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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백제의 위기를 방관한 고구려의 패착
삼국의 운명을 가르다

최중경 | 323호 (2021년 0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고구려가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멸망의 위기에 빠진 백제를 도와 함께 싸웠다면 백제가 사직을 보존하고 고구려도 668년에 멸망하지 않아 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지 모른다. 고구려의 운명이 걸린 중대 상황에서 고구려가 백제의 위기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 조정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고 쉽게 결론짓는 것은 역사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1. 전쟁 상황 파악의 지연 2. 당나라의 기만전술 3. 예식의 배신이라는 백제의 돌발 상황 때문이라는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이 활약하던 시점에도 고구려군이 백제 부흥군과 협력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조정이 백제가 멸망한 뒤 고구려에 닥칠 위험의 크기를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편집자주
지식경제부 장관, 대통령 경제수석, 필리핀 대사를 역임한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한국사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의사결정을 전략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도 내가 역사 속 주인공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상상하면서 전략적 사고 능력을 점검하는 계기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본 연재의 콘텐츠는 필자의 저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2021)』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서양 경구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정작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서 역사의 흐름을 예측하고 미리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세대에 제대로 역사 공부를 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고 객관식 또는 단답형 문제를 풀어 점수를 따는 우리의 역사 교실은 역사를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흥미진진한 과목이 아니라 지겨울 정도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암기력 테스트 과목으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역사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특히 실패한 역사의 원인과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승자의 왜곡과 동거할 수밖에 없다. 전략적 관점과 함께 논리와 이성으로 역사 기록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승자의 왜곡에서 역사를 해방시키려는 노력도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문헌 고증과 유물 고증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 역사학자가 독점할 이유는 없다.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번 연재의 첫 번째 순서로 660년 백제의 위기를 방관하고 결국 멸망에 이른 고구려의 의사결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660년, 백제의 위기를 방관한 고구려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연합, 백제를 공격해 의자왕을 사로잡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는 전쟁 내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관했다. 고구려 입장에서 백제를 당군에 내어주는 것은 고구려의 남쪽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것이어서 군사 전략상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고구려는 왜 침묵했을까? 흔히 연정토, 남생, 남건의 반목과 불화1 로 설명되는 고구려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에 대외 관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얘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결론짓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투쟁이 없었던 왕조는 없다. 권력투쟁 때문에 왕조가 망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마추어적이다. 또는 무언가 다른 의도를 숨기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신라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고구려 조정과 백제 조정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진실을 가렸을 수 있다. 내부에서 서로 싸우다가도 외적이 침입하거나 위험한 상황이 예견되면 정쟁을 일단 멈추고 합심해 외부의 위험 요인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중일전쟁 기간 중에 적대관계인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단하고 함께 일본군과 싸운 국공합작이 좋은 예다.

백제의 멸망을 방관한 고구려는 그로부터 8년 뒤 역시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이 중국군을 상대하는 전술의 기본은 청야작전2 이었다. 백성과 식량을 모두 성안으로 소개시키고 당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못해 굶주리길 기다렸다 역습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년)도 굶다가 지쳐서 후퇴하는 수나라군대를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이다. 하지만 이런 고구려의 전술은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무용지물이 됐다. 백제의 멸망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한 신라로부터 자유롭게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된 당군은 더 이상 지난 시절, 식량 보급에 따른 어려움으로 번번이 정벌을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군이 아니었다. 상황이 역전돼 고구려군은 평양성을 공격하는 당군에 맞서 싸우다가 식량 부족으로 668년, 백기를 들게 된다. 소정방의 당군은 백제를 무너뜨린 데 이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도중에 식량이 떨어지자 신라에 SOS를 보냈다. 이에 김유신이 양곡을 실은 치중대를 인솔하고 고구려-신라 국경을 돌파해 소정방 군대를 아사 위기에서 구출해 준 것이 662년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이 역사적인 이유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중국군의 아킬레스건이 사라지는 동시에 고구려의 필승 전략이었던 청야작전이 더 이상 유효한 작전이 될 수 없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662년 소정방은 군대를 수습해서 고구려에서 물러났지만 668년 평양성 결전의 결과는 662년에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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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백제의 멸망이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릴 명백한 위험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의사결정을 내린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어느 정도의 추리력을 발휘해야 한다. 고구려 조정의 참전 여부 결정 논의와 관련해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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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1 상황 파악의 지연

