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도약한 모범적인 나라로 꼽힌다. 실제 한국은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했지만 1977년 소득 1000달러를 넘기며 개발도상국으로 도약했다. 이후 1998년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며 초기 중진국에 진입한 뒤 최근에는 소득 2만 달러 수준의 후기 중진국 단계에 도달했다. 40대 후반이 넘은 한국인은 이 모든 경제 발전 단계를 경험하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한국이 이처럼 빠른 성장을 이뤄낸 것은 무엇보다 똑똑하고 근면한 국민성 때문이지만 외부 환경의 도움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이 경험한 외부 환경의 도움은 항상 ‘위기’라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국은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을 시작한 1961년 이후 위기를 3번 극복했으며, 이제 네 번째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 3차례 위기는 모두 엄청난 발전과 도약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런 위기가 없었다면 급속한 경제성장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첫 번째 경제위기는 제1차 오일쇼크다. 1973년 당시 유가는 배럴당 3달러에서 3개월 만에 11.6달러로 3.84배 가까이 치솟았다. 이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선진국들은 ‘불가항력 (force majeoure)’이라며 투자계획을 유보하고 이미 계약한 설비 구매를 취소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한국은 미래에 대한 도박을 시작했다. 오일쇼크 직전인 1972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 연장을 위해 “강 한가운데서 말을 바꿔 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며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유신헌법을 을 통과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명분 가운데 하나로 수출 실적을 제시했다. 한국의 수출액은 1964∼1971년 7년 동안 1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10배 늘어났다. 박 전 대통령은 정통성을 얻기 위해 1971∼1978년 7년 동안 수출을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로 늘리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수출 100억 달러가 정치적 목표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신정권이 시작된 바로 다음 해인 1973년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로 수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은 유신정권의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도박은 이렇게 시작됐다. 즉 대부분 선진국들이 오일쇼크로 신규 투자를 포기하고 있을 때 한국 정부는 포항제철(현재의 포스코)의 대규모 증설, 현대중공업의 대형 조선 도크 건설, 삼성전자의 기흥 전자단지 개발 등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런 적극적인 투자로 전 세계 산업재 시장에서 한국은 수요 독점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당연히 한국 기업은 막강한 협상력을 갖추게 됐다. 당시 해외에서 공장 설비를 발주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다른 나라에서 발주했다가 포기한 기계를 고철 가격수준으로 사왔으며, 기술 이전은 보너스로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세계경제는 1974년 후반부터 급격하게 회복세를 보였다. 한국경제는 이미 발주한 공장설비를 토대로 1975∼1977년에 미증유의 호황을 맞았다. 3년 동안 수출은 연평균 36%, 경제는 8.8% 각각 성장했다. 1차 석유위기는 정치적 이유로 배수진을 치고 경제 성장이라는 과감한 도박을 감행한 결과 한국에게 화려한 결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의 경제 성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지나친 자신감을 안겨줬다. 공교롭게도 당시 미국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한 안보 위기를 걱정한 박 전 대통령은 1977년부터 군수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했다. 그러나 1978년의 이란 회교혁명 성공에 이어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함으로써 확장 일변도의 한국 경제는 파탄으로 내몰렸다. 1980년에 한국경제는 성장률은 -6.2%, 실업률은 24%에 달했다. 부마사태 등에서 보듯이 민심은 경제 성장에 실패한 정권을 떠났으며, 박 전 대통령은 측근에 의해 피살됐다.
두 번째 경제위기의 와중에 등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인권유린과 철권통치로 비판을 받았지만 경제에서는 합격점을 받았다. 경제에 대한 철저한 불개입정책 덕분이었다.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경제정책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엄청난 도박을 감행한 1차 오일쇼크 때와 달리 경제 정책 패러다임을 물가안정과 균형발전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한국경제는 성숙 단계로 연착륙했다.
세 번째 경제위기는 1997년 정부의 과보호 속에서 부채 의존도가 높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규모만 늘려온 한국기업의 신용 추락이라는 형태로 다가왔다.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한 정부는 대기업들의 해외 부채를 대신 갚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해외 금융회사도 이들 대기업에 대한 신용 연장을 거부했다. 그 결과 30대 기업집단 가운데 재무구조가 극도로 취약한 19개가 도태됐다. 나머지 기업집단들도 혹독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아픔을 감내하며 체질을 강화해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들은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듯 한국경제는 3차례의 경제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선진국 진입 관문을 하나하나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