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서비스 시장 개방과 기업 전략

토종 서비스업, 국제 경쟁력 있다

안덕근 | 36호 (2009년 7월 Issue 1)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대형 할인점은 한국인의 소비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까지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던 재래식 시장은 정취와 인간미는 넘칠지언정 현대인의 도시 생활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재래식 시장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계 소비의 대부분은 대형 할인점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수백 년 전통과 역사를 지녔던 재래 시장이 대형 할인점에 밀린 이유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정부는 1980년대 초부터 유통 서비스 시장을 제한적으로 개방해왔다. 1993년 7월에는 유통업체의 매장 면적 및 점포 수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이는 WTO 체제 출범으로 본격화될 외국 대형 할인점 진출에 앞서 국내 업체들이 대형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유통 서비스 업계의 최강자인 이마트 1호점이 출범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이후 1996년 유통 서비스 시장이 전면 개방되자 까르푸, 월마트, 코스트코, 테스코 등 외국 대형 할인점들이 대거 국내 시장에 진입했다.
 
시장 개방 초기에는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외국 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독점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컸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노하우를 가진 외국 대형 할인점과 경쟁하면서 국내 할인점 역시 괄목할 만한 경쟁력을 쌓았다. 잘 알려진 대로, 세계 양대 유통업체인 월마트와 까르푸는 한국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국내 시장에서 철수했다. 대형 할인점을 주축으로 한 국내 유통 시장은 전부 토종 업체들이 석권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현상이다.
 
이마트, 롯데마트, 농심 등 한국 유통업체들은 외국 대형 할인점들과 경쟁하며 축적한 경쟁력을 기반으로 최근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시장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2001년 12월 중국이 WTO에 가입한 데 이어, 베트남도 2007년 1월 WTO에 가입했다. 두 나라의 WTO 가입은 국내 유통업체의 해외 진출을 더욱 가속화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의 대형 할인점들은 한류 열기를 등에 업고 고급 이미지를 가진 한국 상품 판매에 앞장서고 있다. 이는 한국 경제 전체에도 중요한 역할을 끼치고 있다. 특히 해외 판로 개척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의 수출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 역사에 선례가 없던 유통업체와 제조업체의 상생 경영 모범 사례다.
 
국내 할인점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 유통업체들을 통해 현지 상품을 직접 조달함으로써 가격 경쟁력까지 한층 높였다. 재래 시장 문화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한국의 대형 할인점들이 세계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WTO 체제의 서비스 시장 개방
서비스 시장 개방은 이처럼 우리의 생활 방식과 기업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역사는 매우 짧다.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무역 자유화 노력은 상품 무역에 국한됐을 뿐이다. 서비스 무역은 복잡한 국내 규제 개선이 뒤따라야 하므로 무역 자유화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WTO 체제를 출범시킨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은 비(非)교역 행위로 간주되던 서비스 무역에 대한 국제 규범(GATS)을 최초로 만들어냈다. GATS는 상품 무역과 전혀 다른 형태의 시장 개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협상 과정부터 논란이 많았다.
 
교육 서비스 시장의 개방을 보자. 교육 서비스 자체의 국경 간 무역도 이뤄지지만, 서비스 공급자나 수요자가 직접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더 많다. 한국 학생이 해외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MBA 과정을 이용하면 이는 국경 간 서비스 무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학생이 유학을 떠나면 수요자가 이동을 하는 해외 소비가 발생한다. 반대로 외국 교수가 한국 대학에 오거나, 카플란 및 프린스턴 리뷰 같은 해외 교육 기관이 국내로 진출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무역이 이뤄지기 때문에, GATS에서는 4가지 서비스 교역 형태 즉 국경 간 무역, 해외 소비, 외국 서비스 업체의 국내 진출, 외국 서비스 공급업자의 국내 진출을 구분해 시장 개방 수준을 결정한다. 특히 외국 서비스 업체의 국내 진출은 해외 직접 투자와 결부되므로 국내 규제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뒤따른다.
 
이처럼 복잡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WTO를 통해 최초로 시도된 서비스 시장의 효과는 매우 크다. 현재 GATS는 금융, 통신, 유통, 운송, 사업 서비스 등 12개 산업의 155개 세부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국방을 제외한 사실상 모든 산업 부문이 GATS 적용 대상이다. 물론 WTO 회원국 여건에 따라 서비스 시장 개방의 실제 수준은 큰 차이를 보인다. 관광 서비스 분야는 대다수 WTO 회원국들이 전면 개방하고 있다. 반면 많은 국가는 아직도 교육 서비스에 상당한 제한을 두고 있다.

