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s from Classic -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上
1793년, 비엔나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이는 홀로 분을 삭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나타, 협주곡, 교향곡 등 배워야 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조그마한 관심조차 베풀어주지 않았다. 당대 음악계의 원로였던 스승은 연일 계속되는 연주 스케줄과 후원자들과의 교제에 바빴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이는 자신의 사부를 제쳐두고 다른 선생들을 기웃거리며 지휘법 레슨을 청강하고 성악 작곡법을 지도받기에 이른다. 불과 1년 전 자신을 ‘음악의 수도’로 이끌었던 스승은 이제 ‘불성실한 노인, 의뭉스러운 영감’으로 비하되는 대상이 되고 만다. 여기서 젊은이는 신출내기 작곡가로 데뷔하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고 스승은 모차르트, 살리에리에게 공히 존경받던 명인 하이든(Haydn)이었다.
시간이 지나 베토벤이 한참 비엔나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을 1806년의 일이다. 당시 빈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대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어느 날 베토벤의 강력한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프랑스 외교관을 초청한 자리에서 당대 최고의 명인에게 작품을 들려주십사 청원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베토벤은 강하게 거절하며 공작을 세게 노려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주변의 귀족들이 ‘선생님’에게 공작의 체면을 보아 한번만 연주해달라고 부탁해도 베토벤은 타협하지 않았다. 천재 작곡가의 자부심과 자기애를 볼 수 있는 일화다.
만약 베토벤이 하이든이나 리히노프스키에게 충실한 제자와 친구의 역할에 머물렀다면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교향곡 5번이나 오페라 피델리오처럼 변혁적인 작품들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No’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베토벤을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은 그의 반골 성향이 그를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영화 ‘카핑 베토벤(Copying Bethoven, 2006)’에서 표현됐던 것처럼 지나칠 만큼의 자유로운 영혼과 자기애적 요소가 창의성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라는 관점이다.1
그러나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베토벤의 삶은 여러 가지 역설(Paradox)과 입체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한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원숙한 청년 예술가 대접을 받는가 하면 노년에는 작품의 잔금을 치르지 못하는 귀족들에게 소송까지 걸어 받아내고야 마는 괴짜 작곡가의 면모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의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블랙박스의 내용을 ‘천재성’이라고 결론짓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과연 그뿐일까?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천재는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일까?
‘신뢰’와 ‘매력’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서부 독일에 위치한 영방 국가(선제후(選帝侯)가 다스리는 곳으로 19세기 초까지 독일은 수십여 개의 영방으로 분리돼 있었다) 중 하나인 본 지역에서 태어났다. ‘판(Van)’은 원래 네덜란드 귀족 가문의 남자에게 붙는 표현이다. 독일어로 ‘폰(Von)’, 프랑스어나 이태리어의 ‘드(De)’ 또는 ‘데’에 해당하는 수식이다. 음악사학자들은 비교적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귀한 핏줄’에 속했던 베토벤의 출신 성분이 훗날의 독자적이고 올곧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0대 당시 베토벤의 집안은 이미 몰락해 있었고 아버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궁정 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결국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비상한 계기를 잡는 것이 절실했다. 흔히 베토벤의 평전이나 그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에서 ‘불행한 유년기’ ‘암담했던 시기에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음악인’으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삶을 사료에 입각해서 추정해 나가는 이들은 조금 견해가 다르다. 사회학자이자 음악학자인 티아 드노라(Tia Denora)는 베토벤을 가리켜 ‘진지하고 사고가 싶은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고 지적한다. 당시에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고관이 칭송받던 시절이 지나가고 깊은 사유와 고민을 통해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진지한 예술’을 할 수 있는 품격을 갖춘 인간을 원했던 것이다.2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트렌드에 가장 부합하는, 신뢰성 있고 매력적인 인재였다. 베토벤은 친구였던 의사 베겔러의 소개를 받아 폰 브로이닝(Von Breuning) 가문의 식객으로 초청받았다. 여기서 베토벤은 적은 급료를 받고도 성심 성의껏 자녀들을 지도했고 세심한 테크닉까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폰 브로이닝 가문 사람들은 젊은이의 태도에 반해버렸다. 