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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기 기업 경영의 진화

프레임 유연성이 신사업 성공의 관건
앞에서 끌기보다 뒤에서 밀어야 효과

김은환 | 343호 (2022년 04월 Issue 2)

편집자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25년간 근무한 김은환 경영 컨설턴트가 전통 기업의 디지털 전환 전략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변화하는 기업의 전략을 들여다보며 디지털 격변기를 헤쳐나갈 경영 노하우를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Article at a glance

기존 오프라인 기업에 디지털은 기회이자 위협으로 다가온다.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는 본업 외 영역을 완전히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아닌 늘 모색하던 새로운 기회의 영역으로 보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프레임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프레임 유연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기업이 마련할 수 있는 장치는 다음과 같다.

1. 회사 내 실험적 시도에 대한 상사의 거부권을 폐지하는 등 신사업 영역에서 경영진의 개입을 억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2. 인력, 예산, 보상 배분의 범위(pool)를 달리하는 등 신•구 사업 간 제로섬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한계를 설정한다.

3. 옴니채널 전략 등 기존 사업과 신사업의 강점이 선순환할 수 있는 운영 시스템을 만든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전략적 의사결정 시 신사업을 우선순위에 둔다.



디지털 전환의 신화와 현실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시대적 화두가 된 것은 기존 오프라인 기업들에 기회이자 위협으로 다가온다. 신생 디지털 기업이 전통 기업의 덜미를 잡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 ‘disrupt(파괴하다)’는 미리엄웹스터 사전이 ‘주목할 만한 단어(Words We’re Watching)’로 선정할 만큼 현시대의 핵심 키워드가 됐다. 레거시 기업이라고 불리는 기존 전통 기업들 중 그 누구도 ‘disrupt’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디지털 전환은 단순히 위기에 그치지 않고 재난이나 파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경고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흡사 밀려드는 쓰나미 앞에 풍전등화처럼 버티고 있는 해안 도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안일한 타성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과도한 패닉에 빠지는 것이다.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 2022년 1∼2월 호에 실린 줄리안 버킨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의 분석은 그런 의미에서 경청할 만하다.1 버킨쇼 교수에 따르면 1995년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의 대부분이 2020년 포천 리스트에 어떤 형태로든 생존하고 있다. 1995년 이후 창업한 신생 기업으로서 이 리스트에 올라간 기업은 12개에 불과하다. 파괴적 혁신의 주역이라는 디지털 기업의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성적표다.

‘임박한 재난’이라는 수사법은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깨우고 타성을 깨뜨리는 경종이 될지 모른다. 이런 수사법을 들으면 끓는 물 속 개구리는 살고 미지근한 물 속의 개구리는 죽는다는 얘기도 떠오른다. 그러나 무작정 튀어 나가기만 하면 될까. 과도한 패닉과 성급한 대응이 오히려 실패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전환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다. 디지털 전환은 쓰나미가 아닌 빙하기에 가까운 현상일지 모른다. 빙하기는 하루아침에 온도가 영하 수십 도로 떨어진 파국이 아니었다. 기온은 수천 년에 걸쳐 조금씩 낮아졌고 가장 낮았을 때의 평균 기온이 현재보다 6도 정도 낮았다고 한다. 당시 동물들은 단기간에 두꺼운 털가죽을 진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기업의 디지털 전환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전환의 실제 모습이 과연 쓰나미인지, 아니면 빙하기인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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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 혁신 vs. 점진적 혁신’이라는
이분법의 오류

