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최초일 필요도, 1등일 필요도 없다

36호 (2009년 7월 Issue 1)

코카콜라, 페덱스, 크리넥스, 아이보리 비누, 바나나맛 우유, 비타500, 드림카카오56. 국내외 기업의 성공 역사를 살펴보면 ‘최초’ ‘원조’ 상품을 선보인 기업이 ‘최고’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시장을 개척한 기업들은 높은 점유율과 순이익을 보이며 ‘선도 진입자 우위(first mover advantage)’를 톡톡히 누렸다.
 
민첩한 후발주자는 1위에 올라
하지만 선도 진입을 통해 ‘최초’가 되는 것이 성공의 만능열쇠가 될 수는 없다. 선발자 우위가 언제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를 최초로 개발한 곳은 미국 기업 암펙스였지만, 이 시장의 승자는 소니와 JVC였다. 전자레인지를 처음 선보였던 레이시온도 GE와 삼성전자에 시장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팩스는 제록스, 카메라는 다게르오 타입, 복사기는 3M 서모팩스가 ‘원조’였지만 각각 샤프, 코닥, 제록스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한국에서도 포털 1세대로 손꼽혔던 네띠앙이 결국 침몰한 사례가 있다.
 
후발주자(late-mover)만이 톡톡히 누리는 이익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무임 승차자(free-rider) 효과’를 누린다. 원조를 자청한 기업들은 시장 개척에 막대한 비용을 퍼부어야 하지만, 후발주자는 선발주자 덕분에 조사와 홍보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개인휴대정보기(PDA)라는 제품을 처음 시장에 내놓은 기업은 암스태드였다. 그 후 ‘뉴튼’이라는 PDA를 내놓은 애플은 소비자에게 PDA를 알리고 사용법을 교육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썼다. 그 다음 나타난 신생 업체 팜은 단순한 디자인과 저가격으로 승부해 결국 PDA 시장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후발주자는 불확실성 또한 줄일 수 있다. 새로운 시장에 맞닥뜨린 선발주자는 제품 기술과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 불확실성은 커다란 리스크 요인이기 때문에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발주자는 선발 기업의 승패를 보고, 시장에 진입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게다가 시장을 관찰할 기회 또한 가질 수 있다. 선발주자의 제품 출시 이후 기술과 소비자 니즈의 변화를 면밀히 지켜보다가 적절한 시점에 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
 
지금은 명실공히 1등 기업이지만, 한때 ‘기민한 2등’ 전략을 썼던 기업도 적지 않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개인용 컴퓨터(PC) 운영체제 시장의 최초 기업은 아니었지만, ‘민첩한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구사한 덕에 전 세계 1위 기업으로 도약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1위 기업인 삼성전자 역시 과거에 민첩한 추격자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 시사지 뉴스위크는 2004년 10월 호에서 “삼성은 다른 기업이 선도 기술을 개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기업보다 진보한 기술을 만든 뒤,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제품을 개발해 선보인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기업이 훗날 1등이 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20세기 이후 한국의 기업사를 비롯해 서구권 국가의 사례를 들춰봐도, 후발주자의 1위 등극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미국에서는 K마트를 앞지른 월마트가 있고, 야후를 무찌른 구글이 있다. 국내에도 OB맥주를 톱에서 끌어내린 하이트맥주, 삼양라면을 추월한 농심 등이 있다. 글로벌 영상 가전 시장에서 소니 등 일본 기업을 따돌린 삼성전자와 LG전자도 후발주자가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다. 이처럼 후발주자의 1위 등극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다.
 
실용적인 No.2 전략
역사를 장식한 ‘민첩한 추격자’ 전략을 따라 1등이 되려고 다짐해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아예 목표를 ‘톱’이 아닌 2, 3등으로 잡는 기업도 최근 부쩍 늘었다. 1등이 되겠다는 꿈을 일찌감치 합리적, 실용적 이유로 포기했다고 해도 염두에 둬야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후발주자’ 전략의 핵심 요소를 간파해야 한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노스 마르키데스 런던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2005년 <신시장을 지배하는 재빠른 2등 전략(Fast Second)>을 출간했다. 그는 새로운 시장을 지배하기 위한 핵심 성공 요인은 ‘빨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재빠른 2등 전략’은 능동적이며 1등만큼 빨리 움직여야 성공할 수 있다. 신기술을 익혀야 할 뿐 아니라 제품 설계, 제조, 유통, 마케팅 전략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치 사슬에서 기민한 전략을 갖춰야 한다. 즉 2등 전략의 핵심은 ‘타이밍’이다. 시장에서 지배적인 기술,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최적의 타이밍에 내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이 지배적 기술, 디자인을 선택할 준비가 돼 있는 시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타이밍’ 외에 후발주자의 유용한 전술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2등 전략’이다. ‘총성 없는 전쟁’으로도 자주 비유되는 시장점유율 경쟁 속에서 평생 2등을 하겠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늘 2등만 하자’는 방침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도 적지 않다. 국내 방송계에서 주말 시청자를 사로잡은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은 2등 전략을 고수했다. 지금은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무한도전’의 연출을 맡은 김태호 PD는 공공연하게 “우리는 2등 콘셉트다” “1등 하면 결국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2위 정도로 따라가면서 오래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2등만 하자’는 방침으로 ‘무한도전’은 방송 시작 당시, 유재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특급과 거리가 먼 비주류 MC를 섭외했다. 처음부터 1등을 외치는 프로그램은 출연료가 비싼 스타를 기용하지만, 2류 정신을 고수했기에 출연료 등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아울러 여러 실험적인 주제도 시도할 수 있었다. 애당초 톱 프로그램을 지향했다면, 시청률 하락 같은 리스크를 떠안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안정적인 소재를 활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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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라는 위치를 내세우며 1등 기업과 오히려 차별화를 꾀하는 기업도 있다. 에이비스는 마케팅사에서 대표적인 2위 전략으로 손꼽히는 회사다. 미국 렌터카 업계 2위 기업이던 에이비스는 ‘우리는 2등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합니다’라는 역발상적인 광고 문구로 유명세를 탔다. 국내에도 2005년 오뚜기 진라면이 이런 마케팅을 활용했다. 차승원은 광고에서 “진라면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은 아닙니다”라고 시인한 뒤, 곧 “이렇게 맛있으면 언젠가는 1등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넉살 좋게 웃음 지었다.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열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셈이다. 동시에 ‘맛’이라는 라면 본연의 가치에서 자신감을 보이는 이색 아이디어로 널리 회자가 됐다.
 
모두가 ‘최초’와 ‘1등’을 외칠 때,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의 기업이 처한 상황을 냉철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선발주자가 되기에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여건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굳이 최초의 역사를 쓴 기업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에 보물이 감춰져 있을 수도 있다.
 
편집자주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김상훈 교수가 주도하는 비즈트렌드연구회가 동아비즈니스리뷰(DBR)를 통해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학계와 업계 전문가로 구성된 이 연구회는 유행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비즈니스 트렌드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제시합니다.
 
필자는 연세대를 졸업(영문학·국문학 전공)한 뒤, 한경비즈니스 기자로 근무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삼정KPMG 경제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유통 산업, 소비재 시장의 분석과 소비자 연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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