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델’이 ‘쿨∼한 델’로 대변신

36호 (2009년 7월 Issue 1)

최선의 위기관리는 물론 위기가 아예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차선책은 이미 일어난 위기 사건에서 배워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다. 똑같은 경험을 하고도 위기 학습 여부에 따라 어떤 기업은 위기를 가치 있는 ‘수업료’로 삼고, 어떤 기업은 헛된 ‘실패 비용’으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델(Dell)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특히 웹 2.0 시대에 위협적인 위기 사례들을 앞서 겪었고, 이로부터 진지한 학습을 한 사례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2007년 10월 미국의 비즈니스위크는 ‘듣기를 배우는 델(Dell learns to listen)’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블로그와 소셜 미디어로 소비자들이 힘을 얻는 시대에 델은 최악에서 최고로 도약했다.” 비즈니스위크는 마이클 델 회장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델의 위기와 아주 독특한 인연을 맺은 제프 자비스라는 인물이었다. 델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델의 3가지 위기 사례들
사례 1 2005년 6월 21일, 저널리즘 교수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로거인 제프 자비스는 ‘거짓말하는 델, 짜증나는 델(Dell lies, Dell sucks)’이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얼마 전 새로운 델 노트북을 샀다. 구매 후 4년 동안 고장 났을 때 집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패키지에 많은 돈을 지불했다. 이 컴퓨터는 엉망이고, 그들의 서비스는 온통 거짓말투성이다. 컴퓨터 하드웨어와 관련해 나는 모든 종류의 문제를 겪고 있다. 과열, 네트워크 장애, 중앙 처리장치(CPU) 문제…. 델은 멍청이다. 그런데 정말 나를 짜증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델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서비스 요원이 내 집을 방문하게 되면 부품을 갖고 올 수 없다며 차라리 컴퓨터를 그들에게 보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쓰레기 같은 컴퓨터 때문에 허비한 시간과는 별도로 7∼10일 동안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는 2주를 까먹는 꼴이다. 엉터리 델, 거짓말쟁이 델….”
 
이 글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제품에 대한 불만을 인터넷에 올릴 때 제목을 ‘…sucks’라고 붙이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됐다. 현재 구글에 ‘Dell sucks’라고 치면 무려 200만 개가 넘는 글을 검색할 수 있다.
 
사례 2 2006 6 21, 영국의 뉴스 사이트 ‘더 인콰이어러’에 델 노트북이 일본의 한 회의장에서 폭발해 불타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델의 배터리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인하던 델은 결국 8월에 문제점을 인정, 사과하고 한국 등 전 세계에서 배터리를 리콜 한다. 이 사진은 당시 회의장에 있던 독자가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했다.
 
사례 3 2007 6 14, 소비자 권리 보호를 주로 다루는 유명 블로그 ‘더 컨슈머리스트’는 ‘전임 델 영업 매니저의 22가지 고백’이라는 기사를 올린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델에서 근무했던 한 매니저가 델과 거래하는 데 유용한 조언들을 열거한 기사였다. 이는 내부 사람만이 알 만한 정보였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델 소속 변호사가 e메일을 보내 기사의 특정 부분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컨슈머리스트는 그 e메일 내용을 그대로 기사화해 델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델의 위기 상황 후속 조치들
‘최악에서 최고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은 델의 후속 조치들을 살펴보자.
 
①소비자 불만 접수 프로세스 개선 델은 우선 고객 불만 처리를 강화해 이 서비스에 지출하는 비용을 무려 35% 늘렸다. 고객이 불만 처리를 위해 전화를 걸어 고객 서비스 직원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줄이려 하기보다는, 충분히 듣도록 노력했다. 과거에는 전화를 하면 수차례 다른 부서나 직원에게 돌려 고객을 짜증나게 했지만, 전화를 걸면 그 자리에서 원스톱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이로써 불만 접수 소비자들이 다른 곳으로 수차례씩 전화를 돌려야 하는 일을 18% 낮췄다.
 