아무리 속도가 중요한 시대라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환경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면 과잉 대응으로 인해 오히려 화를 입게 된다는 점이다. 근본적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거론되는 범선과 증기선의 사례를 검토해보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범선의 돛을 늘리는 점진적 혁신이 오히려 배를 침몰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속도다. 증기선이 최초로 개발된 뒤 범선을 완전히 대체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짧게 잡아도 70년이다. 최초로 증기선이 출현했을 때 범선 사업자가 근본적 혁신을 위해 범선을 버리고 증기선으로 갈아타야 했을까? 70년 뒤에 있을 기술 대체에 대비해 너무 빨리 행동하는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 될 수 있다. 노키아의 심비안은 애플의 iOS를 앞선 최초의 모바일 운영체제(OS)였으나 회사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1980년대 아우디의 하이브리드카 역시 시기상조의 시도였다. 20세기 말 인공위성을 통해 위성통신망을 구축하려던 모토로라의 이리듐 프로젝트 또한 파산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의 실패는 모두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타이밍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기자동차는 기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시대를 대표하는 근본적 혁신의 주역이지만 아직까지 세계 시장 점유율의 10%를 넘지 못하고 있다. 범선 사업자들이 일시에 증기선으로 전환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동차 회사들도 전기차로의 전환을 신중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전기차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지만 신구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모호성의 시기는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 전기차가 자동차의 우세종이 되는 시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결국에는 분명 사라질 기술과 산업이라도 출구 전략은 간단하지 않다. 근본적 혁신이 답이 아니라면 점진적 혁신은 좋은 대안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어떤 때는 변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기도 한다. 후지필름의 CEO 고모리 시게타카는 디지털카메라의 부상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속도에는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년에 전체 시장 규모가 20∼30%씩 감소하는 추세가 계속돼 10년 만에 시장은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모두가 예상한 방향이었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였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빙하기에도 국지적으로는 혹독한 한파가 밀어닥치기도 한다. 이 모호성의 시기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근본적 혁신도, 전략적 혁신도 절대적 정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산업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산업도 예상된 시기에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전략은 각각의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일 따름이다.

홈에서는 공격하고
어웨이 게임에서는 회피하라

버킨쇼 교수는 디지털 전환을 맞은 전통 기업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본업 시장에 치중하는 것과 새로운 디지털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한 축으로 하고, 전략이 공격적인가, 방어적인가를 다른 축으로 하여 4가지 유형을 도출했다. 여기서 첫 번째 축, 본업 치중이냐, 신시장 진출이냐는 앞에서 살펴본 점진적-근본적 혁신의 구분과 일맥상통한다. 본업에 계속 머물면서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전략은 점진적 혁신에, 새롭게 등장하는 디지털 영역에 진출하는 것은 근본적 혁신에 가깝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추진하느냐다. 홈그라운드에서 ①공격할 것인가
②방어할 것인가, 어웨이그라운드에서 ③공격할 것인가 ④방어할 것인가, 이렇게 네 가지 전략이 있다. 결론적으로 최선의 전략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홈에서는 공격적으로 어웨이에서는 방어적으로 대응하라.”

앞서 강조한 대로 본업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지지 않는다. 단 본업을 수호한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본업의 강점을 증폭할 공격적 전략을 끊임없이 구사해야 한다. 몰락한 노키아와 코닥은 스마트폰과 디지털카메라를 초기에 시도한 후 실패하자 신영역과는 담을 쌓고 본업을 고수했다. 전기차 시대에 내연기관차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최근 폴크스바겐 등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엔진 효율과 배출가스 저감과 관련해 신기술을 내놓으며 환경보호 측면에서 전기차 제조업체와 경쟁하고 있다. 이들은 배터리 기술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를 지적하며 내연기관의 우월성을 강조한다.2 월마트는 오프라인 매장을 물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온라인 쇼핑몰과 대결하고 디즈니는 테마파크, 영화, 캐릭터 등의 콘텐츠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전략으로 차별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를 ‘더블 다운(Double Down)’이라고 하는데 도박에서 판돈을 키우는 것을 뜻한다. 적의 베팅에 굴복하지 않고 판을 키워 정면승부를 불사하는 것이다.

