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1. 현대자동차의 대형 SUV ‘팰리세이드’

넓고 럭셔리한데 가성비까지
밀레니얼 대디들이 지갑을 열다

287호 (2019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2019년 SUV 돌풍을 일으킨 현대차 팰리세이드의 성공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SUV를 군용차에서 패밀리카로 재정의함으로써 주 타깃층인 밀레니얼 대디들의 개성과 욕구를 충족시켰다.
2. 가성비를 높임으로써 소비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SUV시장의 저변을 확대했다.
3. BTS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으로 SUV가 중장년층 혹은 다세대 가족을 위한 차량이라는 편견을 깨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차량이라는 점을 어필했다.


“가족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What defines a family)?”

말끔하게 차려입은 7명의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은 흑백 톤의 영상에서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서로 매우 다르지만 함께 있을 때 강하다는 것을 느껴요. 그게 바로 가족이죠.” 2018년 11월 28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LA 모터쇼’의 현대자동차 전시관에서 상영된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팰리세이드의 첫 홍보 영상이다. 방탄소년단은 신차를 보여주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1분37초 분량의 이 영상에서 신차의 모습이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불과 4초에 불과하다. 방탄소년단이 영상 말미에 “팰리세이드”라고 한 번 외치지 않았다면 신차의 이름을 알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차는 방탄소년단의 입을 빌려 신차를 소개하는 대신에 팰리세이드에 탈 수 있는 가족의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가족이 많든 적든 팰리세이드의 넓은 공간을 맘껏 활용해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패밀리카’가 대형 SUV라는 새로운 공식을 방탄소년단의 입을 빌려 각인한 것이다. 현대차가 방탄소년단과 함께 가족 등을 키워드로 공개한 팰리세이드 영상 9편은 총 320만 건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북미 지역에서 큰 화제가 됐다.

현대차가 국내에서 가장 큰 SUV 모델로 선보인 팰리세이드는 2019년 10월 누적 기준 국내 시장에서 4만2794대가 팔렸다. 한 해가 2개월 남은 상황에서 현대차는 팰리세이드만으로 지난해 연간 대형 SUV 전체 판매량 2만8186대를 훌쩍 넘겼다. 한때는 대기 물량만 3만5000대에 달해 소비자들이 주문한 뒤 10개월가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다 지친 고객들의 사전 계약 취소 물량만 2만1000대를 넘어서는 이례적인 기록도 남겼다. 팰리세이드는 국내 시장을 넘어 대형 SUV 차량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북미 지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팰리세이드는 올해 6월 미국 출시 뒤 월평균 4000대 이상 팔리며 10월까지 1만7814대의 판매량을 달성했다. 경기 불황과 공유경제 확산으로 차량 수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가운데 팰리세이드는 국산 완성차가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현대차가 팰리세이드로 대형 SUV 열풍을 일으키자 다른 완성차 업체도 대응에 나섰다. 한국GM은 미국 공장에서 생산된 차량을 국내 시장에 수입하는 형태로 올해 9월 쉐보레의 대형 SUV ‘트래버스’를 출시했다. 기아차는 같은 달 대형 SUV ‘모하비’의 두 번째 부분 변경 모델을 3년 만에 선보였다. 팰리세이드를 계기로 대형 SUV는 완성차 업체들이 필수적으로 판매해야 하는 차종이 됐다.

