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역사

풀에서 배우는 적응 전략

347호 (2022년 0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년 대부분이 추운 겨울인 툰드라 지역에서는 나무보다 풀이 더 강하다. 작고 약할 것이라 생각되기 쉬운 풀은 사실 강인한 적응력을 갖고 있다. 한 번 태어나면 오래 사는 전략을 추구하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짧게 사는 대신 종(種)이 번성하게 하는 전략을 개발한 덕분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인간 사회 역시 신속하게 피드백을 받아 신제품을 짧은 주기로 출시하는 등의 ‘풀의 전략’으로 전환 중이다. 세상은 언제나 위기라는 전제로 삶을 기획하는 풀의 전략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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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시인 김수영(1921∼1968)은 ‘풀’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권력과 민주가 엄혹하게 맞서던 시절, 이 시는 민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잘 나타낸 시로 애송됐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며,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내용은 민초의 속성과 마음과 희망을 상징하는 데 나무람이 없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나기 20일 전 쓴 마지막 작품이었던 데다 세상을 떠난 후에 발표됐기에 시에 나오는 바람과 풀이 누구를(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애송하던 시대의 마음을 따랐고 이런 해석은 굳어졌다. 이후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이 시를 연구한 많은 전문가와 평론가는 ‘풀과 바람=민중과 권력’이라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이를 상식화해 버렸다. 풀은 민중으로, 바람은 억압 세력으로.1

그런데 정말이지 세상은 변하는가? 얼마 전부터 이 시를 ‘새롭게’ 해석하는 현상이 ‘조용한 지지’를 얻고 있다. 권력에 억눌릴 수밖에 없지만 결국은 이겨 내고야 마는 민중의 생명력이 아니라 권력에 어쩌지 못하고 ‘알아서’ 순종하는 공무원들을 빗대는 것으로 말이다. ‘민중주의적 해석’에서 ‘영혼 없는 공무원 해석’으로 의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민중과 공무원은 조선 시대로 치면 백성과 관리이니 주체가 완전히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두 해석 모두 ‘풀=약자’라는 등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억눌리는 존재이건, 알아서 기는 존재이건 풀을 약자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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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그럴까? 풀은 진짜 약자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 약하디약한 존재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무엇보다 약자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세상에서 가뭇없이 사라져야 했을 텐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풀은 약하지 않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쉬운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식물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나무(목본, 木本)와 풀(초본, 草本)인데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세상에, 이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나무일 것이니 말이다. 나무는 크고 단단하고 오래 산다. 풀은 작고 약하고 짧게 산다. 비교하고 말 것도 없다.

하지만 기준을 달리하면 결론이 다를 수도 있다. 강하다는 기준을 단단함이나 하나의 생명체가 오래 사는 것으로 한다면 당연히 나무겠지만 기준을 적응력으로 바꾸면 나무보다 풀이 더 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뜨거운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황무지나 1년 대부분이 추운 겨울이라고 해도 좋을 툰드라 지역에서는 나무보다 풀이 더 강하다. 나무는 살지 못하지만 풀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쪽이 강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떨까? 풀과 나무 중 어느 쪽이 더 먼저 생겨났을까?

이번에도 역시 답은 쉬워 보인다. 백이면 백 모두 풀이라고 하니 말이다. 풀은 약하고 나무는 강하니 풀이 먼저 생겨났고 나무는 나중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틀렸다. 사실은 반대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훨씬 먼저 생겨났고 풀은 ‘아주 나중에’ 출현했다. 수치로 말하자면 3억 년쯤 정도 되는 간격이니 엄청난 차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질 것이다. 생명의 역사를 보면 보통 나중에 출현한 생명체가 더 진화한 경우가 많다. 개구리 같은 양서류보다 악어 같은 파충류가 그렇고, 이들보다 포유류가 더 진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나무보다 약해 보이는 풀이 훨씬 나중에 생겨났을까? 풀은 진화의 역사에서 예외일까?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가 보는 기준에서만 그럴 뿐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풀이 훨씬 더 진화적일 수 있다. 적응력의 폭으로 본다면 확실히 그렇다.

