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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일벌백계’가 해답이 아닌 이유

임용한 | 70호 (2010년 12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들어 여진족은 지속적으로 조선의 국경을 넘어 마을을 약탈하거나 주민을 납치하곤 했다. 이 같은 여진족의 습격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은 세종대에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방어 네트워크를 편성했다. 그 중심이 4군(압록강) 6진(두만강 유역)이다. 이 군현은 큰 진이라고 해서 거진(巨鎭)으로도 불렀다. 각 진에는 관할 구역 안에 여러 개의 작은 진(소진·小鎭)이나 보루를 설치해 중간 기지 겸 초소로 삼았다. 보루의 임무는 주변의 마을을 보호하고 주요 교통로를 감시·통제하는 것이었다. 농사를 지으러 나갈 때는 군인이 함께 나가 호위했고 농부들도 활과 무기를 지참하고 농사를 지었다. 마을이 습격을 받으면 즉시 주변의 보루와 거진에서 출동했다.
 
소진과 보루에는 많게는 150여 명, 적게는 60여 명의 병력이 배치됐다. 두만강 유역에 설치된 6진 중 하나인 경원진(거진)에 소속된 훈융진(소진)의 경우, 1.7km 정도 둘레의 진 안에 150명의 병사가 주둔했다. 무기는 일반 화살 2만3603발, 편전(대롱에 넣어 장전한 후 발사하는 짧은 화살) 2만6941발 등 총 5만544발의 화살을 비치했다. 화살과 함께 활도 282개를 구비해뒀다. 이 활은 병사들의 활이 아니라 적이 대규모로 습격했을 때 주변 마을 사람들이 보루에 들어와 함께 싸울 수 있도록 마련한 예비 활이었다. 조선시대에 무기는 원래 병사들 스스로 알아서 준비하도록 돼 있었으므로, 150명의 병사들은 모두 활을 자비했어야 했다.
 
4군 6진, 열악한 병력과 허술한 지원 체계
얼핏 들으면 상당한 병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계산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유사시 소진에서 동원할 수 있는 총 활의 개수는 훈융진의 사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총 432개(150+282)다. 따라서 활 1개 당 쓸 수 있는 화살은 117발(50544÷432)이다. 마을 사람들을 제외하고 150명의 상주 병력만 싸운다고 하면 1인당 약 336발(50544÷150)을 쏠 수 있다. 이는 1분에 5발을 쏜다고 할 때 1시간이면 떨어지는 양이다. 신중하게 화살을 사용해 1인당 하루 100발을 사용한다고 해도 상주 병력이면 3일, 활 모두를 사용하면 하루 정도면 없어지는 분량이다. 이는 적의 기습을 받았을 때 보루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정도에 불과하므로 구원군이 전투가 벌어진 후 하루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여진족은 대개 저녁에 기습을 감행해 야밤에 전투를 했다. 거진에서 산하 소진의 습격 소식을 받더라도 산길이 험하고 계곡이 많아서 밤에는 구원군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여진족은 이 점을 노리고 계곡에 복병을 둔 후 밤사이에 마을을 털거나 보루에 총공격을 가했다. 그러니 일단 공격을 당하면 최소한 하룻밤의 악몽을 각오해야 했다.
 
물론 진과 보루를 주요 교통로와 복병이 예상되는 모든 곳에 촘촘히 설치하면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보를 많이 설치하면 병력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적게 설치하면 경계망이 허술해지고 보가 고립돼 기습에 취약해진다. 방법은 어떻게 하든 절묘한 위치에 보를 설치해 효율을 높이는 것뿐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 딜레마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끊임없이 보의 위치를 재검토하고 조정했다. 오랫동안 조선이 국방을 소홀히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오해다. 조선은 국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여진족 문제는 아주 예민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여진관계 기록의 상당수가 보루의 위치 조정, 경계 태세에 관한 논의였다.
 
그러나 아무리 네트워크를 정밀하게 구성해도 선()수비, 후()대응이라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진족의 습격이 심해지거나 조선이 큰 피해를 입으면 국경을 건너 여진 부락을 소탕해버리는 초강수로 대응했다. 이 소탕전 최고의 성공 사례는 1467년(세조 13)의 건주 여진 정벌이었다. 대체로 지금의 강계시 건너편 고구려의 국내성이 있던 집안 부근에 이만주가 영도하는 건주 여진의 중심 부락이 있었는데, 조선군이 이 곳을 습격해서 마을을 부수고, 이만주와 그의 아들들을 살해했다. 이후로도 몇 번 큰 사건이 있었지만, 여진족의 기세는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16세기 조선인 통역관 억류 사건
하지만 16세기 후반, 여진족의 분위기가 다시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1583년 봄 경원의 조선인 통역관이 여진 부락에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크고 작은 사건은 늘 있었으므로 경원 부사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가 병력을 대동하고 통역관이 사로잡혀 있다는 우을지내지 부락으로 갔다.
 
김수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선 여진족 추장들의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반란이었다. 조선 통역관이 억류된 이유도 우연히 이들의 모임을 탐지했거나 추장들의 모임에서 조선측에 요구사항을 전달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억류한 듯하다.
 
추장들이 모였고,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있었지만 김수 일행은 첩보를 무시하고 출동했다. 병력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 병력이면 여진족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김수 일행은 그곳에 모여 있던 여진족 병사들에게 포위당했다. 병사들은 거의 살해당했고, 무기와 군량도 모두 빼앗겼다. 김수와 양사의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내금위 출신의 백윤형이라는 무사가 있는 힘을 다해 포위를 뚫고 들어와 이들을 구해낸 덕택이었다.
 