군용차에서 패밀리카로, SUV의 환골탈태

SUV는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대세로 자리 잡았다. SUV의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판매 비중은 지난해 기준으로 47%에 이른다. 2010년대 이전에는 SUV 판매 비중이 20%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장세를 이어왔다. 특히 올해는 SUV 판매 비중이 절반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SUV의 인기가 일시적인 트렌드가 아닌 대세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사실 SUV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군용차로 개발했다. 산이나 사막 등 차량 주행이 어려운 악조건에서도 튼튼하게 전장을 누빌 수 있는 차량이 SUV다. 초기 SUV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현대차의 ‘1세대 갤로퍼(1991년 출시)’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군인처럼 ‘각(角)’이 잡혀 어떠한 환경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을 것 같은 이미지가 직선적인 외관 디자인으로 표현됐다. 갤로퍼는 차량의 뼈대 격인 프레임 위에 엔진 등을 장착해 차체를 올린 이른바 ‘프레임 보디’ 형태로 설계됐다. 프레임 보디는 튼튼하고 힘이 좋지만 차량의 무게가 올라가 연료 효율성이 떨어지는 구조로 평가됐다. 군용차의 느낌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싼타페(2000년)와 투싼(2004년) 등 준중형 SUV 출시를 통해 노하우를 쌓은 현대차는 차량을 가벼운 상자 형태로 만든 뒤 엔진 등을 얹어 제작하는 ‘모노코크 보디’ 기법을 도입했다. 모노코크 보디는 항공기를 제조할 때 적용하는 방식으로 차량의 무게를 가볍게 할 수 있어 프레임 보디보다 연료 효율성이 높다. 팰리세이드의 복합 연비는 2.2 디젤 엔진 모델 기준으로 리터당 9.6㎞까지 나온다. SUV 모델의 복합 연비가 리터당 10㎞를 한참 밑돌았던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 상당한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연비 걱정이 해결되면서 SUV는 단순히 험준한 도로를 달리기 위한 차량이 아니라 도심에서도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는 차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차량 높이가 세단보다 높은 SUV가 운전자의 시야를 더 트여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과거에는 운전자들이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품위 있는 느낌의 세단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삶의 무게중심을 일보다 여가에 두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가족 모두가 차량 내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실용적인 형태의 SUV를 더 선호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갤로퍼의 등장 이후 27년이 지난 2018년 말 출시된 팰리세이드는 현대차 SUV의 완성형 모델에 가깝다. 외부 디자인부터 그물망 형태의 정면 라디에이터(냉각기) 대형 그릴의 무늬를 키우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동시에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측면이 갤로퍼와 큰 차이를 보인다.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세련미를 갖춘 셈이다. 구민철 현대차 외장디자인실장은 “가족을 지켜주는 대형 SUV라는 인상을 정면 라디에이터 등을 통해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밀레니얼 대디, 넓은 공간에 반하다

그렇다면 왜 소비자들은 SUV 중에서도 대형 모델인 팰리세이드에 열광했을까. 가장 큰 이유로 여유로운 공간을 꼽을 수 있다. 팰리세이드의 차량 길이는 약 5m(전장 4980㎜)로 최대 8인까지 탈 수 있다. 현대차가 보유한 SUV 중 가장 크다. 이광국 현대차 국내영업본부장 부사장은 “현대인들은 나만의 공간을 의미하는 ‘케렌시아(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영역)’를 원하고 있다”면서 “팰리세이드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삶에 가치를 더하는 ‘당신만의 영역’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팰리세이드에 1명이 타든, 7명이 타든 각자의 좌석(영역)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차량으로 설계했다는 의미다.

팰리세이드 개발팀은 2015년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사전 조사를 진행하면서 공간이 넓은 대형 SUV를 원하는 소비층이 ‘밀레니얼 대디’라는 점을 발견했다. 밀레니얼 대디는 1980, 1990년대 태어난, 30대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젊은 아빠를 지칭한다. 밀레니얼 대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비싼 집을 못 사는 대신 차에 투자하고,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외여행을 가는 것 또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에도 적극적이다. 쉬는 날에는 차를 몰고 아이들과 함께 놀러 가는 것이 밀레니얼 대디의 중요한 일과다. 유모차 등 유아용품을 넣거나 골프백, 캠핑 장비 등 여가활동에 필요한 도구를 충분히 넣을 수 있는 대형 SUV는 밀레니얼 대디에게 필수품이다.

