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일 교수의 Leader’s Viewpoint
편집자주
리더들의 모습은 제각각입니다. 강력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부터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섬기는 리더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을 것처럼 보이는 리더들의 모습 속에서도 일관되게 흐르는 보편적 원리는 존재합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온 정동일 연세대 교수가 다양한 리더들의 모습을 통해 경영과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리더십의 근본 원리에 대해 많은 통찰을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사례 1
1970년대에 스티브 잡스에게 마우스와 컴퓨터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에 대한 영감을 줘서 더 유명해진 IT기업이 하나 있었다. 괴팍한 성격과 지독한 우월감으로 악명 높았던 잡스도 이 회사의 연구소를 방문하고 싶어서 자존심을 포기해야 했을 정도로 1970년대 컴퓨터와 IT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기업이 바로 제록스이고 잡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연구소는 제록스의 팔로알토연구소(PARC)다.
하지만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비전도 없었던 CEO들 때문에 제록스는 빠른 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2001년 8월1일 제록스 CEO에 오른 앤 멀케이는 주가가 4달러까지 추락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수익성이 좋지 않은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의 채무가 무려 170억 달러에 달해 생존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다.
멀케이는 기존 복사기 비즈니스 모델을 과감히 청산하고 고객사에 포괄적인 IT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서비스 회사로 변신하기 위해 조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과 결단력으로 제록스는 점차 안정화됐고 CEO로서 멀케이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2008년 말 테크리퍼블릭(Tech Republic)이란 컨설팅 회사는 멀케이를 빌 케이츠와 더불어 2008년 세계 IT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5명의 리더 중 하나로 선정했다. 같은 해 미국의는 그녀를 미국의 ‘뛰어난 리더 중 하나(One of America’s Best Leaders)’로 선정했고란 경영잡지는 멀케이에게 ‘2008년 최고의 CEO상(The 2008 CEO of the Year Award)’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망해가던 제록스를 극적으로 기사회생시키고 CEO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멀케이는 2009년 5월21일 자신의 후계자로 우르술라 번스를 지명하고 은퇴를 선언해 큰 충격을 준다.
사례 2
1981년 GE의 CEO로 임명돼 20년 동안 회사의 가치를 무려 4000% 이상 성장시킨 잭 웰치. 무려 11만 명이 넘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끊임없는 성과 평가를 바탕으로 하위 10%에 해당하는 직원들을 가차없이 내보내는 등 여러 측면에서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CEO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회사를 20년간 매해 25% 가까이 성장시켰던 경이적인 기록 때문에 1999년 미국 <포천(Fortune)>은 그를 ‘20세기 최고의 CEO(Manager of the Century)’로 선정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웰치였지만 그는 만 65살이 될 2001년을 목표로 자신의 뒤를 이어 GE를 이끌어 갈 후계자를 기르는 승계 계획(succession plan)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주들에게 약속한 대로 2001년 9월7일 은퇴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은퇴한 후 불과 4일 만에 9·11 테러가 발생해 ‘테러도 비켜간 신이 내린 경영자’ 란 소리를 듣게 된다.
사례 3
1963년 국영기업으로 설립돼 1978년 민영화된 국내 유일한 재보험 기업인 코리안리는 민영화된 이후에도 정부의 재보험 가입 의무조항 덕에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하지만 1996년 이 의무조항이 해제되면서 외국계 기업들과 경쟁하게 됐고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문화 때문에 1997년에만 당기손실이 2800억 원에 달하는 등 파산 직전의 회사가 됐다.
하지만 25년간의 공직자 생활을 마치고 1998년 부임한 박종원 사장은 무사안일주의, 과거지향, 권위로 상징됐던 코리안리의 문화를 도전정신, 혁신과 창의, 책임 문화로 변화시키며 향후 15년 동안 연평균 13%씩 성장시킨다. 코리안리는 2011년 1194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으며 아시아 1위, 세계 10위의 재보험회사로 성장한다. 이런 경이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박종원 사장은 ‘보험업계 최장수 CEO’ ‘금융권 최초 5연임 CEO’ ‘마이더스의 손’ ‘죽어가는 회사도 살리는 화타 CEO’ 등 각종 수식어들이 붙는 최고의 CEO가 됐다. 재보험 전문잡지인 영국 <리인슈어런스(Reinsurance)>에서 선정하는 ‘재보험 영향력 리스트’에서 항상 상위 20위에 선정되는 것은 물론 2013년 한국경영학회로부터 ‘올해의 경영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종원 사장은 코리안리의 이런 실적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2020년에는 자기자본 5조 원, 보유보험료 5조4000억 원을 가진 세계 5대 전문 재보험사가 되자는 비전을 조직에 부여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강한 정신력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전 임직원들과 백두대간 전 구간을 종주하고 2012년에는 60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임직원 14명과 히말라야 칼라파타르봉(해발 5550m)을 등정하는 등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2013년 6월13일 1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사장에서 물러났다.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은 제대로 물러나기에 달려 있다
필자가 3개의 사례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위대한 리더십을 완성시키는 건 제대로 물러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물러난다는 것은 자신을 대신해서 새로운 시각을 바탕으로 조직이나 부서를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후계자를 키우며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권한을 인계해주고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리더가 재임 중 위대한 성과를 내다가 제대로 물러나지 못해서 실패한 리더로 전락하고 만다.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제대로 물러나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표1]디즈니 CEO로서 마이클 아이즈너의 성과1
