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디자인싱킹에 따라 신제품 개발(NPD) 과정에서 콘셉트 발굴과 검증 단계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시장에서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할 수 있다. 소비자는 가상 조사실에서의 설문과 달리 실제 구매 현장에서 실질적인 편리함과 가치를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한다. 따라서 디자인싱킹을 무조건 맹신하거나 배척하기보다 혁신의 유형(점진적, 급진적 등)에 맞춰 프로세스를 유연하게 설계해야 한다. 아울러 가상의 콘셉트 단계와 회의실을 신속히 벗어나 실제 매대에서 소비자를 만나 빠르게 제품을 검증해야 한다.
2018년, 필자는 디자인싱킹의 맹신자였다. 삼성전자에서 8년간 상품전략을 담당하며 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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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비롯한 미국의 혁신 컨설팅 회사들과 일했고 한 프로젝트에 2억~3억 원이 투입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다. 디자인싱킹 프로세스대로 하면 좋은 콘셉트가 나오고, 그 콘셉트를 상품화하면 히트 상품이 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안고 몇 차례 회사를 옮겼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디자인싱킹을 활용해 콘셉트를 제안했지만 상품화에 이르지 못했다. 두 번째인 미국계 회사에서는 상품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디자인싱킹을 거치지 않은 제품이 오히려 더 잘 팔린 것이다. 돌이켜보니 삼성전자 시절 디자인싱킹을 통해 찬사를 받았던 제품들도 오래 살아남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디자인싱킹을 혁신 방법론으로 확산시킨 인물인 팀 브라운 IDEO CEO를 만나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디자인싱킹, 이거 맞는 겁니까?”
디자인싱킹은 소비자를 관찰해 페인포인트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는 기능을 설계해 제품으로 구현하는 프로세스다. 사용자와 눈높이 맞추기, 시도와 개선의 반복 등 디자이너의 사고방식을 제품 개발에 접목한다는 점에서 그 이름이 붙었다. IDEO와 팀 브라운이 이 방법론을 체계화했고 삼성전자를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도입했다. 파급력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파급력과 적중률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데 있다.
디자인싱킹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 그렇다면 디자인싱킹이 그 명성만큼 언제나 히트 상품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NPD(New Product Development, 신제품개발) 프로세스에서 콘셉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일부에 불과하다. 콘셉트를 개발하고 테스트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선별하며 시장을 분석하고 테스트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 제품을 상업화하는 단계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많다. 그러나 디자인싱킹은 콘셉트 발굴 단계에 너무 매몰돼 있다. 콘셉트 단계에만 머물러 있다가 시장에 등장하지 못하는 콘셉트가 하늘의 별만큼 많다. 콘셉트는 콘셉트일 뿐이다.
아울러 콘셉트를 검증하는 단계에도 함정이 있다. 소비자에게 제품의 콘셉트가 어떠한지 물어보고 높은 점수를 받으면 통과된다. 문제는 그 콘셉트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이나 기술적인 완결성은 미완성인 상태이다. 그러한 상태의 아이디어가 그려진 콘셉트 보드를 기획자가 조사 담당자에게, 조사 담당자가 소비자에게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에 구상한 개념은 점점 모호해진다. 그런데 이를 소비자에게 점수를 매겨 달라고 부탁을 한다. 담당자도 잘 모르는 것을 남에게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엄격한 콘셉트 발굴과 검증을 거쳐 시장에 출시한 제품이 콘셉트 보드상의 제품과 상이한 경우도 많다. 소비자들이 좋은 콘셉트라고 평가한 제품이 기술, 비용 등의 문제로 수정을 거쳐 시장에 출시되기 일쑤다. 콘셉트 검증 과정에서 소비자들에게 예상 가격을 함께 알려주며 선호도를 파악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상 가격일 뿐이다. 비용까지는 엄밀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이 출시되길 바라던 제품과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전에 소비자를 관찰하고 뚜렷한 콘셉트를 세우지 않고도 신제품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2021년 출시한 콜러노비타의 히트 상품 살균 비데를 보자. 이는 디자인싱킹 프로세스를 통해 탄생한 제품이 아니었다. 이 제품이 메인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 즉 셀링 포인트로 삼은 건 ‘전기분해수 살균 기능’이었다. 전기분해수가 노즐과 도기 등을 깨끗하게 유지해주는 것이다. 사실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 기능을 선보인 다른 회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위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때 시의적절하게 출시된 제품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출시 그다음 해인 2022년에는 매출이 전년 대비 3.5배가량 성장했다. 위생에 대한 소비자들의 니즈를 확인한 콜러노비타는 같은 해 ‘노즐 교체 비데’를 출시했다. 두 제품 모두 ‘비데 노즐이 비위생적이지 않을까’라는 소비자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나온 상품이었다. 이 제품은 전작과 다르게 디자인싱킹 프로세스를 거쳐 탄생했다. 누구나 쉽게 비데 노즐을 교체할 수 있어 새 제품처럼 쓸 수 있는 게 콘셉트였다.
