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3. 전쟁에서 배우는 인재 기용 전략

전쟁사 속의 ‘반골형 지휘관’ 불확실성과 위기를 이겨낸 인재

234호 (2017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전쟁사 연구자들이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고 인정하는 전투에는 어김없이 ‘반골형’ 지휘관이 등장한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직책은 물론 목숨까지도 잃게 만들 수 있는 상관의 지시마저 거부하고 자신의 경험과 분석에 근거해 현장에서 놀라운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반골형 인재가 갖는 특성은 최근 미국이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쟁에서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뒤 펴낸 <작전디자인의 기술과 방법>에서 제시하는 미래형 지휘관의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상황이 급변하는 현대전에서는 민첩성과 적응력을 갖추고 때론 정해진 교범을 깨거나 상관의 지시를 반박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리더들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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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 셋


장면 1) 1912년 10월, 터키 륄레부르가즈
때는 이때다! 신생 불가리아군의 질주

 

터키(당시 오토만제국)가 약해졌다. 유럽 열강은 어부지리를 취할 셈으로 터키와 국경을 맞댄 발칸국을 꼬드겼다. 터키를 포함한 주변 강국의 지배에 신음해오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자주와 복수를 원했다. 소국 몬테네그로는 영토 확장의 야심이 있었다. 이들은 반(反)터키-발칸동맹을 맺고 1912년 10월,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발칸전쟁(1912∼13)이 시작됐다. 대치와 탐색 속에 소규모 조우전이 몇 번 있은 후 전황은 돌연 화약고가 터진 것처럼 치열해졌다. 특히 1912년 10월 28일부터 11월2일까지 벌어진 륄레부르가즈(Lüleburgaz)전투는 양측의 전사상자만 4만2000명에 달하는 격전이었다. <그림 1>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이 바로 륄레부르가즈다.

 
초전의 선봉은 불가리아였다. 준비되지 않은 터키군을 남으로 밀어내면서 이스탄불로부터 약 200㎞ 떨어진 키르클라렐리(Kırklareli)까지 진격했다. 터키군으로부터 반격이 없자 불가리아군은 10월27일 공격을 재개했다. 양측이 다시 맞붙은 것은 10월29일, 륄레부르가즈(이스탄불 서측 약 150㎞)였다. 흑해, 에게해, 마르마라해를 포함한 발칸반도 남부의 주도권이 이곳에 걸려 있었다.


불가리아군의 기세에 터키군은 계속 밀렸다. 불가리아군은 실전 경험에 기반한 우수한 전술전기를 갖고 있었다. 특히 포병은 정확하고 치명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최초 계획대로 불가리아 제1군이 발칸반도 동쪽에서 내려오면서 측면 포위를 시도할 때, 제3군이 정면에서 공격해 터키군을 격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험한 지형, 궂은 날씨로 제1군의 남진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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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도 준치’ 터키군의 반격에 맞서 황제의 명을 어기고 공격하다

 

터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가리아 제3군과 제1군 사이에 발생한 간격으로 역습을 시도했다. 불가리아군 지휘부는 당황했다. 터키군에 돌파를 허용한다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터키 본토로부터 증원군이 도착한다면 발칸동맹군 전체가 철수해야 할지도 몰랐다. 따라서 불가리아군 지휘부는 ‘제3군은 방어로 전환해 현 위치를 고수하고, 제1군은 신속히 측방으로 기동해 터키군을 공격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했다.

 
방어 전환 명령을 받은 불가리아 제3군의 사령관은 라드코 디미트리예프(Radko Dimitriev) 장군으로, 러시아-터키 전쟁(1877∼78)과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1885)에 참전했던 53세의 노장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공세의 템포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총사령관인 황제의 명을 어기고 터키군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단순히 감으로 맞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면공격을 하는 대신 서쪽으로 주력을 보내 터키군의 측면을 강타하기로 했다. 10월29일 야간의 기습은 효과를 발휘했고 불가리아 제3군은 쉬지 않고 사흘간 터키군을 밀어붙였다.

 
터키군, 600년 만에 발칸반도에서 철수하다


측면이 노출된 터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에 동쪽으로 내려오던 불가리아 제1군까지 가세한다면 터키군은 양 옆구리를 얻어맞을 것이었다. 터키군은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했다.
 

디미트리예프 장군은 이 결정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0월31일 야간, 이번에는 터키군 한가운데를 돌파했다. 옆구리에 훅을 적중시킨 후 비어 있던 얼굴 한가운데 스트레이트를 꽂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터키군은 패닉에 빠졌다. 순식간에 장병 약 2000명이 포로가 될 정도였다. 터키군 주력은 11월2일부로 발칸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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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2) 1914년 8월, 독일 굼빈넨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러시아군,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다

 

독일군이 1914년 8월3일,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리고 계속 서유럽으로 진격했다. 18세기 내내 확장과 분열을 반복하던 유럽의 갈등이 마침내 대전(The Great War, 혹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유럽 정복을 꿈꾸던 독일은 10년 동안 전쟁을 준비했다. (물론 유럽 모든 열강이 그러했다.) 독일군의 기본 계획은 서부(프랑스 방면)를 먼저 기습하고 동부(러시아)를 나중에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처럼 되지 않았다. 굼벵이처럼 느릴 줄 알았던 러시아군이 2주 만에 동프로이센 쪽으로 군대를 보낸 것이다.

