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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LG시그니처의 초프리미엄 가전 전략

“수익 안 나도 돼! 광고비로 생각하자”
‘제품 아닌 작품’ 내놓자 시장이 감동

고승연,여준상 | 264호 (2019년 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2014년 LG전자 경영진은 여전히 ‘잘나가고’ 있던 LG전자의 ‘영속성’과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정말 우리가 미래에도 계속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스스로 위기의식을 갖고 ‘1등 디자인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최고의 미니멀리즘 디자인과 극강의 성능을 갖춘 고가 프리미엄 브랜드 ‘LG시그니처’를 기획한다. 당시 이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구본준 전 LG전자 부회장은 “LG시그니처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광고비’라고 생각하라. 수익이 안 나는 게 당연하니 최고의 디자인에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에만 신경 쓰라”고 지시하며 인력과 비용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브랜드 낙수효과’를 노린 전략이었다. 학문적으로 이는 ‘디자인’과 ‘성능’을 적당히 타협하는 게 아니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팬텀 존’으로의 진입 전략이다. 그 결과 2년 동안 예상 판매량의 두 배를 기록했고, 브랜드 선호도와 프리미엄 지불 의향도 상승 등의 성과를 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홍석영(연세대 불어불문학과·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시그니처 제품들은 광고다. 개발에 들어가는 R&D 인원, 이 제품을 팔지 못해서 생기는 비용, 온·오프라인 영업과 광고에 드는 돈, 이 모든 것이 비용이다. 시그니처로 수익을 내지 않아도 좋다. 수익이 안 나는 게 당연하다.”

약 4년전, 당시 LG전자의 CEO였던 구본준 현 LG그룹 부회장(12월 초 기준)이 국내 가전 회사 역사상 최초로 ‘초프리미엄’을 내세운 ‘시그니처’ 브랜드 제품 개발을 지시하면서 한 말이다. 초고가, 초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고 판매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면서 ‘수익을 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한 것이다. 당장에는 수익이 나지 않고 돈이 많이 들더라도 LG전자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시그니처 개발, 생산, 영업, 마케팅에 배치받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은 이내 의지로 바뀌었다. LG시그니처 라인의 가전은 ‘궁극의 디자인’을 지향한다. 완전히 다른 소재, 극도로 심플하고 기존 가전과 차별화되는 모양새에 최고의 성능을 내야 했다. 엔지니어에게는 엄청난 도전과제가 주어진 셈이었다. 영업과 마케팅 부서에도 큰 부담이었다. 2015년 12월에 개발 완료해 내놓은 TV가 당시 1000만 원대를 넘겼고, 이후 77형 대형 TV는 3300만 원대 가격으로 책정됐으며, 세탁기가 300만 원을 넘기는 상황이었다. 냉장고도 100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이었다. (그림 1) 만약 ‘최대한 빨리 많은 수익을 내라’고 했다면 집중적인 연구개발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영업에서는 무리한 판촉을 진행해 가치를 떨어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미래’를 말하는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에 국내 최초의 ‘초프리미엄 가전’은 3년째 승승장구 중이다. 이는 경영진과 개발자, 영업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LG전자는 구체적인 판매량을 발표하고 있진 않지만 출시 첫해인 2016년과 2017년 두 해 모두 목표 대비 두 배 이상의 실적을 거뒀다고 밝힌 바 있다. 1 LG시그니처 출시 이후 2017년부터 자체적으로 조사한 글로벌 브랜드 선호도 역시 상승 중이다. LG전자 관계자는 “2018년에 2017년 대비 LG 브랜드 선호도가 세계적으로 7% 상승했고, ‘프리미엄 지불 의향’ 2 역시 7% 향상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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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은 이처럼 ‘수익을 내지 않아도 좋다’고 선언했던 제품군, 오직 ‘브랜드 낙수효과’를 위해 ‘광고와 마케팅의 일환’으로 만들어 낸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LG시그니처가 선전하고 있는 이유를 집중 분석했다.

경영진의 결단: ‘1등 디자인 위원회’
LG시그니처의 탄생은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경영진 주도로 만든 ‘1등 디자인 위원회’에서 결정됐다. 왜 ‘1등 품질 위원회’ ‘1등 제품 위원회’가 아닌 ‘1등 디자인 위원회’였을까? LG전자에서는 그 이전부터 구본준 전 부회장이 매년 5월 LG전자 산하의 다양한 사업본부, 즉 HE(Home Entertainment, 주로 디지털 TV 등 생산), HA(Home Appliance,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등 가전기기 생산), MC(Mobile Communication, 주로 스마트폰 담당)의 성과와 그 이듬해의 계획, 향후 전략 등을 묻고 확인하는 현장 점검 행사를 갖고 있다. 이와 별도로 LG화학이나 LG생활건강 등 다른 계열사 CEO들이 참여해 서로의 제품과 브랜드를 살펴보고 경쟁력과 성과를 검토하는 회의도 계속해왔다.

