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삼성 SDI의 포트폴리오 변화 및 캐치업 전략

조직 관성 무너뜨린 빅뱅 전략, ‘변신의 전설’ 낳다

117호 (2012년 11월 Issue 2)

 

인터넷 검색창에 ‘2차전지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2차전지 주요 업체로 자동 연관 검색되는 회사가 있다. 삼성SDI. 이 회사는 2012년 상반기 매출액(28540억 원) 57%(16315억 원)에너지 및 기타사업 부문에서 올렸다. 소형 리튬이온 2차전지 영역에선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 시장분석기관인 IIT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2 1분기 기준 소형 리튬이온 2차전지 시장에서 삼성SDI가 세계 시장점유율 26.8%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삼성SDI의 최근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삼성SDI=에너지 기업이란 분류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 회사는 원래 TV 브라운관 전문 업체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1990년대엔 흑백·컬러TV 브라운관 시장을 주도했고 2000년대 중반엔 전 세계 PDP 시장을 호령했다. 브라운관 전문 업체로 출범해 PDP를 중심으로 한 차세대 디스플레이 업체로 탈바꿈했던 이 회사는 이제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또 한번 변신 중이다. 단순히 모습만 바꿔가는 게 아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각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삼성SDI는 브라운관, PDP, 2차전지 등 지금까지 거쳐 온 사업 영역에서 업계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도 아니었다. 브라운관은 오리온전기, PDP 2차전지는 모두 LG화학의 뒤를 따라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삼성SDI신속한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해 국내는 물론 세계 무대에서도 1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한 우물만 파도 1등 한번 하기 어려운 치열한 경쟁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시장을 선도해 오고 있는 삼성SDI의 진화 발전 과정을 DBR이 집중 분석했다.

 

국내 두 번째 흑백 브라운관 업체로 출범

삼성SDI는 삼성전자가 설립된 이듬해인 1970 1월 설립됐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했을 당시 이병철 회장의 꿈은전자 산업의 꽃으로 불린 TV 산업에서 전 세계 1등에 오르는 것이었다. 삼성은 이에 따라 TV의 핵심 부품인 브라운관을 생산하기 위해 당시 진공관으로 유명했던 일본 NEC와 합작, 현재 삼성SDI의 전신인 삼성NEC㈜를 출범시켰다. 브라운관 업체로는 오리온전기에 이은 국내 두 번째였다. 삼성NEC는 비록 오리온전기보다 1년 늦게 시장에 진출하긴 했지만 회사 출범 후 불과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흑백 브라운관을 생산(1970 12)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 설립 직후 일본 NNE(NEC의 자회사)와 진공관 및 흑백브라운관 기술도입 계약을 맺고 NNE와 일본 제국전자로부터 관련 설비를 도입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인 덕택이었다.

1974년 삼성NEC 1차 오일쇼크 등 주변 상황 악화를 계기로 NEC와 불합리한 합작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로열티 인하와 독자적 영업 및 구매 권한을 골자로 한 새로운 합의서에 조인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명도 삼성전관공업주식회사로 바꿨다.

독자 경영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삼성전관공업은 1975년 세계에서 세 번째, 한국에서는 첫 번째로퀵스타트(Quick-start)’ 브라운관을 개발함으로써 고속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퀵스타트 브라운관이코노참조) 이후 컬러 브라운관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1977년 일본 NEC와 기술제휴계약을 맺고 이듬해 컬러TV 브라운관(CPT·Color Picture Tube) 공장 착공에 나섰다.

1980년 컬러 브라운관 공장 준공 후 3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한 삼성전관공업은 1984년 사명을 삼성전관주식회사로 바꿨다. 이와 함께 삼성전관은 CPT 생산능력을 당시 연산 300만 개 규모(1984)에서 1980년대 말까지 연산 680만 개 규모로 늘린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는 당시 삼성전자의 컬러TV 340만 대 생산 계획을 반영해 삼성전자와 외부로의 판매를 각각 절반씩 계산해 정한 목표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1984 6월 경영이사회에 참석한 이병철 회장의 지시에 따라 전격 수정된다.