지구에서 식물의 역사는 4억7000만 년 전, 바다에 살던 식물들이 육지에 상륙을 시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육지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는데 이때 일부 바다 생명체가 텅 빈 신천지 개척에 나섰던 것이다. 4억2000만 년 전쯤 상륙에 성공한 주인공은 지금도 살아 있는 우산이끼였는데 나무는 이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4억 년 전쯤 나타난 것 같다. 이끼들보다 한층 진화한 양치식물들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건 바다와 환경 자체가 달랐기에 적응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2 예를 들어 바다에서는 단단한 줄기가 필요 없었지만 육지에서는 필수였는데 이런 것들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적응력을 기르고 나자 급속하게 번성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숲도 나타났다.3

이에 비해 풀이 출현한 건 지극히 ‘최근’이다. 소행성 충돌로 공룡이 멸종하기 전인 백악기 말, 그러니까 7000만 년 전쯤 나타나기 시작한 풀은 3000만 년 전쯤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초원이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이때부터 생겨났다는 얘기다. 또 초식공룡이라고 하면 풀을 먹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공룡들은 주로 나뭇잎을 먹었지 풀은 먹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초원을 달리는 공룡 역시 존재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에 출현한 생명체일수록 더 진화할 가능성이 많은데 풀은 도대체 어떤 진화를 했다는 걸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풀은 작고 약함을 전략화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

전 세계 대륙에는 거대한 초원들이 있다. 아시아의 몽골 초원이나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초원, 북미나 남미의 초원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광활해서 자동차로 달려도 끝이 없을 정도인데 이상한 건 초원만 끝없이 이어질 뿐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몇 날 며칠을 달려도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는 곳들이 많다. 초원이라고 하면 비옥함을 떠올리기 쉬운데 왜 이 푸른 초원에 나무가 없을까?

초원만 보면 사시사철 풍요로운 곳 같지만 이건 한 면일 뿐이다. 이런 곳은 대체로 긴 건기가 있다. 다시 말해 1년의 반은 건기이고 나머지는 우기다. 건기라고 하면 대체로 우리의 여름을 생각하기 쉽지만 6개월 넘게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고 햇빛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생명체가 살 수 없다. 나무들이 싹을 틔운다 해도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풀은 살 수 있다. 대부분의 생명체와 다른 전략을 개발한 덕분이다. 보통의 생명체들은 일단 태어나면 오래 사는 전략을 추구한다. 가능한 한 오래 살면서 후손을 많이 퍼트리는 식으로 말이다. 풀은 반대다. 이들은 개체의 생존 주기는 짧은 반면 종(種)이 번성하도록 하는 전략을 쓴다.

예를 들어 미국 서부의 데스밸리 같은 사막은 1년에 비가 오는 기간이 한 달도 안 된다. 나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이다. 도대체 한 달 동안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풀은 할 수 있다. 한 달 만에 싹을 틔우고, 성장하고, 짝짓기를 하고, 씨앗을 만든 다음, 이 씨앗에 자신의 생명력을 담아 전해주고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이들이 남긴 씨앗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 비가 오면 재빨리 자라나는 식으로 다음 생명을 이어간다. 나무나 우리 인간처럼 한 번 태어나면 크고 거대하게 살려고 하고, 가능한 한 오랜 삶을 추구하는 관점으로 보면 덧없는 삶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인 유전자’ 관점, 그러니까 삶이라는 게 사실은 유전자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훨씬 효과적인, 아니 사실은 진짜 혁신적인 생존법이다. 짧게 살아도 더 많은 후손을, 더 넓게 퍼뜨릴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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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막이나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북극 근처로 가면 나무는 없지만 풀은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풀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적응력에 관한 한 그 어느 생명체보다 진화한 능력을 갖고 있다. 풀들의 입장에서 보면 약하디 약한 건 우리일 수도 있다. 환경이 조금만 나빠져도 살지 못하니 말이다.