 
러시아군은 8월13일, 동프로이센 국경에 도달했다. 동프로이센에 배치된 독일군은 12개 사단(제8군)에 불과했다. 러시아군은 이곳에 무려 79개 사단을 보냈다. 숫자상으로 거의 8배였다. 러시아는 승리를 자신했다. 러시아 제1군이 북쪽에서, 제2군이 남쪽에서 서진해 독일 제8군을 포위하기로 했다. 그러나 속도가 나지 않았다. 급히 모아 보낸 군대라 훈련 수준이 낮았고 차량을 비롯한 각종 장비도 부족했다. 마주리안(Masurian)호수 일대의 습지 지형도 진격을 더디게 했다.

 
한편 독일 제8군사령부는 8월15일, 예하부대에 ‘섣불리 교전하지 말고 러시아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면서 시간을 벌라’고 지시했다. 이때 러시아군의 선두는 제1군이었다. 이들이 향하던 방향은 굼빈넨(Gumbinnen)이었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도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이곳에는 독일 제1군단이 배치돼 있었다. <그림 3>의 붉은 곳으로 표시된 곳이 굼빈넨이다.

 
“나는 무조건 공격한다”

 
독일 제1군단은 8월17일, 러시아군을 야간 기습했다. 공격하지 말라던 군사령부의 지시를 위반한 것이다. 군단장 헤르만 프랑수아(Hermann von Francois)는 상관의 지시라고 하더라도 타당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그는 ‘군대는 공격’이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싶었고 그래서 공격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공간에서 공격을 받은 러시아 제1군은 그 자리에 멈췄다.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느리지만 쉼 없이 전진하던 러시아 대군의 기세가 일순간 사라졌다. 소식을 들은 제2군도 멈췄다. 러시아군은 현 위치에서 상황을 파악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인류 역사에 손꼽히는 전투사 탄생

전쟁사 연구자들은 바로 이 프랑수아 장군의 야간 기습이 동부전선 초기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주장한다. 교전 발생 전의 부대는 통상 속도에 주안을 두고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이동한다. 그러나 적 포병화력, 보병사격이 예상될 때는 속도를 포기하고 대형을 넓게 펼친다. 독일 제1군단의 기습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은 혹시 모를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하느라 서로의 간격을 보강하기보다는 자체 방호에 신경을 썼다. 이로 인해 러시아 양군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피습과 정지, 벌어진 간격으로 러시아군은 조급해졌다. 조바심을 내던 러시아군은 공격 시간과 방향이 담긴 계획을 평문으로 전송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전문은 8월22일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공세로 전환해 8월24일부터 29일까지 러시아군을 몰아붙였다.



측후방이 포위된 러시아 제2군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전의를 잃고 투항하는 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전투 후 추산해 보니 포로만 9만2000명이 넘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 각국 사관학교의 전쟁사 교재에 ‘완벽한 전투’의 대표 사례로 소개되고 있는 탄넨베르크(Tannenberg) 섬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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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3) 1939년 5월, 몽고 할힌골
전운이 감도는 만주 지역, 울고 싶은데 뺨 때린 일본군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이래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에는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충돌이 반복될 때마다 적개심은 점점 깊어졌다. 양측은 점차 공세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다가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일본군과 소련군이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바로 할힌골(Khalkhin Gol)전투다. (일본에서는 노몬한전투라고 부른다.)

 
일본군은 소련군을 얕보고 그야말로 활개를 치고 있었다. 러일전쟁(1904∼05) 승리의 자신감 때문이었다. 또한 스탈린의 정치 숙청 과정에서 소련군은 명장을 여럿 잃은 상태였다. 소련은 반대로 혁명 이후 군 개혁으로 국방력을 증대해왔기에 ‘어디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하는 마음이었다.

최초의 사건은 1939년 5월12일 발생했다. 몽골 기병대가 말을 먹이러 할힌골 마을로 들어갔을 때 이들과 일본군 사이의 충돌이 소규모 교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2주간 실속도, 큰 피해도 없는 양측의 자존심 싸움이 이어지고 있을 때 돌연 소련군이 끼어들었다. 몽골군과 연합으로 기습해 일본군 200여 명을 사살한 것이다. 일대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항공 폭격도 실시했다. 5월 내내 밀고 밀리는 전투가 반복됐다. 양측의 부대 규모는 공히 1500명에서 2000명 정도였으며 어느 한쪽이 우세를 점하지 못한 가운데 사상자 수만 늘어갔다.


대규모 증원군을 보낸 소련군

 
소련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심상치 않은 독일의 움직임에 전력 대응하기 위해선 몽골, 만주 지역을 먼저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역 일대 일본군에게 확실한 타격을 줘야 했다. 소련군 지휘부는 할힌골 일대에 대규모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전차와 장갑차로 보강된 보병 약 4개 사단과 각종 포병, 항공 부대를 투입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구식 무기와 장비를 갖춘 약 2개 사단뿐이었다. (병력 규모로만 봐도 7만 명 대 3만5000명으로 소련이 우세였다.)