콘셉트 단계에서 노즐 교체 비데의 소비자 선호도는 살균 비데를 압도했다. 그렇다면 실제 매출은 어땠을까? 살균 비데가 훨씬 잘 팔렸다. 분명 소비자 조사 단계에서는 노즐 자체를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하지만 구매 상황에서의 실제 반응은 소비자 조사실에서의 답변과 달랐다. 많은 소비자가 ‘내 손으로 직접 노즐을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떠올리고 구매를 주저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제품의 콘셉트가 디자인싱킹 프로세스를 통해 체계적으로 발굴되고 엄밀하게 검증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제품이 나에게 쓸모 있고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가 중요했다. 살균 비데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쌌다. 그렇지만 자동으로 노즐을 살균해준다는 편리함과 깔끔함에 소비자들은 손을 들어줬다. 콜러노비타의 사례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승부는 소비자 조사실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매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답은 시장에 있다. 콘셉트를 다듬는 일에만 빠져 있을 게 아니라 매대에 제품을 올리고 나서 소비자로부터 피드백을 얻어야 한다. 제품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는 주변에 널려 있다. 엄밀한 콘셉트 개발이나 검증을 위한 게 아니더라도 시장 조사나 소비자 인터뷰를 수차례 거쳤을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빠르게 제품을 상품화해 시장에 선보이고 경쟁 제품 속에서 우리 제품이 어떻게 취급(포지셔닝)되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삼성전자가 2017년 출시한 애드워시 세탁기도 디자인싱킹 프로세스를 거쳐 개발된 제품이었다. 세탁 도중 빼먹은 세탁물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세탁물이 생기는 소비자들의 일상적 번거로움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된 제품이다. 그래서 세탁기에 작은 문을 하나 더 달아 세탁 중에 세탁물을 추가할 수 있게 했다. 세탁기에 작은 문을 낸다는 것이 별거 아닌 것처럼 들려도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는 제품이었다. 소비자의 통점을 위트 있게 해결하고자 한 콘셉트를 소비자들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콘셉트 개발 단계에서 소비자 반응뿐 아니라 초기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애드워시 기능이 들어간 세탁기는 시장에 많지 않다. 세탁기의 필수 기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소비자들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콘셉트를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 구매는 다른 얘기다. 조사비를 받고 자신이 살 것을 상상해 답하는 소비자와 실제 내 카드에서 할부로 구입해야 하고, 배우자에게 사는 명분을 얘기해야 하고, 실제 집 안에 설치해야 하는 소비자는 다르다. 결국은 이 콘셉트가 제공하는 소비자 혜택을 얼마나 실제 구매 상황에서 체감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조사실에서 빠져나와 제품을 매대에 올려 소비자의 판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프로세스로 담아내기는 어렵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근본적으로는 혁신에도 서로 다른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1]은 제품 및 부품의 핵심 요소의 변화 여부-핵심 요소 간 연결 관계에 따라 혁신의 유형을 구별한 핸더슨-클락 모델이다. 점진적 혁신(Incremental Innovation)은 핵심 요소 간 연결 관계를 유지하며 핵심 요소도 유지/강화하는 것으로 컴퓨터에 더욱 고성능 칩을 넣는 등 제품의 성능을 개선하는 수준이다. 반대로 급진적 혁신(Radical Innovation)은 요소와 요소 간의 관계가 모두 변화하는 것이다. 한편 핵심 요소는 바뀌지만 핵심 요소 간 관계는 유지되는 모듈러 혁신(Modular Innovation), 핵심 요소는 유지되면서 핵심 요소 간 관계는 변화하는 건 구조적 혁신(Architectural Innovation)이다. 컴퓨터 저장 장치를 전자기 기반의 HDD(Hard Disk Drive)에서 반도체 기반의 SSD(Solid State Drive)로 바꾸는 것은 모듈러 혁신이다. 한편 데스크톱 PC의 부품을 재조합해 랩톱(노트북)을 만든 것은 구조적 혁신에 해당한다. 이처럼 혁신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따라서 혁신을 시도할 때 그 상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그 이유에 맞는 프로세스를 찾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 회사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겠다는 니즈를 파악해야 한다. 신제품이 필요한 여러 가지 니즈가 있다. 첫 번째 케이스를 보자. 우리 제품이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새해가 돼 현재 제품이 구식이 됐다. 2026년형 모델을 사고 싶은 소비자들에게 2025년도 모델을 팔아야 한다. 이 경우 신제품에는 굵직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 자잘한 변화면 충분하다. 두 번째 케이스를 보자. 새로운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데 이미 선두 업체가 강력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는 신규 진입자로서 눈에 띄는 새로운 기능이 필요하다. 또 다른 케이스를 보자. 1, 2위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경쟁 업체가 혁신적인 디자인의 상품을 내놓았다. 우리도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 마침 해외 일류 디자이너와 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디자인적으로 상품 차별화를 해야 하는 니즈가 출발점이 된 케이스다.