단순히 기량 있는 예술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됐다’고 평가받은 셈이다. 베토벤은 폰 브로이닝 가문으로부터 교육 지원과 함께 생계를 감당할 수 있는 정기적인 급여를 받으며 연주 기회도 제공받았다. 부유했던 이 집안은 당시 중서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왕족이었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 테레지아(Marie Theresia)의 아들인 막시밀리안(Maximilian)에게까지 베토벤을 소개했다. 궁중이나 지역 제후의 가문에 소속된 예술가만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시기에 ‘야인’ 베토벤에 대한 지원은 거의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마케팅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반 덴 불트(Chrostoph Van den Bulte) 교수도 비슷한 논지를 남긴 바 있다. ‘연결망의 허브(Hub)’에 위치한 사람과 가치를 교환할 때에 비로소 네트워크의 덕을 보게 된다는 요지다.3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발판을 마련하다
그러나 매력 발산 한 가지만으로 작곡가가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훌륭한 음악가’는 넘쳐났다. 명망가들의 ‘살롱’과 ‘가족 음악회’에서 수많은 예술 영재들이 기량을 겨루고 있었다. 계속되는 국가 간의 갈등과 국지전으로 경제기반이 약화돼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귀족들은 저마다 취미를 과시할 수 있는 연주회와 모임을 만들었다. 1780년대 후반의 베토벤은 폰 브로이닝 가문의 소개를 받아 자신의 대표적인 피아노 소나타(Sonata)를 헌정할 주인공을 만났다. 바로 발트슈타인(Waldstein) 백작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척으로 비엔나에서 본으로 파견됐던 이 젊은 귀족은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에게 후원을 했고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선물했다. 후원 결정을 한 이유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영재의 재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의 작곡가들과 달리 발트슈타인이 베토벤에게 베풀었던 호의는 취향이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까웠다. 명문 귀족으로서 그 이름을 과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고 사회가 주목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길 원했던 것이다. 음악사학자 줄리아 무어는 베토벤이 귀족들과 대화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고 지적한다. 비록 동시대의 예술가였던 괴테, 브렌타노처럼 고등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수사학, 문학과 같은 분야에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용어와 맥락을 꾸준히 학습하고 읽어낼 만큼 성실하고 명석하다는 증거였다. 플라톤(Plato)을 주제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논할 수 있었고 라틴어 시구를 인용하면서 인문정신을 피력할 수 있었던 ‘백작의 친구’는 작품마다 후원자의 이름을 붙이며 특유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변방이 아니라 주류 문화계를 선도하는 천재상을 원했던 발트슈타인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하이든의 손에 담아 자네에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네”4 라고 말하며 애석하지만 ‘가장 소중한 친구’를 비엔나로 보내는 데까지 일조했다.
베토벤은 작품의 의도를 언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고 있었다. 유년기의 그가 처음 사사했던 오르가니스트 네페(Neffe)는 유난히 소통을 강조했다. 베토벤의 10대에 만들어진 첫 작품 키보드변주곡집(WoO 63)과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선제후(Elector)’는 초연 때부터 궁중에 헌정됐다. 작곡가들은 외부에 곡을 선보이기 전에 계약주의 궁정이나 관청에서 시연을 통해 점검을 받았다.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곡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계약주가 이해하지 못한 작품들은 거의 무시당하거나 대가를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버려지기도 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새롭게 설명할 능력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타인의 검증을 받은 감성을 일반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결국 베토벤은 단순히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을 후원자들에게 제대로 셀링(selling)하고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코드(code)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던 셈이다.
당시 작품의 생산 구조와 비교해 보면 분석력이나 언어 구사 면에서 탁월했던 베토벤은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당시 베토벤의 선배였던 모차르트는 ‘매우 신선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양산하는 작곡가’로 낙인 찍히곤 했다. 왕실의 인증과 탁월한 경력으로 명사가 됐던 살리에리는 이미 식상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장이 냉정하게 비평(Critic)을 통해 창작의 가치를 재단하고 계약주가 특유의 감식안으로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던 시기에 베토벤은 ‘그들의 언어’로 작품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발트슈타인 백작을 비롯해 그의 후원자 친구들은 이것을 베토벤의 매력이라 불렀다.