풀의 적응력은 보면 볼수록 놀랍다. 예를 들어, 우리 눈에는 풀이 하나로 보이지만 풀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1년만 사는 한해살이가 있고, 2년을 사는 두해살이, 그 이상을 사는 여러해살이 등이 그것이다. 환경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생존 주기를 좀 더 세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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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딱 한 해만 사는 한해살이 풀은 환경 변화가 극심한 곳까지 진출한다. 우리로 치면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싶은 영역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다. 앞에서 말한 데스밸리 같은 곳이 대표적인데 이런 곳은 환경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기회가 언제 올지도 모르거니와 온다 해도 짧다. 하지만 이런 기회까지 순발력 있게 활용한다. 딱 한 번일 수도 있는 기회이기에 ‘일생’을 걸고 모든 걸 빠르게 추진한다. 말 그대로 속전속결이다.

이에 비해 두해살이 풀은 환경 변화가 어느 정도 주기적인 곳을 공략한다. 여름에만 홍수가 나는 시냇가나 강둑, 산기슭 등이 그런 곳인데 이런 곳은 홍수 같은 위기가 주기적이기에 이것만 잘 넘기고 견디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해살이는 이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안정적인 곳을 찾는데 이들을 보면 환경 변화에 이처럼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생명체가 있을까 싶다.

길게 살고 싶은 우리에겐 이런 삶이 이해되지 않지만 생존 주기를 짧게 하는 전략은 상당한 장점이 있다. 환경이 요구하는 능력을 더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어서다. 생명체의 적응력은 보통 한 개체가 후손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데 생존 주기가 길면 필요한 적응력을 획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세대가 80살을 산다면 새로운 유전자를 획득하는 데 기본적으로 80년이 걸린다. 한 세대 만에 이런 유전자를 얻기 어려우니 필요한 변이를 획득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러는 동안 환경이 대폭 바뀌면 멸종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하지만 생존 주기가 짧으면 속도감 있게 세대교체를 할 수 있기에 변이 역시 빠르게 만들 수 있어 필요한 능력을 신속하게 갖출 수 있다. 불확실성이 큰 환경에서는 작고 약함이 우리 생각처럼 단점이 아니라 장점인 것이다. 작고 약함을 전략화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풀의 전략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바로 이런 전략이 우리에게도 점점 더 필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제는 ‘풀처럼 사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이제 불확실성은 가끔 들이닥치는 변수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우리 곁에 항상 있는 상수다.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 더 적합한 전략은 나무의 전략일까, 아니면 풀의 전략일까?

사실 세상은 이미 풀의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장을 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신제품 출시 패턴이 있다. 예전에는 신제품을 출시할 때, 주기적으로 일정 간격을 두고 출시했다. 시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고,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시도 때도 없이 내보낸다.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내보내 반응을 타진하고 피드백을 받아 신속하게 반영하는 추세가 일반화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하자면 나무의 방식에서 풀의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유는 하나.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소비자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트렌드가 순식간에 바뀌기 때문에 제품 생존 주기를 짧게 가지고 가면서 시장 상황이 변할 때마다 신제품에 반영하는 식으로 제품을 진화시켜야 뒤처지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공들여 만든 하나의 완성된 제품으로 승부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모험이다. 생존주기가 긴 생명체가 환경이 요구하는 능력을 만들어 내기 힘들듯 애써 완성품을 만드는 동안 시장 흐름이 바뀌어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낭패가 따로 없다. 일단 냈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포기하고, 괜찮다 싶으면 계속 진화하면서 시장이라는 환경의 요구를 반영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우리는 이미 풀처럼, 아니 풀의 전략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묘하게도 세계 최고 기업이라고 할 만한 구글의 전략을 보면 풀의 전략과 아주 흡사하다. 끊임없이 다양한 신제품을 내고, 이 중에서 반응이 좋은 것만을 추려 키운다. 보폭을 짧게 하면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전략이다.

그런 차원에서 풀의 관점과 풀의 방식으로 세상과 변화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비슷하다. 크고 거대하고, 단단하면서 오래 사는 걸 지향한다. 당연히 태풍이나 홍수 같은 위기가 가능한 한 오지 않는 걸 바란다. 나무에 위기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풀은 반대다. 풀들은 ‘세상은 언제나 위기’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삶을 기획한다. 위기라는 게 어쩌다 한 번 오는 게 아니라 언제든 올 수 있다고 여긴다. 나무에 위기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풀에 위기는 일반적인 상황, 즉 정상 상황이고, 위기가 없는 상황이 예외적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데스밸리의 풀들은 1년 중 11개월 동안 계속되는 사막 상황이 정상이고, 비가 오는 한 달간이 예외적인 상황이다. 이들은 이 예외적인 상황을 기회로 인식, 이걸 활용하는 데 집중한다. 위기에 대한 인식, 삶의 기준점이 다르다.

