있는 건물을 세우고 토론 때마다 황제는 집단들 사이를 오가며 논쟁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을 초월하고자 모든 종교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자신의 역할은 모든 종교들을 하나의 종교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대담한 선언을 했다. 이에 따라 악바르는 토론장을 힌두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로 확대했다.

 

그러나 악바르는 자신의 대담한 개방과 관용을 왕위와 함께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데 실패했다.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은 후계자들은 현실에 안주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러한 보수성은 제국의 쇠퇴로 이어졌다. 아들 자한기르(Jahangir) 때에 이미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악바르의 다른 아들 쿠스라우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한기르는 쿠스라우의 동지들을 잔인하게 처형했고 그 희생자들 가운데 시크교의 존경받던 제5대 스승(guru) 아르준(Arjan Dev)이 있었다. 이때부터 시크교도들은 제국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됐고 결국 자한기르의 손자 아우랑제브(Aurangzeb) 때 심각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자한기르를 계승한 것은 유명한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 자한(Shah Jahan)이었다. 사치스럽고 우유부단했던 아버지와 달리 새 황제는 왕권 강화를 위해 엄격한 통치를 시작했다. 자신은 무슬림이면서도 그의 철칙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엄격한 이슬람 고관은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슬람 지도자들이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샤 자한은 힌두 사원을 허물고 대신 모스크를 세우며 힌두교도들의 전통을 간섭하기 시작하는 차별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무슬림은 겉옷의 단추를 오른쪽으로 채우는 데 반해 힌두교도들은 이제 왼쪽으로 채워야 했고, 악바르가 도입한 일라히는 폐지하였다.

 

다양성과 관련해 샤 자한이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타지마할(Taj Mahal)이었다. 타지마할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물론 돔(dome)과 그 주변의 차트리(chhatri)들인데 이는 페르시아 건축의 영향이다. 그런데 돔의 꼭대기에 세워진 장식(finial)을 보면 힌두교 영향을 받은 연꽃 봉오리와 연잎이 보인다. (사진 1) 또한 그 아래에 보이는 달은 이슬람 예술의 모티프이며 달의 양 끝과 수직 봉이 합쳐지면 힌두교의 신 시바(Shiva)의 상징인 삼지창을 연상시킨다. 기둥이 세워진 회랑(arcade)은 힌두 사원의 특징이며 이 위대한 건물을 짓는 데 참여한 많은 건축가와 장인들은 페르시아 출신이었다.

 

 

아내를 잃고 샤 자한이 중병에 들자 네 아들 사이에 치열한 왕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야심이 컸던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를 구금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 하지만 제국은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중심이 된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황제는 평생을 반란 진압에 소진하는 가운데 점점 더 정통 이슬람교로 기울며 다른 종교를 차별했다. 힌두 사원의 건축은 금지됐고 음악, , 음주를 규제했으며 급기야 인두세를 부활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과 다양성이 번영의 공식이듯 정치적 위기와 폐쇄성은 쇠퇴의 지름길이었다. 이때부터 제국은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다양성과 관련해 무굴 제국이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통치자의 판단이 갖는 중요성이다. 개방, 관용, 다양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을 추구할지 거부할지는 통치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수많은 통치자들은 정치적 위기에서 다양성보다는 소극적, 폐쇄적, 배타적 선택을 했으며 아우랑제브는 그중 하나였다.7 반면 악바르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리더의 전형적 특징들, 즉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적 태도(open-mindedness),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깊은 탐구심, 비전에 대한 확신, 분명한 목표, 적극적 추진력 등을 두루 보여준 예다.8

 

 

3. 이슬람 예술

인류가 행하는 정치, 경제, , 사회, 종교, 학문 같은 여러 행위의 영역들은 서로 각기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때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립적으로 발전하고, 지체하고, 우회하고, 이따금씩 퇴보한다. 이 가운데 가장 앞서가는 영역은 예술이다. 다른 어떤 영역보다 항상 새로운 것, 독창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양성에 관한 한 가장 적극적인 모습 역시 예술에서 볼 수 있다.9

 