 
소련은 이 작전을 지휘할 인물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을 임명했다. 빈농 출신의 이 우직한 장군이라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일본군을 앞에 두고도 태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주코프 장군은 병사로 징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무골에다가 러시아 내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장교로 임관한 이래 쉬지 않고 중장까지 진급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소련군은 예상대로 연전연승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교전이 재개된 7월1일 이후 일본군은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일본군의 아찔할 정도로 과감한 기동, 측방을 노린 야간 기습, 죽음을 불사한 정면 돌격은 여전히 인상적이었으나 전차와 항공기가 투입된 현대 지상전에서 그런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일본군 최후의 발악에 주춤한 소련군, 주코프 장군의 목숨을 건 공격

 
8월20일 새벽부터는 소련군의 파상공세가 시작됐다. 전력을 다한 주코프 장군의 결전(決戰)이었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발악을 했다. 칼과 화염병을 들고 전차에 돌격했다.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육탄 자살 공격까지 감행하는 일본군에게 한때 공격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전황은 전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난전이 됐다.


소련군의 손실이 갑자기 불어나자 현장에 나왔던 자바이칼전선군 총사령관(동북아시아 전선을 총괄) 로디온 말리놉스키(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장군은 당황했다. 그는 주코프 장군에게 공격을 잠시 멈추고 전열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주코프 장군은 공격을 멈춘다면 일본군의 사기가 더 올라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피해는 더 커질 것이었다. 결국 주코프 장군은 말리놉스키 장군의 지시를 정면으로 위반했다. 그는 예비로 남겨뒀던 전력까지 다 투입하라는 명령을 전 부대에 하달했다. 뿌리부터 무인이었던 그는 승리 이외의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목이 휙휙 날아가는 피의 숙청 시기에 전선군 총사령관의 지시를 위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주코프 장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전권에 들어 있는 장군이 아니었다. 부인에게 자신의 최후를 암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전투가 끝난 후 추산한 전사상자는 일본군이 5만5000여 명, 소련군은 1만7000여 명이었다. 일본군은 몽골, 만주 접경 지역에서 힘을 잃었다. 이후 일본은 극동에서 북진 정책을 포기하고 동남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할힌골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인 9월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했고 유럽 대륙은 즉시 전쟁에 돌입했다. 주코프 장군의 과감한 전투, 결정적인 승리 덕택에 소련은 보다 안정적으로 유럽 전역에 대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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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승리로 이끈 세 장군의 반골 기질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전쟁의 국면을 바꿨던 세 명의 장군, 디미트리예프, 프랑수아, 주코프의 공통점을 한단어로 말하자면 ‘반골’이다. 반골은 ‘뼈가 거꾸로 솟아 있다’는 뜻이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며 세태에 타협하지 않고 비판하고 반항하는 기질을 뜻한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뚝심 있게 지휘한 디미트리예프


불가리아 제3군사령관 디미트리예프 장군은 상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부대를 움직였다. 방어를 하라고 했는데 정반대로 공격을 했다. 게다가 그 상관은 누구였는가. 전쟁이 끝나고도 왕좌에 있을 황제였다. 드미트리예프 장군은 지위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잘못된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다. 신생 불가리아군을 건설하면서 그래왔던 것처럼 ‘어떻게 싸워서 이길 것인가’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이 판단과 행동이 결국은 발칸반도에서 터키군을 몰아냈다.


길들지 않은 야수처럼 공격한 프랑수아 장군
 

독일 제1군단장 프랑수아 장군이 한 것은 단순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했다. 공격 부대의 지휘관이므로 공격의 기회가 왔을 때 공격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공격만 한 것은 아니다. 한번은 어쩐 일인지 ‘당장 공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공격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기다리다 못한 러시아군이 먼저 움직였을 때 프랑수아 장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취약한 측면을 강타당한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프랑수아 장군은 자신의 전투감각을 믿고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조직에 길든 병정이 아니었다. 전선의 다른 장군이 모두 ‘yes’라고 대답할 때 혼자 ‘no’라고 대답했다. 바로 이 ‘no’가 러시아 제2군을 섬멸한 수훈갑이었다.

 
자신을 믿고 임무에만 집중한 주코프 장군

 
전장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철칙들이 있다. 나폴레옹의 전쟁 원칙이나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계책 등이 그것이다. ‘적의 저항이 심할 때는 일단 피하라’든가 ‘쥐도 도망갈 구멍이 없으면 문다’ 등과 같은 금언도 세계 공용이다. 극동소령군사령관 주코프 장군은 상식이나 묵계 같은 것을 따르지 않았다. 평생을 최전선에서 보낸 그는 직감과 경험을 더 믿었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가는 벼랑 끝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코프 장군은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도 상관과 마찰을 빚었다. 주변 사람들은 속으로 주코프 장군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그 상관이 스탈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코프 장군은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실질적으로 종결했다’고 평가받는 독소전쟁(1941∼45)에서도 그의 지휘 스타일은 바뀌지 않았으며 후일 조국을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프란체스카 지노 교수의 반골 연구

 

최근 반골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와해성 자기표현(disruptive self-expression)’이나 ‘건설적 비순응(constructive noncon formity)’에 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연구의 주요 내용을 딱 잘라 정리하면 ‘할 말을 하라’ ‘아닌 건 아니라고 하라’는 것이다. 더하고 뺄 데 없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반골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직에서는 순응을 강조한다. 순응하지 않는 반골은 선발과 진급의 절차를 통해 정기적으로 조직 밖으로 퇴출된다.1 조직 구성원들은 참고 견디기를 강요당한다. 강압과 모욕에 내색하지 않고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공공연한 의식이 조직 내에 존재한다.2 왜 현대사회, 조직은 할 말 하고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반골들을 용납하지 못할까? 하버드경영대학원의 교수 프란체스카 지노(Francesca Gino)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사회 규범에 개인을 맞추라고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했을 때 실질적인 이득을 얻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이클의 반복은 사회적 압력에 대한 굴복으로 이어진다. 굴복이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합리적 선택, 절차적 효율성, 도덕적 정당성 대신 상관의 비합리적 지시, 절차를 벗어난 조직의 관례, 비도덕적인 집단행동에 반성 없이 가담한다.

