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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오야마

디플레 상황에서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이우광 | 177호 (2015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운영관리, 혁신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재일교포 3세인 오야마 켄타로 사장이 이끄는 일본의 생활용품 제조·판매 기업인아이리스오야마는 수요가 줄어드는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개척하며 성공을 일궈온 대표적 사례다. 이 업체는블루오션이라는 경영 화두가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이러한 전략을 구사해왔다. 아이리스오야마의 경영철학은 다음과 같다.

 

 

1) 소비자의 불편·불만·부족에 눈을 돌리는유저 인개념으로 새로운 물건, 새 시장을 창출하라.

2) 틈새분야 시장을 찾아내라.

3) 시대의 변화를 선점해 상품개발로 연계하라.

4) ‘백화점 공장’ ‘메이커 벤더처럼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안하라.

5) 신제품 개발회의를 활성화해 신제품 매출 비율을 50%로 유지하라.

6) 사원들이 마음 놓고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도록 책임은 전부 사장이 진다.

7) 급변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비즈니스에 반영하기 위해 초스피드 경영을 실현한다.

 

 

신시장 창출이 디플레이션 경제를 이기는 비결

 

물가하락이 지속되면서 한국 경제도 일본처럼 디플레이션을 경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현실화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향후 소비·투자 등 국내 수요가 줄어들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기업들도 수요 감소 시대에 대비해 새로운 경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수요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대부분의 기업들이 매출과 이익 감소를 경험했다. 그러나 일부 기업은 수요 감소 시대에도 매출과 이익을 늘렸다. 과연 어떤 기업들이 이런 어려운 시기에도 승승장구했을까.

 

디플레이션으로 수요가 감소하는 시대에는 제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기존 제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요 감소를가격파괴로 연명해온 일본 기업들은 대부분 경영 상태가 악화되거나 파산을 경험하기도 했다. 해답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수요 감소시대에도 새로운 수요는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본의 생활용품 제조·판매 기업인아이리스오야마는 이렇다 할 독특한 기술 없이도 소비자의 불편·불만을 해소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출시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대표적인 업체다. 매출에서 차지하는 신제품 비중은 50%나 된다. 게다가 영업이익률도 10%를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의 불편·불만·부족을 해소해 신시장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아이리스오야마의 성공 비결을 알아본다.

 

‘마치고바(동네 소공장)’에서 출발한

아이리스오야마

먼저 아이리스오야마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아이리스오야마의 전신은 1958년 현 사장인 오야마 켄타로(大山健太郞)의 부친인 재일교포 오야마 모리스케(大山森佑)가 히가시오사카(東大阪)에서 창업한 조그만 하청공장오야마브로공업소. 이곳은 유리처럼 플라스틱에 공기를 주입해 팽창시키는브로 성형으로 공업용 약품 병, 샴푸 용기 등 각종 플라스틱 용품을 하청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당시 일본에 플라스틱 생활용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해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창업 6년 후 오야마 켄타로 사장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64, 부친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야마 켄타로 사장은 8남매의 장남으로서 일가를 부양하기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가업을 승계했다. 오야마 사장은 19세에 매출 500만 엔, 종업원 5명의 이 영세한 공장을 맡아 대표가 됐다. 고교 재학 시절 영화연구회를 결성하는 등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던 오야마 사장은 어쩔 수 없이 꿈을 접었다. 그는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헝그리 정신’을 키웠다고 술회했다.

 

 

공장이 바쁠 때 아버지를 도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장이나 기계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에 노력 하나로 버텼다. 종업원들이 퇴근한 후에 밤을 새며 기계를 만지기도 했다. 다른 회사가 맡기 싫어하는 주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난이도가 높은 일거리도 무조건 주문을 받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생산에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브로 성형의 노하우와 기술도 축적됐다. 이익은 모두 생산설비 등에 재투자했다. 매출이 조금씩 올랐지만이대로 하청공장 사장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 무엇인가 자사 브랜드의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욕을 가졌다.

