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천개의 고원: 나무 vs 뿌리 줄기

60호 (2010년 7월 Issue 1)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은 번화한 도시를 걸어 다닌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 생각해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났지만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은 것 같다. 마치 평행으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서로에 대해 무감한 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인들 중 어느 한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떠올리기 힘들다.
 
그렇지만 어느 날, 그리고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마주침이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의 커피 잔을 건드려 커피가 쏟아졌다. “미안합니다.” 당혹감과 성가심이 뒤섞인 당신은 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할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앞으로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랑’이란 감정, 혹은 의미가 발생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와 마주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와 마주치기 이전에 나의 사랑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사랑에 대해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언젠가 사랑은 내 곁에 나타날 것이고, 그 순간 그 사람이 오랫동안 예정돼 있던 나의 연인이라고 바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이 결별을 선언해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지만 나는 네가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아. 네가 돌아올 때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는 이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거야.”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매정하게 떠난 연인은 문득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주 들렀던 커피숍을 찾게 된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는 옛 연인을 발견한다. “잘 지냈어?” 자리에 앉으며 옛 연인이 이야기를 건넨다. 그러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말한다. “올 줄 알았어. 카푸치노를 아직도 좋아하니?”
 
사랑은 마주침 이전에 결정돼 있는 숙명적인, 혹은 필연적인 것일까? 아니면 사랑은 마주침이 일어난 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런 물음은 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상화할 수 있다. “의미가 마주침에 선행하는가? 아니면 의미는 마주침 뒤에 오는가?” 혹은 다음과 같이 풀 수도 있다. “필연성(necessity)이 우선인가? 아니면 우발성(contingency)이 우선인가?” 2000여 년 전 서양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주류 철학자들 대부분은 전자의 입장을 표방했다. 물론 소수의 비주류 철학자들만은 꿋꿋하게 후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플라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은 “의미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에게 의미란 우발적인 마주침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는 우발성이 필연성의 논리를 압도하는 시대이다. 바로 그 중심부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라는 철학자가 있다. 들뢰즈는 필연성과 우발성의 논리를 각각 나무(tree)와 리좀(rhizome·뿌리줄기)에 비교하면서 현대 서양철학의 사유 경향을 가장 명료하게 규정했던 프랑스 철학자다.
 
‘리좀’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 관계(filiation)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alliance)를 이루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 존재한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와(et) …와(et)…’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에 충격을 주는 힘이 충분하게 들어 있다. -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들뢰즈는 사유를 두 가지 이미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리좀이다. 나무는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서서 무성한 가지와 잎들을 지탱한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가지와 잎들에 앞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토대, 즉 절대적인 의미이자 필연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뿌리와 줄기로 구성된 나무 이미지를 아버지와 아들의 구조로 이루어진 친자 관계에 비유했다. 아버지가 없다면 아들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에서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좀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리좀은 땅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며 다른 뿌리줄기와 마주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식물을 의미한다. 리좀의 활동이 새로운 마주침과 다양한 유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남녀가 마주쳐서 맺어지는 것과 같은 결연 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좀은 새로운 타자나 사건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상징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주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두 분은 우연히 마주쳤고, 두 분의 사랑을 통해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서 수정체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만들었다. 나아가 지금 누군가는 누군가와 마주쳐서 사랑에 빠졌을 수 있다. 이런 우발적인 마주침들이 계속 이뤄지면서 우리는 바로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한한 마주침을 들뢰즈는 ‘…와 …와…’라는 접속사, 즉 프랑스 말 ‘에(et)’로 상징하고 있다. 바로 우리는 이런 예기치 않았던 사건과의 마주침, 즉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는 이러저러한 존재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무한한 우발적인 마주침의 결과 ‘…와 …와…’로 설명될 수 있는 우연한 만남들의 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존재에 확고한 뿌리가 없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말이다. 앞으로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마주침과 사건들로 여러분의 삶이 수놓아질 수 있다.
 
이제 결정을 내릴 순간이 온 것 같다. 사랑은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우발적인 마주침에 의존하는가? 사랑을 숙명적이라고 보는 건 나무의 이미지를 따른다. 이 경우 우리는 10년 동안 매주 토요일 떠나간 연인을 기다릴 수 있는 아름드리 고목과도 같은 삶,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오지 않더라도, 아니 오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그 사람은 나의 사랑이야.”
 
반면 사랑을 우발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들뢰즈가 제안했던 리좀의 이미지를 따르고 있다. 이 때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여행을 계속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자신의 기쁨이 계속되는 한 그 사람과의 마주침을 끈덕지게 지속하게 된다. 물론 기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때 기쁨을 주었던 그 사람에게 결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굿바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거야! 너도 좋은 사람과 만났으면 좋겠어.”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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