속도 조절의 미학
후원자들은 23세 이후의 베토벤에게 프로젝트나 활동을 사실상 백지 위임했다. 발트슈타인의 소개로 비엔나의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문객으로 살롱에 들어간 베토벤은 어린 나이에 평균 이상의 급료를 제시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에 베토벤이 받았던 연봉은 600플로린가량인데 이는 궁중에서 활동하는 카펠마이스터(지휘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공작은 서자 문제로 인한 부인과의 갈등 등 복잡한 가정사에도 꾸준히 베토벤을 지원하려고 애썼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 ‘금요일 아침 음악회’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꾸준히 친구들을 모아 베토벤을 소개시켜줬고 ‘기사 협회’를 결성해서 베토벤의 소중한 작품들을 컬렉션으로 표집해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기도 했다.5 공작은 러시아의 압제하에 있던 폴란드에서 망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보편적인 예술을 통해 유럽 전역을 풍미할 것이라 기대되는 베토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자만하거나 자신을 과시했다면 장기적으로 이런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분석한다. 베토벤은 ‘속도조절’에 능했다. 빠른 출세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할 만큼 그는 현명했다.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고 영향력을 입증받았다고 해서 금세 대작(大作)의 길로 이행하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1790년대에 비엔나의 명망가들이 개최하는 살롱에서 자주 초청받던 연주자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도 베토벤은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다녔다. 이미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었지만 기꺼이 학생이 됐다. 아직 하이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1792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슈판치히(Schuppanzigh)가 이끄는 4중주단에 들어가 청강생으로서 기악 연주법을 배웠다. 또 권위 있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하이든의 친구였던 알브레히츠베르거(Albrechtsberger)에게 대위법(Counterpoint)을 배우면서 큰 흐름으로 작품의 철학을 표현할 줄 아는 자세를 체득했다. 훗날 베토벤은 알브레히츠베르거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인내, 성실, 불굴의 자세, 그리고 내면의 진지성에 호소하는 작업이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고 강조했다.”6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의 포지션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알았다. 왕족이나 명문가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금세 ‘카펠마이스터(kappelmeister)’가 되려고 단꿈을 꾸는 이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젊은 베토벤은 ‘충실한 건반 연주자이자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다. 출판 시장에서도 그의 피아노 소곡집들이나 트리오들은 절찬리에 판매됐다. 출판업계가 작곡가의 노고를 좀체 인정하지 않던 시절에 보기 드문 대접이었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공개 연주는 대부분 바흐를 비롯해 지나간 시대의 대가들이 남긴 작품을 선보이거나 자신이 신중하게 고른 작품 중 일부를 시연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795년이 돼서야 기사협회의 후원을 받아 자신을 후원한 명문 귀족들의 친구로서 피아노 콘체르토를 대중에게 선보인다. 그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했거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결국 진가를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대의 패러다임이 ‘진지한 음악과 진지한 천재’를 점점 원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그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으로 청중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베토벤의 속도조절 전략은 작품의 타깃 설정 과정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의 작곡가들이 듣기 쉬운 음악을 지향했다면 1790∼1800년대 초반 문화계는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청중들끼리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즐기는 장르를 선호했다. 실제로 베토벤은 음악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아는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파했다. 고트프리트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과 로보코비츠(Von Lobkowitz) 공작이 대표적인 청자였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여러 국가를 여행하면서 계몽주의 철학과 진지한 고민을 강조하는 북독일 철학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괴테를 비롯해 독일어권의 청중은 원숙한 천재의 등장을 원했다. 베토벤은 이들의 취향을 집중적으로 반영한 작품을 내놓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략은 많은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설득력을 얻는 데 공헌했다. 1800년이 되자 남독일의 시골에서 이사한 천재 작곡가는 비엔나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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