 

처음 손을 댄 제품은 양식어업용 부표(浮漂)였다. 자신의 브랜드를 내건 최초의 자사 제품이었다. 부표를 첫 제품으로 생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플라스틱 제품은 응용 분야도 넓지만 경쟁도 치열하다. 따라서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는 1차 산업, 그중에서도 농업이 아니라 수산업, 게다가 양식이라는 틈새시장을 겨냥했다. 당시 양식용 부표는 유리제품이라 깨지기 쉬웠다. 이를 대체하는 플라스틱 부표에 착안한 것이다. 틈새시장 개척에 성공한 것이다. 잘 깨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이 제품은 시장을 석권했고 이 사업은 오늘날 아이리스오야마의 초석이 됐다.

 

 

오야마사장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길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싸워

쉽게 이겨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다. 틈새시장을 찾아내고 사용자의

불편·불만·부족을 해결하는 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착안한 제품은 벼의 육묘상자였다. 일본에서는 1965년경 모심기 기계가 개발됐고 기계화를 위해선 규격화된 육묘상자가 필요했다. 당시 사용됐던 육묘상자는 나무제품이라 물에 취약했고 내구성도 좋지 않았다. 오야마 사장은 1970년에 규격 및 정도(精度)가 정확하고 가벼우며 기계화에 대응할 수 있는 튼튼한 플라스틱 육묘상자를 개발했다. 사업의 연이은 성공으로 사장을 맡을 당시 500만 엔에 불과했던 매출이 7년 후인인 1971 54000만 엔으로 늘어났다. 사명을오야마브로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수산업·농업 시장이 큰 칸토(關東도호구(東北)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동북지역인 센다이(仙台)에 생산 공장을 지었다. 연달아 나온 절임용 용기, 젓갈 용기 등이 성공하면서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오야마사장은 <손자병법>에 나오는이길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싸워 쉽게 이겨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다. 다른 경쟁자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 틈새시장을 찾아내고 사용자의 불편·불만·부족을 해결하는 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이 바로 오늘의 아이리스오야마를 있게 한 오야마 사장의 경영철학이자 비즈니스 모델이다.

 

역경에서 얻은 경영이념

그러나 부침도 적지 않았다. 부표는 주로 진주양식업자가 고객이었다. 그러나 미니스커트가 인기를 끌고 연관된 패션 트렌드의 영향으로 진주를 착용하는 여성이 줄어들자 진주양식업이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부표사업도 침체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3년에는 오일쇼크가 찾아왔다. 오일쇼크 초기에는 석유가격 급등 우려로 플라스틱 제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른바 가수요였다. 오야마는 이것이 가수요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설비를 늘렸다. 나중에 이게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오일쇼크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나 석유가격이 하락하자 플라스틱 제품 가격이 급락했다. 도매상들마저 가격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팔면 팔수록 적자가 늘었고 재고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10년간 축적해온 회사 자산이 2년 만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오사카 공장을 폐쇄하고 본사를 센다이로 옮겼다. 이때 본사 이전에 찬성한 직원은 5명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정든 오사카를 떠나면서 가족과 같은 종업원 70%를 구조 조정했다.

 

오야마 사장은 이때 굳은 결심을 했다. “두 번 다시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33세의 젊은 경영자가 맛본 쓰디 쓴 경험은 이후 기업이념으로 승화됐다.

 

‘사원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회사는 존속해야 한다. 회사를 둘러싼 환경은 매일 변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변화에도 좌우되지 않고 착실하게 이익을 내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굳게 결심했다. 호황 때 이익을 내는 기업보다는 불황 때 손해를 보지 않는 기업을 만들어야겠다고 반성하며 오야마 사장은 새로운 업태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오야마 사장은 이때의 쓴 경험을 통해 기업 경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 종업원들을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회사가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사업 환경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므로 회사가 불황일 때도 이익을 내는 경영 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도매상들에 대한 불신이다. 석유위기 때 가격을 후려치는 도매상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아이리스오야마는 제조업자가 스스로 유통도 하는메이커 벤더라는 업태를 창출했다.

