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움’에 대한 역사적 고찰

‘남성 大금욕의 시대’는 끝났다. 남녀 모두 미모로 평가받는 때가 온다

206호 (2016년 8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남성이 화장과 옷차림에 관심을 쏟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부터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으로 민주 사상이 전 유럽의 중산층들에게 확대됐다. 원래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화려한 복장으로 드러냈고, 이는 새롭게 떠오른 중산층들에는 눈엣 가시로 통했다. 한편 남성이 화장을 하고, 옷으로 멋을 부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은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한참 뒤인 19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 무렵, 영국은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는 대제국으로 부상했고 그와 함께 제조 기반도 성장했다. 하지만 당시 제조 공장들의 열악한 환경 탓에 여성 근로자들은 경제 활동에 참여하기가 어려웠고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남녀차별 현상은 서구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생산자로 자리 매김한 남성에게패션은 전혀남자다운 것이 아니었고 본성에 역행하는 이런 이데올로기는 한동안 지속됐다.

 

 

“너의 지갑에 들어 있는 돈 액수만큼 비싼 옷을 사라. 옷은 인격을 대표한다.”

요즘 회자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400여 년 전, 영국 문호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온 말이다. 프랑스로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조언했다. 이 말 한마디 속에서 르네상스 시대, 유럽 남자들의 인생관을 느낄 수 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챙겨 입는 남성들의 그루밍과 패션 시장의 급성장은 현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 트렌드 중 하나다. 1990년대엔 어땠는지 기억들 나시는지. 이때만 해도 옷이나 화장에 신경 쓰는 남자들을메트로섹슈얼1 이라 불렀고, 때로 이들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다.

 

1999년 제작돼 2000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아메리칸 사이코의 첫 장면이 당시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주인공인 크리스찬 베일은 첫 장면에서 완벽한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다양한 화장품을 바르며 화장품의 종류와 브랜드, 옷장 속의 수많은 패션 브랜드들을 줄줄이 외운다. 당시 미국의 극단적 소비 문화에 빠진 나머지사이코로 변하는 캐릭터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묘사다. 이때만 해도그루밍(grooming)’, 즉 화장품을 쓰고 모양을 내는 남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성 그루밍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아시아 시장에서 남성 패션 및 그루밍 관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젊은 남성들이 피부 잡티를 감추려고 BB크림을 바르고 출근하는 것이 예사로워졌다. 20여 년 전만 해도 남자가 화장품을 바른다는 말만 들어도 주변 사람들이정상이 아니라고 놀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시야를 좀 더 넓혀보면 남성들의멋부림은 지극히정상적인 일이었다. 인류의 긴 복식사를 놓고 보면 남성 화장품 및 패션 시장의 부상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남자답지 못하다고 봤던 20세기의 트렌드가 정상이 아니라고 할 만했다. 1,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강요된전사적 남성성탓에 남성들이본성을 잃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평화시대에 접어들자 억눌렸던 패션 감성이 비로소 다시 살아난 셈이다.

 

 

 

남성 대()금욕기(1880∼1960?)

 

패션 역사학자 브렌트 셰넌(Brent Shannon) 19세기 말을남자들의 대금욕 시대(Great Masculine Renunciation)’라고 부른다. ‘남자답다라는 말을 정치, 사회, 군사 등 대외적인 일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패션, 향수, 인테리어 따위의사사로운일에 관심을 가지면 절대로 입신(立身)할 수 없다는 전시적 관념이 지배적이었던 시기다.

 

20세기 초는 19세기에 시작된 남성 대금욕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야 남성 그루밍과 패션 시장이 붐을 이루게 됐다. 이런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남성관의 변화는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전쟁 시대의 폐막이 정상적인 남성관 부활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과거 복식사를 놓고 보면빅토리아 시대로 불리던 19세기 이전의 남성 패션은 그 화려함이 오늘날의 여성 패션을 능가했다. 일본 교토 의상 전시실(The Kyoto Costume Institute)에는1810년대 프랑스에서 만든 남성용 슈트 한 벌2 이 소장돼 있는데 여기에서도 당시 남성 패션의 화려함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슈트는 조끼와 바지,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 세 벌로 이뤄져 있다.

