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임금님 행차에 비석도 서있으면 안돼!” 영조의 신하들, 과잉충성의 이면에는?

161호 (2014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HR

조선은 조상숭배와 제사를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사회였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던 사회에서, 왕이 행차한다는 이유로 무덤을 깎고 비석을 뽑아 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때는 1724, 영조 즉위 첫해였다. 선왕인 경종의 장례를 위해 능으로 행차하던 중 영조는 길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이 훼손돼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왕의 행차 때 백성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야 했는데 비석과 봉분은 오뚝하게 서 있어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무덤을 깎고 비석을 뽑아버렸던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아랫사람들의 과잉 충성이나 권력 남용으로 봐서는 안 된다. 변화를 싫어하고 일정한 형식에 자신을 가두려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 문제를 일으킨 역사적 증거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유럽에서는 절대군주와 계몽전제군주라는 두 가지 사조가 유행했다. “짐은 곧 국가다.” 이 말은 볼테르가 17세기 프랑스 절대군주였던 태양왕 루이 14세를 지칭해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태양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태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루이 14세를 태양왕으로 만든 비결은 유럽 최고의 부와 강력한 군대였다. 루이 14세는 전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왕이었다. 막대한 세금과 풍부한 재정으로 베르사유궁전을 짓고 60만의 상비군을 운영함으로써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계몽전제군주의 대표주자는 18세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다. 유명한군주는 그 나라의 첫 번째 공복이다라는 말을 한 주인공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좋아하는데 그 의미를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이 말은 왕의 지위를 태양에서 종으로 바꾸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만들었다. 국가통치, 고문 폐지와 같은 민주적 개혁, 학문 진흥, 군대조직, 정복전쟁 지휘 등 1인 다역을 훌륭히 해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만한 절대 권력을 요구했고 필요하다면 납치, 숙청, 기타 무슨 짓이든 다 했다. “군주는 국민의 공복이다. 너희를 위해 모든 일을 할테니 나를 믿고 모든 권력을 내게 다오.” 그의 선언은 사실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군주 vs. 계몽전제군주

서구에서 왕이 태양이냐, 종이냐는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던 조선에서도 국왕권의 확대를 두고 긴장이 강화되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어떤 면에서는 절대군주와 계몽군주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정조 시대에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신하들과 갈등이 벌어졌다. 다만 문제는 조선에서 태양왕과 같은 절대군주적 개념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고 계몽전제군주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동양의 전통적 군주관은 온 나라의 표상과 본보기로서의 군주였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그 통치자로) 군주를 세워 인()으로써 모두 태평하고 화목하게 지내게 한다는 것이 왕과 백성의 관계이자 국왕 권력의 근거였다. 이 말은 왕은 하늘로부터 백성의 통치를 위임받은 존재라는 의미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왕을 하늘의 해로 묘사했다. 조선에서는 왕이 승하하면 그 즉시 세자가 왕으로 즉위했다. 효를 하늘처럼 받들고 삼년상까지 치르던 나라였다. 선왕의 장례라도 치르고 즉위하는 것이 옳을 듯하지만 왕은 그 즉시 즉위했다. 이유는 바로하늘의 태양은 한순간이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였다. 이것이 태양왕적 요소다.

 

물론 이 말에는 왕은 백성을 하늘같이 여겨야 하며 백성의 뜻을 듣는 것이 하늘의 뜻을 듣고 시행하는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있다. 국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백성의 조그만 불평과 불행도 왕의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는 계몽전제적 군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존귀함과 공정함을 강조하는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존귀함 쪽으로 유혹되기 마련이다. 왕은 하늘의 대행자라는 관념이 태양왕적인 의미로 사용된 지가 너무 오래 됐기에 백성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백성이 원한다면 기존의 관행과 법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몽전제군주적 태도는 훨씬 더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낯섦과 너무도 오래 지속된 태양왕적인 자세 때문에 좋은 뜻으로 시행한 일이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어가 행렬을 보지 못하게 막은 이유

1444(세종 26) 세종이 초수(청주의 초정리 약수터)로 행차할 때의 일이다. 세종이 처음 초수로 행차할 때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어가 행렬을 지켜보려고 길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세종이 돌아올 때는 길가에 군중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세종이 승정원에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했다. 조사해 보니 충청감사 이선이 구경꾼들이 세종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도내의 모든 수령에게 사전에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그 지역에 흉년이 들어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행여나 종자와 식량을 제때에 받지 못해 굶주린 사람들이 어가 앞에서 하소연할까봐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어가행렬을 보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예전에도 듣지 못한 일이라고 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 세종이 치세 중에 화를 낸 기사는 그다지 없는데 화를 낸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

세종은 수령들이 자신들의 허물을 감추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해프닝이 발생했다고 생각했으며 형조에서 조사를 해 곧바로 처벌하게 했다. 그러나 이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원래 백성이 임금 앞에 직접 나와서 하소연을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세종도 이를 알고 있었다. 세종이라면 무한정 모든 일을 착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세종은 원칙주의자였고, 포퓰리즘을 싫어했다.