 

컬러 브라운관 연산 1000만 개 생산 체제 구축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관에 1988년까지 세계 수요의 10%에 해당하는연산 1000만 개 생산 체제를 구축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어떤 사업이든 최소한 세계 수요의 10%는 차지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병철 회장의 철학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관이 비록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컬러브라운관 사업에서는 그리 늦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마침 1970년대 후반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RCA, 제니스, GE, 톰슨, 필립스, 소니, 마쓰시타, 히타치 등 세계 굴지 전자업체들의 CPT에 대한 투자가 주춤한 상태였다. 경쟁사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다면 후발주자로서의 약점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게 이병철 회장의 판단이었다.

삼성전관은 이에 따라 월산 25만 개 규모인 수원 공장을 32만 개 규모로 증설하고 1988년까지 가천 신공장에 월산 60만 개 규모의 공장을 3단계로 나눠 건설했다. 3년 반 동안 1100억 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연산 1000만 개 생산체제 구축을 계기로 삼성전관은 세계적인 브라운관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1988 1080만 개의 CPT 연산 규모를 달성함으로써 필립스, 도시바에 이어 세계 시장 점유율 3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삼성전관은 생산거점의 다각화를 통한 글로벌화에 주력했다. 1998년 기준 삼성전관의 브라운관 생산 규모는 4000만 대로 늘어났고 해외 생산 비중은 70%에 달했다.

 

호황 속에 감춰진 위기 감지

1995년 삼성전관은 창업 이래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다. 창업 이후 가장 많은 19324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고 영업이익(1468억 원)과 경상이익(1229억 원), 당기순이익(1020억 원) 모두 사상 처음으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바깥에서 보기엔 최고의전성기였다.

그러나 냉철히 따져보니 문제가 많았다. 우선 브라운관 사업 부문에 대한 매출 집중도가 너무 높았다. 또한 영업력에 의해 이익과 매출이 늘었다기보다는 공급부족에 따른 판가 상승의 공이 컸다. 특히 1995년은 공급 부족에 따라 세 차례나 가격을 인상했을 정도로 호황이었다. 하반기 손익분석과 경영효율을 분석한 결과 제품 가격 인상이 없었다면 그만한 이익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내부적으로 낭비와 비효율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생산원가가 너무 높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도 수두룩했다. 외부 시장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브라운관 증설 경쟁으로 인해 가격은 언제든지 폭락할 위험이 있었다. 일본과의 기술 격차는 여전히 컸고 대만의 중화영관이 삼성전관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경쟁자는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삼성전관은 삼성그룹 내 계열사인 삼성전자와도 경쟁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됐다. 삼성전관은 브라운관을 대체할 차세대 디스플레이 산업 육성 및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LCD, PDP 등 평판 디스플레이 사업에 투자를 해왔다. 특히 LCD의 경우 부산사업장에 생산라인까지 준공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삼성전관은 그룹 차원의 결정에 따라 1991 TFT-LCD 사업을 삼성전자에 넘겨야 했다. LCD 생산 공정이 반도체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가 LCD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식구끼리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삼성전자는 LCD 사업 육성을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했고 삼성전관이 사상 최대 실적을 냈던 1995년엔 국내 최초로 LCD 양산 라인을 가동하며 디스플레이 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이처럼 안팎으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삼성전관의 구성원들에겐 위기의식을 찾기 힘들었다. 창업 이후 단 한 해도 매출이 줄어든 적이 없었고 20년 넘게 흑자 행진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윤종용 대표와 임원진은 전성기처럼 보일 때일수록 위기의식을 갖고 미래를 위한 내실 다지기에 힘써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사적 프로세스혁신(Process Innovation)을 추진키로 결정하고 1995 101 PI(process innovation·프로세스 혁신) 추진팀을 발족시켰다.