이는 얼핏 보면 돛을 너무 많이 다는 범선의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월마트의 물류 거점이나 디즈니의 콘텐츠는 시대가 바뀌면 사라질 돛이 아니다. 필수적인 경영 요소이자 디지털 플랫폼 기업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즉 오프라인 기업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인 것이다. 자신의 강점을 전면에 내세워 승부를 벌이는 것은 소멸할 사업에 대한 집착이 아닌 디지털 도전자가 갖지 못한 강점을 계속 진화시켜 새로운 사업 판도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시도다. 반면 기존 사업을 고수하면서 진입 장벽을 쌓는 데 골몰하는 것은 본업에서 방어 전략에 몰두하는 것으로 지속가능한 방법이 아니다. 전형적인 방법이 본업을 지키기 위해 디지털 신사업에 대한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것이다. 특히 법적 규제를 통해 신사업을 위축시키는 것은 당장 본업을 방어할 수 있겠지만 경쟁력 향상보다는 현상 유지의 태도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핀테크, 차량 공유, 배양육 등 최근 신사업에 대한 기존 업계의 규제 강화 로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 그 예다. 물론 업계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대응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저지할 수는 없다. 단순히 시간을 조금 버는 정도의 미봉책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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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치명적인 전략 오류는 디지털 시장에 진출할 때 나타난다. 낯선 영역에서 공격적 전략을 취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뉴욕타임스가 닷컴사업부로 페이스북과, GM이 차량 공유 서비스로 우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Bing이라는 검색 엔진으로 구글과 벌인 전면전이 그 예다. 모두 실패했다. 기존 기업이 태생적 한계를 지닌 채 낯선 세계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낯선 영역에서는 싸움을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후지필름은 필름카메라 소멸에 대응해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다. 이들은 필름 표면의 화학 처리 기술을 이용해 피부 화장품 시장으로 옮겨갔다.

본업을 유지할 때는 디지털 전환에도 살아남을 만한 자신의 역량을 발굴하고 오프라인 강점을 버팀목 삼아 디지털 도전자와 맞붙어야 한다. 반면 본업을 포기할 때는 파괴적 혁신의 주역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은 무모하다. 완만하게 진행되는 디지털 전환이 쓰나미 같은 재난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몇몇 오프라인 강자들이 이런 무모한 전략으로 요란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추락은 디지털 전환의 아이콘이 됐다. 디지털카메라 시장의 코닥, 스마트폰 시장의 노키아, 온라인 유통시장의 시어스, 토이저러스 등이 대표적인 패자들이다. 이들의 패배가 강렬히 인식돼 디지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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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의 핵심, ‘프레임 유연성’

디지털 전환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해서 큰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수천 년 동안 천천히 진행된 평균 기온 6도 하락은 사실 조금 서늘해진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다. 만약 지금 평균 기온이 6도 오른다면 전 지구적 차원의 대멸종이 일어난다고 한다.3 단 1도의 변화라도 생태계에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셈이다. 하루하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일어나는 변화도 가랑비에 옷 젖듯 기반을 침식하고 결국 지형을 뒤바꿔 놓는다. ‘천천히 진행되는 근본적 변화’인 것이다. 환경이 천천히 근본적으로 변한다면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그러나 천천히’ 변화해야 한다. 근본적 혁신을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 ‘프레임 유연성(frame flexibility)’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4 프레임이란 사물을 이해하는 큰 틀이다. 프레임이 변하면 대상을 보는 관점이 변하고 이는 전략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는 디지털 전환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떤 혁신이 근본적이냐, 점진적이냐라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 판단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프레임의 영향을 받는다. 즉, 혁신이란 어떤 기업에는 근본적이지만 다른 기업에는 점진적일 수 있다. 혁신을 점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혁신의 실행은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넷플릭스는 처음부터 영화 스트리밍 플랫폼 기업이 아니었다. 블록버스터처럼 비디오를 오프라인 매장에서 대여하진 않았지만 DVD를 우편으로 배달하는 업체로서 디지털 네이티브 기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트리밍 기술이 본격화되면서 영화 플랫폼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이 태동할 무렵 넷플릭스와 블록버스터의 운명이 갈렸다. 블록버스터는 신기술을 거부하고 본업을 고수해 사라지고 넷플릭스는 오늘날 자이언트 테크 기업으로 부상했다.

