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출시 15주년을 맞은 CJ제일제당의 ‘햇반’은 국내 상품밥 시장에서 ‘무균 포장밥’ 카테고리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브랜드다. 2002년 이전까지만 해도 상품밥 시장은 햇반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1996년 12월12일 처음 출시돼 1997년 470만 개, 이듬해 720만 개가 팔리는 등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하지만 2002년 농심, 2004년 오뚜기 등 경쟁사가 잇따라 무균 포장밥 시장에 뛰어들며 ‘빨간 불’이 켜졌다. 2004년까지 80%대선에서 유지해오던 시장점유율(포장 맨밥 물량 기준)이 2005년 처음으로 60%대로 떨어진 것. 2008년 70%대로 점유율을 끌어올렸지만 동원F&B(2007년)까지 경쟁에 가세하자 다시 점유율이 곤두박질치더니 급기야 지난해 59%라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까지 주저앉았다.
CJ제일제당은 그러나 올해 햇반 점유율을 66%(1∼9월 누적)까지 끌어올리며 다시금 수성 다지기에 들어갔다. 과열 양상을 보이는 시장에서 불과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7%포인트나 점유율이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지난 달에는 연간 누적 판매물량이 햇반 출시 후 처음으로 1억 개를 넘어섰다. 15년간 햇반의 총 누적 생산량이 7억 개이고 불과 4년 전인 2007년 한 해 생산량이 6000만 개 남짓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가파른 상승세다.
위기 때마다 CJ제일제당은 출혈 경쟁을 자제하고 품질 개선이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다른 업체들이 무분별한 가격 할인에 나설 때 CJ는 가격은 거의 그대로 두면서 품질, 즉 밥맛을 개선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금액 기준 햇반 점유율(2011년 9월 76%)이 물량 기준 점유율(69%)보다 월등히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소모적인 가격 경쟁 대신 품질 기반 경쟁에 주력한 성과다.
밥은 ‘집에서 엄마가 정성스레 해주는 것’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고집스런 소비행태를 거슬러 새로운 식문화를 창출한 햇반. 핵가족화의 확산, 1인 가구의 급증, 건강식과 맛을 기반으로 한 편의식에 대한 수요 증대 등 사회 트렌드를 타고 햇반은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한식 세계화 열풍 속에 멕시코 현지 대형 할인점에 제품을 공급하는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1위의 상품밥이 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15년째 장수 히트상품으로 자리잡고 있는 햇반의 신제품 개발 성공 사례를 DBR이 집중 분석했다.
알파미에서 동결건조미, 이천쌀에 이르는 2전3기의 도전
제록스와 크리넥스, 햇반의 공통점은 뭘까. 모두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고유명사란 점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제록스(Xerox) 브랜드는 ‘복사하다’는 뜻의 동사로 쓰인다. 사람들은 사각통에서 한 장씩 뽑아 쓰는 휴지는 모두 크리넥스라고 말한다. 햇반 역시 CJ제일제당의 고유한 상품 브랜드일 뿐이다. 하지만 대개의 소비자들은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즉석밥은 모두 햇반이라고 부른다.
이런 강력한 브랜드 인지도 덕분에 많은 이들이 햇반을 국내 상품밥의 효시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햇반은 국내 최초의 상품밥은 아니다. 1993년 냉동식품 전문업체인 천일식품 등에서 볶음밥, 필라프 등의 형태로 내놓은 냉동밥이 국내 첫 상품밥이었다. 1995년에는 비락과 빙그레에서 레토르트 공법을 적용한 상품밥을 팔기 시작했다. 무균 포장밥인 햇반이 나온 것은 국내 첫 상품밥인 냉동밥이 출시된 후 무려 3년 여가 흐른 1996년 12월이었다.
① 1989년 알파미, 1993년 동결건조미 프로젝트의 잇단 실패
CJ가 상품밥 관련 신제품 기획에 돌입한 것은 1989년이다. 핵가족화의 확산,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밥 짓는 절대 횟수는 물론 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드는 등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인스턴트 식품 형태의 상품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CJ는 이에 따라 알파미(정백미로 밥을 지은 후 상압 또는 감압 상태에서 급속 탈수해 수분율을 5% 이하로 건조한 쌀)로 상품밥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얼마 못 가 곧 중단됐다. 시제품까지 만들어 수차례 내부 품평회를 거쳤지만 CJ가 추구하는 수준의 품질(밥맛)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원재료가 갖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다. 알파미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되기 때문에 주로 군용 전투 식량 등으로 비상시에 먹을 수 있게 개발된 쌀이다. 편의성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생존’을 위한 식량 성격이 강하다 보니 허기진 배를 채워줄 뿐 맛에서는 기대할 게 별로 없었다. 제 아무리 갖은 기술을 접목시켜도 알파미로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1993년 천일식품 등 경쟁사들이 냉동밥을 시장에 먼저 내놓았다. CJ제일제당으로서는 상품밥 시장에서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알파미로 한 번 실패를 경험한 CJ제일제당은 이번엔 동결건조미를 활용해 상품밥 시장에 재도전하기로 결정했다. 1인 가구 수나 기혼 여성 취업률의 증가 추세 등을 볼 때 즉석밥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한번 어물쩍거리다가 경쟁사에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다는 위기감도 한몫했다.
그러나 동결건조미 프로젝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알파미 프로젝트 때처럼 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동결건조미는 밥을 지은 후 동결한 다음 얼음을 승화시켜 수분을 제거한 쌀이다. 제품 복원력은 우수하지만 동결을 거치면서 조직 구조가 나빠져 쉽게 부스러지는 등의 단점이 있다. 최동재 CJ제일제당 햇반팀장은 “동결건조미를 동결건조 블록 형태의 기존 즉석국 사업과 연계시키면 북어국밥, 미역국밥 등 그럴듯한 상품밥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당초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치 스펀지를 씹는 듯한 느낌을 없앨 수가 없었다”고 귀띔했다.