2014년에 이러한 다양한 회의체에서 한 가지 이슈가 제기됐다. 바로 ‘LG전자의 사업 영속성’에 관한 문제였다. ‘LG전자가 지금 가전에서 국내 최고로, 해외에서도 글로벌 브랜드로 인정받는다고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구 전 부회장 등은 기존 LG전자 제품 디자인이 과연 차별화가 가능한 정도의 수준인지, 고품질을 자부하지만 ‘고급화’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게 아닌지, 투자가 인색했던 것이 아닌지, 그리고 전체적으로 주력사업에서 ‘양(volume)’에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던졌다. 물론 당시에 LG 가전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10년 전 제품을 사실 지금 써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기본적인 기능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세탁기의 경우도 에너지 효율 좀 더 좋게 만들고, 세탁이 조금 더 빨리 되고, 예전에 세탁이 어려웠던 의류도 빨 수 있게 되는 정도가 10년간 발전한 전부였다. 냉장고 역시 용량이 커지고, 기능의 수가 좀 늘고, 급속 냉동이 된다는 게 그나마 발전이라면 발전인 상황이었다.

고객들이 ‘LG 가전을 꼭 다시 사고 싶다’ 혹은 ‘이번에 LG 가전으로 싹 바꾸고 싶다’라는 마음을 먹게 하고 구매를 실행하게 할, 이른바 ‘buying feature’가 없다는 게 LG전자를 비롯한 모든 가전업계의 고민이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주요 시장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고, 중국 기업이 카피 제품을 만들며 따라오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국내외 경쟁자들은 또 LG전자가 먼저 개척한 시장에 곧바로 따라 들어와 훨씬 싸게 프로모션을 진행해 경쟁을 격화시키는 상황이었다. 한편 최상위 브랜드로 대접받는 전통의 유럽 가전에 비하면 LG의 브랜드 이미지는 ‘품질이 좋고 가격이 합리적이다’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에 포지션이 다소 애매한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깨달은 한계를 극복하고 자각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작업이 바로 시작됐다. 그룹 차원에서 역량을 결집해 이러한 한계를 타파할 수 있는 프리미엄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거듭된 논의 끝에 ‘디자인’을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당연히 여기에서 디자인이란 그저 외관상의 아름다움이나 고급스러움이 아니었다. 소비자가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고, 무엇을 불편해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자, 사용자 경험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싱킹’이 핵심이었다. 프리미엄 브랜드 출시와 제품 개발을 위한 위원회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1등 디자인 위원회’가 됐다.

위원회는 본부장급 이상 최고경영진, 디자인경영센터 임원과 제품별 전문가인 디자인 전문위원들로 구성됐다. 이미 경쟁력이 입증된 LG전자 가전, 즉 TV,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제품군을 출시하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미 시장에서 인정받은 고품질 제품일 경우에 이를 기반으로 ‘프리미엄’으로 다시 브랜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엔지니어의 반발을 ‘승부욕’으로 바꾸다
개발이 시작됐다. 당연히 디자인이 우선이었다. 내부 역량으로만 진행할 경우 관성에 매몰될 수 있다는 생각에 외부 자문을 많이 받았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 토르스텐 밸루어도 LG시그니처 마스터 디자이너로 자문단에 합류했다. 3 그 후 1년간 사용자 경험 향상과 미니멀리즘을 구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외관을 갖춘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직 디자인 관점에서 고민을 했다. 그렇게 디자인이 완성되고 소재가 결정된 뒤에 엔지니어들을 불러들였다.