 

오야마 사장은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선 비용 절감을 위해 오사카 공장을 폐쇄했다. 은행에는 장사하는 방식을 바꾸려 하니 유예기간을 달라고 사정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시장이 작더라도 경쟁이 적은 시장에서 온리 원, 넘버원이 되자고 결의했다. 요즘 경영학에서 말하는니치(niche)’ ‘블루오션이란 개념을 30년 전에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매출이 반으로 줄어도 좋으니 자신의 강점을 살려 이길 수 있는 비즈니스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수백만 엔을 지불하고 140만여 개에 달하는 전 업종에 걸친 일본 내 기업 데이터를 구입했고 반 년에 걸쳐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불황에 강한 분야는 항상 수요가 끊이지 않는 생활용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중에서도 원예 용품, 즉 플라스틱 화분을 제조해 판매하기로 했다. 데이터를 면밀히 조사해보니 원예용품을 제조하는 2개 회사는 석유 위기 불황에도 이익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야마 사장이 이 분야를 사업으로 택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시대변화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소득이 증가하면 서구 선진국들처럼 집안에서 식물을 가꾸는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시대변화를 읽었다. 오야마 사장은 우연으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필연보다는 성공 확률이 훨씬 낮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의 4가지 판단 기준을 세운다. 첫째, 자사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사업, 둘째, 장래성이 있는 사업, 셋째, 수익성이 높은 사업, 넷째, 경쟁사보다 우위에 있는 사업에 손을 대기로 했다.

 

 

‘유저 인을 실천해 히트상품 개발

오야마 사장은 1981년에 플라스틱 화분을 개발했다. 이미 플라스틱 화분을 제조하는 기업은 많았지만 보습성·통기성이 뛰어나 흙으로 만든 화분 못지않은 플라스틱 화분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기존 플라스틱 화분은 소재만 플라스틱으로 했을 뿐 물을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버리는 등 문제가 많았다. 이런 원예 애호가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물이 잘 빠지도록 화분 밑 부분에 망사를 깔고 지면과의 거리를 두는 구조로 만들었다. 아이리스오야마의 플라스틱 화분은 1980년대 일본에서 원예 붐을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둔다.

 

이때 오야마 사장은유저 인이라는 개념을 확립한다. 최종 사용자의 불만과 부족을 해소해주는 제품을 개발하면 소비자는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아이리스오야마는 최종 사용자의 불편·불만·부족을 해결하는 비즈니스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화분의 최종 유저는 식물이지 판매점 등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물의 불편·불만·부족을 해결하는 화분을 만들면 결국 소비자들도 이를 만족할 것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또 하나, 시대의 변화와 유저의 불편·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태어난 제품은 씻을 수 있는 플라스틱 개집(1987년 발매)이다. 원예용품 판매량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오야마 사장의 아이들이 집에서 개를 키우고 싶다기에 개집을 사줬는데 참기 힘들 정도로 악취가 났다. 당시 개집들은 베니어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청소하기가 너무 불편했다. 오야마 사장은 소득이 증가하면 앞으로 실내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가정이 늘어날 것이므로 개나 고양이를 실내에서 키울 수 있도록 집을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맞춰 개집 안에 화장실 공간을 만들고 침구도 제작했다. 애완동물도 가족으로 여긴다면 이들에게도 쾌적한 생활을 할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내에서 개를 키우기에 불편이 없도록 각종 펫(pet) 용품들을 개발해 성공을 이어갔다.

 

 

아이리스오야마의 기업이념

· 회사의 목적은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다.

· 어떠한 시대 환경에서도 이익을 내는 시스템을 만든다.

· 건전한 성장을 계속해 사회에 공헌하고, 이익의 환원과 순환을 도모한다.

· 사원이 행복하면 회사도 좋아지는 시스템을 만든다.

· 고객의 창조 없이는 회사의 발전도 없다. 생활제안형 기업으로서 시장을 창조한다.

· 항상 지()를 높게 가지며,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혁신 성장하는 생명력이 충만한 조직을 만들어 나간다.