팰리세이드는 3열 좌석을 접으면 트렁크 화물 적재 용량이 1297리터, 2열까지 접으면 최대 2447리터가 된다. 좌석을 접는 것도 버튼 하나만으로 가능하도록 설계해 승객의 편의성을 높였다. 아이들과 아내를 태우고 나서 각종 여가활동 도구를 넣어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현대차 팰리세이드 개발팀은 팰리세이드의 적재 용량에 초점을 맞추면서 특히 더 많은 가족이 탈 경우를 대비해 차량을 설계했다. 대형 SUV에서 승차감이 가장 나쁜 자리인 3열 좌석까지도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에 주력한 것이다. 3열까지 좌석 곳곳에 컵 받침대를 16개나 설치하고 스마트 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범용직렬버스(USB) 포트를 6개 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8월 완성 단계의 팰리세이드를 시승해보고 공간이 넓어진 데다 모든 좌석의 안정감이 높아진 점에 대해 만족감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밀레니얼 대디를 공략하는 현대차의 전략은 적중했다. 현대차가 지난해 11월29일부터 8일간 팰리세이드 사전 계약 물량 2만506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 비중이 85.2%로 싼타페나 베라크루즈보다 5%포인트 높았다. 또 30, 40대 비중은 58.1%로 집계됐다. 렉스턴이나 모하비 등 기존 국산 대형 SUV가 30, 40대 구매 비중이 50%를 밑돌고 50대의 선택을 상대적으로 더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구매 연령대가 꽤 낮아진 것이다.


매버릭 패밀리를 위한 기술 차별화

팰리세이드가 지향한 또 다른 핵심 가치는 ‘럭셔리’다. 미국의 유명 자동차 전문가 댄 닐(Dan Neil)은 올해 8월 월스트리트저널의 연재 칼럼에서 팰리세이드의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과 편의 기능을 거론하며 “실내는 말끔하고 정숙하며 최고급 사양까지 가득 품고 있으니 럭셔리 SUV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극찬했다. 미국의 유명 자동차 전문지 카앤드라이버 역시 현지에 출시된 7, 8인승 SUV 5종(기아차 텔루라이드, 마쓰다 CX-9, 포드 익스플로러, 뷰익 엔클레이브)을 비교 평가하며 팰리세이드를 두고 “고객이 원하는 모든 기능을 담았다”며 “넉넉한 공간과 고급스러운 실내 디자인, 준수한 주행 성능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팰리세이드에는 실제 각종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ADAS)과 정보통신기술(ICT)이 탑재됐다.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도 차로 중앙으로 주행하도록 도와주는 ‘차로 유지 보조(LFA)’부터 전면 주차 차량이 빠져나올 때 후방 상황을 감지해 경고하고 제동하는 ‘후방 교차 충돌 방지 보조(RCCA)’가 대표적이다. 또 운전자가 좌우 방향 지시등을 켜면 후측 방향 영상을 대시보드 가운데 표시해주는 기능과 고속도로 내 곡선 구간 통과 시 일시적으로 자동 감속하거나 가속을 제한하는 시스템도 들어갔다. 이 외에도 전방 충돌 방지 보조 및 경고, 차로 이탈 방지 보조 및 경고, 운전자 주의 경고 등의 주행 보조 시스템이 적용됐다. 자동차 업계 최초로 차량 내 에어컨 바람이 승객에게 직접 쐬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확산형 천장 송풍구(루프 에어벤트)’와 실내 소음을 줄이는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 등도 팰리세이드가 가진 특별한 편의 기능으로 꼽힌다.

SUV의 대중화를 추구하면서도 모랫길, 진흙길, 눈길 등을 달릴 때 선택하는 험로 주행 기능(터레인 모드)같이 고급 SUV를 상징하는 기능도 빼놓지 않았다. 송군호 현대차 차량시스템개발실장은 “팰리세이드가 가족을 위한 차량이지만 모험심 강한 젊은 아빠의 성향에 맞게 거친 길도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한 가족이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개성 또한 중시하는, 이른바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패밀리’의 니즈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팰리세이드는 내부 디자인도 기존 SUV와 차이가 있다. 현대차는 다른 SUV 모델과 달리 막대기형의 기어 노브(자동변속기)를 과감하게 없애고 전자식 버튼 형태로 바꿨다. 주차(P)부터 중립(N), 후진(R), 주행(D) 등을 운전자가 버튼을 눌러 조작하도록 했다. 주로 슈퍼카 브랜드에 활용되던 방식을 팰리세이드에 적용해 고급화를 꾀한 것이다. 정 수석부회장 역시 팰리세이드의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내장재의 촉감을 더 부드럽게 바꾸고 내부 조명의 색조를 조정해달라고 개발팀에 직접 주문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한다.