이처럼 신제품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를 ‘신제품 출시의 전략적 의도’라 부를 수 있다. 세계적인 전략 및 혁신 전문가인 게리 하멜 런던비즈니스대 교수는 ‘전략적 의도’라는 개념을 소개한 바 있다. 전략적 의도란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회사의 목표를 전사에 공유한 후 조직의 역량을 끌어올려 경쟁 우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략적 의도를 명확히 하고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그 의도의 달성을 위해 전력 질주할 때 혁신이 완성된다. 이러한 전략적 의도는 혁신의 프로세스에도 적용돼야 한다. 혁신의 모든 참여자가 혁신이 필요한 전략적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하자면 우리 조직에 신제품 개발이 필요한 이유와 그에 담긴 전략적 의도를 파악하고 어떤 유형의 혁신이 필요한지 정의한 뒤 실질적인 신제품 개발 프로세스에 나서야 한다. (그림 2) 점유율 1위 제품의 신년 모델을 출시하는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이 경우 신제품 개발의 니즈는 고객에게 구식 제품이 아닌 새로운 제품을 선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더욱 탄탄한 매출을 일으켜 시장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다. 고객들이 기존 제품에 크게 만족하는 만큼 거창한 변화 대신 점진적 혁신이면 충분하다.
이처럼 어떤 유형의 혁신이 필요한지 결정됐다면 그에 맞는 NPD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그림 2) 예를 들어 소비자 관찰을 통한 인사이트 발굴이 불필요하거나 일반적으로는 사업 진행이 확정된 후 결정되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계획을 콘셉트 확정 전에 발표하는 경우가 있다. 점진적 혁신에서는 인사이트 단계가 생략됐다. 앞선 신년 모델의 사례와 같이 점진적 혁신은 말 그대로 소소한 변화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1년 내에 개선된 제품을 선보여야 한다. 기존에 수집된 인사이트에서 콘셉트를 뽑아내야 한다. 반면 급진적 혁신은 시장의 판을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콘셉트를 요구한다. 현재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플레이어를 넘어뜨릴 만한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 콘셉트가 급진적인 만큼 검증 역시 상대적으로 강도 높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소비자에게 묻는 것은 당연하고 기술자나 영업사원에게도 의견을 물어야 한다.
언디자인싱킹을 얘기하면 “디자인싱킹이 잘못됐다는 것인가?” “디자인싱킹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 한번은 유명 에이전시와 디자인싱킹 방식을 통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었다는 분으로부터 “디자인싱킹이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론을 들은 적도 있다. 언디자인싱킹은 ‘디자인싱킹 방식이 잘못됐으니 사용하지 말자’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혁신의 종류에 따라서 디자인싱킹을 써야 할 때가 있고 쓰지 말아야 할 때가 있으니 구분해서 쓰자는 게 핵심 주장이다.
소비자 관찰을 통해서 통점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통점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 단계를 건너뛸 수도 있다. 또한 소비자 콘셉트 조사를 세밀하게 설계해서 소비자가 선호하는 최적의 콘셉트를 찾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호평을 받은 콘셉트라 할지라도 조사의 한계를 인지하고 영업팀과의 논의를 통해 ‘No-Go’를 선언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정형화된 프로세스에 갖히지 말고 그 틀을 해체해 유연하게 활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팀 브라운이 디자인싱킹 개념을 소개한 것은 2008년이다. 그 사이 세상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 좋은 제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똑같다. 어떻게 해야 좋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을까? 교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콘셉트 단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둘째, 회의실에서 벗어나 매장으로 가야 한다. 셋째, 디자인싱킹을 실행하는 주체는 이 개념을 만든 IDEO가 아니라 우리다. 따라서 개념화에 매몰되지 말고 어서 빨리 매대에서 소비자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