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지정학적 위기와 AI발(發) 전력 수요 급증으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부상했다. 그동안 저렴하고 안정적인 화석연료가 안보의 근간으로 여겨졌으나 역설적이게도 이번 위기는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원자력 등을 통해 자국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면 수입 연료와 달리 공급망 충격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 전환의 흐름은 국가마다 다르게 전개된다. 미국에선 AI 전력 수요와 시장 논리가 청정에너지 투자를 이끈다. EU는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전기화에 앞장서고 있다. 중국은 일찍이 에너지 전환을 시작해 자급률을 높였고 전환 기술 수출에 나서고 있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현 상황은 분명 위기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전력기기·에너지저장장치(ESS) 등 글로벌 인프라 수출의 거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내산 에너지 확대와 차세대 전환 기술 육성을 결합한 ‘한국형 에너지 패트리에이션’을 국가 전략과 기업 투자로 얼마나 신속히 실행하느냐가 승부처가 될 것이다.
11. 에너지 패트리에이션Energy-patriation이란 전쟁·호르무즈 봉쇄 등 지정학적 위기와 AI 전력 수요 폭증으로 인해 에너지 생산의 핵심 기지를 해외에서 국내로 되돌리려는 국제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자국에서 생산하는 저탄소에너지 등과 관련 기술이 부상할 것으로 전망됨.
에너지 전환의 역설2026년 2월, 호르무즈 해협에 유조선들의 발이 묶였다. 미국·이란 전쟁이 세계 원유 해상 수송의 약 20%가 지나는 이 길목을 위협하자 공급망이 얼어붙고 유가가 뛰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은 두 번째 충격이었다. 여기에 더해 전쟁 위험 때문에 해상 보험이 거부돼 수급이 경색되는 ‘페이퍼 초크포인트(paper chokepoints)’까지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전례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흥미로운 역설이 등장했다. 그동안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은 간헐적이고 비싼 선택으로 인식돼 안정적이고 저렴한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안보와 상충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지정학적 충격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에너지 안보가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소환하고 있다.
이 혼란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 재편을 예고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올해 가트너가 10대 전략 기술 트렌드로 꼽은 개념 중 하나가 데이터·클라우드를 자국이나 인접 지역으로 되돌리는 ‘지오패트리에이션(Geopatriation)’인데 곱씹어 보면 이는 데이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정학적 갈등이 일상화되는 지금, 에너지야말로 어디서 생산해 어디에 두느냐가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자산이 됐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 빗대 자국 산업을 지키고 수입에 휘둘리지 않도록 국내산 에너지를 확대하는 ‘에너지 패트리에이션(Energy-patriation)’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다. 이를 통해 수입 화석연료에 묶인 구조에서 벗어나 에너지 전환이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재생에너지는 자국 안에서 생산하므로 LNG·석유 등 연료 가격 폭등이나 교역 차단에서 자유롭다. 원자력도 연료 수입 리스크가 월등히 낮고 장기간 비축 가능해 공급망 충격에 상대적으로 강한 에너지원이어서 글로벌 공급망 쇼크의 직격탄을 피할 수 있다. 영국 환경 매체 인사이드에콜로지는 태양광·풍력·배터리가 전력의 중심이 되고 운송·난방까지 전기화된 세계였다면 이번 호르무즈 해협 위기가 지금 같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간헐적인 태양과 바람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원자력·에너지저장장치를 결합한 에너지 믹스를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