 

프로세스 혁신(PI·Process Innovation) 6시그마(6 sigma)

PI는 구성원들의 마인드와 업무의 순서 및 방법 등 기업경영의 모든 프로세스를 고객의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재수정하는 작업이다. 대개 회사의 모든 프로세스를 재설계한 후 그 기초자료를 근거로 후속 작업인 IT시스템을 구축해 마무리 짓는다. 중견 기업을 기준으로 할 때 이 두 가지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은 통상 프로세스 재설계와 IT시스템 구축 각각에 1년씩 총 2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조직의 규모가 큰 삼성전자의 경우 PI 작업을 완전하게 정착시키는 데 5년이 걸렸다. 그러나 윤종용 대표 후임으로 1996 1월 삼성전관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손욱 대표는 이 모든 과정을 1년 내에 끝내기로 결정했다. , 1996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997년부터 실제 시행하고 실행 과정 중 일어나는 문제를 보완해 1998년에는 완전히 정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PI를 지원할 업체로는 공개입찰을 통해 독일에 본사를 둔 KPMG가 선정됐다. 공개입찰에 참가한 6개 사 중 독일 KPMG 한 곳만이 1년을 수락했다. KPMG ‘1이라는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프로세스 설계와 IT시스템 구축을 동시에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자칫 모든 시스템이 뒤엉켜 일대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발상이었지만 삼성전관 경영진은 하루 종일 토론을 벌인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그만큼 경영진이 생각하는 위기 수준은 높았다.

삼성전관은 1996 3월부터 본격적으로 PI를 추진했다. 프로세스 재설계와 IT시스템 구축을 동시에 추진하다 보니 초기 PI 추진팀 인력만 100명에 달했다. 추진 과정에서 합류한 간접인력까지 포함하면 프로젝트에 투입된 전체 인력은 200명에 육박했다. IT시스템은 당시 세계적인 기업들이 주로 사용하던 ERP 시스템인 ‘SAP R/3’를 도입하기로 했다. SAP R/3는 재무, 회계, 생산 및 설비, 영업, 인사 등 각 부문에 걸친 10여 개 모듈로 구성돼 있었는데 대부분 기업들은 필요한 모듈만 선택해 사용하거나 순차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삼성전관은 전체 모듈을 한꺼번에 도입하는, 이른바빅뱅(Big Bang)’ 방식을 선택했다.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전관은 1997 4월 생산, 구매, 영업, 재무 등 SAP R/3 전 모듈을 오픈했다. 처음엔 예상했던 것처럼 시스템이 엉키고 충돌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약 1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시스템이 안정되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ERP 도입으로 물류, 생산수율, 영업, 구매, 원가 등 기존에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됐던 시스템(stand-alone system)이 한데 통합돼 운영(integrated system)됨으로써 시스템 간 정보 활용력이 높아지고 투명 경영과 스피드 경영을 실현하는 데 일조했다.

삼성전관은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PI에 이어 1996 10 ‘6시그마(6 Sigma)’ 운동까지 내쳐 시작했다. 물론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PI 하나만으로도 벅찬 마당에 개념조차 생소한 6시그마까지 도입하려고 하자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동시 다발적인 혁신 활동에 대한 구성원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삼성전관 경영진은 향후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제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개선하기 위한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6시그마를 추진해 나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처럼 혁신도 개혁의 바람이 불었을 때 한꺼번에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성전관에서 삼성SDI로 사명을 바꾼 2000 1월 새롭게 취임한 김순택 대표는 6시그마 전파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을 ‘6시그마 챔피언의 날로 지정하고 임원들과 함께 6시그마 목표와 우수 사례를 점검했다. 이와 함께 6시그마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미국 컨설팅 기관인 SBTI 1년 동안 컨설팅 계약을 맺어 블랙벨트 양성 교육을 실시했고 2001년부터는 사내 강사를 활용해 6시그마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기존의 경영혁신팀은 아예 ‘6시그마 전담팀으로 이름도 바꿨다. 2001년에는 해외 사업장으로도 6시그마를 전파했고 2002년부터는 생산 부문뿐만 아니라 재무와 인사를 포함한 관리부문으로까지 적용 범위를 확대시켰다.