앞서 인류 최고의 건축 유산 가운데 하나인 타지마할이 다양한 문화의 융합임을 보았지만 진정한 예술적 다양성은 이슬람 문명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만날 수 있다. 이슬람 예술에 없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독자적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바깥 모든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이슬람 예술은 누구보다독자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콥트(Copt)10 , 모자라브(Mozarab)11 같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지역에 살며 일했고 반대로 무데하르(Mudéjar)12 와 시실리의 아랍인들은 기독교인 시장에서 팔 물건들을 만들었다. 중국 예술의 영향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슬람 종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던 8세기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는 콥트인들이었고 이슬람 왕조는 모스크 건축에 기독교도들인 이들을 주저 없이 불러들였을 뿐 아니라 시리아로부터 정교(Orthodox) 소속 기독교인들을 불러와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등에서 궁궐 건축을 돕도록 했다. 특히 콥트인들은 고향인 이집트 경제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렸는데 그들의 귀금속 세공 기술과 직물 제조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진 2>는 순례자들이 갖고 다니던 물통 가운데 하나인데 섬세하기 그지없는 장식을 보면 놀랍게도 한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장면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수태고지13 , 그리스도의 탄생, 성당에서 이뤄진 마리아의 축제 등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이다. 이 물통은 자신의 성지순례를 추억하고 싶었던 부유한 기독교도의 주문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기독교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이슬람교도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 역시 유력하다. 어쨌거나 아랍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기독교 예술과 마주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사진 3> 역시 흥미롭다. 이 아름다운 대야에는 당시 시리아를 지배하던 술탄 알-말릭 아유브(al-Malik al-Salih Najmuddin Ayyub)에게 증정됐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찬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장식된 내용을 보면 예수의 생애를 소재로 한 다섯 가지 그림과 수도사와 성인으로 짐작되는 39명의 인물이 후광과 함께 묘사돼 있다.

 

 

 

비잔티움에서는 용병으로 활약했던 아르메니아인들 역시 뛰어난 건축가들로서 11∼14세기 중동을 지배했던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의 궁궐을 짓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들은 또한 직물과 카펫 기술도 뛰어나서 당시 페르시아 카펫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아르메니아 제품에 버금간다는 말이었을 정도였다. 17세기에 이르러서도 이들의 명성은 시들지 않아 당시 페르시아를 지배한 사파비 제국의 압바스(Abbas I) 황제는 아르메이나아인들이 이스파한(Isfahan) 근처 줄파(Julfa)에 정착해 살도록 했고 이들은 이슬람 예술을 위해 유럽의 기술을 전수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줄파는 페르시아 고급 공예와 교역의 중심지가 됐고 아르메니아인들은 귀금속 세공, 각종 직물 생산과 수출 등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결론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이든, 정교회 신자든, 콥트인이든 간에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왕조의 예술, 건축, 경제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와의 활발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이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중국이었다.14 압바스(Abbasid) 왕조와 당()나라 간의 해상무역은 언제나 호황을 누려 이슬람 세계에는 중국산 은 그릇과 유리 제품이 넘쳐났고 당의 항구도시 광저우 주민의 절반은 무슬림이었을 정도였다. 이슬람 장인들이 중국에서 가장 부러워한 수입품은 도자기였다. 술탄들이 즐겨 수집한 것 역시 청자나 청화백자 같은 도자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도공들은 중국의 모티프에 독창적 요소를 가미하기 시작했다. 당의 현자(賢者)는 포도주 병을 들고 있는 사파비 왕조의 시인이 됐고, 연꽃을 보다 추상적인 문양으로 변모시켰으며, 특별한 색채를 더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4세기에 이르면 이슬람은 중국 도공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지에 이르렀다.15 채색 무늬 도자기가 아마도 그 예일 것이며 그 밖에도 중국 도공들은 이슬람 제조 기술을 배우고 이슬람 세계로부터 코발트 광석과 유약을 바르기 전에 칠하는 코발트 안료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 세계가 보여준 다양성과 개방은 때로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아예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특히 군사적 필요에 따라 외부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이슬람 지역은 이에 따른 정치적 변화들을 겪어야 했다. 고대 중동지역의 주인공은 페르시아인들이었고 이후 8세기부터 이슬람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면서 아랍인들이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투르크(Turks)인들이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간 끝에 셀주크 부족이 투르크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에는 또 오스만 투르크가 중동을 통일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한편 오스만 투르크가 14세기에 창설한 재니세리(janissary)는 정복지의 기독교도 노예 어린이들을 데려와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훈련시킨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오스만이 치른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 끝에 점점 세력이 커져 18세기에는 황제들의 개혁을 거부하면서 그들을 살해하거나 폐위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격동 가운데서도 이슬람 문명의 예술에 대한 개방성과 다양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한 군주의 의지의 결과나 법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예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 때문이었다. 다른 어떤 인간 활동보다 발전 지향적인 예술은 그 어느 장벽도 쉽게 넘나들 수 있음을 이슬람 문명은 보여줬다. 따라서 이슬람 예술의 예는 다양성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통치자가 조심스러워해야 할 영역과 반대로 최대한 적극적이어야 할 영역에 대한 원칙을 보여준다. 특히 요즘처럼 예술과 문화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시대에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를 필요로 하는 기업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에 있어서 앞서 갈 수 있는 열쇠는 역시 다양성에 있다. 최근 한국 대중음악과 드라마가 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들도 이내 우리 문화 속의 코드를 찾아내 복제할 것을 예상한다면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추구해야 함은 새로운 문화의 선두주자로서 당연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4. ()의 수도 장안