서비스 시장의 개방 원칙
상품 무역과 마찬가지로 시장 개방에 합의한 서비스 분야에 대해서는 비차별 대우를 보장해야 한다. 다만 국내 서비스 공급자와 비교해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보장하는 내국민 대우 의무는 산업별로 제한할 수 있다. 일례로 WTO에 가입한 대다수 개발도상국들은 아직도 외국 기업의 토지 구입에 상당한 제약을 가한다.
 
시장 개방에 합의했을 때는 서비스 공급자 수, 서비스 거래 규모나 횟수, 서비스 공급자의 법인 형태, 소유 지분 등에 대해 제한을 둘 수 없다. 이러한 개방 형태에 대한 규범은 실제로 서비스 시장 개방 수준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대표 사례가 미국 온라인 도박 시장에 대한 WTO의 개방 결정이다.
 
2003년 6월 카리브 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나라 앤티가 바부다(Antigua and Barbuda)가 자국의 온라인 도박 산업을 근거 없이 제한한다는 이유로 미국을 WTO에 제소했다. 미국은 라스베이거스나 애틀랜틱시티 같은 세계적인 도박 중심지를 키우면서도, 불법 돈세탁 방지와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통신 등을 활용한 온라인 도박 서비스를 금지해왔다.
 
그러나 인터넷 기술 발달과 함께 2000년대부터 폭증하기 시작한 온라인 도박은 미국 정부의 규제에도 엄청난 규모의 산업으로 발전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미 온라인 도박 시장의 규모는 연간 200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미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온라인 도박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온라인 도박 시장은 세계 최대 규모다. 때문에 매년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막대한 규모의 달러가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해외 업체로 흘러 나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 미국 시장을 겨냥한 상당수 온라인 도박업체들은 앤티가 바부다에 근거하고 있다. 전성기에는 앤티가 바부다의 국내총생산(GDP) 및 고용의 3분의 1이 온라인 도박 산업에서 나올 정도였다. 미국이 온라인 도박 서비스를 금지하는 바람에, 앤티가 바부다에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친 셈이다.
 
결국 WTO 분쟁해결기구는 미국이 우루과이라운드 당시 합의한 오락 서비스 시장 개방 약속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온라인 도박도 GATS 분류 체계상 오락 서비스에 포함되므로, 이를 금지하는 일은 서비스 공급자의 수와 거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GATS 규범에 어긋난다는 논리다.
 
사실 미국도 억울한 측면은 있다. 온라인 도박 서비스는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될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의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서비스 시장 개방 양허표에 합당한 제한 규정이 없는 한 개방 의무는 준수해야 한다. 향후 세계 각국의 서비스 시장 개방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아직까지는 통신 서비스 분야에만 국한되지만, GATS는 국제 협정으로는 드물게 국제 무역에도 공정 경쟁 원칙을 적용한다.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멕시코 통신 시장의 요금 체계가 지나치게 비싸 외국 업체들에 불리하다는 문제를 제기해왔다. 결국 미국은 이를 2002년 WTO에 제소했다. WTO 분쟁해결기구는 멕시코 통신 시장의 국제 통화요금 정산 체계를 사실상 독점 기업인 텔멕스가 결정하므로 공정 경쟁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이는 향후 서비스 무역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공정 경쟁 원칙을 적용한 첫 선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내 서비스 시장 개방
오랫동안 시장 개방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한국 서비스 산업은 WTO 체제 출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등을 거치면서 그 문호를 대폭 개방했다. WTO를 통한 회계 서비스 시장 개방은 국내에 해외 유수 회계법인들이 대거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세계 4대 회계법인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 딜로이트, KPMG, 언스트 & 영(E&Y)은 대부분 외환위기를 전후로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이들이 회계 업무뿐 아니라 종합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국내 컨설팅 서비스 시장 규모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업무의 특성상 해외 전문 인력들의 원활한 이동은 필수적이다. GATS에 의한 서비스 시장 개방이 활발한 인력 이동에 중요한 발판을 제공했다.
 