프로세스 혁신과 6시그마라는 혁신 활동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익률, 수주 및 개발 리드타임 등 구체적인 지표들이 속속 개선돼 나갔다. 1997년을 기준으로 평균 17개월 걸렸던 신제품 개발 기간은 1998 10개월로 단축됐고 수주 및 출하시간은 20일에서 10일로, 재고자산 보유일은 40일에서 12일로 각각 줄어들었다. 6시그마 도입으로 1998년 한 해 동안 11000억 원 규모의 원가 절감 효과를 봤다는 게 회사 측 추산이다.

 

PDP 중심의 차세대 디스플레이 업체로 변신

1999 12월 삼성전관은 브라운관 위주의 사업 구조를 미래 지향적인 첨단산업으로 전환하고 새천년을 맞아 디지털 시대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삼성SDI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꿨다. 사명 변경과 함께 삼성SDI는 브라운관과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디스플레이 업체로 성장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미래를 이끌 디스플레이로 삼성SDI가 지목한 건 바로 PDP였다.

 

삼성전관이 PDP 사업에 처음 손을 댄 건 1989 10월이다. 당시 삼성전관은 1987 3월부터 삼성종합기술원이 수행해 오던 과제를 이관받아 PDP 개발을 진행했다. 1990년대 초 주로 랩톱용의 단색 PDP를 개발하던 삼성전관은 LCD가 등장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됐고, 이로 인해 PDP 사업을 거의 접다시피했다. 하지만 LCD 사업이 1991년 그룹 차원의 사업 영역 조정에 따라 삼성전자로 이관된데다 1996년을 전후해 세계적으로 PDP 기술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지면서 다시 인력을 늘리고 PDP 연구를 본격화했다.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삼성SDI는 중앙연구소 소속이던 PDP개발팀을 독립된 PDP사업팀(2001 3 PDP사업본부로 확대)으로 전환하는 등 조직 체제를 정비했다. 이어 10년 넘게 연구소 단계에서만 진행해왔던 PDP 개발을 양산화하기 위해 2000 5 PDP 공장 기공식(천안사업장)을 가졌다. 5년 내에 세계 시장 점유율 25%, 매출 15000억 원을 달성한다는 PDP 일류화 전략에 따라 2005년까지 연면적 20여 만㎡ 규모로 2개 공장, 3개 라인(연산 150만 대)을 구축한다는 목표였다. 2001 7월 준공된 천안사업장 P1라인은 월산 3만 개 규모로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2900억 원을 투입, 37인치, 42인치, 50인치, 63인치 PDP 4개 기종을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공장 설립을 위해 첫 삽을 뜬 지 고작 14개월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초기 PDP 시장 선점을 위해 생산뿐 아니라 마케팅에도 박차를 가했다. 주력사업이었던 컬러브라운관 마케팅의 노하우를 PDP 부문으로 이전하기 위해 ‘CPT·PDP 교류회를 개최했고 판매팀과 별도로 마케팅팀도 신설했다.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 유럽, 일본 등 각 지역별로 마케팅 전략을 세분화한 것은 물론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시장 선점을 위해 중국영업팀을 신설한 후 과거 브라운관 영업에 경험이 많은 임원들을 전진 배치했다.