 

1988년에 발매한 투명 수납케이스는 일본의 집안 풍경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히트했다. 이전에도 플라스틱 수납장은 있었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갈아입을 옷을 찾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오야마 사장 역시 낚시에 입고 갈 옷을 찾으면서 부인과 다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사용기 재질에서 착안한 이 제품의 단가를 낮추려는 노력을 거듭한 결과 기존의 플라스틱 수납장보다 20%가량 비싼 수준까지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판매업자들은아무리 투명하게 바꿨다고 한들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러한유저 인제품 개발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플라스틱 화분, 페트 용품, 투명 수납케이스에 이어 마스크, 발광다이오드(LED) 전구, 청소기 등 가전 분야로 신제품 출시가 이어졌다. 아이리스오야마에서는 신상품을 만들 때에 먼저 소비자가 받아들일 만한적정 가격을 설정하고 개발을 시작한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비용 삭감 노력을 한다. 다른 기업들이 생산비용에 이익을 얻어서 가격을 설정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또 공장 가동률을 항상 70% 정도로 유지했다. 이를 초과하면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소비자에게 공급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고객이 한 번 품절을 경험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원칙만은 철칙으로 지켰다. 아이리스오야마에서는 이를 결코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투자라고 생각한다.

 

신제품 개발 비결은신상품 개발회의

그렇다면 어떻게 소비자의 불편·불만을 해소하는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할 수 있었을까. 자전거처럼 페달을 끊임없이 밟아야 하는 기업경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리스오야마는 매년 1000개 정도의 신상품을 개발한다. 그리고 신제품 매출 비중 50%, 영업이익률 10%를 유지하고 있다. 생산하는 제품 수만 15000종에 이른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신상품 개발 시스템은 바로 30년 전부터 실시하고 있는신상품 개발회의.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야마 사장은 물론 개발, 제조, 영업, 홍보 등 신상품 관련 부서의 리더 50∼60명이 참가하는 회의다. 신제품 개발 담당자의 기획취지, 기술해설, 원재료 및 제조 코스트, 납품 점포 수, 유사품 매출 실적 등등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수치에 대한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 토론한 후에 오야마 사장이 그 자리에서(go) 사인을 내는 회의다. 한 번 회의에서 60∼70개의 아이템이 검토돼 연간 기준 1000건의 아이템을 출시할 수 있는비밀 장치가 바로 이 회의다.

 

오야마 사장은 이 신상품 개발회의를문제해결을 위한 최강의 툴이라며 이 회의를 통해 3가지 큰 경영성과를 거둔다고 강조한다. 첫째, 조직의 모든 부분의 책임자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조직의 벽을 허물 수 있고 둘째, 조직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최종 실패 책임은 오야마 사장이 지기 때문에 사원들이 신상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조직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스피드다. ‘고 사인이 나는 순간, 금형 발주, 생산라인 구축, 영업 준비 등등 관련된 모든 팀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작동하고 3개월 후에는 신상품이 출시된다고 한다. 오야마 사장은 프레젠테이션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지속적인 신제품 개발의 원동력은 사원들의 적극적인 아이디어 제시에 있다. 실패의 책임은 오야마 사장이 지기 때문에 종업원들은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신상품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그 대신 제안자가 잠재 니즈를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 그 니즈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오야마 사장 스스로문제 발견 역량을 항상 연마하고 있다. 그래야 의사결정을 빨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유저 인의 시점이다. “당신 부인이라면 그 제품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에게 꼭 자문해 보라고 한다. 아이리스오야마에서는 아침 회의가 5분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최대한 간결하게 쓰고 미팅도 선 채로 한다. 오야마 사장은 주어진 안건을 즉시에 처리하고 주저하지 않고 결단한다. 오야마 사장은신속을 모토로 하는 것은 급변하는 소비자의 니즈에 재빨리 대응하기 위해서다. 시대 변화로 소비자 심리도 민감하게 변하기 때문에 이에 재빨리 대응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이 빨라야 한다라고 한다. “인구감소, 소비감소 시대에 같은 상품이나 같은 분야에 머물러 있어서는 사업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변화 속에 기회가 있다. 변화에는 항상 새로운 니즈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 재빨리 캐치해 새로운 기술이나 상품을 개발해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지의 분야에 도전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문제 발견력을 연마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를 금방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오야마 사장은 일본 전국 18000점포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팔리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다음에 무엇이 팔릴지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방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이리스오야마에서는

아침 회의가 5분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최대한 간결하게 쓰고

미팅도 선 채로 한다. 오야마 사장은

주어진 안건을 즉시에 처리하고

주저하지 않고 결단한다.