공격적인 가성비로 날개를 달다

차량이 아무리 좋아도 이른바 ‘가격 대비 성능 비율(가성비)’이 떨어진다면 소비자들은 쉽게 지갑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차가 지난해
11월 팰리세이드의 실물을 처음 공개하자 국내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는 ‘팰’리세이드와 함께 표기가 비슷한 ‘펠’리세이드가 나란히 상위권을 차지했다. 신차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소비자들이 급하게 내용을 검색하려다가 잘못된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입력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이 외에도 기사 댓글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그래서 신차의 가격은 도대체 가격은 얼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팰리세이드의 가격은 3475만∼4408만 원으로 책정됐다. 경쟁 차종으로 언급되는 포드 익스플로러(2018년형)가 5460만∼5710만 원, 혼다 파일럿(2019년형)이 5490만∼5950만 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높은 트림(선택 사양에 따른 등급)을 기준으로 봐도 가격이 1500만 원가량 저렴한 것이다. 모든 선택 사양을 다 담아도 가격은 4900만 원 안팎으로 5000만 원을 넘지 않는다. 팰리세이드의 가격이 공개되자 SUV 애호가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착한 가격’이라거나 ‘가성비의 끝판왕’이라는 표현을 쓰며 환호했다. 5000만 원을 가뿐히 넘어설 것이라는 업계와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미국에서도 가격 범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시장에서는 팰리세이드가 3개 트림으로 출시됐는데 가격대가 3만1550만∼4만4700달러다. 환율 1160원을 기준으로 약 3660만∼5185만 원이다.

현대차는 어떻게 팰리세이드의 가격을 예상보다 낮게 책정할 수 있었을까. 우선 엔진을 기존 제품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엔진은 차량 부품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 비중을 차지한다. 신차를 만들기 위해 새로 엔진을 개발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반면 팰리세이드는 2.2L 디젤 엔진을 동생 격인 싼타페와 공유한다. 3.8L 가솔린 엔진도 제네시스 브랜드에 장착되는 제품을 쓴다. 또 사륜구동(4WD) 및 운전자 보조 시스템 등을 자체 기술로 해결해 추가 비용이 들어가지 않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다. 팰리세이드의 가격이 낮아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의 가격을 소비자들의 예상보다 확 낮춰 국내에서 싹트기 시작한 대형 SUV 시장을 선점하고자 했다. 전략적으로 팰리세이드의 가격을 낮게 책정해 소비자들이 쉽게 구매에 나서도록 유도했다는 뜻이다.

현대차는 가격 경쟁력을 갖춘 대형 SUV를 출시하면 수요가 쏠릴 것으로 기대했다. 팰리세이드가 대형 SUV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뒤이어 내놓을 고급 차 브랜드 제네시스의 ‘GV80’으로 기세를 이어가겠다고 판단했다. 올해 11월 공개된 제네시스의 첫 SUV GV80은 길이가 4945㎜로 팰리세이드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팰리세이드를 뛰어넘는 운전자 지원 시스템과 한층 더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공개 이후 자동차 업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가격은 6000만 원 초반부터 시작해 팰리세이드와 차별화를 뒀다. GV80까지 본격적으로 판매가 이뤄지면 현대차는 완성차 시장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SUV 분야에서 소형부터 준중형, 대형, 고급 모델까지 체계적인 라인업을 완성하게 된다.