 

둘째, 평생에 걸쳐 주어진 제도, 표준, 절차(이를 매뉴얼이라고 통칭하자)에 사고와 행동을 맞춰 왔기 때문이다. 매뉴얼에 길드는 것이다. 한 개인이 조직의 매뉴얼에 길든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매뉴얼에 대한 숙련도는 개인 사고와 행동의 최소화와 비례한다. 즉,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상화되면 점차 매뉴얼을 벗어난 문제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창의나 혁신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현상 유지가 조직의 미덕이 되고 조직원은 타성에 젖는다.
 

셋째, 우리가 지식과 정보를 취급하는 방식 때문이다. 즉, 우선순위를 정해 상위의 지식을 우대하고 경중완급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배제, 편협, 왜곡의 습관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인재를 평가하고 선발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학벌, 스펙을 중심으로 신입사원을 뽑고 계량화된 점수, 상급자의 평가로 진급을 결정하는 조직의 방식이 위에 언급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배제, 편협, 왜곡의 인재관리 방식은 당연히 반골을 도태시킨다.


지노 교수는 현대사회에서 조직이 생존, 지속 발전하려면 반골형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골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제도, 절차, 관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은 견뎠던 불편과 불만을 참지 않고 터뜨려 이슈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업이 강조하는 ‘변화와 혁신’의 적임자다. 반골의 가치는 특히 위기상황에서 드러난다. 순응하고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해진 조직원들은 틀을 벗어난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다. 반골은 조직이 위기를 뚫고 나갈 때 앞에 나설 송곳이다. 산업, 자본, 지식이 평준화해놓은 기계적 인재들 틈에서 창의와 혁신에 나설 모난 돌이다. 따라서 예측하지 못한 사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는 현대의 기업 환경에서 반골은 조직 생존의 핵심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현대 조직의 반골형 인재, 어떤 모습일까: 미군의 사례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 최강의 군대라고 하는 미군은 어떨까. 양성 과정에서 강조하는 바람직한 리더상에 포함된 반골형 인재의 요소는 무엇일까. 작전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더의 면모에서 발견되는 반골형 리더의 특성은 어떤 것일까. 사실 앞서 제시한 사례에서 등장하는 세 명의 위대한 지휘관들은 역사상 거의 존재하지 않던 유형의 리더였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지시, 잘못된 판단을 의심 없이, 혹은 좀 이상하더라도 역설적으로 ‘조직을 위한다’라는 명분하에 그대로 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1세기 최첨단 군대에서는 바로 저런 유형의 지휘관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계 최강이자 최첨단 군대인 미군의 최근 사례를 통해 이를 알아보고 기업에 주는 함의를 살펴보자.

 

비판적, 창의적 사고 (critical and creative thinking)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의 뼈저린 실패 후, 미군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다양한 성과가 나왔는데 그중 가장 흥미롭고도 유용한 것은 미 육군의 ‘작전디자인론(Operational Design Methodology)’이다. 미 육군은 군 지식정보 분야의 중추인 교육사령부, 지휘참모대학, 지상전연구소에 과업을 부여해 실전에 투입됐던 장병들을 인터뷰했으며 유사한 사례를 겪었을 법한 이스라엘군, 영국군, 캐나다군, 호주군 등과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도출된 미군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장병들이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었다. 때문에 현대 작전환경과 위협의 복잡하며 얽히고설킨 문제들(complex and ill-structured problems)을 인식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했다. 둘째, 리더들이 구식의 고정된 인지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예상·예측하지 못했던 도전(unexpected and unpredictable challenges)에 대처하지 못했다.

 

미 육군은 위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는데 ‘작전디자인론’은 그 성과 중 하나다. ‘작전디자인론’은 창의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인재, 적응성이 뛰어난 리더를 육성하기 위한 철학, 이론, 절차, 방법론을 통칭한다. 미군은 이를 바탕으로 제대별, 수준별로 지침서, 교범, 교과서 등을 발간했다.3



그중 미 엘리트 장교 육성기관인 지휘참모대학(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합동참모대학(Joint Forces Staff College)의 교재, '작전디자인의 기술과 방법(Art of Design)'은 미군이 요망하는 미래의 리더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대전의 환경과 위협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과 예상치 못한 도전이 산재해 있다. 발생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중략) 때문에 미군에는 비판적, 창의적으로 사고하는(critical and creative thinking) 리더, 민첩하고 잘 적응하는(versatile and adaptable) 리더가 필요하다.”


“안보 환경과 위협을 근원부터 다시 인식하고 문제를 가시화해 구성원의 이해를 재구성할 수 있는 리더, 기존 방법·절차와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가 미래 미군에 필요한 인재다.”