 

‘메이커 벤더창안

또 하나의 도구가 있다. 메이커 스스로가 도매업자를 거치지 않고 유통에 직접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의 니즈를 재빨리 캐치할 수 있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메이커 벤더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한 아이리스오야마는 원예용품 등 주요 제품을 주로 홈센터(HC)를 통해 판매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도매상을 통해 각종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아이리스오야마는 오일쇼크 이후 홈센터와 직거래를 하기로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홈센터라는 업태가 한창 발전하던 때였다. 생활자의 불편·불만을 해소해주는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자 홈센터도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한 곳에서 히트하자 다른 홈센터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아이리스오야마는 일본 내 홈센터 960개 점포에 SAS(점두판매지원스태프)를 배치해 납품에서 판매에 이르기까지 홈센터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상품지식, 접객 스킬, 파견 점포 등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겸비한 정예 사원들이다. 제조업자가 SAS를 파견하는 것은 얼핏 보아서는 낭비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상품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모르는 고객에게 자사의 상품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고객의 니즈, 불편·불만을 현장에서 접할 수 있다. 이들은 때문에 아이리스오야마에서도 최정예 직원을 SAS로 파견한다. 이들이 수집한 각종 정보는 신제품 개발로 연계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제도는 사업 다각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씻을 수 있는 개집을 사러온 고객이 애완동물에게 줄 먹이를 찾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고객의 눈높이에 맞는 신제품 개발이 추진된다.

 

아이리스오야마는 20년에 걸쳐 생산과 물류를 일체화해 전국 8공장 체제를 완성했다. 즉 물류센터 안에 공장을 집어넣었다. 메이커의 재고와 물류의 재고가 하나가 되도록 했다. 재고부담이 줄었고 판매관리비도 절약할 수 있었다.

 

 

홈센터의 PB 등장

주요 거래처인 홈센터도 성숙기를 맞게 되자 아이리스오야마는 또다시 위기를 경험했다. 홈센터들이 아이리스오야마의 잘 팔리는 제품을 복사한 PB상품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이리스오야마는 두 가지 대책으로 난관을 극복한다. 첫째는 다각화다. 홈센터뿐만 아니라 슈퍼마켓, 편의점, 드럭스토어, 가전양판점 등으로 판매선을 확장했다. 그러면서도 홈센터에서 취급하지 않는 상품을 개발해 홈센터에는 타격을 주지 않도록 배려했다. 드럭스토어 판매용 헬스케어 상품, 토스터·오븐레인지 등이 그것이다. 하나의 업종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메이커 벤더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둘째는 해외 진출이다. 특히 위력을 발휘한 것은 중국 다롄(大連) 진출이다. 다롄을 노린 이유는 센다이와 비슷한 위도이고 일본 친화적인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롄에 7개의 공장을 건설하는 등 중국에서백화점 공장처럼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취급하는 상품이 수지, 금속, 목제, 부직포, 흙 등이며 기계도 사출성형기, 자동 용접기, 자동 용접로봇, 목공공작기 등을 다루면서 실제로 제조업의 백화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기술 육성이나 관리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을 해내는 것이 아이리스오야마의 강점이다. 아이리스오야마는 자신들이 개발한 제품이 어느 정도 성숙하고 경쟁자가 나타나면 금방 다른 신제품이나 비즈니스 모델로 갈아탄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신제품 개발회의이며메이커 벤더.

 

 

