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진 ‘인문학 열풍’ 식을 때

25호 (2009년 1월 Issue 2)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 섬에 가고 싶습니다.”
 
트렌드에 민감하기로 소문난 한 최고경영자(CEO)가 올해 신년사에서 던진 말이다. 그 후로 한동안 직원들 사이에는 이 말을 해석하기 위한 논의가 분분했다. ‘직원 간의 단절된 공간이 섬이고 직원들은 섬을 둘러싼 바다로 해석되니, 사내 커뮤니케이션 부재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먼저 나왔다. 이어서 ‘우리 회사와 고객 사이에 섬이 있다는 의미로, 고객과의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한 말이다’는 견해와 ‘사람들이라고 하는 불특정 다수의 현대인으로 파악되므로, 소외되고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의 소비자 심리 분석을 강화하자는 것이다’는 주장까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이랬다. 이 CEO는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조찬 강의’에 참석했다가 ‘인문경영’을 시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에 서점에 들러 한국 현대시 코너에서 시집 한 권을 구입했고, 인상 깊은 대목을 별 생각 없이 신년사에 넣었을 뿐이다. ‘섬’얘기를 했을 때 감동한 듯 반짝이던 직원들의 눈빛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해 오는 걸 느꼈으며, 처음으로 신년사가 이슈화되었다는 얘길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문경영 메시지 해석에 직원들의 소중한 시간이 낭비됐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인문경영의 남용이 가져온 역기능
경영자들 사이에 인문학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경영과 인문학을 접목한 강의가 기업 및 대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CEO와 임원 등 이른바 ‘C레벨’을 대상으로 한 교육 과정에서도 인문학 수업이 적잖게 발견된다. 경영 코드로 재무장한 인문학 서적이 서점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꾸준히 오르고 있는 현상을 보더라도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인문학 위기론’이 부각되던 시기가 불과 몇 해 전이었음을 돌이켜보면 세월의 변화가 놀랍다.
 
인문학은 경영자들에게 통찰(insight)과 상상력(imagination)을 불어넣어 준다. 최근 트렌드인 ‘창조경영’과 ‘스토리텔링’의 자양분을 제공한다는 점도 인문학이 재조명을 받고 있는 이유다. 게다가 인문학적 지식은 경영자의 사교와 커뮤니케이션의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인문경영 트렌드는 자칫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특히 인문학이 중시되는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인문학을 경영에 차용한다면 인문경영은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이내 사라질 것이다.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역사·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근원적 가치가 내재화하지 못하고 경영의 겉치레로 남용된다면 인문학 열풍은 오히려 심각한 후유증만 남기게 될 것이다.
 
명쾌한 메시지를 주지 않는 인문경영은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비즈니스 세계의 커뮤니케이션에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데이터와 통계를 활용하거나 성공사례를 제시하기도 하고, 학계 전문가의 의견이나 업계 베테랑의 경험을 인용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신년사 사례처럼 인문학이 비유를 통한 설득 방법에 활용될 경우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효율성’과 ‘정확성’이 핵심인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에서 CEO의 부적절한 인문경영 시도는 핵심을 버리고 껍데기를 취하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경영과 인문의 조화로운 연주를 외치는 기업인의 ‘언행 불일치’ 또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을 심화할 수 있다고 되풀이해 인문경영을 강조하면서, 정작 인재 채용 때에는 인문학 전공자를 홀대하는 기업인도 많다. 억만장자 투자자 칼 아이칸은 철학, 전 휴렛팩커드(HP) 회장인 칼리 피오리나는 역사와 철학을 각각 전공했다는 해외 사례가 인문경영 강의에서 강조되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인문학 전공 경영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월간CEO’가 2007년에 파악한 국내 500대 기업(매출순) CEO 512명의 전공을 살펴보면 인문학도는 24명(4.7%)에 지나지 않았다. 29.2%를 차지한 경영학 전공자(149명)와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인문학이 경영의 겉포장이 되어서는 곤란
인문경영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메가 트렌드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경영의 포장지’로만 쓰이는 것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인문과 경영의 하모니는 바로 인문학이 경영의 콘텐츠로 융화될 때 극대화된다. 문학과 역사, 철학의 풍부한 세계관이 종합적인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고 제품이나 브랜드의 스토리 속에 제대로 녹아 들어가면 그 효과가 배가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인문학이 경영의 단순한 겉포장으로만 사용된다면 ‘먹을 것 없는 소문난 말잔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마케팅 분야에 인문학 요소를 입힌 ‘스토리텔링 기법’이 급부상했다. 저명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은 “소비자들은 상품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얽힌 이야기를 산다”면서 “기업과 시장을 주도하려면 이야기꾼이 돼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빌려 이야기의 힘, 즉 내러티브 파워를 기르겠다는 기업이 많다. 또 이야기의 근원을 바로 인문학에서 탐색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기업은 인문학에 기반을 둔 스토리텔링 기법을 쓴다’는 홍보 일변도에 그치는 기업이 적지 않다. 인문학적 마인드를 깊숙이 체화하지 못한 채 인문학 유행이라는 시류에만 편승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의 인문학 특강과 몇 권의 인문학 서적만으로 하루아침에 인문학적 통찰력을 갖출 수는 없다. 인문학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비로소 폭넓은 지식과 혜안을 갖춘 ‘아이디어뱅크’가 될 수 있다. 인문만으로 경영을 할 수는 없지만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경영자는 고객과 시장에 대한 좀 더 깊은 통찰을 기반으로 성공적인 기업을 이끌며 존경 받는 경영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문경영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인문과 경영, 기술 등이 융합돼야 한다. 이는 기업에도 적용되고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한 예로 스티브 잡스 애플 회장을 보자. 그는 젊은 시절 인도에 직접 건너가 동양철학에 몰두했을 정도로 인문학에 심취했다. 고전문학과 시집으로 서재를 가득 채운 그는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고 영역이 인문학에만 치우쳐 있지는 않다. 최신 기술과 과학에 관한 이해 등 다방면에 걸쳐 소양을 갖추고 이를 모두 융합해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경영을 한 잡스는 소위 ‘전인(全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관리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21세기의 경영자는 고민이 많다. 그리고 인문학이 그 고민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장지로 사용되거나 남용되는 인문학 열풍은 경영의 기본마저 흔들어 통찰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2009년 새해에는 인문과 경영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존경받는 경영자가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인문경영이 제자리를 잡아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풍’보다는 오래가는 차 향기 같은 그윽한 ‘잔향’이 인문학의 가치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필자는 연세대를 졸업(영문학·국문학 전공)한 뒤 한국경제신문 경제주간지 한경비즈니스의 기자로 근무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삼정KPMG 경제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유통 산업, 소비재 시장의 분석과 소비자 연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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