최영석 선문대 스마트자동차공학부 겸임 교수는 “팰리세이드 구매에 5000만 원을 쓸 수 있다고 판단한 고객이라면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면서 최첨단 사양을 갖춘 GV80을 보면 1500만 원을 추가로 내더라도 언젠가 사려고 할 것이다. 앞으로 국산 대형·고급 SUV가 시장의 대세로 안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패밀리카의 스토리 마케팅

절벽 아래로 보이는 태평양,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시원하게 파도를 타는 서핑족과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태양,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산맥을 끼고 자리 잡은 고급 주택 지구 퍼시픽 팰리세이즈(Pacific Palisades)에서 만날 수 있는 멋진 광경이다. 현대차는 바로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신차의 이름을 따왔다.

현대차는 2000년 ‘싼타페’를 처음 출시한 후 줄곧 SUV 차량의 명칭을 미국 지역에서 가져와 썼다. 싼타페는 뉴멕시코주의 주도 산타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싼타페의 동생 격인 투싼은 애리조나주의 도시 이름이다. 코나 역시 세계 3대 커피 생산지로 꼽히는 하와이주의 한 지역 이름이다.

더 나아가 팰리세이드란 이름에는 패밀리카를 새롭게 정의하겠다는 현대차의 의지가 담겨 있다. 현대차는 프로젝트명 ‘LX2’라는 이름으로 팰리세이드 개발에 착수할 때부터 코나, 투싼, 싼타페에 이어 SUV 제품군의 가장 최상급 모델이 될 새로운 대형 SUV의 이름에 다른 모델보다 더 특별한 스토리를 담고자 했다. SUV를 상징하는 실용성과 대형 차량으로서의 고급스러움, 이 2가지 이점을 함께 잡기 위해 선택한 지역이 바로 퍼시픽 팰리세이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많은 예술가는 퍼시픽 팰리세이즈가 품은 대자연을 담아낼 건축물을 고민했다. 이에 대한 해답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형태의 ‘미드 센추리 모던’ 양식이었다. 1950, 196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리처드 노이트라 등이 미드 센추리 모던 양식을 반영해 실용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주택들을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대거 지었다. 이후 대형 공원과 자전거 도로, 고급 골프장까지 들어서면서 퍼시픽 팰리세이즈는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즐기고 싶은 현대인들의 욕구를 그대로 반영한 지역으로 유명해졌다.

현대차는 퍼시픽 팰리세이즈의 이런 특징에 주목했다. 고급스럽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실용적이면서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차량. 밀레니얼 대디가 가족들과 어디든 편안하게 떠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스토리를 신차 이름에 고스란히 녹인 것이다.

이런 형태의 스토리는 사전 광고(티저)로도 이어진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의 사전 광고 대표 문구를 ‘당신만의 영역을 찾아서’로 내걸고 밀레니얼 대디가 어린 딸을 데리고 로켓 발사 장면을 지켜보러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아빠가 운전하는 팰리세이드 안에서 편안하게 잠든다. 아빠의 어릴 적 꿈과 어린 딸의 꿈이 모두 팰리세이드를 통해 실현된다는 스토리다. 모델이나 차량 분위기보다는 밀레니얼 대디가 가족과 공유하는 감정이 따뜻한 시선으로 전달된다. 현대차가 팰리세이드를 통해 새롭게 정의하려는 패밀리카의 모습을 한 편의 광고에 압축적으로 담았다.