 

검은색 울 코트에는 옷섶을 따라 여러 색의 실로 꽃과 풀 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고, 조끼에도 역시 하얀 새틴과 실크를 꼬아 만든 자수가 아로새겨져 있다. 사소한 단추마저도 실크로 싸맨 뒤 그 위에 꽃무늬 자수 패턴이 이어지도록 하는 섬세함을 잊지 않았다. 코트의 주머니 부분도 화려한 색실로 장식했다. 이 양복만 봐도 당시 유럽 남성들이 패션과 관련해 얼마나 사치를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럽 남성들의 초상화에서도 이런 미적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늘색, 핑크색, 꽃무늬 등의 소재가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닌 남성들이 함께 향유하던 요소였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남성들은 자신의 가문 또는 본인이 속한 기사회 등이 표방하는 요란한 문장, 그리고 이것으로 장식된 컬러풀한 옷을 입고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 목걸이, 반지 등으로 최대한 멋을 내고 있다. 굽 높은 하이힐, 코트를 들어올리며 꽉 끼는 스타킹 속 각선미를 자랑하는 초상화도 17∼18세기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아생트 리고의루이 14세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남성이 화장과 옷차림에 관심을 쏟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부터일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1830년대의 남성복3 을 보면 엄청나게 경직된 당시 남성상을 엿볼 수 있다. 상의 겉옷은 흑색 단색이고, 조끼는 어두운 보라색 바탕에 보라색 수를 놓아 튀지 않게 장식했다. 셔츠와 바지 역시 단색이다.

 

남성 패션에 왜 이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여러 원인을 지목할 수 있다. 첫째, 프랑스혁명으로 계급 갈등이 살벌하게 펼쳐졌고 전쟁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프랑스혁명은 민주 사상을 전 유럽의 중산층들에게 퍼뜨렸다.

 

원래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화려한 복장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민주 사상의 파급으로 화려한 옷차림으로 특권을 드러내는 행위는 당장축출의 대상이 되는 위험천만한 일로 여겨졌다. 이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계층들에게 패션이 곧 표적이 된 것이다. 또 혁명으로 지배 계급이 바뀌면서 귀족 계급은 문화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했다. 이 틈에 중산층이 장악한 신문과 팸플릿, 연극 등을 통한 미디어 세상이 왔다. 이런미디어는 귀족들을 풍자와 유머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때 권력의 상징이던 화려한 복장과 가발, 얼굴의 분칠 등 이른바귀족 복식이 코미디 소재로 전락한 것이다. 세대 교체까지 이뤄지면서 젊은이들은 길거리에서 그런 차림을 한 사람들을 대놓고 비웃었다.

 

남성 패션이 칙칙해진 두 번째 원인은 산업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귀족 계급의 경제와 권력의 원천은 농업이었다. 귀족은 농민들이 바친 공물을 도시에 내다 팔아 현금을 확보했다. 과시 소비를 통해 이 현금을 부르주아 계급과 농민에게 흘러들어가도록 하는 경제 시스템이 당시의 소비 구조였다.

 

따라서 귀족은 절대 소비 계급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산업 계층의 부가 귀족들이 누리던 농경 계급의 부를 추월하게 되면서 귀족들은 몰락의 길에 올랐다. 산업 시대는 공장주가 지배층이었으며 공장 운영에 필요한 자질은 귀족들의 생활 태도나 성향과 크게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도양반은 천둥치고 비가와도 절대로 뛰어다니지 않는다고 했듯 유럽의 귀족도 시간과 돈 개념이 느슨하고 매사에 느긋했다.

 

따라서 철저한 업무 윤리, 능동적이고 부지런한 업무 태도 등을 중시하는 산업 사회와는 체질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장과 광산을 누비며 부를 창출해야 하는 산업 계급이 지배 계급을 차지했다. 당연히 먼지나 매연이 묻어도 티가 나지 않는 어두운 컬러의 질긴 천으로 만든 실용적 패션이 각광을 받았다. 옛 귀족들의 화려하고 멋지기만 할 뿐 행동을 제약하는 옷차림이 삽시간에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혼잡한 도시에서 수많은 마차들에서 쏟아져나오는 말똥을 비켜가며 사업 미팅에 일일이 참석하려면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복장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19세기 남성 슈트는 18세기의 승마 복장에서 유래한 활동적인 디자인을 띠게 됐다. 이전 세대의 스포츠복이 다음 세대의 정장으로 자리 잡는, 색다른 트렌드가 태동한 것이다. 또 때가 조금 묻더라도 티가 나지 않는 검은색이 점점 남성을 대표하는 색깔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역할

 