우선 660년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해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육로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백제의 위기 상황을 제때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가설이 가능해 보인다. 즉, 백제 조정이 고구려 조정에 위기 상황을 상세히 알리지 않았다면 권력투쟁으로 혼란한 고구려 조정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늦어졌을 수는 있어도 멀리 왜국에까지 알려져 구원군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전쟁 내내 몰랐을 리는 없어 보인다.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 관계에 있었다면 고구려 사람들이 백제 안에 다수 존재했을 것이고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이나 뱃길을 통한 인편 서신 교환도 가능했을 것이다.

가설 2 당나라의 기만전술

당나라가 기만전술을 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나라가 이전에 그랬듯이 3 요동으로 군대를 움직여 고구려의 시선을 요동에 고착시키고 소정방 군대도 평양 앞바다에 상륙할 것처럼 하다가 기습적으로 백제에 상륙해 고구려 조정이 적기에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당나라의 기만전술이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일 기만전술로 요동에서 양동작전을 폈더라도 고구려군이 속았음을 안 순간 백제를 돕기 위해 달려왔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백제 영토로 진입을 시도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군의 고구려 공격은 의자왕을 사로잡아 백제를 평정한 이후에 개시됐다.

가설 3 백제의 돌발 상황

백제가 의외로 너무 일찍 무너져 고구려 조정이 대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삼국사기』 기록에 입각해 백제 최후의 보루인 계백 장군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가 영웅적으로 싸우다 아쉽게 패전하자 의자왕이 스스로 걸어 나와 항복한 것으로 백제의 멸망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측 사서인 『당서 소정방전』에 따르면 항복의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웅진성주 예식으로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의자왕이 부하의 배신으로 당군의 포로가 됐다고 주장했다.

『당서 소정방전』에는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성주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는 내용으로 기록돼 있다. 항복의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예식인 것이다. 이 상반된 역사 기록과 관련된 논란은 2006년과 2010년에 중국 시안에서 발견된 예씨 집안의 묘지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김영관 제주대 교수에 의하면 2006년의 묘지명 주인공은 예식진인데 이 묘지명의 주인공이 『당서 소정방전』에 등장하는 예식과 동일인물이다. 또한 2010년의 묘지명 주인공은 예식의 손자인 예인수인데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할아버지가 의자왕을 묶어 당나라 고종황제에게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식은 당나라의 대장군이 됐고 죽어서는 국가유공자들이 묻히는 특별한 장소에 묻혔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예식이 세운 공이 그만큼 크고 결정적이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계백의 부대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고 규모가 5000명이라는 역사 기록을 믿어야 할까? 기록대로 나라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결전에 5000명밖에 동원하지 못할 정도로 백제가 형편없는 나라였다면 당나라 조정이 배신자 예식을 그렇게까지 예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설 4 고구려 조정의 오판

끝으로 고구려 조정이 백제가 멸망한 뒤 고구려에 닥칠 위험의 크기를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다. 400년에 광개토대왕은 신라가 가야와 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경주까지 내주고 멸망 위기에 몰렸을 때 구해준 이후 오랜 기간 신라를 고구려 영향력 아래 뒀다. 이처럼 고구려는 신라를 신하의 나라 정도로 낮게 보고 있었기에 신라가 당군과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할 가능성을 놓쳤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남쪽의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이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의 시너지 효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수 있다. 그래서 신라가 당나라 군대의 아킬레스건인 식량 보급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당군이 고구려군에 대해 절대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시나리오를 간과했을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총력을 기울여 벌인 두 차례의 고구려 정벌전쟁에서 승리했던 기억도 고구려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방심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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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통일인가, 삼국 몰락인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추론한다면 네 번째 가설, 고구려 조정의 오판이 가장 합리적인 가설로 보인다. 만일 나머지 가설이 진실에 가깝다면 나중에 백제 부흥군이 활약하던 661년부터 664년 사이의 기간에 고구려군이 적극적으로 백제 부흥군을 도와서 연합작전을 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역사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제 부흥군이 한때 수도 사비성을 포위 공격해 당군을 위기로 몰아넣어 당나라가 원군을 보낼 정도로 세력을 떨쳤는데도 고구려군은 여전히 침묵했다. 이런 고구려군의 침묵에 대해 이호영 단국대 국사학과 교수는 여제동맹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642년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키자 신라 조정이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군을 요청한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여제동맹이 있었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4