‘백화점 공장으로 LED 조명 사업도 성공

고래처럼 큰 시장이 아이리스오야마 앞에 나타났다. 바로 LED 조명이다. 파나소닉, 도시바 등 일본의 유명 가전업체들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발주자인 아이리스오야마가 이 시장에 뛰어든 데에는 나름대로 전략이 있었다. 아이리스오야마는 과거 겨울에 정원을 장식하는 LED 일루미네이션을 생산·판매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기술과 노하우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LED 조명 사업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금방 시장에 진입하지 않았다. 바로 소비자가 원하는적정 가격으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오야마가 LED 조명 사업을 구상했던 2008년 당시는 파나소닉의 LED 전구 가격이 9800엔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 가전업체는 제조 원가에 이익을 덧붙여 판매하기 때문에 소비자 가격이 비쌌다. 아이리스오야마는 전구가격이 2000엔대로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 백열전구에서 LED 전구로 바꾸면 1년간 절약할 수 있는 전기료가 약 2000엔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오야마는 2000엔대의 가격이 소비자가 살 수 있는적정 가격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가격을 2000엔대로 낮출 수 있도록 사내의 모든 자원을 LED 전구 개발에 투입했다. 우수 인력을 LED사업에 투입했고, 생산은 중국에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2010, 2980엔짜리 전구를 선보이며 시장에 신규 진입했고 지금은 대기업들을 위협할 정도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다른 메이커들이 가전양판점을 주요 판매선으로 한 데 비해 아이리스오야마는 주부들이 쉽게 찾고 있는 드럭스토어를 공략했다. 특히 동일본대지진 이후 에너지 절감 기술이 키워드가 되자 LED 사업은 더욱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이리스오야마가 다른 메이커들보다 비용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백화점 공장식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오야마의 공장은 플라스틱 가공, 금속가공, 목공, 프레스, 도장라인 등이 가능한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이다. 시장 니즈 변화에 따라 수시로 생산량을 조정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를 다른 제품 생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이 코스트를 낮출 수 있는 비법이다. 비용절감을 위한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이 유행하고 있지만 아이리스오야마는 이런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오히려 자사의 생산 시스템을 갖춰야만 저가 생산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LED 조명 생산도 반도체만 외부에서 조달할 뿐 나머지는 전부 자체 생산한다. 이렇게 하면 다른 기업들보다 30% 정도는 싸게 생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적정 이윤도 확보하면서 소비자에게는 적정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

 

가족기업으로 수성하다

아이리스오야마는가족기업이다. 이사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부 오야마의 형제들이다. 오일쇼크 때의 위기상황이 그 배경이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다른 유명 대기업에 근무하는 형제를 불러 모아 아이리스오야마의 경영을 돕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같은 큰형님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고 형제들은 토로한다. 밤잠도 자지 않고 밤에는 기계를 만지고, 낮에는 영업 현장으로 나가는 형의 모습을 보고 자란 동생들은 형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야마 사장은업무에서는 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에서는 서로 이해하며 화기애애하다. 서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혈육이기 때문에 생겨난다라고 말한다.

 

아이리스오야마의 경영철학, 기업 시스템은 디플레이션에 대비해야 하는 우리 기업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는 디플레이션 경제로 수요가 감소하는 시대에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다 할 독특한 기술이 없어도 소비자의 불편·불만·부족에 눈을 돌리면 새로운 시장을 얼마든지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유저 인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는 틈새 분야를 공략하라는 점이다. 오야마 사장은 6개월에 걸쳐 140만 개의 자료를 분석해 원예시장이라는 틈새시장을 찾아내 사업화에 성공했다.

 

셋째는 시대의 변화를 선점해 상품개발로 연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변하면 생활패턴이 바뀌기 때문에 이에 부합하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화분, 씻을 수 있는 실내용 개집 등이 좋은 예다. 오야마 사장은 우연보다는 필연의 성공 확률이 높다는 점을 강조한다.

 

넷째는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안하라는 점이다. 오야마 사장은메이커 벤더백화점 공장같은 비즈니스 모델로 혁신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는 생활용품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률을 10%로 유지하게 하는 비결이다.

 

다섯째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점포에 판매 스태프를 파견해 소비자의 니즈를 현장에서 캐치할 수 있게 했고 이를 신상품 개발로 바로 연계시키기 위한 신제품 개발회의를 운영했다. 그리고 오너가 나서 빠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오야마 사장 스스로가 문제 발견 역량을 연마하고 있다.

 

여섯째는 사원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원들이 마음 놓고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도록 책임은 전부 사장 스스로가 진다. 그리고 사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불황에서도 이익을 내는 경영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첫 번째 경영이념이기도 하다.

 

일곱째는 초스피드 경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급변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비즈니스에 반영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계속할지, 중단할지를 결정하는 즉단즉결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아이리스오야마는 평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경영을 실천해 왔다. 이러한 경쟁력으로 디플레이션 경제를 극복해왔다는 점이 우리 기업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

 

 

이우광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wklee@kjc.or.kr

필자는 중앙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 경제학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해 주로 일본 경제와 산업·기업 등을 연구했고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 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등이 있다.

  • 이우광 | -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저자
    wklee@kj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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