②찾아가는 고객 불만 서비스 마이클 델 회장은 전화 등을 통해 회사로 직접 불만을 말하는 소비자들 외에 블로그에서 불만을 털어놓는 이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6년 3월, 그는 델의 기업 커뮤니케이션 팀장에게 품질에 만족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인터넷으로 적극 찾아내 델의 기술자들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제품 기술자로 일을 시작해 중간에 PR부서로 옮긴 리오넬 멘차카가 떠올랐다. 기술적인 측면과 대고객 커뮤니케이션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멘차카는 여러 부서에서 차출한 사람들로 ‘블로그 해결팀’을 구성, 고객의 불만을 찾아내 기술자가 직접 해결하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델의 ‘찾아가는 불만 서비스’를 경험한 소비자 블로거들은 자신들의 긍정적 경험을 또다시 블로깅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에서 델에 관한 부정적 글은 기존의 49%에서 22%로 줄었다.
 

③기업 블로깅으로 소비자와 대화 시도
2006년 7월, 델은 기업 블로그를 연다. 때마침 일본 회의장에서 폭발한 노트북 문제를 다뤘다. 멘차카는 델의 기업 블로그에 ‘불타는 노트북’이라는 대담한 제목의 글을 올려 노트북 폭발 사건과 델의 추후 조치에 대해 솔직하게 썼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델의 블로그 책임자가 기업 블로그에 자사 제품에 대해 부정적인 제목을 올렸다는 점이다. 기존의 기업 홍보 마인드로 보면 결코 바람직한 조치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글은 웹 2.0 시대에 기업이 자신들의 부정성에 대해 얼마만큼 공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④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사과하기
컨슈머리스트 사례에서 보듯, 델은 언론사와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내부 변호사를 앞세워 ‘법적인 사고’로 접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소셜 미디어가 발달한 투명성의 시대에 압력을 행사하는 듯한 변호사의 e메일 내용이 그대로 기사로 나갈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전 영업 매니저의 ‘22가지 고백’이 컨슈머리스트에 올랐을 때, 델은 기사를 빼려 하기보다는 그 내용 중 적절치 않거나 사실과 다른 점을 자사의 블로그에서 밝혔어야 했다. 결국 델의 최고 블로거로서 멘차카는 첫 기사가 나간 이틀 뒤 ‘델의 23번째 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했다. “델은 이미 공개된 정보를 관리하려 하기보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고치려 했으면 됐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델의 위기 사례에서 얻는 교훈
이와 같은 델의 위기 및 극복 사례에서 우리 기업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전환해야 한다. 고객 불만이나 위기관리는 그동안 ‘수동태 모드’였다. 즉 소비자나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 가서 반응했다. 하지만 델의 사례는 이제 문제점을 찾아가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최고경영자(CEO)의 인식 전환이나 지원 없이는 새로운 틀의 위기관리를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델이 2005년 블로그 공간에서 험악한 평판을 얻었을 때, 마이클 델이 이를 무시했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면 지금의 델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블로그 해결팀’을 구성했고, 소비자 서비스 개선에 예산을 늘렸다. 나아가 델의 최고 블로거가 ‘불타는 노트북’이라는 과감한 제목의 글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게 고객과 대화를 나누는 문화를 만들었다. 조직이 위기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을 실행할 수 있으려면 CEO부터 인식을 바꾸는 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셋째, 미디어 기업이 돼야 한다. 최근 기업들은 소비자들이 직접 만들어내는 콘텐츠인 손수제작물(UCC)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개인뿐 아니라 기업도 뉴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미국 CBS 뉴스의 전 사장인 앤드류 헤이워드가 말한 “오늘날 모든 회사는 미디어 회사다”라는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최근 기아자동차의 해외 블로그(kia-buzz.com)나 농심(blog.nongshim.com), LG전자(blog.lge.com), 풀무원(blog.pulmuone.com) 등 주요 기업들이 블로그를 만들어 소비자들과 친밀한 대화에 나서고 있는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위기와 위기관리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델은 이 전환기에 힘든 경험을 했고, 그로부터 교훈을 배워 위기관리 혁신을 하고 있다. ‘눈치 빠른’ 기업들은 델의 위기 상황을 자신들의 기업에서 반복하지 않도록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마켓대에서 PR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연구 중이다. 글로벌 PR 컨설팅사인 에델만 한국 대표를 거쳐 더랩에이치 대표로 있으면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에게 위기관리 노하우를 전하는 코칭과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주 위기는 ‘재수 없는 일’이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나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위기관리 시스템을 철저히 정립해놓고 비상시에 현명하게 활용하는 기업은 아직 드뭅니다. 위기관리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가 실제 사례들을 중심으로 기업의 위기관리 노하우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겪은 위기관리 사례를 공유하고 싶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김 대표의 e메일로 보내주십시오. 좋은 사례를 골라 본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