남성이 화장을 하고, 옷으로 멋을 부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은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한참 뒤인 19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 무렵, 영국은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는 대제국으로 부상했다. 많은 영국 남자들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모국을 떠나 소비재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로 파견돼 몇 십 년씩 근무하면서 현지에서 번 돈을 영국의 가족들에게 부쳐주는 생활을 했다. 화장실도 없고, 냉동식품도 없던 시절, 걸핏하면 바닷물이 넘쳐 들어와 눅눅했던 작은 나무배를 타고 비스킷으로 끼니를 연명하며 두세 달씩 버텨야 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초, 영국 선원이 파견국 현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치사율은 15%에 달했다.4 식민지 시대, 기후와 면역체계가 맞지 않는 낯선 나라로 발령 받아 떠난 엄청난 수의 영국 남성들이 말라리아, 황열병 등에 걸려 죽었고, 주권을 지키려는 현지 독립운동가과 원주민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현지에 입성해 성공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렇게남자답게해외 식민지 진출에 성공해 큰돈을 벌고 집안을 일군 남자들은 멋과는 담을 쌓고 산 사람들이었다. 대범하고,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이 남자가 가진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자라면 어떤 힘든 일도 ‘Tight upper lip(윗입술을 굳게 다문)’ 태도로 난고를 버텨내야 했고 이런 이미지가남자의 전형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영국 내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당시 대영제국의 제조공장들은 환경이 열악하다 못해 잔혹했다. 그 때문에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과어림도 없다며 버티는 자본가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폭력이 난무했다. ()의 원천인 식민지와 공장은 여성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으로 판단됐다. 때문에 여성들은 사회에 진출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남녀차별 현상은 서구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대영제국의 위세가 세상을 뒤덮던 그 시절, 영국이 만든분리영역 사회가 자본주의적 핵가족이라는 가족상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다. 분리영역 사회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철저히 구분해 남성은 생산을, 여성은 소비를 담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 개념이 세계적으로 퍼져 확고해짐으로써 남성은 열심히 돈을 벌고, 여성은 그 돈으로 유행과 신분 계급에 맞는 소비를 해서 남편의 출세 정도를 알리는트로피5 역할을 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차츰 남성은 소비 행위에서 소외되고남성 금욕시대가 도래하게 됐던 것이다.

 

즉 남성 금욕기는 19세기와 20세기 사회 특유의 폭력성에서 기원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으로 이어진 지속적 폭력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인류는 평화 시기를 맞았다. 그리고 남성들은 슬슬 소비의 주체였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남성, 패션에 다시 눈을 뜨다

 

물론 대금욕의 시대였던 19세기, 모든 남성들이 패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화점 같은 패션 매장에 노골적으로 옷을 보러 다니는 행동이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자 이를 우회하는 방법을 고안해 사업에 성공한 사례도 많다.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에선 남성들이 코르셋을 입었다. 코르셋이야말로남자다운 것과는 거리가 먼 패션 아이템이다. 하지만 이 코르셋과 남성적인 이미지의기사를 연결하는 전략을 사용해 코르셋마저남자다워보이는 광고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1905년 남성잡지 <펀치>에 실린워스라는 이름의 남성용 코르셋 회사가 바로 그 예다. 이 회사의 광고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를 인용했다. ‘내 벨트를 한번 차 본 사람은 그 이하(품질 또는 등급의 제품)를 차고는 살 수 없다라는 문구를 쓴 것이다.

 

또 남성 고객들을 부를 때는 항상장교와 신사 여러분!”으로 시작했는데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전쟁 시대의 이미지가 남아 있을 때인 만큼 터프한 기사 복장과 기사 복장만큼이나 몸에 꼭 끼는 코르셋을 동일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잡지 1885 6월 호에 실린 캐드버리 초콜릿 광고는 굵은 다리와 근육질 팔을 드러낸 남성 모델을 등장시켰다. 이를 통해 초콜릿을 먹으면 보다 터프해지고남성적으로 변한다는 점을 소구한 것이다.