마치며: 성공 요인 분석 및 제언

그동안 한국 7, 8인승 SUV 시장은 포드 익스플로러가 주도했다. 포드 익스플로러는 광고에서 기본적으로 모험적인 이미지를 앞세운다. 광고에는 각양각색의 광활한 자연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차량이 산길, 눈길, 강가 등 어느 도로든 잘 달릴 수 있다는 점을 자세히 보여주며 거친 면모를 부각한다. 차량에 탄 가족은 보조적 역할로 등장한다. 또 7명이 다 타도 차량 공간이 굉장히 넉넉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근까지는 이런 마케팅이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포드 익스플로러는 지난해 6908대의 판매량으로 2017년에 이어 전체 수입 차 SUV 차종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막강한 경쟁 모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팰리세이드는 대형 SUV 시장에서 차별화를 시도하며 새로운 포지셔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포드 익스플로러의 ‘탐험’이라는 콘셉트와 대비되는 ‘패밀리’를 내세운 것이다. 포드 익스플로러 역시 전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차량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여러 광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포드 익스플로러는 특별한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이 탈법한 차량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들이 일상적인 도로를 달릴 때 필요한 차량인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반면 팰리세이드는 ‘매버릭 패밀리’가 타는 차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매버릭 패밀리는 밀레니얼 부부를 중심으로 한 여러 형태의 가족 구성을 의미한다. 이때 가족은 단순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나
4인 핵가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아빠와 아이가 단둘이 캠핑을 갈 때도 팰리세이드는 꼭 필요한 차량이다. 팰리세이드의 마케팅에서 ‘몇 명이 타는 차량’이라는 점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특히 한 지붕에 모여 사는 가족이라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삶을 지향하는 밀레니얼 부부에게 방탄소년단의 메시지는 더 큰 울림을 전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해 9월 유엔(UN) 총회 연설에서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피부색이나 성 정체성이 무엇이든, 그냥 나를 말하라”는 연설로 전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외침을 이어왔던 방탄소년단이 이번엔 팰리세이드를 통해 새로운 가족의 정의를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더 묵직하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였다.

현대차 마케팅전략실장 출신인 최명화 CMO캠퍼스 대표는 “그동안 차량이 크면 중장년층만 탈 수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팰리세이드는 앞으로 대형 SUV가 다양한 생활방식을 가진 소비자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탈 수 있는 차량이라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면서 시장에서 열풍을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물론 포지셔닝에 성공한 일등공신으로 가격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차는 이번에 예상외로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펼쳤다. 팰리세이드의 핵심 소비층으로 설정한 30대, 40대 초반의 밀레니얼 부부가 아직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단계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이들은 소득이 점점 늘고 있지만 내 집 마련과 육아 등으로 돈을 쓸 여력이 크진 않다. 이들을 대형 SUV 시장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려면 인기 차종의 가격을 높여 수익을 올리는 형태의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팰리세이드에 현대차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 차량 수준의 가격이 매겨졌다면 밀레니얼세대가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팰리세이드의 경쟁 차량인 포드 익스플로러와 혼다 파일럿 등은 가장 높은 트림(선택 사양에 따른 등급) 기준으로도 1500만 원 정도 비싼 탓에 주요 고객층이 40대 후반, 50대로 분포돼 있다.

대신 현대차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SUV의 이미지는 제네시스 GV80이 담당한다. 현대차가 애초부터 팰리세이드의 뒤를 이어 출시될 GV80에 고급화 전략을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팰리세이드에는 의도적으로 낮은 가격을 매겼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국산 대형 SUV를 처음 접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상대로 높은 진입 문턱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수요 예측에 실패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를 처음 출시하면서 노동조합과 올해 국내 시장에서의 연간 판매량을 2만5000대로 예상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판매량은 5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초기 수요 예측이 완전히 어긋났다. 사전 계약 취소 물량만 2만1000대를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없어서 못 파는 차량’이라는 ‘노이즈 마케팅’이 단기적으로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소비자들이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신차를 내놓은 것이냐”며 팰리세이드에 더 큰 흥미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회사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면서 소비자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폴크스바겐, GM, 도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다르게 현대차는 노조와 합의를 거쳐야 신차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은 더 커졌다. 노사가 올해 7월 가까스로 팰리세이드 증산에 합의하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GV80 등 새로 출시하는 인기 차종에서 비슷한 문제가 또 불거질 가능성은 여전하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번 팰리세이드 물량 부족 사태를 계기로 현대차가 신차의 수요 예측과 노사 협의를 더 정교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노이즈 마케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소비자들이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도록 해야 신뢰도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필자소개 지민구 동아일보 산업1부 기자 warum@donga.com
필자는 2012년 서울경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국회, 증권업계, 정보기술(IT) 업계 등을 출입했다. 일명 ‘청담동 주식부자 사건’을 취재해 2016년 8월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2019년 동아일보에 합류해 산업1부에서 자동차 업계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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