두 기업의 핵심 차이는 프레임에 있다. 오프라인 비디오 대여점이 주축인 블록버스터의 프레임에서 스트리밍이란 대체재나 경쟁재로 비춰졌다. 기존의 전략과 역량, 더 나아가 철학과도 상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우편배달을 하던 넷플릭스는 스트리밍을 새로운 기회로 봤다. 특히 인기 영화에 주력하던 블록버스터와 달리 컬트 영화팬들과 독특한 취향을 가진 고객을 타깃으로 한 넷플릭스는 고객 선호에 관한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스트리밍은 고객 정보를 실시간으로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신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곧 전략의 차이로 이어져 결국 기업의 운명을 좌우했다.

이것은 오프라인 사업의 관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인 스트리밍을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디지털 기술에 의한 근본적 혁신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 격차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는 스트리밍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적었다. 고객의 선호를 추적해 좋아할 만한 영화를 탐색하고 추천한다는 전략의 관점에서 영화 스트리밍을 목표 달성을 도와주는 기술적 솔루션으로 간주했다. 즉, 기술 차원에서는 근본적 혁신이지만 전략 차원에서는 점진적 혁신이었던 것이다.

후지필름의 변신도 마찬가지다. 필름 처리 기술을 피부 화장품에 적용하는 것은 코닥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코닥은 하지 못했을까. 여기서는 ‘경쟁을 대하는 태도’라는 프레임이 작용했다. 코닥은 카메라 산업의 원조이자 ‘영원한 1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만년 2등’이었던 후지필름은 1등을 따라잡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이른바 ‘언더독(underdog) 정신’이 있었다.5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따라잡을 수 없던 업계 강자 코닥을 어떻게든 이기려는 2인자의 마인드는 새로운 산업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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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카메라라는 본업 외 영역을 완전히 이질적이고 낯선 것으로 바라보는 것과 늘 모색하던 새로운 기회의 영역으로 보는 것은 프레임의 차이다. 후지필름의 변혁을 주도한 고모리 시게타가 회장은 회사의 신사업을 찾기 위해 전방위적인 탐색을 시도했다. 이런 와중에 피부 화장품이라는 분야는 근본적 혁신이 아닌 점진적 혁신의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가능한 신사업의 광범위한 영역을 체계적으로 탐색하고 있었고 피부 화장품이라는 신사업은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신사업을 새로운 기회의 영역으로 보고 유연하게 받아들였기에 후지필름은 코닥과 달리 변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신사업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두 기업의 결정적 차이였던 셈이다.

프레임 유연성을 발휘하려면

프레임을 유연하게 가져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오랜 기간 검증되고 확립된 전통 사업의 강자가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육지의 강자인 사자가 물속에서 사는 방법을 익히기가 쉽지 않듯 말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늘 보아왔다. 오프라인 강자들은 역사적 사명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고 디지털 전환의 무대는 신생 디지털 기업에 양보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물의 진화에서 보듯 진화는 칼로 베듯 깔끔히 진행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최종 결과를 보면 변화가 뚜렷이 보이지만 일상에서는 식별하기조차 어려운 작은 변화들이 쌓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실제 진화의 역사를 끌고 간 주역들은 시작과 끝에서 나타나는 순수한 종이 아닌 여러 종의 특성을 혼합한 하이브리드종이다. 디지털 전환 역시 오프라인 기업이 어느 순간 도태되고 신생 디지털 네이티브 기업이 무대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매우 긴 기간에 걸쳐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된 수없이 다양한 변종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양상일 가능성이 높다.

