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멸망의 위기에 빠진 백제를 도와 함께 싸웠다면 백제가 사직을 보존하고 고구려도 668년에 멸망하지 않아 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지 모른다. 고구려의 운명이 걸린 중대 상황에서 고구려가 백제의 위기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 조정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고 쉽게 결론짓는 것은 역사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1. 전쟁 상황 파악의 지연 2. 당나라의 기만전술 3. 예식의 배신이라는 백제의 돌발 상황 때문이라는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이 활약하던 시점에도 고구려군이 백제 부흥군과 협력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조정이 백제가 멸망한 뒤 고구려에 닥칠 위험의 크기를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편집자주 지식경제부 장관, 대통령 경제수석, 필리핀 대사를 역임한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한국사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의사결정을 전략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도 내가 역사 속 주인공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상상하면서 전략적 사고 능력을 점검하는 계기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본 연재의 콘텐츠는 필자의 저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2021)』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서양 경구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정작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서 역사의 흐름을 예측하고 미리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세대에 제대로 역사 공부를 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고 객관식 또는 단답형 문제를 풀어 점수를 따는 우리의 역사 교실은 역사를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흥미진진한 과목이 아니라 지겨울 정도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암기력 테스트 과목으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역사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특히 실패한 역사의 원인과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승자의 왜곡과 동거할 수밖에 없다. 전략적 관점과 함께 논리와 이성으로 역사 기록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승자의 왜곡에서 역사를 해방시키려는 노력도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문헌 고증과 유물 고증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 역사학자가 독점할 이유는 없다.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번 연재의 첫 번째 순서로 660년 백제의 위기를 방관하고 결국 멸망에 이른 고구려의 의사결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660년, 백제의 위기를 방관한 고구려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연합, 백제를 공격해 의자왕을 사로잡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는 전쟁 내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관했다. 고구려 입장에서 백제를 당군에 내어주는 것은 고구려의 남쪽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것이어서 군사 전략상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고구려는 왜 침묵했을까? 흔히 연정토, 남생, 남건의 반목과 불화11대막리지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연개소문이 노쇠해지자 연개소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와 아들인 남생, 남건 간에 권력투쟁이 심해져 조정이 분열되고 중요한 의사결정의 타이밍을 놓쳤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닫기로 설명되는 고구려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에 대외 관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얘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결론짓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투쟁이 없었던 왕조는 없다. 권력투쟁 때문에 왕조가 망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마추어적이다. 또는 무언가 다른 의도를 숨기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신라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고구려 조정과 백제 조정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진실을 가렸을 수 있다. 내부에서 서로 싸우다가도 외적이 침입하거나 위험한 상황이 예견되면 정쟁을 일단 멈추고 합심해 외부의 위험 요인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중일전쟁 기간 중에 적대관계인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단하고 함께 일본군과 싸운 국공합작이 좋은 예다.
백제의 멸망을 방관한 고구려는 그로부터 8년 뒤 역시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이 중국군을 상대하는 전술의 기본은 청야작전21대막리지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연개소문이 노쇠해지자 연개소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와 아들인 남생, 남건 간에 권력투쟁이 심해져 조정이 분열되고 중요한 의사결정의 타이밍을 놓쳤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닫기이었다. 백성과 식량을 모두 성안으로 소개시키고 당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못해 굶주리길 기다렸다 역습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년)도 굶다가 지쳐서 후퇴하는 수나라군대를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이다. 하지만 이런 고구려의 전술은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무용지물이 됐다. 백제의 멸망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한 신라로부터 자유롭게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된 당군은 더 이상 지난 시절, 식량 보급에 따른 어려움으로 번번이 정벌을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군이 아니었다. 상황이 역전돼 고구려군은 평양성을 공격하는 당군에 맞서 싸우다가 식량 부족으로 668년, 백기를 들게 된다. 소정방의 당군은 백제를 무너뜨린 데 이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도중에 식량이 떨어지자 신라에 SOS를 보냈다. 이에 김유신이 양곡을 실은 치중대를 인솔하고 고구려-신라 국경을 돌파해 소정방 군대를 아사 위기에서 구출해 준 것이 662년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이 역사적인 이유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중국군의 아킬레스건이 사라지는 동시에 고구려의 필승 전략이었던 청야작전이 더 이상 유효한 작전이 될 수 없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662년 소정방은 군대를 수습해서 고구려에서 물러났지만 668년 평양성 결전의 결과는 662년에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중경choijk1956@hanmail.net
한미협회장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