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급진적 혁신기, 생존을 모색하는 기존 기업에 유효한 전략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한 조직 안에 두고 운영하는 ‘양손잡이 조직’이다. 기존 사업은 안정적 수익과 품질을 책임지는 ‘활용 사업부’로, 새로운 기술·비즈니스 모델은 실험과 학습을 담당하는 ‘탐색 사업부’로 분리해 전략·구조·문화가 서로 다른 두 조직이 병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동차 산업에서 기존 하드웨어 중심 조직과 SDV, 자율주행, 차량 OS 등 새로운 패러다임 조직을 분리해 운영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양손잡이 조직을 영구 해법이 아닌 ‘전환기의 완충 장치’로 이해하고 장기적으로는 인력 구조 차원에서 세대교체형 패러다임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즉 기존 패러다임에 기반한 인력의 이직·퇴직 등 자연 감소를 활용해 충격을 완화하는 한편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인재를 지속적으로 채용·육성해 전략의 무게 중심을 서서히 옮기는 것이다.
미래 자동차는 어떤 모습일까? 10년 전에 이 질문을 자동차 전문가들에게 던졌다면 전기차와 수소차, 내연기관의 존속 여부, 자율주행 기술의 상용화 시점 등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을 것이다. 그러나 2025년 11월 현재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전기동력 자율주행차 혹은 SDV(Software Defined Vehicle)로의 전환이 대세라는 응답이 지배적일 것이다. 이미 2년 전인 2023년 8월부터 자율주행 택시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식 허용된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11한국일보(2023.08.11.), “언제든 무인택시 불러 타는 시대 열렸다... 샌프란서 세계 최초 허용”닫기
미국에서 자율주행 택시가 허가되기 1년 전인 2022년, 즉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시기에 필자는 1년간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22김석관 외(2022), 『급진적 혁신에서 살아남기: 자동차 산업의 기술 패러다임 변화와 한국의 대응 전략』, 과학기술정책연구원닫기 연구를 진행하며 몇 가지 자문을 얻기 위해 국내 산학연 소속 자동차 전문가들에게 서면 인터뷰를 의뢰했다. 전기동력 자율주행차로의 전환을 전제로 설문지를 구성해 20여 명의 전문가에게 발송했다. 대부분이 회신했으나 응답자 중 한 분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설문지의 전제와 질문 자체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의 답변을 요약하면 내연기관 패러다임의 수명은 다하지 않았으며 미래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응답자의 불편한 감정이 드러난 답변서를 읽으면서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언급한 ‘평생의 저항(lifelong resistance)’이라는 표현이 생각났다. 이는 옛 패러다임 속에서 자신의 생산적인 시기를 보냈던 과학자 중 상당수가 죽을 때까지 새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그 답변서의 작성자도 양자역학을 수용하지 못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자동차 산업에서 진행 중인 전기동력 자율주행차로의 거대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 ‘과학’이 혁명적인 변화를 겪을 때 과학자들이 행동하는 방식과 ‘기술’ 혹은 ‘산업’이 급진적 변화를 겪을 때 산업 전문가들이 행동하는 방식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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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관kskwan@stepi.re.kr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석관 선임연구위원은 물리학 학사, 과학철학 석사, 과학기술정책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6년째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혁신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바이오 산업을 중심으로 섹터 기반의 혁신 연구를 수행하다 점차 오픈 이노베이션, 스타트업 생태계, 벤처캐피털 등 전체 섹터를 관통하는 주제별 연구로 옮겨왔고 최근에는 한국의 성장 모델과 같은 거시적인 이슈나 혁신 연구의 정체성과 같은 이론적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