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초대형 군단 ‘무적함대’의 실상

60호 (2010년 7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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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스페인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던 마야,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15세기 후반에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선구자는 포르투갈이었는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개척한 주요 항구에서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동남아시아의 향료 무역을 선점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포르투갈이 차지한 엄청난 식민지와 부를 손에 넣었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최강국으로 스페인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육군은 정말 강했고, 특히 스페인 육군을 이끌던 파르마 공작은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이 스페인의 명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 이후 신교도 세력이 늘어나면서,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네덜란드는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 네덜란드 반란군 진압 임무가 파르마 공작에게 떨어졌다. 네덜란드 반군은 육지에서는 스페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스페인의 약점을 발견했다. 스페인군이 물에서는 느리고 굼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저지대와 수로가 많았다. 따라서 얕은 수로를 이용한 게릴라전을 벌이자 스페인군은 고전했다. 전세가 역전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군의 저항을 근절시킬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영국은 네덜란드 반군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투항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펠리페도 그것이 걱정이었다. 네덜란드가 프랑스로 투항하면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러야 한다. 스페인군이 최강이라는 소리는 듣고 있지만, 프랑스는 두려운 상대였다. 그러니 빨리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얄밉게도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부와 전쟁비용은 거의 남아메리카에서 날라오는 황금과 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황금이 중간에 사라졌다. 영국의 해적 때문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들에게 작위를 줬고, 이들을 기사와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심지어 정규군으로까지 편입하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그녀 자신이 영국 최대의 상선 소유주였으며, 제일 믿고 의지하는 심복 존 호킨스는 노예상인이었다.
 
해적들은 영화에서처럼 카리브 해에서만 출몰한 게 아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 연안까지 스페인의 배와 항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출몰했다. 해적왕 드레이크는 종종 포르투갈 해안까지 상륙하곤 했다. 심지어 드레이크는 소위 ‘대항해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집무실이 있던 바닷가 궁전까지 털어갔다.
 
초대형 군단 무적함대(Armada)의 출항
펠리페 2세는 격노했고 마침내 네덜란드에 있는 파르마 공작의 군대를 영국에 상륙시킨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상륙부대의 수송을 위해 펠리페 2세는 최대 규모의 함대를 조직했다. 이게 바로 무적함대(Armada)다. 1588년 5월 28일, 서구 역사상 최강의 함대가 포르투갈의 리스본항을 출발했다. 전함 130척에 수병 8000명, 육군 1만9000명, 대포 2000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함대의 목적은 네덜란드로 가서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페르네세의 부대 1만8000명을 태워 영국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무적함대의 지휘관으로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임명됐다. 이 인선은 오늘날까지 논쟁을 낳고 있다. 메디나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리더로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고, 탁월한 관리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러나 평생 군대에는 발을 디뎌본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다.
 
행정가로서 메디나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원정과 상륙작전에서 제일 애로사항이 물자 조달이다. 스페인군은 한번 출발하면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제대로 된 보급기지가 없었다. 메디나는 필요한 물자를 계산하고, 물품명세와 관리지침을 만들고 이를 문서화했다. 이와 같은 방대한 매뉴얼은 유럽에서 최초였다고 한다. 메디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문서를 출판해서 공개했다. 공개가 목적이었는지, 혹은 되도록 많은 부하들에게 읽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공개된 문서는 당장 영국군에 입수됐다.
 
스페인군이 바다에서 약하다고 해서 몽골군처럼 해전을 아예 못하는 그런 군대는 아니었다. 그들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식민지를 만들었다. 다만 스페인 해군은 영국군과 스타일이 달랐다. 백병전에 강했던 그들은 배를 맞부딪치고, 배 위로 뛰어 올라 싸우는 전투가 장기였다. 그러면 영국 해군은 아웃 복싱(권투에서 상대방에게 떨어져서 공격하는 전법) 스타일로 충돌을 피하고 포격으로 승부를 내는 군대였을까? 사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16세기는 해전에서 대포가 막 실용화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따라서 포격으로 승부를 내기엔 대포의 성능이 너무 떨어졌다.
 