해외 회계법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국내 회계법인들도 최근 신설된 국제회계기준(IFRS)을 토대로 해외 시장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 외국 기업들의 한국 진출과 한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도 해외 회계법인 못지않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은 법률 서비스 시장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계기로 개방할 예정이다. 스캐든 압스, 베이커 & 맥킨지, 래텀 & 워킨스 등 미국 유명 로펌의 서울 지사가 생길 날도 머지않았다. 이는 국제 거래 및 국제 인수합병(M&A) 시장 확장에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서비스 시장 개방으로 외국 업체가 직접 국내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국내 시장 환경이 대거 변화할 때도 많다. 외국 업체의 진출에 대비한 국내 규제의 개선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통신 서비스 시장이다.

1980
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미국의 강력한 개방 요구에, 정부는 ‘선(先) 국내 경쟁, 후(後) 대외 개방’을 표방하며 시장 개편을 단행했다. 그 결과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시작된 한국의 통신 시장은 1998년부터 전면적인 자유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이제 국제전화와 이동통신 시장에서 한국 소비자들은 세계 어떤 나라의 소비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다양한 선택권을 갖고 있다. 심지어 더 싼 요금을 찾아 통신업체를 쇼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국가가 시장 개방에 소극적인 방송 서비스 부문도 마찬가지다. 1995년 케이블 방송이 전격 도입되면서 정부는 역시 ‘선 국내 경쟁’ 원칙 아래 진행된 이 부문의 규제 개편을 단행했다. 이제 케이블 방송은 홈쇼핑, IPTV 등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으로 시장을 확대·변화시키고 있다.
 
기업 통상 전략
그간 국내 서비스 업체들은 선진국의 시장 개방 요구에 맞서 국내 시장을 보호하는 데 주력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타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검토할 때다. 앞서 설명한 대형 할인점 사례처럼 해외 진출로 성공한 서비스 기업의 예는 수없이 많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유럽 변방 스페인의 2류 은행이었던 산탄데르 은행은 활발한 해외 진출로 생존 위기를 극복했다. 중남미 시장을 적극 공략한 후 유럽 시장에서도 입지를 키운 이 은행은 현재 유럽 1위 은행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난 5월 20일 한국 시장에도 사무소를 개설했다. 소매 금융이 중심인 산탄데르가 한국 시장에 진출함에 따라 비슷한 사업 구조를 가진 국민·신한·하나은행 등은 상당히 강력한 경쟁자를 맞을 전망이다. 산탄데르가 국내 은행의 M&A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제조업체만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을 뿐, 서비스 업체의 경쟁력은 이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 서비스 산업은 국제 경쟁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국제 경쟁 방식에 무지할 따름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 의료 서비스 산업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2005년 8월부터 2007년 8월까지 국제 병원 인증(JCI 인증)을 받은 한국 병원의 수는 불과 1개다. 반면 싱가포르는 24개, 태국은 13개, 하물며 인도도 9개나 된다. 한국 서비스 업체들이 얼마나 국제 경쟁에 무지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동남아를 비롯해 독립국가연합(CIS) 등 많은 개발도상국에는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 한류는 한국 서비스 업체의 해외 진출을 위한 귀중한 초석이다. 10년 전부터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개발도상국 출신 유학생들도 한국 서비스 업체의 해외 진출에 요긴한 전문 인력이다. FTA 타결로 서비스 시장 개방 속도는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달 정부는 교육, 의료, 물류, 콘텐츠 등 9개 분야를 중심으로 한 서비스 산업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얼마나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지는 두고 봐야 한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규제 개혁과 시장 개방이 이뤄진다는 점은 일단 고무적이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 서비스 산업이 세계 시장에 활발히 진출하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법과대학 J.D. 및 뉴욕 주 변호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와 스위스 세계무역연구소(WTI) 등에서 근무했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국제통상협상, 통상분쟁, 통상정책 및 전략 분야에 대해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은행(IBRD) 등 국제 기구 및 개발도상국 정부 자문 활동도 하고 있다.
 
편집자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과 글로벌 경쟁 격화로 통상 전략에 관한 기업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통상 분야 전문가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안덕근 교수가 한국 기업에 꼭 필요한 주요 통상 관련 법규와 조항, 기업들의 실제 사례, 이에 대한 대응 방안 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관심 바랍니다.
  • 안덕근 | - (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세계무역기구(WTO) 근무
    - 스위스 세계무역연구소(WTI) 근무
    -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역임
    dahn@snu.ac.kr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