그룹 내 전자 관계사들과의 협력도 공고히 했다. 당시 LG전자는 삼성SDI보다 한발 앞서 양산에 성공, 이미 유럽과 북미 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다. 오리온전기로부터 PDP를 공급받는 대우전자 역시 유럽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 3대 디스플레이 메이커로 꼽히는 일본 NEC LCD 사업을 포기하고 PDP 사업에 주력키로 함에 따라 초기 보급 단계인 PDP 시장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후발주자였던 삼성SDI는 이에 따라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 삼성그룹 내 전자 관계사들과의 공동으로 ‘PDP-TV 일류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5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삼성전자는 미주법인(SEA)에 디지털 TV 마케팅 전담팀을 별도로 구성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룹 차원에서 전방위 노력을 기울였다.

전 세계적으로 PDP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삼성SDI 2003 3700억 원을 투입해 월산 65000대 규모의 2라인조기착공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기존 P1라인의 증량 공사도 추진, 두 가지 모두를연내에 끝냈다. 한발 더 나아가 연말 P2라인 준공에 임박해서는 P3라인(2004 11월 준공 목표), P4라인(2005 7월 준공 목표) 건설을 위해 총 9400억 원을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했다.과감한 설비 투자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규모의 경제 확보 노력과 함께 공정 기술 혁신에도 매진했다. 한 장의 유리 원판에서 여러 장의 PDP 패널을 한꺼번에 제조하는다면취 제조 기술’, 유리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고속 정밀 절단이 가능한레이저 유리절단 기술등 원가 절감 및 생산성 제고에 도움이 되는 기술도 적극 도입, 양산 라인에 조기 정착시켰다. 2003 125 P2라인 준공을 계기로 삼성SDI는 월산 13만 대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PDP 업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는 국내외 경쟁업체에 비해 2배 이상의 규모였다.

초대형 PDP 생산체제를 기반으로 삼성 SDI는 늘 세계 최대 크기의 제품을 내놓으며 시장을 주도해 갔다. 2000 4월엔 63인치 HD PDP, 2003 5월엔 70인치 FHD PDP를 발표했고 2004 1월과 11월엔 각각 80인치와 102인치 FHD PDP를 선보이는 등 각 시기마다 당대 최대 크기의 PDP를 계속 내놓았다.

 

 

 

 

결국 삼성SDI PDP 사업은 양산을 시작한 지 약 2년 만인 2003 6월에 월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2004년엔 한 해 동안 868000개의 PDP를 판매해 세계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다. 2005 5월 들어 삼성SDI PDP 누계 생산은 200만 대를 돌파했고 8월 들어서는 PDP업계 최초로 월 생산량이 20만 대를 넘어섰다. 2001 7 PDP P1라인 준공 후 불과 43개월 만에 이룬 업적이었다.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의 변신

2009 5월 창립 39주년 기념식에서 삼성SDI는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사업 분야 최고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이는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더 이상 가파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LCD PCP 간 엇비슷한 경쟁 구도였지만 200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디스플레이 시장의 주도권이 LCD로 완전히 넘어감에 따라 PDP 시장의 성장 정체가 예견됐기 때문이다. 삼성SDI로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고 신성장 엔진으로 2차전지를 지목했다.

원래 삼성의 2차전지 사업은 1990년 그룹의 수종사업으로 정해지면서 당시 삼성전관, 삼성전자, 삼성전기 3사가 각각 연구개발에 들어갔다. 그러다 1992년 그룹 내 중복사업을 조정하면서 삼성전자로 통합됐고 1994 4월 삼성전관이 다시 삼성전자로부터 사업을 이관받았다.

삼성전관은 1999 8월 천안사업장에서 2차전지 공장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양산 투자에 들어갔다. 외환위기로 대부분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삼성전관은 후발 주자로서 당시 급성장하고 있는 휴대폰 및 노트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총 1700억 원을 투자해 연면적 13200( 4000) 규모의 2차전지 공장을 완공하고 2000 7월부터 본격 양산 체제에 돌입했다.노트북PC에 들어가는 원통형 리튬이온전지, 휴대폰용 각형 리튬이온전지, 차세대 리튬폴리머전지 등 3종류의 2차 전지를 월간 220만 개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었다.