제대로 물러나기가 힘든 이유
그럼 왜 제대로 물러나기가 힘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자리와 권력에 대한 집착과 미련 때문이다. 아무리 겸손하고 훌륭한 인격을 지닌 리더라 할지라도 한번 자리와 이에 수반된 권력을 경험하면 스스로 물러날 때를 정해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특히 그 리더가 힘을 부하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혼자 쥐고 있는 스타일(개인 성향)이거나 조직의 특성상 힘이 리더에게 몰리는 경향(조직 특성)이 있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제대로 물러나기가 힘든 두 번째 이유는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자기중심적 사고 또는 우월의식이다.필자도 종종 “물러나고 싶어도 제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안 돌아가고 금방 망해버릴 것 같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며 차일피일 은퇴를 미루고 있는 CEO나 회장님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한다. 그런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 회사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능력이 없고 일과 회사에 대한 열정이 전혀 없는 B급, C급 임직원들만 모여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런 조직에 가서 직원들과 이야기 나누어 보면 직원들의 역량과 열정이 부족해서 회장님이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불안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런 조직일수록 ‘은퇴’나 ‘후계자 육성’과 같은 단어는 금기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사장, 회장 등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리더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리더들에게 해당된다.
제대로 물러나기가 힘든 마지막 이유는 자신이 물러난 후에도 그 조직이나 부서가 지속적으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물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일을 그만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적의 타이밍에 자신을 대신해 부서나 조직을 이끌 수 있는 후임자를 발굴해 키우고 이들이 조직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최적화된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뜻이다.
‘후배들에게 어떤 조직을 물려줘야 하는가’란 고민에 잠 못 이루는 CEO
필자는 2012년 12월에 기아자동차의 초대를 받아 해외에서 근무하는 임원을 포함한 회사의 모든 임원이 참석하는 전략회의에 가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전 잠시 회사의 이형근 부회장을 뵙고 말씀을 나누게 됐다. 이 부회장은 2012년 <매경이코노미>가 선정한 ‘올해의 CEO’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CEO이자 리더라 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필자에게 “이제 몇 년 있으면 은퇴를 해야 하는데 후배들에게 어떤 기아자동차를 남겨주고 떠나야 할지 고민이 돼 요새 잠도 잘 안 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기아자동차의 많은 임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고 이들이 이 부회장을 왜 진심으로 존경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어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 부회장이 제대로 물러나기를 잘 이뤄서 후배들에게 멋진 회사를 물려주고 좋은 레거시(legacy, 유산)를 남기고 떠나는 리더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제대로 물러나기를 하지 못해 20년간의 뛰어난 업적이 물거품이 돼 버린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즈너(Michael Eisner)
마이클 아이즈너는 ABC와 파라마운트픽처 등 미국 할리우드의 여러 기업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후 1984년 디즈니의 CEO로 영입됐다. 디즈니는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가 1966년 사망한 후 비전과 창의성이 고갈되고 작품을 3년에서 5년에 한 편 정도만 만들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진 기업이 됐다. 그나마 특별한 히트 작품도 없이 과거의 성공 덕분에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한 회사였다. 따라서 회사의 주가도 1.33달러로 추락한 상태였으며 최악의 시장가치로 인해 다른 기업으로부터 몇 번의 비우호적인 합병시도도 있었다. 이를 가까스로 모면한 디즈니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아이즈너를 CEO로 영입했다.
CEO에 임명된 아이즈너는 극장용 만화영화에만 치중했던 디즈니의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회사의 미래는 가정용 엔터테인먼트(home entertainment)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회사의 전략을 과감히 수정하기 시작한다. 먼저 회사 중역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극장에서 상영했던 만화영화들을 비디오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즈너의 전략은 적중했고 불과 몇 년 만에 디즈니의 수익 대부분이 가정용으로 판매되는 비디오와 DVD에서 나오게 됐다. 아이즈너가 디즈니에서 물러난 (정확하게 말하자면 쫓겨난) 2004년에 이 부문에서 6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이 발생했다.
아이즈너는 사업다각화를 위해 1995년 또 한번의 중대한 결정을 한다. 미국 3대 방송사 중 하나인 ABC를 19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인수과정에 포함된 회사가 미국의 대표 스포츠 채널인 ESPN이었고 디즈니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기 시작한다. ESPN이 얼마나 디즈니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는지는 2004년 디즈니가 영화 관련 활동을 해서 벌어들인 이익이 6억6200만 달러였는데 ESPN에서의 이익이 무려 3배가 넘는 19억4000만 달러에 달했다는 사실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마이클 아이즈너가 1984년부터 2004년까지 디즈니의 CEO로 재직하면서 회사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는 <표 1>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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