기술적으로 미니멀리즘 디자인에 최고의 기능을 구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엔지니어들의 반발도 심했다. 예를 들어, LG시그니처 냉장고에 사용하기로 한 소재는 난방향 공법의 스테인리스인데 지문이 묻어나지도 않고 각도에 따라 약간씩 색다르게 보이는 것으로 냉장고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소재였다. 세탁기에도 법랑(세라믹) 코팅을 하기로 했는데 이것 역시 최초의 시도였다. 이런 소재와 재질을 사용해야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충족하면서 동시에 사용자 경험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게 디자인 위원회의 결론이었다. 이 같은 공법과 재질에다 기존보다 업그레이드된 성능/기능을 담아야 한다는 게 엔지니어들의 미션이었다. 예를 들어, 세탁기의 경우 ‘건조’ 기능까지 들어가야 했는데 기존 세탁기와 달리 앞면이 깎여 있고 문도 큰 유리로 만들어야 했다. TV의 경우 종잇장처럼 얇은 TV에, LCD에 붙어 있는 컨트롤러는 다 떼어내야 했다. 심지어 냉장고의 경우 냉장고에서 쓰지 않는 모터나 기구를 달아 자동으로 서랍 선반들이 나오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는 못 만든다’는 엔지니어들을 사방팔방 뛰며 설득하는 것도 결국 경영진이 해야 할 일이었다. 디자인 위원회에서 부품이나 기술적인 부분, 공학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외관과 사용성 측면만 고려해서 제품을 디자인했기에 엔지니어들은 ‘안 되는 이유, 못하는 이유’를 100가지 이상 말하며 완강하게 버텼다. 이때 바로 ‘돈을 벌지 않아도 좋다. 인력도 최대한으로 지원하겠다’는 최고경영진의 메시지가 전달됐고, 엔지니어들의 반발은 ‘엔지니어의 자존심을 건 승부욕’으로 전환됐다. ‘기업에 속한 엔지니어’이기에 고민해야 했던 수익성, 비용적인 측면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털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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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제품 한 개당 개발 인력은 기존 제품에 배정되는 인력의 5배 정도였다. 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자동으로 서랍 선반이 나오는 냉장고의 경우 세탁기나 청소기 모터를 다루던 엔지니어들이 합류해서 개발하는 등 제품마다 다른 제품 엔지니어들까지 모두 모여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짜내야 ‘디자인이 만든 기술적/공학적 한계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 밸루어 수석디자이너의 디자인 자문단 영입과 같은 외부 역량의 적극적인 활용도 큰 도움이 됐다. 시그니처 관련 비즈니스 전반을 조율하고 있는 LG시그니처 PMO 장보영 상무는 “LG전자 내부에 디자인 경영센터가 있고 중국, 러시아 등지에 또 디자인 분소 형식의 연구소들이 존재한다”며 “그들이 새로운 재질이나 신소재 등을 발굴해주고, 최신 기술 반영을 위해 산학협력도 많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디자인 위원회가 만들고, 엔지니어들의 피땀과 외부 역량의 적극 활용을 통해 완성한 LG시그니처는 ‘1등 디자인 위원회’의 정신을 계승한 ‘시그니처 위원회’에서 지속적으로 마케팅, 판매, 제품개발 등과 관련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을 계획하고 있다. (표 1)

브랜드 낙수효과에서 기술 낙수효과까지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추구하는 LG시그니처는 ‘본질’에 집중한다는 걸 강조해왔다. 그저 예쁜 디자인의 제품이 아니라 성능과 편의성까지 포함한 ‘광의의 디자인’이 최고인 제품이라는 컨셉으로 ‘프리미엄’ 혹은 ‘초프리미엄’ 브랜드임을 강조했다. 광고와 마케팅 컨셉은 그래서 그냥 제품이 아니라 ‘작품’에 가까운 디자인과 성능을 갖춘 가전이 됐다. ‘제품이 아닌 작품, 혹은 예술품’이라는 컨셉은 한국에서는 주로 TV 광고로 전달됐고 4 글로벌하게는 설치작가들과의 협업 전시, 즉 진짜 작품 사이에 시그니처 가전제품을 가져다 놓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극도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추구했기에 어색하지 않게 다른 ‘진짜 설치 미술품’과 어울릴 수 있었다. 설치 예술가 제임스 부르지즈와 IFA에서 협업해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일상을 시그니처 제품과 연결해 표현한 전시를 열었고,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멘디니와 함께 시그니처 제품을 진열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2018년, 브랜드 출시 3년 차가 되면서 홍보부서 등에서는 시그니처 라인 제품들이 가진 최고의 기능이나 성능을 소비자들에게 소구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조성진 현 부회장(최초 개발 당시 H&A사업본부장) 등이 ‘계속 예술품의 컨셉으로 가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다만 기능이나 성능적인 측면에서의 홍보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유명 셰프나 패션디자이너, 유명 와인 소믈리에 등에게 각각 시그니처 라인의 냉장고나 세탁기, 와인냉장고를 주고 사용 후기를 적도록 하는 등 ‘상류층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수준의 가전’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결혼 10년 차 혹은 20년 차에 가전을 완전히 바꾸는 가정은 물론 ‘이왕 큰돈 쓰는 거 최고로 가자’는 생각으로 LG시그니처로 가전을 구성하는 예비 신혼부부도 생겼다. 이는 조용하지만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소비자들은 ‘비슷비슷하게 다 품질이 좋은 국산 가전 브랜드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 결혼 직전이나 10년 차, 20년 차 결혼 생활 후에 그렇게 고른 브랜드로 싹 바꾸거나 그때그때 가장 ‘핫’한 브랜드와 제품으로 고장 나거나 오래된 가전을 바꾸는 방식으로 구매를 해왔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의 머릿속에 ‘국산 가전 중 가장 비싸고 좋은 것, 가장 예쁜 건 LG시그니처다’라는 생각이 슬슬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 가전 전체를 새로 구입할 때든, 아이를 위한 공기청정기 등 단품 구입을 고민할 때든 ‘LG시그니처’를 떠올리고 예산이나 집안 분위기 등을 생각해 구입을 감행하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그냥 일반 LG전자 제품을 사는 사례가 생겨났다. ‘국산 중 가장 좋은 가전’을 고민할 때 LG시그니처를 떠올릴 수 있기에 바로 이런 낙수효과가 생긴다는 얘기다.