② 일본 시장 벤치마킹 통해 찾은 돌파구 ‘무균 포장밥’
상품밥 신제품 개발을 위한 돌파구 찾기에 골몰하던 CJ는 1995년 우리와 식문화가 비슷한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일본에서 상품밥 시장을 석권한 ‘무균 포장밥’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의 상품밥 시장은 920억 엔 수준으로 연평균 14%의 성장세를 달리고 있었다. 일본에선 1980년에 레토르트밥, 1984년에 냉동밥이 출시되는 등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 시장이 태동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조차 상품밥 시장이 본격적 성장을 맞은 것은 1988년 무균 포장밥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무균 포장방식은 갓 지은 밥을 무균 상태로 포장해 밥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알파미, 동결건조미처럼 원재료 단계에서 인위적인 수분 제거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갓 지은 밥맛과 식감을 살리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상품밥을 기획할 때마다 밥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CJ로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솔루션을 찾은 셈이었다.
문제는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무균 포장을 하기 위해선 세미(洗米), 침지(沈漬), 취반(炊飯) 등 일련의 밥짓는 공정 외에도 반도체 공장 수준의 클린룸을 갖추고 밥이 담긴 용기 내·외부의 미생물을 완벽하게 제거한 후 자외선으로 살균한 필름을 덮어 포장해야 한다. 이런 무균 포장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초기 설비 투자비만 최소 100억 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게다가 무균 포장 기술은 기본적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하기가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즉, 맨밥이나 잡곡밥 등 곡물류만 활용한 밥에 적용하기는 쉽지만 쌀, 야채, 육류 등 조성 성분 차이가 확연하게 다른 재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볶음밥류에 적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다. 원재료 성분 조성이 달라지면 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술도 각각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원재료 간 성분 차이가 커질수록 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최적화된 기술을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 시장 벤치마킹을 통해 상품밥 시장에 진입할 꽤 가능성 있는 해법을 찾기는 했지만 회사 내부에선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투자비 부담에 더해 향후 제품 확장 가능성이 낮은 사업에 과연 투자해야 할지를 놓고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1995년 경쟁사들이 레토르트밥을 시장에 선보이자 무균 포장 대신 레토르트 방식의 제품 개발을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일부에서 나왔다.
레토르트는 밀봉 포장 후 고압솥에서 통상 섭씨 120도 이상의 열을 가해 멸균하는 방식이다. 과도한 압력과 온도를 가하기 때문에 밥맛은 무균 포장방식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곡류뿐 아니라 야채, 육류 등 종류에 상관없이 무엇이든 밀봉 후 고온 가열하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제품군 확장성 측면에선 가장 유리한 방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CJ로서는 초기 설비 투자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당시 CJ에선 레토르트 방식을 활용해 자장, 카레, 미트볼 등을 생산하는 ‘레또’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또의 레토르트 설비를 활용해 상품밥 시장에 진출할 경우 처음부터 설비투자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무균화 포장 방식의 5분의1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내부 판단이었다.
③ 1996년 이천쌀로 만든 ‘햇반’ 출시
하지만 CJ는 과도한 투자비 부담 때문에 품질(밥맛)에서 타협을 보기보다는 면밀한 시장조사와 대대적인 소비자 조사를 통해 사업 타당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제품 콘셉트 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밥에 대한 일반적 욕구와 기존 상품밥에 대한 인식, 불만 등을 파악했다. “담백하게 맨밥을 먹고 싶을 때가 많은데 시중에 나와 있는 상품밥 종류는 볶음밥 일색이다” “레토르트 밥은 먹을 때 왠지 이상한 냄새가 난다” “맛도 별로지만 식감은 더 안 좋다” 등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CJ는 무균 포장밥 시제품을 만들어 소비자 테스트를 실시했다. 원재료는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경기도 이천쌀을 택했다. 조리법에도 신경 썼다. 압력솥의 원리를 적용해 밥을 짓고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쌀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테스트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소비자들은 냉동밥이나 레토르트밥 등 기존 상품밥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CJ가 개발한 무균 포장밥 시제품의 맛에는 합격점을 줬다. 실제 신제품으로 출시됐을 때 구매하겠다는 응답 역시 매우 높게 나왔다. 결국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CJ는 레토르트 사업이 아니라 국내 최초로 무균 포장밥 사업을 시작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1996년 초 클린룸을 포함한 무균 포장 설비 구축을 위해 1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설비 투자 진행과 함께 CJ는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CJ 이전에 경쟁사들이 내놓은 냉동밥, 레토르트밥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서 오는 새로운 니즈를 포착한 신제품이었지만 품질이 낮아 소비자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소비자들의 머릿 속에는 이미 ‘상품밥=저품질’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CJ는 상품밥과 함께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부정적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새로 브랜딩하는 먼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일부에선 기존 편의식 브랜드인 레또를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상품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벗겨내려면 이름부터 새로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독자적인 브랜드 전략을 택했다.
이렇게 탄생한 네이밍이 바로 ‘햇반’. 방금 만든 맛있는 밥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선택된 이름이었다. 제품 가격은 1050원(210g 소비자가격 기준)으로 정했다. 당시 소비자 조사에서 가격저항선은 800∼900원 사이로 나타났지만 초기 투자비 등 원가 부담을 고려해 높게 잡았다. 당시 일반 음식점의 공깃밥 한 그릇 값이 1000원선이었던 점도 감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