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3일 조용하던 경희궁 앞뜰이 엄청난 인파로 붐볐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을 찾은 기자들과 국내외 문화계 인사들이 한꺼번에 모였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 프라다 그룹의 최고경영자(CEO) 파트리지오 베르텔리,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세계적 건축가 렘 쿨하스도 있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사람이 아닌 건축물, 즉 독특한 모습으로 경희궁 앞뜰에 선 ‘트랜스포머’였다. 렘 쿨하스가 프라다의 의뢰로 만든 이 건축물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양이 바뀌는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다. 건물의 모양이 바뀔 때마다 그 안을 채우는 콘텐츠도 달라진다는 점이 더욱 독특하다. 패션 전시, 영화제, 미술 전시 등 다양한 콘텐츠가 등장할 예정이다.
프라다의 트랜스포머는 하나의 장소에서 모양을 바꾸는 전시관이다. 반면 샤넬의 ‘모바일 아트’는 움직이는 미술 전시관이다. 이라크 출신의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모바일 아트는 해체와 조립 후 이동이 가능하다. 전시관 안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샤넬 제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예술품들로 채워져 있다. 샤넬은 지난해부터 아시아, 미국, 유럽 등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모바일 아트를 선보이고 있다.
샤넬을 만든 코코 샤넬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다. 샤넬은 모바일 아트가 코코 샤넬과 현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정신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장소라고 홍보하고 있다.
프라다와 샤넬의 예에서 보듯, 브랜딩에서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 의류나 액세서리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가격에 합당한 품질을 얻기 위해 지갑을 열지 않는다. 이들은 제품 안에 담긴 장인 정신과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 비싼 돈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 제품을 구입하는 순간, 해당 브랜드의 일부가 됐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샤넬의 2.55 핸드백을 사는 여성 소비자들은 단지 정장에 어울리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핸드백이 필요해 샤넬을 사지 않는다.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이미지의 코코 샤넬이라는 여성 디자이너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또한 샤넬 제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도 부르주아 계급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일반 가방보다 수십 배 비싼 돈을 쓴다.
샤넬도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샤넬이 움직이는 미술관을 만든 이유는 고객에게 한 차원 높은 만족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샤넬의 고객들은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새롭고 대단한 발상을 해낸 브랜드의 제품을 갖고 있다니, 역시 나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야’ ‘가방 하나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에게 이토록 대단한 영감을 줬다니, 역시 이 가방이 괜히 비싼 게 아니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라다의 트랜스포머도 다르지 않다. 경희궁이라는 역사적이고 고풍스러운 장소에 들어선 건축물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양이 바뀐다니 이 얼마나 독특한가. 게다가 건축물의 모양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문화 콘텐츠까지 등장한다니 이보다 더 혁신적일 수는 없다. 때문에 프라다 고객 역시 샤넬 고객이 가졌던 만족을 느끼게 된다.
프라다와 샤넬뿐만이 아니다. 루이비통 역시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매장 일부를 ‘에스파스 루이비통’이라는 미술관으로 만들어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전시, 후원하고 있다. 에르메스도 ‘에르메스 미술상’을 제정해 매년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를 선정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세계 패션업계에는 스페인의 자라, 스웨덴의 H&M과 망고, 일본의 유니클로 등이 주도한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패스트 패션은 패스트푸드처럼 깊이는 없으나 소비자의 욕구를 바로바로 만족시켜주는 중저가 의류들을 일컫는다. 디자인, 생산, 유통 등 제조의 전 과정이 1, 2주밖에 걸리지 않아 오늘 산 옷을 내일 같은 매장에서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제품 컬렉션이 빨리빨리 바뀐다. 싼값에 최신 유행 옷을 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세계 젊은이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예술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명품 브랜드들의 전략은 패스트 패션을 추구하는 브랜드와 정반대다. 진품보다 더 진품 같은 ‘짝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예술가들과 손잡고 ‘나는 턱없이 비싼 제품이 아니라 나만의 철학과 이야기를 지닌 제품을 판다’고 강조하는 셈이다.
아무리 불황이 심해도 소비자들은 언제나 지갑을 열 준비가 돼 있다. 문제는 소비자들에게 지갑을 열 ‘명분’을 주느냐 마느냐다. 그 명분을 만드는 일은 어디까지나 기업의 몫이다. 예술과의 조우보다 폼 나는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