이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부근의 여진족이 일제히 봉기해 경원성을 습격했다. 여진족은 1만기가 넘었다. 경원성은 여진족의 기세에 눌린 데다 엊그제의 패배로 병력도 줄었다. 경원의 부사, 판관, 만호 등 간부들이 총출동해서 성문 하나씩을 맡아 수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서문 방어를 책임진 만호(종 4품) 이봉수가 1만이 넘는 여진족을 보더니 달아나버렸다. 여진족은 이 사실을 탐지하고 서문을 뚫고 들어왔다.
 
관아를 지켜내고도 처형당한 판관 김수
성이 뚫리자 판관 양사의는 저항을 포기하고 향교로 도망쳐 아궁이에 숨었다. 그러나 김수는 이틀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병력을 데리고 관아로 달려가 최후의 방어선을 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여진족 40여 명을 살해하고 관아와 창고, 무엇보다도 무기고를 지켜냈다. 경원을 공격했던 여진족은 만주에서 온 무장집단이 아니라 경원 관내에 살며 조선의 통치를 받던 여진족(여진족은 조선의 국경 안과 부근에 살고 있는 여진족과 국경 밖에 사는 여진족이 있었다.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번호라고 했는데 이들은 조선과 우호적이었고, 어느 정도 통제를 받았다)들로 무기나 훈련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들이 무기고까지 약탈했더라면 조선군이 경원을 포기하고 4군 6진 개척 이래 거진이 정복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발할 뻔했다.
 
관아는 지켜냈지만 다른 곳과 주민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수많은 주민이 살해됐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민간의 곡식과 가축은 모조리 약탈당했다. 판관 양사의의 첩도 납치됐다.
 
다음 날 여진족이 다시 몰려와 경원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이 직전에 온성부사 신립의 구원부대가 성으로 들어왔다. 신립은 겁에 질려 도망하려는 경원성의 병사들을 성벽에 세우고, 자신이 데려온 정예병과 함께 성을 사수했다. 하지만 신립도 급하게 오느라 정예 병사와 군관만 끌고 달려왔으므로 병력이 많지는 않았다. 여진족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며 압박했고 조선군은 화살로 대응했다. 조선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음을 본 여진족의 지휘관이 백마를 타고 성 밑까지 육박해서 공격을 지휘했다. 그가 여진족의 최고 장수였던 모양인데 너무 드러나게 호기를 부린 게 실수였다. 성 위에 있던 신립이 화살 한 발로 그를 거꾸러뜨렸다. 백마를 탄 장수가 쓰러지자 여진족은 포위를 풀고 도망쳤다.
 
간신히 적을 물리쳤지만 보고를 받은 조정은 노발대발했다. 특히 선조가 크게 흥분해서 당장 김수와 양사의를 처형하라고 명령하고, 바로 선전관(왕의 명령을 전하는 특별한 무관)을 집행관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의정부의 재상과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 이이는 “김수는 관아를 사수한 공이 있으니 처형은 면하게 해 주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하고 완강했다. 법대로라면 장수를 압송해 와서 재판을 하고 처형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전시의 군율을 적용해서 병사들 앞에서 김수와 양사의를 즉결처분 형식으로 사형시켜버렸다.
 
일벌백계 vs. 합리적 시스템
선조의 이 같은 처분에 대해 “과도하다”거나 “김수와 양사의의 형량은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등의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선조는 일벌백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조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경원성 사건은 경원성으로 끝나지 않고 두만강 일대 전 여진족의 봉기(대표적으로 이탕개의 난)를 불러왔다. 그러니 강력하고 즉각적인 처벌로 4군 6진 전체의 군기를 다잡아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선조의 이 같은 판단은 또한 자신의 자제, 친인척, 학우나 제자를 지방관으로 파견하고 있는 권력가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지방관 제도는 상당히 부패해 있었다. 4군 6진 지역만 해도, 여진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관내 여진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재능과 행정력을 골고루 구비한 수준급 인재를 파견하는 게 마땅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이 같은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져서, 관찰사는 반드시 재상급에서 파견했고, 하급 수령 인선에도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 재상들은 절대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으로 나가지 않았고, 전국의 지방관 인사가 인맥과 뇌물이 얽혀 진행됐다.
 
파벌화도 심해져서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수보다 양사의의 처형이 더 불공평했다는 상식 이하의 비판도 실렸다. 김수의 직책은 부사(종 3품)이고 양사의는 판관(종 5품)인데, 직책이 높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는 논리였다. 높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사의처럼 전장에서 도망친 죄를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이처럼 관리 인선부터 평가에 이르기까지 파벌과 억지주장이 횡행하고 있으니 선조는 조직의 인사관리 능력과 구성원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벌백계를 통해 조직의 질서를 잡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선조가 애초부터 파벌을 척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더라면, 조직의 질서를 잡겠다는 목적으로 일벌백계와 같은 ‘편법’을 쓸 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흔히 일벌백계를 얘기할 때 전체를 보는 입장과 개인 입장의 차이를 이야기하곤 한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선 한두 개인의 사정을 일일이 배려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일벌백계의 본질은 전체와 개인이 아니다. 조직이 정당하고 공정하게 운영되고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다면 일벌백계가 필요 없다. 합리적인 규정에 의거한 처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는 합리적 시스템 구축에 실패했고, 그 결과 억울한 죽음을 불러 일으켰다.
 
 
 
 임용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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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yhkmyy@hanmail.net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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