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Article at a Glance - HR,인문학
16세에 과거급제를 한 뒤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육진 개척은 물론 북방 안정을 비롯한 각종 민생안정책을 세우고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던 인물인 김종서. 그러나 그는 결국 문종이 당부했던 ‘단종의 보호’와 ‘수양대군 견제’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권력 교체기의 ‘실패한 재상’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자부심이 너무 센 나머지 독선적인 행태를 보였고 스스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 했다. 권한 위임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놓쳤다. 정도전의 실패와 겹치는 부분이다. 권력 교체기의 조직이나 기업에서 2인자는 단호하되 독선적이어서는 안 된다. 조직의 경영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새 리더를 뒷받침해 줄 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786년(정조 10년) 어느 가을 날. 한양 백악산을 유람하던 한 선비가 산비탈의 소나무 아래에 낯선 물건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여겨 다가가 흙을 헤쳐 보니 그것은 아주 오래돼 보이는 낡은 옥함(玉函)이었다. 함을 열어 본 선비는 깜짝 놀랐다. 거기엔 ‘김종서(金宗瑞)’라고 새겨진 위패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보고받은 정조는 “김종서가 북쪽 국경을 넓힌 공적은 지금도 칭송하지 않는가. 더욱이 그 절의는 사육신에 뒤지지 않는다”며 불천위(不遷位)1 로 지정해 줄 뜻을 비친다. 영의정 김치인 등 대신들도 “옛날 충문공(忠文公:성삼문)의 위패도 수백 년을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김 정승의 위패 또한 그러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승의 충절은 참으로 탁월하고 더욱이 나라에도 큰 공이 있으니 불천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 지나친 은전은 아닐 것입니다”라며 흔쾌히 동의했다.2
세조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던 김종서가 복권된 것은 이로부터 40년 전인 영조 22년(1746년)이었다. 숙종에 의해 단종이 다시 왕호를 받았고 “저들이 어찌 천명과 민심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래도 자신들의 왕을 섬기기를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조께서도 육신을 두고 당대에는 난신이나 후대에는 충신이었다고 말씀하셨다”며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육신도 신원됐지만3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죽임을 당한 김종서에 대한 복권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그를 신원한다면 자칫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세조가 불의(不義)를 저지른 것으로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문제야 어쨌든 겉으로나마 합법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고 사육신도 비록 ‘왕’인 세조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자신의 왕에게 충성을 바친 신하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계유정난은 세조가 ‘대군’의 신분일 때 변란을 일으켜 자신의 대권플랜을 방해하는 형제와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을 공격해 죽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기서 김종서를 단종의 ‘충(忠)’으로 본다면 그를 죽인 세조는 단종의 ‘역(逆)’이 된다.
그러던 1746년 12월. 마침내 김종서의 관작이 회복됐다. 이때 영조는 세조가 예종에게 당부했던 “나는 고난을 줬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 나의 행적에 구애돼 변통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따라 김종서를 복권한다고 밝혔다. 세조의 유지를 거론함으로써 후대가 선대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논란을 방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허점은 여전했고 영조 스스로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럼에도 영조가 이 결정을 밀어붙인 것은 ‘김종서=충신’이라는 인식이 당대에 보편화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을 고양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죽이기까지 한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으로 표상한 것처럼 유교국가에서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충신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충성’을 존경받아야 할 신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지금의 신하들이 그러한 정신을 본받길 바라서였다. 군주가 정치의 중심이 되는 ‘황극(皇極)’을 강조하고, 군주가 주도하는 탕평정치를 추진한 영조로서는 신하들의 ‘충성’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김종서의 복권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종서를 불천위로 지정한 정조도 마찬가지였다.
소년 급제한 김종서, 세종의 총애를 받다
이렇듯 300년이 지난 후에야 역적의 멍에를 벗고 충신의 명예를 안은 김종서. 1383년, 고려 우왕 9년에 태어난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는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큼 빠른 기록이다. 그의 자(字)는 ‘나라의 재상’이라는 뜻의 ‘국경(國卿)’이며, 호는 ‘절재(節齋)’다. 흔히 김종서 하면 ‘대호(大虎)’라는 그의 별명처럼 장대한 체격을 가진 무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그의 체구는 작았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그는 문신(文臣) 출신으로 학문적으로도 남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경연에서 참찬관(參贊官)으로 <시경(詩經)>을 논했고4 지경연사(知經筵事)로서 주자의 <근사록(近思錄)>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는 모습이 실록에 등장한다.5 집현전과 춘추관의 총책임자가 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 작업을 주도했으며 유생들이 “학문이 경전과 사기(史記)에 통달하고 도덕과 문장을 본받을 만하니 신하들의 영수요, 사림의 표준이라 할 만하다”며 그로 하여금 영성균관사(領成均館事)6 의 임무를 맡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7
김종서는 세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행대감찰로 강원도에 파견돼 백성들의 기근상황을 살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충청도로 가서 수령들의 백성 구호사업 실태를 점검했다. 이어 황해도 등 각 지방의 경차관(敬差官) 업무를 차례로 수행한 것으로 보아 그의 업무능력이 세종의 합격점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그는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좌대언이8 돼 세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좌대언 시절 김종서는 세종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는데 국정의 핵심 사안이나 극비안건들에 대한 조사와 조율을 도맡았고 정승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도 항상 김종서를 보냈다. 임금을 대신해 행사에 참석하고 사신들에 대한 접대도 담당했다. 실록에 보면 세종이 김종서의 의견을 묻고 직접 설명해주며 부족한 점을 깨우쳐 주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세종 14년 6월9일에는 세종이 최윤덕의 인품을 논하며 인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정승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김종서에게 가르쳐주는 대목이 나온다. 흡사 부자나 사제 간 같은 면모를 보인 것이다. 세종이 김종서를 미래의 재상감으로 생각하고 직접 교육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던 세종 15년 12월9일. 세종은 김종서를 관찰사로 삼아 함길도에 파견했다. 이어 함길도의 군권을 총괄하는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직을 옮겨서 국경방어를 담당하게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문신이 군의 통수권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임금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대표적인 측근을 갑작스레 척박한 변방으로 보낸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9 결과론적으로 보면 김종서를 국경을 어지럽히는 야인(野人)을 단속하고, 북방개척을 통한 영토 확장의 숙원사업을 이뤄낼 최적임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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