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마킹은 이제 경영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다. ‘남자의 자격’ 박칼린의 리더십을 ‘벤치마킹’ 하자 하고, 김정은이 김일성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벤치마킹’ 했다고 말한다. 경영 현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Bain & Company가 지난해 조사한, 경영자들이 애용하는 경영도구에서도 벤치마킹이 1위였다. 전세계 유수 기업 임원 1430명 중 4분의 3 이상이 벤치마킹을 했노라 한 것이다. 국내 기업의 실무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상부에서 툭하면 떨어지는 게 벤치마킹 숙제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전략 담당자도 해외사 벤치마킹 고민부터 털어놓는다.
잘하는 남들을 따라 배우자는 게 나쁠 건 없다. 우리가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시행착오를 줄여가며 개선을 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DBR 66호 스페셜 리포트 “Benchmarking Rules” 참조). 그러나 애초에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법한 벤치마킹도 있다. 어디에 쓰자는 건지 알 수 없는 막무가내식 자료 모으기인데, 의외로 국내의 많은 기업들에서 이런 ‘하나마나 벤치마킹’이 종종 이루어진다. 벤치마킹이라 이름 붙이기도 부당할 정도로 오용되는 경우다.
관찰해보면, 그 첫 번째 유형은 “남들은 뭐한대?” 벤치마킹이다. 벤치마킹 대상(benchmarkee)은 정해져 있는데 명확한 벤치마킹 포인트(benchmark)는 없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나가는 기업이나 경쟁사에 대해 분석의 포커스 없이 무작정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보고서는 길고 지엽말단적인 사항이라도 자세할수록 좋다. 그 속내를 보면, 의사결정자의 특별한 전략적 방향성이 없을 때가 많다. 생각과 방향성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 뭐라도 건질 수 있게 일단 파보자는 것이다. 경쟁사의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달라진 운영방식 등 응당 알고 있어야 할 업계 동향 파악의 수준을 넘어선 가히 산업 스파이식 접근이다.
두 번째 유형은 “남들은 했대?” 벤치마킹이다. 벤치마킹 하고 싶은 내용(benchmark)은 있는데 벤치마킹 대상(benchmarkee)이 바르지 않고 그러다 보니 대상 기업의 수가 한정없이 늘어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무엇이든 일단 삼성이 했는지, 또는 해외의 덩치 큰 기업들 중에서 몇 군데나 했는지부터 알고 싶어한다. 이 경우는 대개 의사결정자가 새로 제시된 비즈니스 아이디어나 전략적 방향성에 자신이 없을 때다. 물론 조직 내에서 분명한 설득 논리도 필요하다. 그러나 경쟁환경도 기업문화도 우리와 다른 기업들이 비슷한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될 때, 벤치마킹은 창의적 방안이나 새로운 시도 앞의 딴지걸기로 변모된다. 의사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또는 결정을 유보하는 핑계가 된다.
이런 ‘하나마나 벤치마킹’의 공통점은 어렵사리 벤치마킹을 한 후 그 결과를 “so what?”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외시장 확장 전략을 짜기 위해 경쟁사 어느 부서 아래 어느 팀에 몇 명이 있는지 정교하게 조직도를 그려낸들, 신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해외 유수 기업들이 추진중인 신규 사업 리스트를 길게 작성해본들, 새로 기안된 운영방식을 해외 100대 기업 중 37개 기업이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들, 우리 비즈니스에 커다란 의미는 없다. 자칫하면 로버트 서튼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벤치마킹의 함정으로 지적한 대로,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CEO 허브 켈러허가 즐기는 ‘와일드 터키’ 위스키를 따라 마시면서 회사 실적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격이 되고 만다.
전략적 방향성이 없거나, 있더라도 이에 대한 자신이 없을 때, 이를 메울 방법으로 벤치마킹에 기대는 건 엄연한 시간 낭비, 돈 낭비다. “남들은 뭐한대?” “남들은 했대?”라는 말이 하고 싶어질 땐 먼저 스스로에게 되물을 일이다. “남들이 뭐하면 어쩌려고?” “남들이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