실크로드의 시작점 장안이 활기 넘치는 국제도시였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618∼907)과 교류한 국가는 많을 때에는 300여 개 국이나 됐을 정도였다. 신라만 하더라도 혜초, 의상, 원측과 같은 고승들이 당에 유학해 발자취를 남겼다. 이처럼 장안은 우선 불교의 중심지로서 각국의 승려들이 모이는 구심점이었을 뿐 아니라 서역16 , 신라, 발해, 일본의 상인, 사신들이 수시로 드나든 국제도시였다.

 

실크로드가 개척된 한()대에 이미 서역인들의 출입이 시작됐지만 당대에는 아예 장안에 거주하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티베트인들이 늘어나 부유한 당 귀족들은 중앙아시아인 마부와 낙타몰이, 인도인 요리사, 박트리아(Bactria)17 , 시리아인 가수와 배우를 고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외국인들을 위한 당의 적극적 정책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가 법률이다. 당대 법전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분쟁 발생 시 그들의 법에 따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다.

 

이러한 서역과의 활발한 인적 교류 가운데 당은 의식주에서부터 놀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남녀 모두 소매깃이 좁고 몸에 달라붙는 호복(胡服)을 입고 머리에는 서역 스타일 모자를 썼으며 템포가 느린 중국 전통 무용 대신 빠르고 활발한 호무(胡舞)를 즐겼다. 새로운 춤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서역 무용수의 화장과 의상을 모방했고 여성들의 남장이 유행했다. 후한(後漢) 이후 유행한 서역의 밀가루 음식 또한 당대에 이르면 그 종류가 크게 늘어나 장안의 시장에는 호병(胡餠) 파는 가게가 즐비하였으며 포도주 또한 인기였다. 황제와 귀족들은 폴로(polo)에 열광했고 서역에서 온 마술사와 곡예사들의 공연은 성황을 이뤘다. 다양한 종교도 유입돼 북위(北魏) 시대에 전해진 조로아스터(Zoroaster)교는 당대에 이르러 이를 믿는 페르시아인들을 위한 사원이 지어질 정도였고 그 외에도 네스토리우스(Nestorius)18 파 기독교, 마니(Mani)19 등이 소개됐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농업 문화가 주류였던 당에 유목문화와 목축문화가 유입되면서 7세기의 당은(19∼20세기를 제외하고) 외부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격동의 시대가 됐다. 기마를 이용한 군사전술, 의자와 탁자를 기본으로 하는 생활방식, , 염소, , , 낙타를 가축으로 관리하는 농경적 목축 등이 확산됐고, 특히 말을 모티프로 한 그림과 조각을 통해 새로운 예술 기법의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중국 내부의 교류도 활발했다. 장강(양쯔강) 남쪽으로부터의 세금을 원활하게 장안으로 운반하기 위해 건설한 수송 시스템이 만들어지면서 장안의 두 시장,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에는 전국의 물자를 취급하는 도매상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상류층의 저택에는 강남풍의 정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고급 강남 도자기가 유행했으며 차를 마시는 풍습은 귀족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두루 유행했다.

 

이처럼 활발하던 장안은 현종(재위 712∼756) 후기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양귀비에게 빠진 황제의 실정, 무거운 세금으로 인한 농민층의 몰락, 혼란을 틈탄 변방 민족들의 침입 등으로 대제국은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751년 탈라스전투에서의 대패로 말미암아 당은 서역을 향한 확장을 포기했고 안사의 난 이후 침체는 심화됐다. 9세기에 토번 등과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면서 대외관계가 악화되자 당에는 국제주의 대신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한인(漢人) 의식과 중국 전통지향적인 문화가 자라나게 됐다.

 

당이 다양성으로부터 거둔 가장 큰 유익은 상업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문물의 유입에 따른 시장의 확대는 당연히 물품의 생산과 공급 증대를 낳았고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익을 얻기 위해 당이 외국인에 대해 취했던 개방적 조치들을 보면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소극적인 느낌이 든다. 거대한 제국의 수도라는 사실만으로 외국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당이 그토록 적극적이었다면 우리는 외국의 인재, 고급 인력을 (고액의 연봉 외에) 어떤 자원(resources)으로 품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20

 

 

 

5. 결론

아랍 세계에서 맘루크, 재니세리의 예들이 보여준 것처럼 다양성이 곧 성공은 아니다. 하지만 비잔틴과 악바르의 경우처럼 정치적 업적을 이룬 많은 문명과 통치자들은 다양화를 통해 그 업적을 안정적으로 정착시켰다. 다양성은 물론 기존의 특권세력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통치자의 카리스마와 통제력이 부족할 때 그것은 위험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활용할 만큼 인재의 다양화는 정치적으로 유용했던 것이다.

