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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디자인

상품에 즐거운 ‘체험의 옷’ 입혀라

이건표 | 11호 (2008년 6월 Issue 2)
최근 네스프레소(Nespresso)라는 커피메이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필자도 이 기기를 구입해 즐기고 있다. 네스프레소는 네슬레가 만든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다양한 맛의 커피를 응축한 소형 캡슐을 기기 속에 넣고 작동시키면 간단하게 양질의 맛과 향의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돼 있다.
 
네스프레소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기기의 디자인이 독특하고 아름다워서일까. 제품의 사용법이 간단해 그 사용성(usability)이 뛰어나서일까. 커피의 제조과정이 혁신적이어서 그 기술성(feasibility)이 우수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고급 에스프레소 기기가 수백만 원씩 하는데 30만40만 원의 저렴한 가격으로도 비교적 고급 커피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경제성(viability) 때문일까.
 
다른 성공적인 제품에도 똑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애플의 아이팟(iPod)이 예쁘거나, 사용하기 간편하거나, 기술력이 놀랍거나, 비교적 저렴해서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을까? 결론은 ‘아니다’이다. 성공을 거둔 제품들이 일관성 있게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제는 사람들이 물건 자체보다는 그것에서 얻는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커피 캡슐에서 보는 경험 디자인 사례
다시 말하자면 네스프레소 커피기기의 성공요인은 예쁜 기기에서 커피를 손쉽게 빼먹을 수 있다는 ‘물건의 효용성’ 때문이 아니다. 소비자는 네스프레소를 사용하면서 매 단계에 나타나는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돼 발산하는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전에 나온 가정용 고급 에스프레소 커피기기들의 사용과정을 살펴보자. 집주인이 우선 손님들에게 커피를 마실 것인지 물어본다. 만약 커피기기가 고급이라서 몇 종류를 선택할 여지가 있다면 이를 물어보고 커피를 만들어서 대접하면 될 뿐이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무슨 커피 하실래요?”, “자, 드시지요.” 이런 단순한 23단계 과정은 아마도 커피기기가 발명돼 가정에서 사용된 이래 줄곧 행해져 온 사용 경험일 것이다.
 
이제 네스프레소 기기의 경우를 보자. 우선 주인이 손님에게 커피를 마실 것인지 묻기도 전에 손님은 호기심에 빠지게 된다. 마치 예술품처럼 액자 속에 저장돼 벽에 걸려 있는 형형색색의 커피 캡슐과 새로운 형태의 기기를 보고는 “저게 뭐예요?”라고 묻게 된다.
 
네스프레소의 10가지가 넘는 다양한 맛의 커피는 형형색색의 소형 캡슐에 진공 포장돼 있다. 이들을 담는 용기도 단순한 보관용 상자가 아니라 벽에 거는 액자나 매우 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용기, 또는 보석함 모양으로 되어 있다. 다른 제품에서는 마시고 버리는 일회용 커피캡슐을 마치 예술품처럼, 혹은 고도의 장식 오브제처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캡슐을 보는 사람은 저절로 “과연 이게 무엇일까?하고 질문하게 된다. 이런 질문에 주인은 대개 일단 현시적 욕구의 충족(social pleasure)에 만족한다.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각 커피의 원산지와 맛의 특성 등이 고급스럽게 디자인된 책자를 마치 와인리스트처럼 보여준다. 이어 그 커피에 얽힌 유래나 관련 스토리를 줄줄이 풀어낸다. 대접받는 손님도 대접하는 사람도 마시기 전에 커피를 매개로 대화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평소 커피를 즐기지 않거나 커피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손님이라도 형형색색의 장미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고르듯이 적어도 “아, 난 이 색깔 한번 마셔볼래”라는 말을 저절로 꺼내게 된다.
 
이어 주인은 손님이 선택한 커피를 기기에 집어넣고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손님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커피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커피는 고유한 커피 잔(커피의 거품이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끔 디자인 된)에 담아 내놓는다. 손님과 주인은 ‘투명한 잔으로 보이는 커피의 크리머’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각적으로도 맛을 즐긴다.
 
네슬레는 네스프레소 사용자 커뮤니티의 회원들에게 기념 커피(anniversary coffee)의 발매와 다양한 음식과 커피의 궁합, 요리, 전용 커피 살롱, 커피기기의 주변기기, 이벤트 등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제공한다. 이런 과정에 사용자의 소속감과 브랜드 충성도는 높아지며 지속적으로 경험을 확장한다.
 