'작전디자인의 기술과 방법'이 요구하는 미래 리더의 조건은 지노 교수가 강조한 반골형 인재의 요건과 맥을 같이한다. 또한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을 때 다른 이들이 생각지 못한 전술로 민첩하게 대응하고, 복잡한 전장상황을 단순하고 과감한 해법으로 뚫고 나갔던 세 반골 디미트리예프, 프랑수아, 주코프 장군의 특성과도 부합한다.

 

전문성에 기반한 강한 소신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

 

2009년 전 필자는 미 버지니아 노폭에서 열린 국제 합동연습에 연락장교로 일주일간 참가한 적이 있다. 전쟁 발발을 가정해 시나리오대로 일반 상황을 부여하고 메시지로 특수 상황을 부여하면 지휘부가 조치를 하는 전형적인 전쟁 시뮬레이션이었다. 연습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미 육해공군 장교단이 연습을 주도했고 미국의 동맹국 장교들이 합동파트너 역할 겸 피교육생으로 참가했다.


동유럽 국가, 한국, 중동지역 국가의 장교들로 구성된 A그룹의 지휘통제실 모습은 잘 짜인 상황극 무대 같았다.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메시지가 부여되고 있었지만 실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 조치나 대안 마련을 위한 열띤 토론 같은 것은 없었다. 참모와 실무자들은 잠시 후 평가관(미 예비역 장군)의 입장과 함께 시작될 상황보고를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면에 파워포인트를 띄워놓고 기능별로 돌아가면서 보고연습을 했다. 어떤 장교는 중간에 글자 크기, 색, 위아래 간격 같은 것을 조정했고 다른 장교는 자기도 연습해야 하니 빨리 끝내라고 성화였다.


미국 지휘통제실의 모습은 달랐다. 지휘관과 주요 참모는 처음부터 현장(으로 묘사된 야외 주차장)에 나가 있었다. 지휘통제실과 야전지휘소는 화상으로 연결돼 있었다. 실무자들은 현장을 연결해 실질적인 조치를 하고 있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관련 기능별 담당자들이 한쪽에 모여 커다란 토론용 전지(미군들은 butcher paper라고 불렀다)나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쓰고 도표를 그려가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무도 상황보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진짜배기 전쟁을 하고 있었다.

 
A그룹 장교와 미국 장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문성이다. 미군 장교들은 대부분 전장을 경험한 베테랑이면서 앉으나 서나 전술, 작전, 전략을 연구하는 전쟁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최초의 총성 한 발이 들렸을 때 직감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적용해야 할 교전규칙은 무엇인지 부하들에게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A그룹의 장교들은 대부분 평시 행정업무에 익숙해진 관리자들이었다. 군 생활의 태반을 사고예방이나 부대 관리로 보낸 비전문가들이었다.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프린트한 보고서를 읽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줄 몰랐다. 시나리오 순서에 맞춰 다음 메시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들은 허수아비 같았다. 전쟁의 경험이나 작전 이론에 대한 깊이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한 공간에 모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가상 언론 브리핑에서는 더 극적으로 비교가 됐다. 기자들을 모아놓고 주요 전장 상황을 알리는 브리핑은 국민 신뢰와 직결된 중요 과제다. 그러나 훈련 과제에 언론 브리핑을 포함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A그룹에도 이는 생소한 것이긴 했다. 가상 언론 브리핑이 시작되자 A그룹과 미군의 수준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과제에는 상당한 예산이 배정됐는데 A그룹은 파워포인트로 만든 브리핑을 컬러 출력해 책자를 만들고, 간판과 현수막을 제작과 다과와 샌드위치를 준비하는 데 돈을 다 썼다. 그런데 미군은 예산을 사용해 유엔 대외홍보담당, 방송언론 기자, 심리학자, 홍보전략가를 초빙했다. 브리핑이 끝난 뒤 초빙자들은 잘한 점과 보완할 점을 강평했다. 강평이 끝난 후 곧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파병을 나갈 미군 장교들은 개별적으로 조언을 요청하면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미군 장교의 사례처럼 스스로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전문성을 확보해야 강한 소신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이는 ‘건설적 반골’의 기초 토대가 된다. 반골이라 함은 이유 없이 반항하거나 지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전문성에 기반해 위급한 상황에서 잘못된 지시가 내려올 경우 이를 정확하게 판단해 자신의 결정을 내리고, 지시와 다른 결정을 하더라도 이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살펴본 ‘역사를 바꾼 전투’의 반골형 지휘관들은 모두 이 경우에 해당한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문성과 소신을 가진 리더와 임원들만이 자신이 판단한 ‘옳은’ 방향대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으며 윗선을 설득할 수 있다. 이런 전문성을 갖춘 리더들은 부하 직원들이 전문성을 토대로 자신을 비판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할 때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오직 윗선의 지시만을 받드는 사람들, 자신감 있게 판단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지시를 따르듯 아랫사람도 그래야만 한다고 믿을 공산이 크다.