양산 제품들은 소니, 산요 등 일본 선진업체들의 기존 제품 대비 성능을 20% 향상시킨 제품들이었다. , 원통형 리튬이온전지는 2000밀리암페어(h)로 기존 제품(1600∼1700H)에 비해 18∼25%나 강화된 세계 최고용량 제품이었고 각형 리튬이온전지의 경우 일본 제품에 비해 두께가 최대 0.5㎜ 얇아진 4㎜의 초박형 제품이었다. 폴리머전지 역시 기존 일본 제품 대비 약 20% 높은 170Wh/㎏급 고용량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삼성SDI 2003 3 2차전지 제2기동 준공식을 갖고 PDA 및 휴대폰용 리튬폴리머전지 2개 라인, 휴대폰용 각형 리튬이온전지 3개 라인, 노트북PC용 원통형 리튬이온전지 1개 라인 등 총 6개 신규 라인을 새롭게 가동했다. 이로써 생산능력은 기존 7개 라인, 월산 720만 셀에서 13개 라인, 월산 1410만 셀로 약 2배가 늘어나 산요, 소니에 이어 세계 3위권에 진입하게 됐다.

삼성SDI의 첫 양산 제품에서도 잘 드러나듯 삼성SDI는 후발주자로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용량 전지 개발에 매달렸다. 2001 12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각형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성공했다. 두께 2.8, 34, 높이 58, 무게 12g에 불과한 초경량·초박형이지만 에너지밀도가 355WH/ℓ에 달하는 고밀도 제품이었다. 특히 2002 4월엔 세계 최고 용량인 2200h 원통형 리튬이온 전지 양산에 돌입했다. 당시 전지업계에서는 2000h()의 벽으로 불렸다. 삼성전자는 이를 뛰어넘기 위해 14개월간 20명의 개발 인력과 10억 원의 연구 비용을 투자했고 쓸모없는 공간(dead space)을 최소화하는 최적의 전지 설계 기술과 고밀도 전극 소재를 채용, 한계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삼성SDI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2003 2월 또다시 세계 최고 용량(2400h)의 원형 전지를 내놓으며 업체 간 대용량 전지 개발 경쟁에 불을 붙였다.

2008년 일본 시장조사기관 IIT 2차전지 업체들을 대상으로 안전성, 품질, 기술력, 가격 등 11개 항목을 종합 평가한 결과 삼성SDI는 산요(47), 소니(46) 등 일본 업체를 제치고 1(55)에 올랐다. 2010년 이후 삼성SDI 20% 이상의 시장점유율로 전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SDI는 중장기적으로 기존 소형전지 분야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전기자동차용 전지와 전력저장시스템(ESS) 전지, 태양전지 사업까지 모두 갖춘 친환경 에너지 솔루션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목표다. 이를 통해 2015 10조 원, 2020 24조 원의 매출을 달성할 계획이다.

 

성공 요인

‘변신의 귀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삼성SDI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위해 왔던 사업 분야 어디에서도 선발주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발주자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각 영역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견줄 만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그 이유는 뭘까.

<마켓 리더의 조건>의 저자인 제러드 J. 텔리스와 피터 N. 골더는 선발 주자, 즉 시장 개척기업이 지속적으로 시장 지배력을 갖는 마켓 리더가 된다는 상식이 현실에서 자주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선발주자이기 때문에 갖는 이점(firstmover advantage)도 있지만 동시에 불이익(firstmover disadvantage)도 존재한다. 새로운 시장 및 고객 창출을 위한 비용이나 경험 부족에 따른 시행착오 등이 대표적 예다. 시장에 처음으로 진입하는 그 자체로는 영구적인 시장지배력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텔리스와 골더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텔리스와 골더는 기업의 장기간 성공과 지배력 유지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시장에 대한 거시적인 비전경영진의 추진력과감한 혁신재무 건전성자산의 적절한 이용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이런 측면에서 삼성SDI는 텔리스와 골더의 분석에 부합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컬러브라운관 연산 1000만 개 생산 체제 구축이나 PDP 2차전지 사업에서 드러난 과감하고 신속한 설비투자는 미래 시장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 그리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통해 이뤄낸 결과였다. 제품 개발에 있어서도 늘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초대형’ ‘최고용량의 제품을 내놓았고 PI, 6시그마 등 조직의 DNA를 바꾸는 고강도 혁신을 추진했다. 그 결과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단기간 국제 경쟁력을 갖는 글로벌 플레이어로 부상할 수 있었다.