스페인이나 영국이나 해전의 방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포가 등장하고 전술이 바뀌면서 선박도 바뀌고 있었다. 원래 배끼리 부딪쳐서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던 전법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술이었고, 여기에 사용하던 배는 갤리선이었다. 갤리선은 속도와 기동력이 뛰어나 접근전에선 제격이지만, 항속 거리가 짧아 중간 기항지 없이 원거리 항해가 어렵고 바다가 거칠어지면 운행하기 힘들었다. 특히 배의 아래층에서 2층, 3층으로 노를 저어 추진하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승무원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대포가 등장하고, 넓고 거친 바다에서 싸우게 되면서, 해전에서 사용되는 배는 갤리선의 비중이 떨어지고, 돛으로 항해하는 갈레온선(범선)이 주역이 됐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에 비해 갤리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무적함대는 스페인이 갈레온선을 주축으로 만든 최초의 함대였다. 갤리선과 갈레아스선(갤리선과 갈레온선을 혼용한 배)은 각각 4척씩만이 있었다. 무적함대 갈레온선의 위용은 영국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훈련과 경험부족으로 갈레온선 조종술과 이에 적합한 전술 및 포격술의 운용법에서 영국군에 뒤처졌다. 무적함대에 맞선 영국군은 전함 80척에 수병 8000명으로 절대 전력이나 규모 측면에서 스페인군보다 훨씬 떨어졌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육중한 무적함대와 달리 해적질을 하기에도 적합할 만큼 기동성이 뛰어난 범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로 이 범선들의 치고 빠지는 전술로 인해 스페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사실 무적함대는 그들이 세운 공적보다 그 명칭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그러나 무적함대라는 명칭에는 알고 보면 스페인군의 소심한 사정이 숨어 있다. 무적함대의 목적은 영국 함대와의 승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3만 명에 달하는 스페인 육군을 영국 해안까지 안전하게 수송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목적은 영국 해군을 격멸시키는 게 아니었다. 영국 해군이 수송선단에 덤벼들지 못하도록 하는 데 전술의 주안점을 두었다. “우리는 무적이니 덤비지 마라!” 그것이 무적이란 말의 진짜 의미였다.
 
이 목적을 위해 무적함대는 사상초유의 진형을 펼쳤다. 함대가 서로 빽빽하게 붙어 초승달 형태의 진형을 만들었다. 스페인군은 영국군이 스페인군의 진로를 막으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면충돌 후 백병전 형태의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영국군이 그들의 장기인 기동력을 앞세워 스페인 군의 배후를 공격하더라도, 초승달의 안쪽으로 들어와 좌우에서 십자포화를 맞게 될 것이다. 스페인군은 무적함대야말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초승달형 진형을 유지하며 도버해협까지 진출했다.
 
기동성으로 무장한 영국 범선 군단
도버해협에서 마침내 영국 함대가 나타났을 때, 스페인군은 그들의 눈을 의심했다. 당시 스페인의 갈레온선들은 거친 영국 해협의 조류를 역행할 수가 없었다. 스페인 함대들은 항해를 한다기보단 조류에 밀려 떠내려가는 셈이었다. 그래서 영국군도 앞에서 막거나 뒤에서 따라 오면서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초승달 대형을 구성했던 것도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신형 함정들은 조류를 역류해서 자유롭게 기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영국군은 스페인 함대를 상어 떼처럼 빙빙 돌면서 앞도 뒤도 아닌 초승달의 끝 뾰족한 부분을 공략했다. 놀란 스페인군은 최강의 전함을 그쪽에 두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스페인군은 엄청난 화력을 뿜어내면서 저항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의 대포는 단거리용 중포여서 화약소비량만 많았다. 두 번의 전투 동안 스페인군은 거의 모든 탄약을 소비할 정도로 쏘아댔다. 하지만 포탄은 영국 배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영국은 사정거리가 길고 가벼운 캘리버포를 사용했다. 경포의 특성상 위력이 약해 결정타를 날리기는 어려웠지만 스페인군의 약을 올리기엔 충분했다. 역사상 유래 없는 어마어마한 포격전이 벌어졌지만 영국은 거의 손실이 없었다. 스페인군은 배 2척을 잃었다. 그 중 한 척이 하필 스페인군의 급료를 싣고 있던 배였다.
 