특히 LG시그니처가 전반적으로 LG전자 제품의 인지도나 호감도를 올려놓는 것도 중요한 브랜드 낙수효과라 볼 수 있다. 구본준 전 부회장이 “매출이나 수익률에 신경 쓰지 마라. 모든 건 광고비용이라 생각하라”고 말한 건 바로 이 브랜드 낙수효과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LG전자가 장기적인 생존과 지속 성장을 위해 비전을 갖고 투자하는 것이기에 당장의 비용과 손익을 신경 쓰지 않고 최고의 제품, ‘작품 같은 제품’을 만들어 브랜드를 키우면 그 자체로 수년 뒤 수익을 크게 올릴 수도 있고, 단기적으로 LG시그니처 자체가 LG전자 전체의 가전제품들의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셈이었다. 여기에 최상위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군이 존재하고 그 가격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앵커링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예전에는 다소 비싸게 느껴지던 LG전자 최신 가전제품의 가격을 저렴하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같은 효과 이외에 ‘기술 낙수효과’도 얻고 있다. 앞서도 설명했듯 LG시그니처 제품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디자인과 소재가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기능을 구현하고자 평소 5배 인원의 엔지니어들이, 심지어 각기 다른 가전을 만들던 엔지니어들이 집단지성으로 만들어낸 기술이 들어가 있다. 그러한 기술 중 ‘selling point’가 될 만한 몇 가지는 충분히 일반 LG전자 제품에 활용할 수 있고 실제 그런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장보영 상무는 “디자인을 시그니처와 비슷하게 만들고 기능 몇 개를 빼는 방식의 ‘하방전개’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자동으로 냉장고 문이 열리는 기술, 똑똑 두드려 냉장고 안을 확인하는 ‘노크온’ 기술 등은 일반 제품군에도 적용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극한의 상황에서 구현한 최신 기술력이 자연스럽게 일반 제품군으로 흘러내려 가는 효과가 생기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시장 진출과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시장 공략
LG시그니처는 현재 50여 개국에 진출했다. 우선 미국 시장에서는 반응이 괜찮다는 평이다. 장보영 상무는 “브랜드 가치로만 보면 아직 유럽산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에 좀 밀리고 있지만 ‘전통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소비자가 많은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의 시장에서는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특히 한국 다음으로 큰 시장인데 베스트바이, 홈데코 등 미국의 오프라인 유통 매장 중 고소득층이 많이 사는 지역에 진출해 있고, 지역별로 존재하는 큰 규모의 독립 판매점 중 역시나 ‘부자 동네’ 위주로 판매가 되고 있다. 특히 지역 판매점에서는 이미 고객들과 신뢰를 형성하고 있는 점주나 직원들의 추천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중상층 이상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형마트인 코스트코에서도 ‘LG시그니처 패키지’ 형태로 판매가 되고 있는데, 실제 고가의 가전 세트 전체를 패키지로 구매하는 일이 많다는 게 LG전자의 설명이다. 이렇게 LG시그니처는 2018년 특히 미국에서 예상치를 훌쩍 넘는 판매량을 보였다.

처음에 미국과 서유럽 시장 위주로 공략을 시작했다면 올해부터는 멕시코, 콜롬비아, 대만 등의 국가에 진출했다. 다만 LG시그니처의 해외 진출에는 원칙이 하나 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LG전자 법인장이 의지를 보일 때에만 진출한다는 것이다. LG시그니처 자체는 경영진의 강력한 결단과 의지로 시작됐지만 해외 진출과 판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장 상무는 “시그니처 제품을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해당 국가 법인장에게 ‘차라리 하지말라’고 조언한다”며 “법인장이 무리하게 실적 향상을 위해 ‘노 세일’ 원칙인 시그니처 제품을 프로모션 형식으로 할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많이 팔아 수익을 많이 내는 것’을 핵심으로 보지 않고 ‘LG시그니처’라는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국내외 고객들에게 알리고 프리미엄 브랜드로 각인하는 걸 중시한다는 것이다.

