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스페인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던 마야,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15세기 후반에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선구자는 포르투갈이었는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개척한 주요 항구에서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동남아시아의 향료 무역을 선점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포르투갈이 차지한 엄청난 식민지와 부를 손에 넣었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최강국으로 스페인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육군은 정말 강했고, 특히 스페인 육군을 이끌던 파르마 공작은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이 스페인의 명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 이후 신교도 세력이 늘어나면서,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네덜란드는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 네덜란드 반란군 진압 임무가 파르마 공작에게 떨어졌다. 네덜란드 반군은 육지에서는 스페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스페인의 약점을 발견했다. 스페인군이 물에서는 느리고 굼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저지대와 수로가 많았다. 따라서 얕은 수로를 이용한 게릴라전을 벌이자 스페인군은 고전했다. 전세가 역전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군의 저항을 근절시킬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영국은 네덜란드 반군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투항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펠리페도 그것이 걱정이었다. 네덜란드가 프랑스로 투항하면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러야 한다. 스페인군이 최강이라는 소리는 듣고 있지만, 프랑스는 두려운 상대였다. 그러니 빨리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얄밉게도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부와 전쟁비용은 거의 남아메리카에서 날라오는 황금과 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황금이 중간에 사라졌다. 영국의 해적 때문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들에게 작위를 줬고, 이들을 기사와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심지어 정규군으로까지 편입하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그녀 자신이 영국 최대의 상선 소유주였으며, 제일 믿고 의지하는 심복 존 호킨스는 노예상인이었다.
해적들은 영화에서처럼 카리브 해에서만 출몰한 게 아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 연안까지 스페인의 배와 항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출몰했다. 해적왕 드레이크는 종종 포르투갈 해안까지 상륙하곤 했다. 심지어 드레이크는 소위 ‘대항해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집무실이 있던 바닷가 궁전까지 털어갔다.
초대형 군단 무적함대(Armada)의 출항
펠리페 2세는 격노했고 마침내 네덜란드에 있는 파르마 공작의 군대를 영국에 상륙시킨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상륙부대의 수송을 위해 펠리페 2세는 최대 규모의 함대를 조직했다. 이게 바로 무적함대(Armada)다. 1588년 5월 28일, 서구 역사상 최강의 함대가 포르투갈의 리스본항을 출발했다. 전함 130척에 수병 8000명, 육군 1만9000명, 대포 2000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함대의 목적은 네덜란드로 가서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페르네세의 부대 1만8000명을 태워 영국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무적함대의 지휘관으로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임명됐다. 이 인선은 오늘날까지 논쟁을 낳고 있다. 메디나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리더로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고, 탁월한 관리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러나 평생 군대에는 발을 디뎌본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다.
행정가로서 메디나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원정과 상륙작전에서 제일 애로사항이 물자 조달이다. 스페인군은 한번 출발하면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제대로 된 보급기지가 없었다. 메디나는 필요한 물자를 계산하고, 물품명세와 관리지침을 만들고 이를 문서화했다. 이와 같은 방대한 매뉴얼은 유럽에서 최초였다고 한다. 메디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문서를 출판해서 공개했다. 공개가 목적이었는지, 혹은 되도록 많은 부하들에게 읽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공개된 문서는 당장 영국군에 입수됐다.
스페인군이 바다에서 약하다고 해서 몽골군처럼 해전을 아예 못하는 그런 군대는 아니었다. 그들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식민지를 만들었다. 다만 스페인 해군은 영국군과 스타일이 달랐다. 백병전에 강했던 그들은 배를 맞부딪치고, 배 위로 뛰어 올라 싸우는 전투가 장기였다. 그러면 영국 해군은 아웃 복싱(권투에서 상대방에게 떨어져서 공격하는 전법) 스타일로 충돌을 피하고 포격으로 승부를 내는 군대였을까? 사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16세기는 해전에서 대포가 막 실용화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따라서 포격으로 승부를 내기엔 대포의 성능이 너무 떨어졌다.
스페인이나 영국이나 해전의 방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포가 등장하고 전술이 바뀌면서 선박도 바뀌고 있었다. 원래 배끼리 부딪쳐서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던 전법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술이었고, 여기에 사용하던 배는 갤리선이었다. 갤리선은 속도와 기동력이 뛰어나 접근전에선 제격이지만, 항속 거리가 짧아 중간 기항지 없이 원거리 항해가 어렵고 바다가 거칠어지면 운행하기 힘들었다. 특히 배의 아래층에서 2층, 3층으로 노를 저어 추진하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승무원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대포가 등장하고, 넓고 거친 바다에서 싸우게 되면서, 해전에서 사용되는 배는 갤리선의 비중이 떨어지고, 돛으로 항해하는 갈레온선(범선)이 주역이 됐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에 비해 갤리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무적함대는 스페인이 갈레온선을 주축으로 만든 최초의 함대였다. 갤리선과 갈레아스선(갤리선과 갈레온선을 혼용한 배)은 각각 4척씩만이 있었다. 무적함대 갈레온선의 위용은 영국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훈련과 경험부족으로 갈레온선 조종술과 이에 적합한 전술 및 포격술의 운용법에서 영국군에 뒤처졌다. 무적함대에 맞선 영국군은 전함 80척에 수병 8000명으로 절대 전력이나 규모 측면에서 스페인군보다 훨씬 떨어졌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육중한 무적함대와 달리 해적질을 하기에도 적합할 만큼 기동성이 뛰어난 범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로 이 범선들의 치고 빠지는 전술로 인해 스페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