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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듯 한국은 민주주의의 혜택을 먼저 누리고 그 비용은 뒤늦게 치렀다. 자본주의도 다르지 않다. 1인당 GDP가 일본과 주요 유럽 국가를 추월하고 코스피가 한때 9000을 넘어선 2026년, 상법 개정 이후의 극심한 주식 쏠림과 반도체 성과급 논쟁은 그 청구서가 도착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규범을 뒤늦게 익히는 ‘학습의 후불제’와 현세대의 성장 비용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부담의 후불제’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신기술의 침투 속도가 세계 최전선인 한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노동 계약의 비대칭성 해소 등 법치와 계약 규범을 실질화하고 노동자가 성과와 위험을 함께 나누는 구조 등을 통해 위험과 보상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세대 간 부담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 학습의 후불제는 불가피했지만 부담의 후불제는 이제 선택의 문제다.
01. 후불제 자본주의
Capitalism on Deferred Payments민주주의를 후불로 학습했던 것처럼 1인당 GDP가 일본, 일부 유럽 국가를 추월하고 주식시장이 역대급 활황을 맞았던 한국 사회가 비싼 대가를 치르며 상법 개정 이후 심화된 주식 쏠림, 반도체 성과급 논쟁 등 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을 뒤늦게 체득해가는 현상을 의미.
작가 유시민은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2009)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의 혜택을 먼저 누렸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시민적 비용과 책임은 뒤늦게 치러 왔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강조했듯 자본주의는 단순히 돈을 버는 체제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위에 세워진 문명적 질서다. 이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민주주의를 후불제로 학습한 한국은 자본주의 역시 후불제로 학습해 온 것이 아닐까.
2026년은 그 청구서가 도착한 해로 기억될지 모른다. 구매력 평가 기준인 1인당 GDP가 일본과 주요 유럽 국가들을 추월하고 코스피지수가 한때 9000을 넘어서는 유례없는 변동성을 보이면서 한국의 국민들은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달콤하고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자본주의의 참맛을 보았다. OECD에 가입한 지 30년이 지났고 공식적인 해외 원조국이 되면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했음에도 한국 사회 전반의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는데 이제서야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각성이 시작되고 있는 모양새다. 후불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해 왔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규범을 뒤늦게 익혀 가는 학습의 후불제이고, 다른 하나는 현세대의 성장 비용을 미래 세대에 전가하는 부담의 후불제다.
이식된 자본주의 한국은 자본주의를 스스로 발명한 나라가 아니다. 한국의 첫 자본주의 경험은 자유시장경제라기보다 식민지 수탈 경제에 가까웠다. 회사령으로 조선인의 기업 설립을 통제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전통적 소유관계를 재편하며, 산업 배치를 제국의 필요에 종속시킨 체제 아래에서 한국 민족 다수가 경험한 시장이란 자유로운 교환의 장이 아니라 수탈의 통로였다. 시장에 대한 뿌리 깊은 양가감정은 여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