마침내 무적함대는 파르마와의 합류지점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파르마는 병력을 보낼 수 없다고 알려왔다. 네덜란드의 해군이 항구를 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돌파할 호송 함대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핑계고 파르마가 영국 상륙에 의욕이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제해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영국에 상륙한다는 것은 자멸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무적함대는 결국 네덜란드 상륙을 포기하고 북으로 항진했다. 북쪽으로 항진한 이유는 조류와 바람 때문에 남쪽으로 직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그들을 뒤쫓았고 치고 빠지기를 거듭하며 무적함대를 괴롭혔다. 칼레 부근에서는 불타는 배를 스페인 함대로 보내 화공을 펼쳤다. 화염선을 앞세운 야습으로 실제 파괴된 배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르마다의 조직력을 와해시키기엔 충분했다. 메디나 공작은 낯선 지형과 폭풍에 시달리며 겨우 54척의 배를 이끌고 고향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준비 없는 성급함이 무적함대 실패 불러
 무적함대가 실패한 원인은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 힘들다. 어찌 보면 무적함대는 파르마 공작이 기다리고 있는 네덜란드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다. 초승달 대형도 성공했더라면 기발하고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전술로 찬양받았을 것이다. 혹자는 운이 없게 폭풍을 만나 실패했다고도 하지만, 그것도 절반의 진실이다. 스코틀랜드 부근의 북해는 세계에서 가장 거친 바다다. 기상 악화는 필연적이다.
 
비극의 진짜 원인은 물과 식량 부족이었다. 특히 식수 오염이 치명타였다. 물통 제작에 사용할 목재를 운반하던 배를, 하필 영국 해적 드레이크가 침몰시켜버렸다. 목재를 수장시킨 후 드레이크는 영국 여왕에게 스페인군의 침공을 2년은 연장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물통 제작용 목재는 대개 2년 이상 건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적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메디나도 최소 1년은 작전을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침공연기를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충분히 건조하지 못한 목재로 물통을 만들었고, 아르마다는 급조된 물통을 싣고 출격했다. 하지만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통과 물들이 썩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병에 걸리고 음식마저 결핍되면서 배를 조종할 기력이 남질 않았다.
 
급조된 물통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펠리페 2세의 성급함은 결국 무적함대를 실패로 내몰았다. 그는 승리를 고대한 나머지 철저한 준비 없이 성급한 결정을 남발했다. 물자를 관리하고 보급하는 일은 군사 작전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는 ‘물통 따위의 사소한 문제들로 거사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뿐 아니다. 아르마다 출격 전 네덜란드 연안에 아르마다를 안전하게 수용할 항구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거나, 영국을 치기 전 아일랜드를 먼저 장악해 공격의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도 듣지 않고 무조건 밀어붙였다. 작전 규모 자체가 스페인 해군이 지금껏 감당해보지 못한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원정을 뒷받침할 제대로 된 병참술도 마련하지 않은 채 말이다. 메디나가 작전 계획서를 인쇄해서 배포하는 황당한 행동을 한 것도 알고 보면 담당자들의 사업에 대한 이해와 운영능력이 사업규모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하면 된다’는 식의 의지와 도전정신을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치밀함과 준비, 엄정한 분석은 도전 정신과 상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그 둘은 언제나 공존해야 하는 미덕이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의지’가 더 부각된 이유는 사업이나 경영환경과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작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경영의 내용이 고도화하고 규모가 커지면 거기에 합당한 준비와 대응능력을 갖춰야 한다. 무리한 확장, 무리한 시도로 고통 받는 회사가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그 시도의 크기와 목표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더 주목해야 할 대상은 그 목적을 수행할 만큼 충분한 준비를 했는지 여부이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