 

관습과 전례를 과감히 혁파하는 사람들

 

4년 전 미 펜타곤의 TF 부서에서 3개월 동안 공동 업무를 한 적이 있다. 대령이 팀장으로 있던 그곳의 보고서 작성 방식은 매우 특이했다. 우리 공직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우선 보고서나 지시문서 같은 결과물이 나와야 할 사안이 있으면 회의실에 모인다. 각자의 업무용 랩톱을 가지고 실무자, 중간관리자, 의사결정권자 등이 테이블에 모여 앉는다.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 업무 관련자는 자신의 일을 하다가 중간에 연락을 하면 회의실에 들어온다. 회의는 자유로운 토론이 주가 되며 종종 화상전화나 스피커폰으로 다양한 외부 관계자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토론 과정에서 실무자는 지정된 양식(주로 범용 공유플랫폼을 사용한다)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문서를 작성한다. 토론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실무자는 화면에 지금까지 작성한 문서를 띄워놓는다. 때에 따라서는 정돈되지 않은 메모 수준일 때도 있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수정보완이 되면 실무자는 현 상태의 문서를 참석자들에게 e메일로 보낸 후 회의실을 먼저 나가 자기 자리에서 하던 일을 한다. 이제는 중간관리자, 의사결정권자가 남아서 심도 깊은 토론을 한다. 중간관리자가 문서를 보완한다. 토론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중간관리자는 문서를 결정권자에게 송신하고 관련자들에게 참조 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실무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결정권자는 회의실에 남거나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문서 초안을 만든다. 본격적인 문서 작업은 결정권자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성이 끝나면 그는 e메일에 문서를 첨부해 중간관리자, 실무자에게 보내고 의견을 구한다. 결정권자는 이 의견을 받아 최종적으로 문서를 완성하고 상급자에게 e메일을 보내거나 직접 보고한다. 그래서 미군은 계급과 직책이 높을수록 업무의 강도가 세고 퇴근시간이 늦다.


만약 한국 군대에서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훈련 때 지휘통제실에 앉아서 보고를 받는 대신 참모와 실무자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힐난을 받을 것이다. 조직의 순리에 역행하는 반골이란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반골 짓을 미군은 세계 군사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펜타곤에서 하고 있었다. 미국이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거듭된 ‘전쟁 실패’를 통해 기존 관습을 깨 나가는 사람들로 리더 자리를 채운 것은 현재 기업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기업에 적용해보자. 반골은 모든 일에 삐딱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반골은 조직의 관습과 전례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다. 늘 하던 대로 의사결정하고, 늘 하던 방식대로 회의를 하고, 항상 하던 대로 업무지시를 하는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기업을 이끌 수 없다. 아마 한국 기업에서 갑자기 어떤 임원이나 팀장이 미국 지휘관처럼 본인이 회의의 내용을 정리하며 이를 부하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알려주는 방식으로 일한다면 ‘유난 떤다’ ‘조직의 문화를 해친다’ ‘아랫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한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반골의 숙명이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문화, 오래된 관습에 저항하는 반골이야말로 진정한 반골이며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혁신가의 활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가며



이 글에서는 전쟁사 속에서 국가 위기를 극복해낸 세 장군 디미트리예프, 프랑수아, 주코프 장군의 사례를 찾아 ‘반골형 지휘관’으로 묶고 그들의 특징을 묘사했다. 또한 반골의 특징과 필요성을 현대 경영의 관점에서 분석한 프란체스카 지노 교수의 연구와 연계해 현재 조직이 반골형 인재를 육성하고 보호해야 하는 이유를 부연했다. 마지막으로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미군 조직 내에서 관찰했던 반골형 리더들의 모습과 그 특징을 간략히 제시했다.


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골형 인재를 찾아내 조직 차원에서 보호 육성해야 할 이유는 명확하다. 미 국방성이 발표한 미래 안보환경과 위협의 가장 큰 특징은 불확실성과 복잡성이다. 21세기 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국가의 군대에는 전통적으로 강조돼 오던 ‘좋은 리더’의 이미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직적 위계 구조 내에서 상명하복하는 꼿꼿한 병정이나 상하 두루 화목하게 구성원을 잘 다독이는 관리자는 위기를 돌파하는 데 역부족이다. 미 육군에서 발간한 미래 육군 비전은 불확실성과 복잡성의 시대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판적이고 창의적 사고를 하는 리더, 전문성에 기반한 강한 소신을 가진 리더, 관습과 전례에 과감히 도전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미래 환경에 대한 전망은 전쟁과 군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특징도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포함하고 있다. 미 육군이 강조한 비판과 창의, 도덕적 용기, 과감한 실천력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기업가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인재 기용과 승진, 선발은 군, 기업, 행정기구 등 어느 조직에서나 조직의 명운을 가른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더욱 그렇다. 전쟁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는 축구 등의 스포츠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축구를 통해 본 선발과 기용의 지혜’ 참고.) 이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반골형 인재를 찾아 관리, 육성함으로써 조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남보람 육군군사연구소 연구원 elyzcamp@gmail.com

필자는 전쟁사 연구자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파견연구원, 미 육군군사연구소 교환연구원, 뉴욕 유엔아카이브 파견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국내 여러 매체에 군사학과 전쟁사 등 자신의 전공 분야를 바탕으로 조직문화 혁신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해 통섭적인 글을 쓰고 있다.