 

당시 영국의 해로즈백화점은 남성들이 백화점 출입을 꺼리지 않게 하기 위해 대학 내 클럽이나 귀족 클럽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벽난로와 어두운 나무 벽, 큰 가죽 의자로 인테리어를 꾸민신사클럽을 운영했다. 또 백화점 내 남성 용품 코너 담당자들을 결혼 적령기의 미혼 여성들로 구성해 남성들이 쇼핑이나 옷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여성들과 만날 목적으로 이곳에 출입하는 것으로위장했다. 패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보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훨씬남자다운일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금욕 시기에도 19세기 남성들의 소비 욕구가 소심하게나마 폭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패션이 발달하게 되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생각해보자. 첫째로는 익명성, 둘째로는 전통 계급의 붕괴를 들 수 있다. 조상 대대로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누가 어느 집 자식인지 모두 다 아는 동네에서는 굳이 자신을 멋지게 포장할 필요가 없다. 포장을 잘못할 경우 오히려 비웃음이나 지탄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지만 19세기 말은 농경사회가 급격히 산업화, 도시화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고향을 버리고 공장이 있는 도시로 떠난 수많은 사람들은익명의 물결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복장이 자신의 위상을 대표하고, 옷과 액세서리는 사회적 위치를 재편성해준다. 당연히 사회적 직위를 중시하는 남성들로선 자신을재포장해줄 패션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계급의 붕괴 역시 남성들의 패션에 대한 소비 욕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귀족들의 복장은 매우 화려했으나 귀족 제도에는 사회적인 의복 규정이 뒤따랐다. 조선시대 양반 계층 사이에서 갓의 모양을 보고 지체의 높낮이를 알 수 있었듯 유럽에서도 리본의 크기, 단추의 개수 같은 것이 계급에 따라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아래 계급 사람이 윗 계급인 척 흉내를 내면 엄청난 벌금, 또는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심할 경우, ‘위계질서 위반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급 이동이 심한 사회에서는 자기가 갈망하는 계급의 옷을 직접 선택해 알아서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원하는 계급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예술가 지망생과 법조인 지망생의 패션이 대학생 때부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지향성을 패션을 통해 표현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남성 패션

 

서양 패션의 근원지가 된 프랑스의 베르사유는 특별한 곳이었다. 루이14세는 오락과 예술, 학교를 조성해 프랑스 전역의 젊은 자제들을 베르사유로 끌어들였다. 이 결과, 베르사유에는 3000명이 넘는 귀족 자제들이 모여 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뿌리박고 있던 지역 사회를 떠나게 됐고 베르사유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을 잘 모르는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모두 다 귀족이었던 덕에 의복 규정의 제약을 받지도 않았다. 이때 서로가 서로의(look)’을 의식하는 패션 경쟁이 싹 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양반 남성들의 복장에는패션이라고 불릴 정도로 과시적 경쟁으로 치달을 만한 요소가 없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짐작하다시피 일단 지배 계급의 사상적 특성 때문이었다. 유교는 의복을 예()의 일부로 삼아 엄격하게 규제했고 사회 계급도 아주 상세하게 구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입는 복장에 대해 조선 양반들은 선택의 폭을 갖지 못했다. 또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복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양반들 중 한양에 사는재경양반(在京兩班)’보다 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각 지방(고을)의 농경을 장악한재지양반(在地兩班)’들이 더 원형적인 양반으로 여겨졌다는 사실 때문이다.6  ‘재지양반은 누구나 그 집안을 알고 있는 본향에 세력의 근거를 두고 있어 익명성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권력을 키워갔다. 게다가 여느 전근대 사회나 마찬가지로 18세기 이전 조선반도의 농촌에서는 현금 경제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양반들이 서로의 본향을 방문해 토산품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경제가 작동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즉 현금 경제를 기반으로, 경제력 과시로 이어지는패션 경쟁이 원천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구조였던 것이다.

 

한국 남자도 달라졌다

 

패션에 있어서는꽉 막힌사회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부터였다. 일제강점기, 청계천 남쪽으로 형성된 남촌은 조선의 전통을 고수하는 북촌과 달리 익명의 세계에 가까웠다. 또 미스코시백화점 등 일본 문화와 소비재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지방 향촌이나 인근 지역의 외지인들이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사회 계급은 급속히 붕괴됐다.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재포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숨은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7

 

예를 들어 시인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 다른 기자들이 40원짜리 양복을 입을 때 200원짜리 양복을 입었다. 그는이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했다고 회고했고, 이 내용이 남은 문헌이 적지 않다.8 그 여파로 우리나라에서도 소비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설정하는모던보이’ ‘모던 걸이 등장했다. 또 시인 백석, 이상, 가수 윤심덕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소비와 연애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새로운 사회 풍토의 아방가르드9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양반이라는 계급사회의 붕괴가 남성 패션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바로 전, 우리나라는 분리영역 사회가 돼 소비를 여성의 영역으로 국한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1930년대부터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렸고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이라는 가혹한 내전을 치렀다. 이후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도 이전 세기, 대영제국이 전 세계에 퍼트린남자는 생산하고 여자는 소비한다는 분리영역 사회로 본격 진입했다.