월마트는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모든 매장과 물류 창고의 정보를 위성으로 연결하는 크로스-도킹 시스템을 구축했다. 디즈니는 테마파크 입장객의 손목 밴드와 모바일 앱을 연동하는 디지털화를 통해 고객의 행동과 선호를 파악하고 반영해 재방문율을 10배 이상 끌어올렸다. 반대로 온라인 강자 아마존은 아마존북스, 아마존고 등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있다. 넷플릭스는 성공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디즈니와 같은 캐릭터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디지털도, 아날로그도 정답이 아님을 보여준다. 디지털 전환이 장기적인 트렌드이고 그 방향성이 분명하다는 점은 오늘날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두 패러다임이 공존할 때는 두 개의 프레임을 모두 볼 수 있는 양안이 필요하다. 외눈이 아닌 두 개의 눈을 통해 대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프레임 유연성이란 하나의 프레임에 매몰되지 않고 두 프레임을 겹쳐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기업에 어려운 과제다. 기업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며 난상토론을 벌이는 형태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진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일사불란한 실행력을 발휘하는 것이 기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업 조직은 여당과 야당이 대립하고 노선 차이를 유지하는 민주적 정치 체제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기업이 프레임 유연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증거는 곳곳에 있다. 오프라인 유통 강자는 왜 온라인 시장에서 실패할까. 두 개의 사업은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강점은 서로 부딪힌다. 브랜드 가치를 중시하는 오프라인은 온라인의 파격적 저가 정책과 충돌한다. 오프라인의 마진을 유지하면서 온라인 경쟁력을 높이기 어렵다. 결국 사업부 간 갈등이 발생하고 시너지가 아닌 아네르기(anergy, 무력증)가 발생한다.

온•오프라인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수닐 굽타 하버드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이를 위해 독특한 메타포를 제시했다. 바로 ‘예인선-모선 모델’이다.6 디지털 신사업이 예인선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디지털 신사업을 또 하나의 사업부나 별동 조직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 두 개의 프레임이 같은 레벨에 공존하면 상충이 일어난다. 따라서 디지털 신사업이 예인선 역할을 해야 하고, 이는 곧 회사의 리더십이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변이나 혁명을 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젊은 신세대 경영자가 회사를 장악하고 기존 경영자를 몰아내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예인선은 모선을 끌고 가지만 모선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않는다. 큰 배가 낯선 항구에 정박하는 것을 도울 뿐이다. 모선의 컨트롤타워는 예인선에 잠시 리더십을 위양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로버트 버겔만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양손잡이 조직론’에 따라 기존 경영자는 기존 기회의 활용(exploit)을 담당하고 신진 경영자는 새로운 기회의 모색(explore)을 담당하라고 말한다.7 기존 사업 운영은 기존 경영자가 담당하되 신사업 모색은 그 사업에 정통한 신세대가 담당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의사결정 권한이 주어지고 낡은 프레임으로 간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새로운 도전을 우선하고 기존 사업이 여기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앞으로 기업은 수많은 도전과 실험을 감행하는 실험실 같은 조직이 돼야 한다. 이런 조직 풍토를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이 바로 상사의 거부권이다. 실험적 시도를 상사로부터 승인받는 위계 구조는 모든 시도를 억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계의 전횡을 막기 위해 부킹닷컴은 어떤 실험이라도 통보만 하면 실행할 수 있도록 상사의 승인 절차를 폐지했다.8 회사를 혁신의 샌드박스로 만든 것이다.

이는 상사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경영진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샌드박스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영진은 실험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리스크에 대응하고 안정적인 경영을 유지할 책임을 지닌다.