DBR mini box

 

축구를 통해 본 선발과 기용의 지혜

스포츠는 종종 전쟁에 비유된다. 그중에서도 축구는 특유의 ‘돌파’ ‘후방침투’ ‘기습’ ‘역습’ 등의 각종 ‘전략·전술적 용어’로 인해 전투와 가장 비슷하게 여겨지는 종목이기도 하다. 또한 전 세계 국가대표들이 맞붙는 월드컵이 4년마다 치러지면서 ‘현대 국민국가가 유지되는 건 월드컵 때문’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축구에서의 국가대표 선발은 ‘축구계’라는 조직 전체에서의 ‘승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우수한 팀원(선수)이 인사권자(감독)에 의해 선발되고, 선발된 인사에는 부와 명예와 영향력을 얻지만 그만큼 큰 책임도 따른다. ‘감독의 전권’이라 불리는 만큼 실패에 대한 기용과 선발 실패에 대한 책임은 그들을 ‘승진’시킨 감독에게 쏟아지기도 한다. 한국 축구에서도 최근 큰 실패와 성공 사례가 존재한다. 또 한때 유럽의 약팀으로 전락했다 피파랭킹 1위까지 차지했고 여전히 강팀으로 군림하는 벨기에의 성공 사례도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기업이나 경영 현장의 리더들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을 찾아보자.

 

실패 사례: ‘의리 프레임’에 갇힌 2014 브라질월드컵 홍명보 감독

 

브라질월드컵 본선을 한 달여 앞두고 명단 발표 기자 회견이 있던 날이다. 명단 발표 전이었지만 이미 20명의 선발은 사실상 확정돼 있었다. 관건은 2∼3명이었다. 최전방 공격수, 왼쪽 측면 수비수, 당시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가던 선수의 발탁 여부였다. 홍명보 감독이 한 명 한 명 선수의 이름을 불러나갔다. 끝까지 고민했던 최전방 공격수와 왼쪽 측면 수비수 자리에는 모두 홍 감독과 2012 런던올림픽 대표팀에서 함께했던 선수들이 이름을 올렸고, 주목받던 K리거의 이름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선수는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에서 홍 감독과 인연이 없었다. 명단 발표 직후 첫 번째 질문이 날아들었다.



“결국 고심하던 자리가 모두 ‘홍명보의 아이들’로 채워졌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상된 질문이었지만 홍 감독은 조금 흥분했다. 그는 “‘홍명보의 아이들’이란 실체는 없다, 선발된 모든 선수들은 감독이 계획하는 전술을 잘 수행할 능력이 있고, 기량이 훌륭한 선수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리’로 대표팀을 구성했다는 말이 쏟아졌고, 각종 패러디물이 퍼지며 축구대표팀과 해당 선수들, 특히 홍 감독을 조롱했다.

 

브라질월드컵 실패는 여기서 시작됐다. 필자는 ‘논란의 중심에 선 선수들의 경기력이 좋지 않았다’거나 ‘선수 선발이 잘못됐다’는 결과론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홍 감독의 의도와 다르게 팀이 ‘의리 프레임’에 갇혀버린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홍 감독은 기자와 사석에서 만나 당시 상황을 ‘서로 수갑을 채워 놓은 듯한 상황’이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팀을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야 할 신뢰의 끈이 차갑고 딱딱한 수갑으로 변한 것이다.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했지만 서로 손과 발에 족쇄를 찬 꼴이 돼 제대로 뛰지 못했다. 서로에게 애석한 시간이었다. 감독으로서 선수에게 ‘내가 너를 진짜 의리로 뽑았냐’고, 선수도 감독에게 ‘감독님, 제가 진짜 의리로 뽑혔나요?’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브라질월드컵의 실패가 ‘의리 프레임에 갇혀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이유다.

 

홍 감독의 말대로 그 당시 대표팀이 어떤 프레임에 갇힌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도 확실하다. 다만 그 프레임을 누가 만들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다. 홍 감독은 억울할 테다. 자신은 나름의 기준을 갖고 철저히 검증했는데 색안경을 낀 언론과 대중이 그들을 액자에 가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조직의 리더는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팀 안과 밖, 그 경계에 높고 튼튼한 울타리를 쳐 명확히 구분하고 팀을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부당한 외풍을 막아주려 세운 울타리가 그 안의 사람들에겐 안락함이 아닌 나태함을 줄 수 있다. 또 밖에 있는 이들에겐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홍 감독의 브라질월드컵 대표팀은 단합이 잘되던 팀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담합으로 봤다. 감독이 선수단을 하나로 응집하려 스스로 구심점이 돼 강한 구심력을 발휘할수록 원심력 탓에 튕겨 나온 누군가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해당 팀원에게만 주는 메시지가 아니다. 팀 밖에 있는 다른 이들, 또 팀을 바라보고 응원해야 할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홍 감독은 선수단을 하나로 만드는 데 탁월한 지도자다. 하지만 팀 밖의 선수, 언론, 팬까지 하나로 묶는 리더십은 당시에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선발과 기용’, 기업으로 말하면 ‘승진’에서의 문제가 리더십 자체를 망가뜨린 셈이다.

 

팀 문제니까 팀에 맡겨달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게 국가대표팀이 아닌 사적인 조직이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들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고, 그 평가에서 팀 내 구성원이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를 뽑는 행위는 명확한 철학 아래 충분한 논리적 타당성과 설득력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성공 사례: 발로 뛰어 편견을 깨고 설득해 성공한 2015 아시안컵

 

2017년 여름을 기준으로 울리 슈틸리케 전 축구대표팀 감독은 실패한 지도자다. 축구대표팀을 월드컵 예선 탈락의 벼랑 끝 위기로 몰고 간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나 2015년 아시안컵 직후 그는 역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사령탑 가운데 최고 명장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 배경 중 하나가 이정협의 발굴이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직후 취임한 슈틸리케 감독은 7년 만에 다시 외국인 감독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부임 후 첫 메이저 대회인 아시안컵을 앞두고 이정협을 발탁했다. 축구대표팀 경력은 고사하고 청소년 대표팀 경력도 없었던 선수를 우승을 노리는 대회에 주전 공격수로 선발한 것이다.