 

분리영역 사회의 여성은 이미 언급했듯 남성의 성공 정도를 드러내주는 지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자기의 성공 정도를 과시하기 위해 여성을 외모로 판단해 선택하고 그에게 비싼 옷, 가방, 보석 들을 사주면서충실한 마네킹으로 만들려고 했다.

 

분리영역 사회에서 남성은 소비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가족을 책임지라는 사회적 프레임 안에서 그 욕망을 억지하고 있었다. 여성들이 생산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의 사회참여 요구로 폭발했다면, 분리영역의 반대쪽에 속한 남성들이 소비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는메트로섹슈얼이라는 트렌드로 폭발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분리영역 사회가 됐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철저한 계급 사회를 유지하기도 했다. 1960∼1990년대의 자본주의는 국가와 재벌을 중심으로 계급의 피라미드적 체계를 강고하게 유지했다. 패션에 투자할 경제력이 있는 남성들은 회사에서는부장’ ‘과장’ ‘대리같은 타이틀을 달고 있었고, 공무원들은 급수나 호봉이 계급을 정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패션이 개성을 뽐내고 미모를 과시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패션은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에 얼마나 적합한지,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튀는 패션으로 시선을 끌면 조직 내 상하관계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오래 지속됐고 이에 따라 남성들의 소비 억제 분위기가 지속됐다. 1980년대가 돼서야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불어 닥친 ‘X세대열풍이 남성 소비시대의 물꼬를 틀었다. 하지만 X세대는 사회 전체로 남성 소비문화를 크게 확산시키지는 못했다. 부모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학생 계층이 주체가 됐던 터라 이들의 패션과 뷰티 트렌드가 사회적인 계급을 형성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평범한 직장인 남성 가운데 조직이 선호하는 패션의 틀에서 벗어날 용기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패션에서의 유행이란, 직업이 아닌 공통 관심사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야 시장으로 형성이 된다. 예컨대 등산동호회의 등산복 경쟁이나 자전거 동호회의 사이클복 경쟁처럼 말이다.

 

하지만 연봉제와 잦은 이직과 같은 변화는 개인을 회사라는 위계질서의 일부로만 보던 시대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많은 젊은 사원들은 지금 회사에 다니면서도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회사 내 자신의 위치보다 업계 전체 내에서의 이미지와 인식을 더 중시한다.

 

이런 연봉구조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미디어, 금융, IT,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이 1차적으로 남성 화장품과 패션 업계의 소비자가 됐다. 프리랜서와 부티크 사업가, 스타트업 등의 증가 역시 남성 패션과 화장품 등 소비 시장 발달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 몇 곳을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되면서어느 기업에 속한 누구는 어떤 등급으로 묵시적으로 매겨졌던 명백한 상하 관계가 무너지고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노동 인구의 증가는 우리나라에 갑자기 익명의 시대를 앞당겼다.

 

이는 마치 유럽에서 귀족시대가 몰락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당시와 비슷한 익명성과 계급 이동의 시대로 이어질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해로즈백화점의 예에서처럼 분리 영역사회에서 막 탈출하려는 시점의 사회 분위기에서 남성들이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옷과 인테리어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먼저 남성적이라고 허용된 분야의 소비가 일시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이후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졌던 소비 분야로 확장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남자들의 경우신사클럽에서 명문 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나온 남자들이 시가와 싱글몰트 위스키에 돈을 쓰는 것은공인남성적 소비였다. 해로즈백화점은 이런 신사클럽을 만들어 남성 소비자들이 일단 백화점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도 공인된 남성 소비 시장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형성된기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다. 자동차, 시계, 오디오 등은 정밀 기계라는 이유로 남성들에게 공인된 사치로 통했다. 또 우리나라 유통 시장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분야, 특히 2005∼2013년 사이 큰 폭으로 성장한 분야는 하이엔드 시계 시장이었을 것이다. 시계 역시 남자들이 대놓고 소비하기에부끄럽지 않은소비 영역으로 통했다.