LG시그니처의 행보는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초프리미엄 가전 제품군’ 출시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시장은 물론 이제 소득 수준이 높아진 한국에서조차 초프리미엄 가전의 마지막 전쟁터는 결국 ‘빌트인 가전 시장’이다. 이미 국내외에서 빌트인 가전사업을 하고 있던 LG였지만 국내(LG DIOS)에서나, 해외(LG STUDIO)에서나 ‘가성비 빌트인’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초프리미엄 시장에는 가게나우(Gaggenau), 서마도(Thermador), 밀레(Miele), 서브제로(Subzero) 등 유럽과 북미의 다양한 빌트인 가전 브랜드들이 경쟁하고 있다. 아직까지 국내 전자회사들은 함부로 넘보지 못하던 시장이고 더군다나 가전제품마다 고객이 선호하는 브랜드가 다를 정도로 까다로운 시장이다. 각기 다른 브랜드를 써도 빌트인 가전의 경우 집안 인테리어의 통일성을 전혀 해치지 않는데, 바로 전면에 브랜드 로고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의 붙박이 가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전제품인 게 핵심이다. 5 그렇기에 초프리미엄 가전에서는 ‘LG’를 살려 ‘LG시그니처’로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에는 ‘LG’라는 글자를 빼고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로 명명했다. LG전자 제품의 기존 LG 로고에 ‘시그니처’라는 단어를 붙여 우선 프리미엄 가전 시장에 진입하고,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시장에는 LG라는 단어조차 떼고 오직 ‘시그니처’라는 이름만으로 승부를 벌이기 시작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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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의 반응, 그리고 LG시그니처의 미래
LG시그니처에서는 아직까지 모든 가전을 다 만들지 않는다. 일단 하나를 개발하고 생산하기로 결정하면 실제 개발에 평균 18개월가량 걸린다. 이렇게 개발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시그니처 위원회’의 5대 내부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는 ‘LG만의 차별적 고객가치를 제공했는가?(World First)’이고, 둘째는 ‘제품 본연의 성능이 탁월한가?(World Best)’다. 셋째는 ‘LG시그니처 브랜드 위상 및 프리미엄 이미지 향상에 기여하는가’이며, 넷째는 ‘LG시그니처 브랜드 이미지(Art of Essence)와 제품이 추구하는 이미지와의 정합성이 있는가’다. 마지막 기준은 ‘(해당 제품의) 프리미엄 시장 규모가 있는가’다. 물론 여기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출시 전에는 ‘모크업’ 형태로 만들어 시그니처 가전을 이미 구매한 바 있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이 제품에 시그니처를 붙여도 되겠느냐’고 묻기도 한다. LG 관계자에 따르면, 이 고객들은 자신들이 LG시그니처를 소유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다. 예술작품 같은 아우라나 느낌, 재질, 마감과 관련된 부분까지 다 들여다보고 한마디씩 던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출시 전 모크업이 맘에 안 들면 ‘시그니처는 이런 게 아니잖아요’ 혹은 ‘시그니처답지 않네요’라고 말한다는 것. 고객의 이런 반응은 LG시그니처가 어떤 이미지의 브랜드로 고객들에게 인지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성적이지만 꽤 강력한 지표로, 브랜드 선호도와 프리미엄 지불 의향 등 정량적 결과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이는 디자인, 기능, 성능 등 모든 걸 신경 써서 만든 LG시그니처 제품 자체를 통해 형성된 충성도와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1년씩 주어지는 무상 AS 기간을 2년으로 늘려주고, 오직 ‘명장’ 7 으로만 구성된 AS 기사들이 방문해 설치와 수리, 조언을 해주기에 고객들이 갖게 된 프라이드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고객관리를 하고 있는데 시그니처 핫라인을 별도로 만들어 오직 시그니처 구매 고객에게는 24시간 상담을 해주고 있다. ‘특별한 제품’을 구입한 고객들에게 그만큼 ‘특별한 대접’을 해주고 이를 실제로 느끼게 한다는 뜻이다. 초프리미엄 빌트인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는 아예 회원제로 별도 관리하기도 한다.