 

당시 2부 리그 소속의 군인팀 상주 상무에서 뛰고 있던 이정협을 뽑겠다는 얘기에 여론은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렇다고 이정협이 소속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것도 아니다. 2014년 상주 상무에서 기록은 25경기 출전에 4골이 전부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골이 전부가 아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서 아주 좋은 움직임을 지녔다. 우리 팀엔 미드필드에 손흥민과 이청용 등 훌륭한 자원이 많다. 이정협이 활발히 움직이면 이들이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협은 기대에 부응했다. A매치 데뷔전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평가전에서 데뷔골을 넣었고, 강팀 호주와 아시안컵 조별리그 3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군인’ 신분으로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군데렐라(군인+신데렐라)’로 불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난적 이라크와 준결승에서도 골을 넣으며 팀을 27년 만의 아시안컵 결승으로 이끌었다.

 

슈틸리케가 당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이정협 발탁에서 알 수 있듯 그가 편견 없이 선수를 선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임 후 2015년 9월까지 꼭 1년 동안 59명을 대표팀에 불렀고 그 가운데 11명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선수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41차례 지방 출장을 다니며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를 보좌했던 박건하 당시 대표팀 코치는 “이정협 발탁은 슈틸리케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다”라면서 “선수의 장단점을 두루 보는 게 아니라 장점만 보고 활용하려는 점이 다른 지도자와 달랐다”고 기억했다. 슈틸리케는 이정협을 기용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점유율 높은 축구를 펼쳤다. 물론 슈틸리케 감독과 이정협은 아시안컵에서의 번뜩임을 이어가지 못했다. 다만 2015년 아시안컵만을 놓고 봤을 때 이정협의 발탁은 신선했고, 설득력이 충분했다. 당시 대표팀에 들지 못하던 선수들도 ‘나도 열심히만 하면, 슈틸리케 감독 전술에 적합한 선수만 된다면 어떤 편견에도 간섭받지 않고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이뤄졌다. 축구대표팀이 아시안컵 이후 2015년 한 해 승승장구했던 비결이었다.

 
지금처럼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외부 인재 채용과 내부 인재 승진을 고민하는 기업 리더들에게 주는 시사점이 큰 사례다.

 

타국 성공 사례: 벨기에가 FIFA 랭킹 1위에 오른 이유

 

벨기에는 작은 나라다. 인구는 서울시와 비슷하고 면적은 경상도 크기와 비슷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유로 2000에서의 개최국 사상 첫 16강 실패와 2006∼2010 월드컵 진출 실패로 암흑기에 있던 나라가 2015년 말 FIFA 랭킹 1위에 올랐다. 필자는 2016년 1월 그 비결을 취재하기 위해 벨기에를 찾았다. 2000년대 초반 2년 동안 철저한 분석을 한 뒤 유소년을 향한 10여 년에 걸친 과감한 투자로 벨기에 축구의 청사진을 그린 크리스 판 푸이벨데 기술이사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벨기에 축구가 성장하게 된 비결을 문화 융합에서 찾았다. 국경을 마주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은 물론 바다 건너 영국까지 수없이 왕래하며 각 나라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벨기에 문화에 맞춰 나갔다. 또 대표팀 내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으로 갈린 문화갈등을 정리하는 데 정열을 쏟았다.

 

벨기에리그는 현재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이 없다. 2015/2016시즌 2부 리그 우승으로 1부에 승격한 AS 오이펜은 이런 다문화 프로젝트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카타르 국부 펀드로 운영되는 이 팀은 독일 국경 도시 오이펜을 연고로 하며 단장 및 프런트를 독일인 중심으로 구성했다. 유소년팀 지도자들은 스페인 출신으로 채웠다. 선수단은 벨기에, 독일, 스페인, 프랑스, 아일랜드 등 유럽 출신은 물론 말리,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세네갈, 모로코 등 아프리카 외에도 아시아(카타르), 남미(베네수엘라) 대륙 출신까지 있다. 이와 같은 벨기에 축구 정책에 혜택을 본 한국 선수도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 추천으로 벨기에 리그(2000∼2001 앤드워프, 2001∼2004 안더레흐트)에 진출했던 설기현이다.

 
2017년 9월 현재, 벨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개최국 제외)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해 놓은 상태다.

 
한때 잘나가다 암흑기를 거친 후 다시 세계 정상권에 선 벨기에 축구 사례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후 급변하는 환경과 다양한 어려움으로 정체기를 겪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다양성’을 체계적으로 확보해 인재를 채용하고 승진시키는 것에 해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찬 SBS 스포츠부 기자 jaycee@sbs.co.kr

이정찬 기자는 고려대에서 심리학과 언론학을 공부했다. 대학스포츠 매거진 'SPORTS KU'를 창간했고, 영국 셰필드할람대에서 스포츠 저널리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SBS 스포츠부에서 재직 중이며 저서로 '스포츠 사이언스: 이길 수밖에 없는 승부의 법칙' '원팀리더십: 한국축구대표팀에 ‘팀의 길’을 묻다'가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29호 Fly to the Metaverse 2021년 09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