 

남성이 얼굴 피부를 가꾸는 그루밍 트렌드 역시 트렌디한 유통가를 중심으로 확대된바버숍이란 독특한 남성적 공간의 부활을 통해 확산됐다. 1950년에는여심을 잡아라’, 1990년대는 ‘10대를 잡아라라는 모토가 마케팅을 지배했다면, 2010년대 유통 및 소비재 기업은 소비라는 관념에 대해 지금껏 수줍어했던 남성들을 어떻게 소비 공간에 끌어들이고 그들을 어떻게 여전히남성답게느끼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남성, 선입견에서 벗어나다

 

‘남성은 생산하고 여성은 소비한다는 분리영역 사회관의 역사는 일견 매우 뿌리가 깊은 것 같지만 겨우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이 역사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실제 기간에 비해남자는 능동적, 생산적,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 사치적, 충동적이라는 선입견이 지나치게 오래, 그리고 깊숙이 자리 잡은 셈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 가치를 들이대 남성은 돈과 권력으로, 여성은 가정적 성공과 미모로 판단 받는 사회가 오랫동안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온 것 같다.

 

다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분리영역 사회가 시작되기 이전 고대 그리스의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의 외모에 대단히 민감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알치비디아데스의 미모는 다른 그리스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스 남자들은 미끈하고 젊고 슬림한 몸매의 남성 나체 조각들을 도시 곳곳에 세워 놓고 사모했으며, 올림픽게임 때는 경기 자체보다 기름을 바른 나체로 경기를 치르는 스포츠 선수들의 몸매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전쟁으로 대제국을 이룬 초기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분리영역 사회여서 당시 남성 조각상을 보면 매끈한 외모보다 마초적인 외모를 선호했다. 즉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흉터가 곳곳에 깊이 파인경험 많은얼굴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몸매 역시 운동으로 다져진 미끈하고 슬림한 형태가 아닌 노동의 결실로 느껴지는 질긴 잔 근육 형태로 표현됐다.

 

이를 놓고 봐도 전쟁이 잦은 시대의 남성관은 로마 쪽에 가깝다. 하지만 긴 평화 시기에는 그리스 남성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녀 분리영역 사회가 끝나고 평등 사회가 왔을 때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아마도 남성과 여성을 모두 미모로 평가하고 대상화하는 사회로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패션 시장이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남성의 패션 시장과 관련해서는 막 시작된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남성들의 그루밍과 패션 시장의 팽창이 상대적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조승연 문화전략가 scho@gurupartners.kr

 

필자는 고교 시절 미국전국라틴어경시대회에서 우수상(Magna Cum Laude)을 받았으며 미국 고등학생 문예지에 시와 단편소설을 싣기도 했다.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NYU Stern School)을 졸업한 뒤 프랑스 최고 미술사 학교인 에콜 드 루브르에서 2년간 수학했다. 영국계 컨설팅회사 UnfroZenMind에서 외부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무역협회 등에서 주관한 국제 마케팅 리서치에 참여했다. <피리 부는 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비즈니스 인문학>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One Point Lesson

 

 

 

1.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보면 남성 패션 및 화장품 시장의 부상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를남자답지 못하다고 봤던 20세기의 트렌드가 오히려 정상이 아니다.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강요된전사적 남성성탓에 남성들은본성을 잃었다.

 

 

2.남성이 화장과 옷차림에 관심을 쏟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원인 중 첫 번째는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민주 사상을 전 유럽의 중산층들에게 퍼뜨렸고,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화려한 복장으로 드러내려는 귀족들의 행태를 혐오했다.

 

 

3.대금욕의 시대에도 남성을 겨냥한마케팅시도는 있었다. 영국 해로즈백화점은 남성들이 백화점을 드나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까봐 내부를 대학 내 클럽이나 귀족 클럽을 연상케 하는 인테리어로 꾸몄다. 또 남성용품 코너 담당자들을 미혼 여성들로 구성해 남성들이 옷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관심이 있어 이곳에 출입하는 것으로위장했다.

 

 

4.남성의소비를 터부시했던 우리나라에도 공인된 남성 소비 시장이 있었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형성된기계와 관련된(자동차, 시계, 오디오 등) 제품은 정밀 기계라는 이유로부끄럽지 않은사치로 통했다. 2010년대 유통, 소비재 기업은 지금껏, 그리고 아직은 여전히 소비라는 관념을 수줍어하는 남성들을 끌어들이고, 이들을 어떻게 ‘남성답게’ 느끼게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29호 Fly to the Metaverse 2021년 09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