위의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네스프레소 사용자는 아무런 기기 고장 없이 쉽게 만들어내는 커피의 맛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커피를 고르고 마시는 새로운 단계적 행동과 거기에 배어 있는 이야기, 마시는 자들 간의 상호교류(interaction), 그 과정에 나타나는 다양한 유형의 즐거움(pleasurable satisfaction) 등이 포함된 완전히 새로운 경험(whole new experience)을 즐기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이런 완전히 새로운 경험의 과정에서 커피 기기 자체는 커피 마시는 경험이라는 ‘연극’에 나타나는 여러 ‘소품’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적 디자인과 경험 디자인의 차이
네스프레소 커피메이커의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험 디자인’이란 ‘인간 경험의 질적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험의 과정에 포함되는 사물과 서비스는 물론 경험 자체의 구조와 이의 흐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정의로 보면 경험 디자인은 전통적으로 제품의 외형이나 색채, 또는 포스터 심벌 로고 등 ‘사물(object)’ 중심으로 일을 해온 디자이너에게는 매우 도전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과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전통적 디자인과 경험 디자인, 그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경험 디자인은 ‘비(非)시각적’이고 ‘비(非)촉각적’이다. 경험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디자이너와 비(非)디자이너, 혹은 우수한 디자이너와 그렇지 못한 디자이너를 구분하는 주요 잣대로 쓰이던 ‘그리기’ 실력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경험이란 종이 위에 스케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경험을 구성하는 각 요소 간의 맥락적 관계와 흐름을 이야기 구조로 풀어 나갈 수 있는 ‘시나리오’ 구성력이 필요하다. 근래 들어 제시되고 있는 ‘시나리오 기반 디자인’이 각광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경험 디자인은 ‘다감각적(multi-sensory)’이다. 시각적 이슈가 주를 이루는 전통적 디자인은 주로 인간의 ‘시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춰 보기에 아름답고 예쁜 조형의 창출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경험 디자인은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 청각 후각 미각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지향한다. 아이팟의 매끈거리는 질감처럼 재질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촉각 디자인, 스포츠카 운전자의 역동적 감성을 최대한 유발할 수 있도록 기어 변환 시의 소리를 디자인하는 청각 디자인, 새 자동차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만드는 후각 디자인, 담배에서 독특한 맛이 나게 하는 미각 디자인 등 감각적 디자인은 이미 부분적으로는 꽤 많이 활용되고 있다.
 
아울러 이런 다양한 감각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즐거움도 다차원적이다. 물건을 직접 만지면서 느끼는 육체적(physical) 즐거움, 사용법이 사용자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에서 오는 인지적(cognitive) 즐거움, 지각된 가치를 통해 나타나는 감성적(emotional) 즐거움, 자기 자신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관계 짓는 사회문화적(socio-cultural) 즐거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념과 상징체계를 실현하는 데서 얻는 상징적(ideological) 즐거움이 이에 포함된다.
 
끝으로 경험 디자인은 ‘맥락적(contex-tual)’이다. 요소의 개체보다는 관계 중심적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경험은 연극과 비슷하다. 연극에서는 소품과 무대, 배우, 스토리 등의 개체가 각각 움직이기보다는 전체 맥락에 따라 조화를 이루며 연극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경험 디자인을 위해서는 사용자, 제품, 시각적 정보, 행동, 이벤트 등의 요소에 상호 관계와 통합을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 최근 ‘맥락적 디자인’이란 이름으로 사용자의 다차원적인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합적으로 디자인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제품 자체만 뛰어났지 포장, 사용설명서, 광고, 제품진열 방식 등이 맥락 없이 각기 따로인 경우를 본다.
 
이와 같은 경험 디자인의 특성은 기존 디자인으로부터 완전히 사고를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체조각 데생과 색채구성 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이들을 미술적 맥락에서 교육하는 것이 과연 경험 디자인에 효과적일까. 마케팅에서 소비자 조사를 다 하고, 엔지니어가 어떤 기술을 개발한 후에야 디자인을 시작하는 기업 조직에서 우수한 경험 디자인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근래 들어 대기업은 물론 정부기관에서도 앞다투어 ‘디자인 중심’을 외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디자인은 과연 어떤 디자인인가. 에어컨 위의 ‘선정적 예술 터치’ 정도를, 혹은 시내의 간판이나 환경 디자인 정비 정도를 의미한다면 이는 경험 디자인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일관되게 말하듯이 패러다임의 이동은 ‘순진성의 상실’을 요구한다. 순진성의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 대처해 나간다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KAIST 산업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중이며, 세계디자인학회 초대 사무총장과 한국디자인학회, 한국감성과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Design Research Society의 석학회원이기도 하다. 중앙대 공예학과를 나와 미국 일리노이 공대에서 산업디자인 석사 학위를, 일본 쓰쿠바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이건표 | - (현) KAIST 산업디자인학과 학과장
    - (현) 세계디자인학회 초대 사무총장
    - (현) 한국디자인학회 회장
    - (현) 한국감성과학회 회장
    - (현) Design Research Society 석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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