기준이 다르니 대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위기를 견디는 것으로 대처하는 나무들과 달리 풀들은 변하는 환경에 자신을 맞춘다. 1년에 6개월만 자랄 수 있는 환경이면 1년에 할 일을 6개월에 모두 끝내고, 심지어 데스밸리 같은 곳이라도 이 환경에 맞춰 한 달 만에 모든 걸 마친다. 적의 대군이 몰려오면 후퇴하고, 지치거나 물러가면 공격하는, 치고 빠지는 전략과 비슷한 ‘환경친화적’ 원리다.

위기를 전제하는 삶이기에 풀들은 위기가 부지불식간에 닥치거나 생각 이상으로 길어질 경우를 삶에 내재한다. 예를 들어 풀들이 만든 씨앗은 이듬해 봄에 모두 싹트지 않고 일부만 싹이 튼다. 썩거나 잘못 만든 게 아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올인하지 않는 것이다. 봄이 왔다고 모든 걸 걸지 않는다. 아마 오랫동안 세상을 겪어 보니 터득한 지혜일 텐데 풀들은 씨앗을 만들 때 껍질 두께를 다 다르게 한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주식 투자 격언과 같은 원리인데 다음 해 봄에 가진 걸 전부 투자하지 않고, 각기 다르게 싹을 틔우도록 해서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다. 세상이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인데 한꺼번에 싹을 다 틔웠다가 이상 기온이 닥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그래서 이렇게 위험을 분산한다. 우리도 하기 힘든 포트폴리오 전략을 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는 것이다.

땅속뿌리를 생존의 기지로 삼는 것도 그렇다. 나무는 성장을 시작하는 생장점이 줄기 끝에 있다. 하지만 풀은 생장점이 땅 위가 아닌 땅속뿌리의 가장 위에 있다. 그래서 줄기가 잘리고 부러져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 농사를 지어 보거나 화단을 가꿔 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른바 잡초들은 정말이지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온다. 앞에서 말한 휴면 씨앗들이 계속 싹을 틔우는데다 부러뜨리고 잘라도 생장점이 온전하기에 금방 다시 새로운 줄기를 올려보내는 까닭이다.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기든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나하나 개체로는 작고 약하기 그지없지만 전체로 보면 절대 작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다. 아니, 반대로 정말 질기고 질기다.

이런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풀들은 지구 전역에서 번성할 수 있었고 지구 또한 더불어 번성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이 번성한 덕분에 지구는 더 푸르러졌고,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포유류가 번성할 수 있었다. 다양한 초식동물이 존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사자나 호랑이 같은 포식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고 약하고 하찮게 보이는 풀 덕분에 풍요로운 생태계가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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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풀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도 지금처럼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인류의 문명은 1만여 년 전쯤 시작한 농경이 시초인데 농경의 기본인 쌀, 밀, 보리, 옥수수 같은 곡식이 다 풀 ‘출신’이다. 그래서 리처드 포티 같은 고생물 학자들은 이런 풀들의 혁신을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생태계 전반을 풍요롭게 하는 풀의 전략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풀의 전략이 주는 주요한 의미 두 가지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이렇다.

첫째, 아무 일도 없는 게 정상이 아니라 변화 가득한 상황이 정상이다. 위기를 기본으로 생존 주기를 설정해야 한다.

둘째, 생존 주기를 짧게 가져가는 진화 전략이 필요하다. 빠른 세대교체를 통해 항상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유전자(적응력)를 만들어내야 한다. 언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강이 있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살얼음판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잘 안다. 가능하면 건너지 말아야 하겠지만 건너야 한다면 작은 발걸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능한 한 신속하게 통과해야 한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불확실성 가득한 상황에서는 이 같은 풀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araseo11@naver.com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0호 Smart Worcation 2022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