 

개방과 관련해 통치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위대한 통치자들의 다양성에 대한 태도는 오만함보다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다.21 평생을 전쟁 속에 살았고 문맹이었던 악바르가 제국 완성 후 문화와 예술에 보인 열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의 한 전직 대통령은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개방적 리더십은 조직과 사회의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다양한 구성원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조율할 것인지에 대한 예술가적 안목과 강력한 추진력(카리스마)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22 반면 안정된 유산을 물려받고 현실에 안주한 보수적 후계자들은 정치적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보수적, 배타적 반응으로 대처함으로써 위기를 악화시키곤 했다. 통치자에게 개방과 관용을 통한 문화와 예술의 번영은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유익이었고 따라서 제국의 안정에도 기여했다.

 

그렇다면 다양성을 가로막는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한 가지였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적어도 우리에게 이러한 위기가 폐쇄적 대응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두 번째는 우리끼리 할 수 있다는 생각, 우리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하지만난타’, 오스트리아에서 성공한 요리사 김코흐트, ‘뽀로로같은 우리에게서 나왔으되 우리 색깔이 짙지 않은 성공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세 번째는 변화와 새로운 것은 불편하다는 태도다. 신대륙에서 수입한 옥수수와 감자는 기근이 잦던 유럽으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구황식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유럽인들의 식탁에 용납되기까지는 150여 년의 세월이 걸렸고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다양성은 자체적,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 문제와 모순을 해결해주는 열쇠다. 때로는 새로운 문물이 기존 위계질서와 통합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은 최고통치자나 서민보다는 상층과 중간계층의 이른바 기득권 집단의 개혁에 대한 저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성의 핵심은 근원에는 인적(人的) 다양성에 있다. 다른 집단과 문명이 폐쇄성을 추구할 때 나에게 기회가 오는 경우가 있다.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위그노, Huguenot)을 박해하자 이들이 홀란트(Holland)로 이주해 그곳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우연이며 우리는 적극적으로 인재의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최근스펙의 유행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비슷한 스펙을 갖춤으로 인해 오히려 획일적이 되어가는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 수십년 동안 유지되고 있는 미국 대학생 선발과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선발 요건 중 하나가이 학생이 얼마나 oo학번의 다양성에 기여할 것인지인데 이를 판단하기 위해 요구하는 것이 자기소개서(essay). 명문대일수록 참신한 질문들을 주고 여러 개를 쓰도록 함으로써스펙에 보이지 않는 학생의 잠재성을 보고자 한다. 2012년 시카고대의 예를 보면무엇보다, 적을 선택함에 있어 신중하라”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말을 인용하면서역사와 예술은 영웅들과 그들의 적으로 가득하다. 당신과 당신의 가장 강력한 적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해 보라고 돼 있다. 나만의 개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다른 사람의 개성과 어떻게 조화할지, 무조건 배척하거나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이 더불어 살며 각각의 장점들을 극대화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단일민족이라는 담론이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스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개방, 관용에 관한 우리나라의 잠재력은 큰 편이다. 서두에서 소개한 개경이 그 증거일 것이다. 반면 우리의 가장 큰 위협이자 이웃인 중국은 얼핏 편협한 민족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에 맞서 더욱 위험한 국수주의로 대응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중국은 중화사상을 온 세계에 과시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주경기장 건설을 스위스 건축가들23 에게 맡긴, 세계로 손을 뻗되 동시에 세계를 품으려는 과감한 나라라는 점이다.다양성은 이미 역사 속에서 숱한 예가 있기에 새삼스러운 현상이다. 특히나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위기를 극복한 우리에게 지금은 개방과 관용의 시점이며, 따라서 다양화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1000년 전 개경에서 나타났던 우리의 다양성, 개방, 관용이 더 이상 잠재력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백종율 클리오아카데미 원장 jypaik59@naver.com

필자는 성균관대 사학과와 미국 코넬대, 아이오와대 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성균관대와 한림대에서 강의했다. 주 연구 분야는 문화사, 18세기 유럽사 등이다. 삼성인력개발원의 역사교육 콘텐츠를 개발했고 다수의 잡지에 시사와 역사 관련 글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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