LG시그니처 브랜드에서 또 하나 관심 있게 볼 부분은 ‘남성 고객들의 변화’다. 본래 상당수 남성들은 ‘돈을 많이 벌면 슈퍼카를 사거나 비싼 시계를 사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자동차, 시계, 오디오, 카메라 정도가 남자들이 집착하는 고가의 제품들이다. 가전은 사실상 ‘여성들의 로망’이 구현되는 제품군이었다. 그런데 최근 가사 노동을 적극적으로 분담하는 남성들이 증가하고, 심지어 요리가 취미인 남성이 많아지면서 ‘멋진 디자인에 최고의 기능과 성능’을 가진 가전제품을 관심 있게 보는 경우가 늘었다. LG시그니처는 ‘돈을 벌면 내 공간에 작품 같은 세탁기, 냉장고, 와인셀러 등을 배치해 놓고 꾸미고 싶다’는 남자들의 ‘본인도 잘 모르던’ 욕망을 자극했을 수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각종 성과나 실적, 고객 반응 등을 놓고 보면 LG시그니처는 꽤 안정적인 ‘성공 궤도’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큰 수익을 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애초에 ‘1등 디자인 위원회’에서 목표했던 ‘브랜드 낙수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의도하지 않았던 ‘기술 낙수효과’까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은 브랜드다. 일단 제조업에서 지금까지 추진해 온 플랫폼 단일화, 공통 부품 사용이 절대 불가능하다. 별도의 라인에서 가장 숙련된 전문가들이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조립하고 포장해서 배송한다. 상당히 고가로 책정했지만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은 구조다. 물론 애초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만든 브랜드가 아니었기에 큰 압박감은 없지만 언젠가는 수익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라는 게 LG전자 관계자의 말이다. ‘가격을 낮추지 않고 더 팔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다. 영업 직원들도 절반 가격인 일반 LG전자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시그니처 브랜드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10배의 시간을 들여 설명을 해야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산다는 보장도 없다.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동기부여를 하고 판매 전략을 학습할지 역시 ‘시그니처 위원회’와 담당 임직원들이 계속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전통 제조업을 하는 거대한 기업에서 하는 이 시그니처 프로젝트와 비즈니스가 상당히 ‘린’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미국 시장에서 급성장을 했는데 사실 예측도 못했고, 아직 LG전자 내부에서도 정확히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어디에서 많이 팔렸는지를 보고 그때그때 고객의 반응을 추적해 계속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영업 직원들과 임원이 함께 모여 누가 우리 제품을 샀는지, 어떻게 샀는지, 왜 샀는지를 논의하고 고민한다. 장보영 상무는 “국내 기업 중에서는 ‘프리미엄 가전’과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으로는 사실상 처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기에 마케팅과 영업 전반에서 모든 걸 배워가는 중”이라며 “일단 전통적 럭셔리 브랜드가 하고 있는 걸 따라 해 보고 있다. 글로벌 5대 고급 잡지에 광고도 내고 공항 라운지 등에도 광고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모든 시도는 1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며 어느 광고와 마케팅 전략이 효과가 있는지 측정하고, 또 수정하며 공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 상무는 또 “시그니처 위원회, 최고경영진의 관심사는 여전히 매출이 아니다. 오직 브랜드 관련 지표다”라며 “매출 목표는 사실상 내가 설정해 달성해가고 있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광고비용’이라고 하더라도 시장점유율을 키워가고 제품 수를 늘려가며 비용 대비 성과를 높이는 건 역시 계속 고민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공 요인 및 시사점
프리미엄 위의 프리미엄, 아직 가보지 못한 이른바 ‘초프리미엄’ 영역으로의 진출은 결코 쉽지 않다. 대중적 이미지가 강했던 LG 입장에서는 특히 아주 험난한 도전일 수 있다. 시그니처를 보면 비록 전혀 다른 제조업, 자동차 산업에 속해 있긴 하지만 도요타에서 분가한 렉서스, 현대차에서 분가 시도를 하는 제네시스가 떠오른다. 도요타, 현대차 모두 대중적 이미지가 강한 모(母)브랜드다. 렉서스, 제네시스라는 프리미엄급 자식이 분가를 한 후 더욱 성장을 하면 부모의 어깨를 들썩이게 할 수 있다. LG의 후견인 역할이 끝날 무렵 시그니처도 완전 분가할지 모른다. 성공의 관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오겠지만 적어도 여타 브랜드나 조직 내부로의 긍정적 파급효과(spillover effect) 면에선 ‘시그니처 효과’가 유효하다고 본다. 시그니처가 주목받는 이면에 어떤 기저 메커니즘이 있는지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포지셔닝의 고정관념을 깨다

가장 기본적인 ‘가격 대 품질’ 속성을 놓고 보면 [그림 3-1]처럼 전통적으로 a, b, c가 각각 고가, 중가, 저가로 불리며 포지셔닝 존을 차지했다. 고가는 고품질, 중가는 중품질, 저가는 저품질을 전제했다. 하지만 기술 발달로 인해 ‘가격-품질 동등성 휴리스틱’이 깨지고 있다. 저가격-합리적 품질, 이른바 ‘가성비’ 개념이 나타나 c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 b가 c에 지배돼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림 3-2]처럼 b가 점점 사라지면서 a, c만 남는 양분적 포지셔닝 존을 보이고 있다. 요즘 양극화시대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여기서도 양극화 포지셔닝 존이 나타난다. 그런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림 3-1]의 a, c처럼 대칭적이지 않기에 비대칭적 양극화라 불러야 한다. 프리미엄 아니면 가성비만 남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제품, 서비스, 브랜드, 가게, 장소,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업종 불문하고 비대칭적 양극화 포지셔닝 시대로 가고 있다. 중간적 위치가 무너지는 것은 비즈니스뿐만 아니다. 사회구조에서도 중산층이 점차 몰락하고 자산에서도 중간 위치가 무너지며 양극화하고 있다. 20세기 중후반 고도 성장시대에는 a와 c사이에서 다양한 b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저성장 기조와 함께 거품이 꺼지고 해체가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b가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기술 발달로 인해 비즈니스에서는 [그림 3-2]처럼 c가 가성비로 변환되면서 b는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유효 포지셔닝 존이 [그림 3-2]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고민에 빠져 있다. 지금까지 설명했듯 가격-품질 속성으로 차별화된 다양한 포지셔닝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기업이 그동안 b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 아마 지금 모두들 사면초가 심정일 것이다. 여기서 수직적 확장, 즉 상향 또는 하향 확장을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성비를 탑재한 저렴한 가격으로 저변을 확대, 침투해갈 것인가, 아니면 ‘넘사벽’의 상징적 프리미엄으로 장벽을 칠 것인가의 선택이다. 상향 확장은 브랜드 자산 창출에 초점 두는 장기적 관점이다. 하향 확장은 이미지 창출 초점보다는 양적 매출 기반 확보에 초점을 두는 중단기적 관점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하향 확장은 상대적으로 쉽게 구현할 수 있지만 상향 확장은 ‘실체적 고품질 실현’이라는 기술적 혁신이 필요하기에 쉽지 않다. 프리미엄에 걸맞은 품질 담보 없이 고가격만 내세우다 역효과만 내고 몰락할 수 있다. 하지만 실현될 경우 ‘브랜드 스트럭처’에 골고루 오랫동안 온기를 더해주는 ‘온돌효과’가 발생한다.