최고경영자가 모든 의사를 결정하고 회사를 이끄는 기존의 모델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최고경영자는 기업을 이끄는 최상위 꼭짓점이 아닌 전진하는 회사의 토대로서 과감한 도전을 뒷받침하는 안전망 역할을 해야 한다. ‘경영자는 기획하고 실무자는 실행한다’는 통념을 깨야 한다. 경영자는 기존 사업의 안정적 운영을 담당하고 회사의 미래는 기업가정신을 가진 사내 혁신가들이 모색해야 한다. 회사의 비전과 큰 그림은 근엄한 최고경영자가 아닌 무모해 보이지만 혁신을 꿈꾸는 신진 세력이 그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계의 하단이 회사의 방향을 끌고 가는 역피라미드 경영이다.9

이는 프레임 유연성을 조직 내에 구현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위계 조직이 유지되고 최고경영자(CEO), 최고운영책임자(COO), 최고재무책임자(CFO)도 모두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존재한다. 그러나 최고경영진은 회사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닌 혁신의 샌드박스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예인선이 모선을 끌고 갈 때 모선은 단순히 엔진을 끄고 모든 것을 맡기지는 않는다. 거대한 모선으로부터 일어나는 와류가 예인선을 흔들어버리기 때문에 모선은 보조를 맞춰야 한다. 이것이 모선 선장의 역할이다. 과거 프레임으로 성공한 경영자가 미래 경영자의 후견인이 돼야 하는 것이다.

픽사의 앤드루 스탠턴 감독은 2009년 아카데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남겼다. “혁신의 안식처(safe haven)를 만들어 준 경영진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영화 ‘월-E’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10 비전과 미션을 공유한 일사불란한 기업 조직이 어떻게 프레임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열쇠는 경영진이 쥐고 있다. 경영진이 자신의 프레임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안정성의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다만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영역에서는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가 가져오는 파장에 대해서는 방어와 저항이 아닌 기존 역량과의 생산적인 접목을 고민해야 한다.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모르는 길고 느린 디지털 전환기에서 기업의 창의적 진화는 천천히 진행될 것이다. 이 과도기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멀리 보되 조급해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디지털 쓰나미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음 세 가지 제안으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신사업 영역에서 경영진의 개입을 억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회사 내 실험적 시도에 대한 상사의 거부권을 폐지하는 등 자의적 개입을 차단하는 제도를 구축한다.

둘째, 신•구사업 간 제로섬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한계가 설정돼야 한다. 인력, 예산, 보상 배분의 범위(pool) 자체를 달리해 경쟁을 사전에 차단한다. 별도의 독립 사업 단위로 만드는 것이 가장 명쾌하지만 시너지를 위해 긴밀한 상호작용이 필요할 때는 협업하면서 시스템은 분리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 기존 사업과 신사업의 강점이 선순환할 수 있는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유통 기업의 온•오프라인 결합 형태인 옴니채널 전략이 좋은 예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전략적 의사결정에서 신사업을 우선순위에 둔다. 즉, 신사업이 요구하는 방향과 기존 사업이 상충할 때는 신사업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기존 사업을 수정 및 조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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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이 최상위로 집중되는 기업이라는 조직에서 최고경영진의 프레임과 다른 프레임을 공존시키고 적절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 체제에 비유하면 삼권분립과 같은 견제 원리를 기업 조직에 구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구 권력이 각자 목소리를 내면서 어느 하나가 압도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단일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극복해야 할 난관이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시간이 많다는 점이다. 다양한 시도를 장기간 지속할 기회가 있다. 구체제를 일소하고 권력을 교체하는 혁명적 방식은 실행이 곤란할뿐더러 정답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느린 진화는 현상 유지, 즉 타성적인 기존 방식의 고수와 잘 구별되지 않는다. 프레임 유연성보다는 프레임 경직성이 현실에서 더 많이 목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레임 유연성이 단순히 경영자의 포용력과 혁신 의지만으로 달성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기업이 프레임 유연성을 갖추고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김은환 경영 컨설턴트•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serikeh@gmail.com
필자는 경영과학과 조직이론을 전공한 후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25년간 근무했다. 근무 중 삼성그룹의 인사, 조직, 전략 분야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현재 삼성 계열사 전체가 사용하고 있는 조직 문화 진단 툴을 설계하기도 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 및 컨설턴트로서 저술 활동과 기업 및 공공 조직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저서 『기업 진화의 비밀』로 정진기언론문화상 경제•경영도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격변기를 맞아 기업과 전략의 변화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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