 

세종이 화를 낸 진짜 이유는 백성들이 왕을 보는 것조차 막았다는 것이다. 백성이 없으면 왕도 없는 것인데, 왕과 백성이 서로 마주볼 수도 없다면 왕을 왕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리고 왕이 백성의 하소연을 듣고 안 듣고는 왕의 절대권한이다. 관료들이 자기 이해관계로 왕과 백성의 만남 자체를 차단한다는 건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할지 모른다고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을 훼방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세종은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하나 세종이 화를 낸 이유는 왕이 아무리 존귀하다고 해도 형식과 조치가 인간의 상식과 기본적 감정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왕의 행차는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 한 것인데 경호상의 이유든, 의례상의 이유든 백성이 보지도 못하게 하는 왕이라면 과연 왕이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봉분을 깎고 비석을 뽑은 이유

태양 같은 권위라도,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상식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넘는 것이 또한 세상일이다. 1724년에 영조가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영조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왕은 산 사람도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더구나 이미 죽은 자의 그 많은 무덤까지 깎아내야 하겠냐고 통탄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한술 더 떴다.

 

이 해는 영조가 막 즉위한 해였다. 선왕인 경종의 장례를 위해 능으로 행차하던 영조는 길가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이 모두 훼손돼 있는 것을 보게 됐다. 둥근 봉분은 서양식 무덤처럼 평평하게 깎여 있었고 무덤의 비석은 모조리 뽑혀 있었다. 이유가 좀 황당했다. 조선시대 때 왕의 행차를 만나면 백성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야 했다. 그런데 비석과 봉분은 오뚝하게 서 있고 솟아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왕 앞에서는 똑바로 서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영조 이전에는 국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도 선왕이 승하하거나 중요한 제사 때는 가끔 나갔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영조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왕은 산 사람도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더구나 이미 죽은 자의 그 많은 무덤까지 깎아내야 하겠냐고 통탄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한술 더 떴다. 경종 능으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경종 능 주변의 모든 능을 없애고 비석까지 모두 뽑아내야 한다고 했다. 영조는 경종 능에서 보이는 곳의 비석만 뽑고 나머지는 그냥 두라고 했고 무덤의 이장도 형편에 따라 처리하는 선에서 해결하도록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무덤 모두를 파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큰 소동이 났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영조는 이런 상식 밖의 행동,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를 무시하는 행동은 왕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깎아 내린다고 한탄했다.

 

역사가 전해주는 경고

조선은 조상 숭배와 제사를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사회였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어서 명절 성묘 길의 교통정체는 세계적인 화제가 되곤 한다. 그런 조선사회에서 왕이 한 번 행차한다고 해서 길가의 비석까지 모두 뽑아 버리는 행동이 벌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신하들은 경종 능 주변의 모든 능을 없애고 비석까지 모두 뽑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잠든 곳에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함께 누워 있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이런 관행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관료들의 과잉 충성이었을까?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이 사건은 누가 책임을 지거나 맡아서 한 일도 아니었다. 재상 이하 신하들이라고 이 일이 대소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모른 것도 아니고, 힘없는 일반 백성들에게 무책임한 권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다. 게다가 조선시대만 해도 비석을 세운 무덤은 평범한 백성들의 무덤이 아니었다. 왕릉이 들어설 만한 좋은 자리에 비석과 봉분을 마련했다면 필시 사대부급 집안의 무덤들이었다고 봐야 한다. 즉 자신들과 일가친척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을 알면서도 정말로 국왕의 권위를 위해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과잉 충성이나 권력 남용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왜 조선의 관료들은 국왕의 한 번 행차와 형식적인 권위를 위해 자신들과 사대부들의 무덤까지 파괴하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 인간은 무슨 제도나 관념을 만들면 자꾸 행동이 인플레이션이 되는 경향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은 현대로 넘어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만든 제도라도 점차 처음의 목표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경직된 행동방식을 규정한다. 이것은 이래야 되고, 저것은 저래야 된다는 식으로 관념이 관념을 낳고 형식이 형식을 낳는다. 혹은 그 명제에 맹목적으로 집착한다.

 

왕의 행차를 위해 비석을 뽑아버린 사건은 변화를 싫어하고, 일정한 형식과 반복 속에 자신을 가두려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그 본성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지 삼년상을 지내는 사회에서 자신들의 부모와 조상의 무덤을 파내는 행위로까지 발전했다. 오늘날 기업들도 스스로를 옭아매는 허울뿐인 형식만 남은 사례는 없는지, 일상의 전통과 관습 속에 봉분을 깎고 비석을 뽑는 행위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때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to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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