이처럼 상향 확장이 쉽지 않은 대안임에도 LG는 기술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도전을 했다. 그것도 한 단계 더 높은 초프리미엄으로의 확장이기에 대단히 파격적인, 어찌 보면 ‘파괴적 결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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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처의 ‘파괴적 포지셔닝’은 [그림 4]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성능과 디자인이라는 대표 속성을 대칭시켜 놓고 보면 세 가지 지점이 나타난다. A와 B는 각각 디자인과 성능에 초점을 두는 비대칭적 지배지점이다. 무엇에 특화됐다, 혹은 전문화됐다고 소구하는 포지셔닝이고 상대적으로 전문화에 따른 고가격을 전제한다. C는 두 속성의 타협 지점, 즉 디자인과 성능 모두 ‘그냥저냥’ 하게 가는 지점이며 특별한 색깔 없이 무난하게 가는 지점이다. 일반적 대중 겨냥 포지셔닝이며 대부분 합리적 가격을 전제한다.

A, B, C와 달리 D는 이상점에 가깝다. C를 우상향 극단으로 당겨 올린 격인데, 개념적으로는 그리기 쉽지만 현실적으로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그래서 상상 또는 유령 존(phantom zone)이라 부를 수 있다. D는 제대로 된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다 잡는다는 관점이다. 두 마리 잡으려다 다 놓칠 바에는 제대로 된 한 마리라도 잡자는 A, B와 다르며, 꿩 대신 닭이라고 좀 모자라지만 일단 쉬운 두 마리를 잡자는 C와도 다르다. D가 좋고 바람직하다는 것은 알지만 두 가지 한계가 있다. 조직 내부에서는 기술적 혁신과 도전이 필요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인내하고 투자한다는 강력한 철학이 필요하다. 외부적으로는 고객들이 가격에 대한 저항을 보일 것이다. 디자인과 성능을 함께 궁극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초고가격을 전제로 한다.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고객에게도 이상적으로 보일 뿐인 팬텀지점에 왜 우리가 어렵게 실제 제품화하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단히 파격적이고 확고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D지점을 실현하게 되면 D는 사분면 우상단 꼭대기에서 아래쪽 전 방향으로 후광을 보내게 된다. 그야말로 브랜딩 스펙트럼 전반에 파급효과를 창출하게 된다.

2. 디자인 우선이 갖는 시사점
시그니처는 ‘1등 디자인 위원회’에서 시작됐다. 품질과 기술에 자신감을 가진 LG가 디자인에 초점을 두면서 시그니처가 탄생된 셈인데 디자인 지향성은 몇 가지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선, 디자인의 심리적 효과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것은 최근의 사회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상처로 인해 자존감과 자신감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상처로 인한 결핍은 충족돼야 하는데 여기서 디자인이 큰 역할을 한다. 최근의 사회심리학 연구는 다양한 디자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디자인이 뛰어난 심미적 제품에 노출됐을 때 사람들은 더 높은 자기확신성(self-affirmation)을 보여줬다. 또한 심적 여유로 인해 기부에도 더 적극적 행동을 보였다. 아름다움에 의한 관용적 행위는 동안(baby-face)효과 실험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비윤리적 문제를 일으킨 회사의 기사 노출 시 CEO 사진을 함께 게재했는데 동안 CEO 사진에 노출된 그룹에서 회사에 대한 ‘용서 의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니멀 디자인의 심리적 효과도 실증됐는데 고급, 리더, 파워, 자신감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미적인 미니멀 디자인에 노출되면 요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마음의 힘과 여유가 함께 생겨난다는 의미다.



디자인 우선의 의미는 켈러의 ‘브랜드 공명 피라미드(brand resonance pyramid)’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반응 모델인데 브랜드 인지에서 출발해 브랜드와 소비자가 하나 되는 단계에 이른다. [그림 5]에서 보듯 피라미드의 하단은 눈에 띄는 두드러짐(salience)이다. 눈에 띈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부각된다는 의미인데, 당연히 디자인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시그니처와 같은 물리적 제품의 경우 시각과 시각 경로를 통해 인지되는 촉각에 대한 디자인이 첫 인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눈에 반하다’는 말처럼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디자인 정보가 ‘현저성’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디자인, 성능 둘 다 중요하지만 고객의 반응 단계를 봤을 때 감각적 현저성이 첫 출발인 만큼 디자인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그니처는 그저 디자인만 지향한 게 아니다. 디자인과 성능의 조화를 시도했다. 최고성능이 담보되는 최고 디자인을 추구했으며 이것은 곧 희소한 명작 반열에 오름을 의미한다. [그림 4]의 D, 팬텀 존에 해당된다. 미니멀 디자인에 최고 기능 구현은 반대 공존과도 같다. 궁극의 디자인 지향과 궁극의 기술 지향은 서로 교차되기 어렵다. 생각의 관점이 다르고 사고의 출발이 다르기에 마치 물과 기름 같아 섞이기 힘들다. LG는 시그니처를 통해 이 둘의 절묘한 공존을 시도하고 있고 그것을 장기적으로 자산화하고 있다. 단기적 대응 차원에서 신제품, 신브랜드를 남발하는 임기응변식 마케팅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역량과 이미지 상승을 도모하는 시도는 피라미드 최상단의 ‘함께 울림(resonance)’, 즉 고객과 하나 되기를 지향해간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에서 출발해 최고 성능과 이미지로 긍정적 판단과 감정을 이끌어내면 몰입, 애착, 인게이지먼트(자발적 결성 및 참여)로 닻을 내리게 된다. 시그니처 고객들이 공명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 인그룹(in-group)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신호를 보내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에 나서고 이것이 브랜드와 하나 되는 모습으로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공명은 입자끼리 충돌로 에너지 극대화가 나타나거나 새로운 복합입자가 생겨남을 의미하는데 브랜드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하다.