660년 고구려 조정의 오판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강역을 한반도로 제한하는 출발점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 계승을 선언한 발해가 고구려 멸망 후 30년이 지나 698년에 건국됐지만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많은 고구려 신민이 죽고, 중국으로 끌려가고, 신라로 망명함으로써 만주 지역의 민족 구성에서 고구려의 색채가 약해지고 여진족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됐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발해 다음으로 일어난 왕조가 여진족의 금나라라는 역사적 사실이 만주 지역에서 옅어진 고구려의 색채를 말해주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작전을 편 것은 이민족을 끌어들여 제 민족을 배신한 도덕적 결함이 있는데다 대동강과 원산을 잇는 선 이남의 좁은 지역을 획득하는 데 한정됨으로써 통일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오히려 삼국의 몰락이라고 표현하는 게 현실에 부합된다.

신라가 외교력을 발휘해 당나라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소중화사상에 물든 자들의 목소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고구려 정벌이 숙원사업이던 당나라에 신라가 번신을 자청하고 협공을 제안한 것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은 것이어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사 시간에 신라 중심으로 삼국시대의 역사를 교육하며 신라가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룬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억지를 쓰는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에 힘을 실어줄 뿐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가 한반도 내부의 중국 식민지(한4군 중 특히 낙랑군)와 일본 식민지(임나일본부)에서 시작됐다고 강변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사관을 합리화시키는 중대한 실책이다. 이러한 실책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시정도 되지 못하는 현실을 냉엄하게 짚어보고 그 원인을 분석해 하루빨리 우리 역사 교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교훈

삼국의 몰락으로부터 오늘날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리더는 늘 국가 또는 조직이 봉착할 수 있는 최대 위험(Maximum Risk)이 무엇인지 미리 파악하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최대 위험은 위험이 현실화했을 때 국가 또는 조직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을 말한다. 660년 고구려의 최대 위험은 적대적인 중국 왕조 자체가 아니라 중국 왕조와 신라(또는 백제)의 군사동맹이었다. 고구려는 1차적으로 남쪽의 작은 두 나라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맏형 노릇을 제대로 하는 한편 두 나라가 중국으로 붙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또 혹시라도 중국과의 동맹이 이뤄지는 경우를 대비한 플랜B를 갖고 있어야 했다. 오늘날 해병대에 해당하는 수군 육전대를 양성하고 황해도 해안 지역에 배치해 출동 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남쪽 국경에 기동성이 좋은 경기병 군단을 배치해 놨어야 했다. 642년 백제군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였을 때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고구려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위기를 느껴 당나라의 번신을 자칭하고 대당 외교에 나섰다. 고구려의 리더가 최대 위험을 미리 인지해 백제와 신라의 갈등을 중재하고 신라를 보듬었다면 660년과 668년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리더가 이런 최대 위험을 미리 인식하지 못하고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않은 것이 이후 역사의 흐름에서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고구려 조정이 오늘날의 경영 기법인 워게임(War Game) 5 과 SWOT 분석 기법을 활용했다면 고구려의 약점과 위험 요인, 그리고 미래에 전개될 가능성이 있는 위기 시나리오를 미리 인지하고 체계적으로 대비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흔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백제의 위기를 외면한 고구려의 중대한 실책에 관해서는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역사 교실에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원인을 심도 있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를 권력투쟁으로 인한 지배층 분열 정도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는 660년의 잘못된 의사결정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백제가 의자왕의 실정 때문에 망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승자의 왜곡이라고 봐야 한다. 의자왕이 반격전 전개의 중심으로 선택한 웅진성에서 성주 예식의 배신은 치명적인 돌발 상황으로 봐야 한다.

차세대들이 660년 백제의 멸망 과정과 고구려 조정의 의사결정을 두고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인다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정세를 분석하고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연재가 독자 여러분의 전략적 사고 능력을 점검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중경 한미협회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Heritage 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의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가 있다.
  • 최중경 | 한미협회장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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