3. 결과효과와 과정효과
시그니처의 파급효과는 결과 대 과정(outcome vs. process)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결과효과는 그동안 없던 결과물의 출현이 외부적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의미한다. LG가 탄생시킨 초프리미엄이 고객 인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어떤 외적 파급효과를 가져왔을까? 애플의 아이폰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없었던 아이폰 등장은 사람들에게 애플을 혁신의 대명사로 인식시켰다. 아이폰 이후 출시되는 어떤 제품이건 애플이기에 혁신으로 등식화하는 파급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시그니처 등장이 LG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비슷한 맥락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시그니처로 인해 LG가 프리미엄의 대명사로 굳어진다면 후속 LG 제품에 프리미엄 이미지 파급이 일어날 수 있다. 도심 속 최고층 빌딩처럼 눈에 띄는 구조물을 ‘랜드마크’라고 한다. 전체를 대변하는 눈에 띄는 특징을 ‘시그니처’라고 한다. 랜드마크효과나 시그니처효과는 전체 이미지를 좌우한다는 의미다. 시그니처효과를 LG시그니처가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과정효과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내부적으로 어떤 파급효과가 발생하는지를 의미한다. LG가 최고의 성능과 디자인의 결합이라는,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회사에 어떤 내부 파급효과를 발생시켰을까? 역시 애플 아이폰에 비유할 수 있다. 직관적 미니멀 디자인에 최첨단 기능을 녹여내는 혁신 시도 과정은 한마디로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디자인을 먼저, 그리고 그 틀하에 기능을 구현하는 것은 그동안의 과정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도전과정에서 생겨나고, 이 과정은 조직의 R&D 역량을 키우는 역량파급효과를 만든다. 이른바 도전효과라 할 수 있는데 시그니처의 LG 내부향 도전효과의 가시화가 기대된다.

4. 전망 및 제언

앞서 [그림 4]의 D 지점은 직접적 수익 창출이냐, 프리미엄 이미지 파급효과냐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처음부터 직접 효과에 너무 욕심내서는 안 된다. 공헌이익관점의 간접 효과에 좀 더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직접적 수익목표를 잡더라도 낮은 수준에서 잡고 파급효과에 더 큰 가중치를 두는 관점에서 D를 바라봐야 한다. 이 관점에서 시그니처는 이미 수익실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 파급효과가 나타나고 있는바 여타 LG 제품이나 브랜드로의 인지도, 이미지 상승과 매출 상승으로 공헌이익 관점에서 수익이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그니처가 범LG 계열에 개별적으로 얼마만큼 공헌이익을 창출하는지 산출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도와 이미지는 정량지표이긴 하나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비금전적 지표라는 한계가 있다. 매출기여도는 금전적 지표지만 여러 가지 노이즈에 의해 정확한 산출이 쉽지 않다.

따라서 간접효과에만 치중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시그니처의 직접 수익 창출효과도 향후엔 다각도로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새로운 타깃을 끌어들여 고객군을 좀 더 확보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케이션 노력을 통해 새로운 고객군을 영입함에 있어 외부 자원의 활용이 도움 될 것이다. 시그니처의 잠재고객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파트너와의 제휴로 그 고객을 커버리지 내에 둘 수 있다. 이때 간접적 홍보보다는 직접적 체험을 통해 시그니처 첫 경험의 현저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커뮤니케이션 노력뿐만 아니라 시그니처의 사용 상황이나 장소의 확장을 제품 범주 확장과 함께 조심스럽게 고려할 필요도 있다. 이미 부엌으로 확장된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가 있지만 제2, 제3의 시그니처 카테고리를 서브 브랜드 개발과 함께 고려해보면 좋을 것이다.

필자소개
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여준상 동국대 경영대 교수 marnia@dgu.edu

여준상 교수는 고려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명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실었다. 저서로 『한국형 마케팅 불변의 법칙 33』 『역발상 마케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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