 

특히 삼성SDI는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업 내부 자원은 물론 외부 자원도 적극 활용하는 동태적 역량(dynamic capabilities)을 발휘,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우선 TV 사업 초기 일본 선진업체와 합작사를 체결하고 기술제휴를 맺어 부족한 역량을 보완했다. PDP 사업의 경우엔 CRT 사업을 중심으로 쌓아 온 영업·마케팅 분야 역량을 활용(CPT·PDP 교류회)하는 동시에 그룹 내 다른 전자 관계사들과 공동으로 ‘PDP-TV 일류화 추진위원회를 구성,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섰다.

외부 시장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온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SDI는 정확한 시장 예측력을 기반으로 시의적절하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컬러 브라운관의 경우 제2차 오일쇼크로, PDP 양산 투자의 경우 외환위기로 인해 경쟁사들이 투자를 꺼리고 있을 때를 틈타 공격적인 투자에 나섬으로써 선도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후발주자이기에 갖는 이점(latemover advantage)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존 기업들의 경우 차세대 시장 공략을 위해 결정적 투자를 해야 할 시점에 관성(inertia)과 레거시(legacy)로 머뭇거리다 시기를 놓쳐버릴 수 있지만 후발 주자들은 이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삼성SDI는 선발주자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줄임과 동시에 일본 경쟁사들이 신규 투자를 꺼리고 있을 때 과감한 투자를 단행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조직 내 혁신 DNA를 구축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990년대 중반까지 삼성SDI의 조직 문화는 가능한 위험을 회피하고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관행이 굳어져 있었다. 생산 과정이 일정하고 표준화돼 있는 브라운관 사업을 장기간 성공적으로 영위해 오면서 고착된 문화였다. 이러한 조직 문화는 브라운관에서 평판디스플레이로 시장 주도권이 넘어가는 불연속적 변화(discontinuous change) 상황에서 기업의 성장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컸다.

삼성SDI 경영진은 이런 비생산적인 조직 내 루틴(routines)을 전사적 경영 혁신을 통해 바꿨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혁신 활동을 추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전체를 한꺼번에 바꾸는빅뱅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자칫 무모해보일 수도 있는 결정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건 삼성SDI의 실행 역량(implementation capability) 덕택이다.

삼성SDI결정하면 실행하고, 실행하면 반드시 실적을 낸다는 삼성그룹의 특성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브라운관, PDP, 2차전지 등 서로 다른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특징은일단 결정하면 빠르게 실행하고, 시기와 범위 모두에서 과감한 목표를 세우며, 한번 정해진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성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조직 내 프로세스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삼성SDI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났다. 각각 따로따로 추진해도 버거운 PI 6시그마를 동시에 추진하는 고강도 혁신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낸 것은 그 대상이 기술이든 경영시스템이든 상관없이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일사불란하게 과업을 완수해내는 삼성그룹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브라운관 편찬TF. (2010). 브라운관, 세상을 바꾸다: 브라운관. 용인: 삼성SDI

삼성SDI 40년사 편찬위원회. (2010). 삼성SDI 40년사 1970-2010. 용인. 삼성SDI.

손욱. (2006). 변화의 중심에 서라. 서울: 크레듀.

이희균. (2001). 삼성SDI㈜ 부산사업장의 6시그마 품질운동 도입사례. 경영교육연구, 4(2), pp. 59-89.

 

 

 

이방실기자 smile@donga.com

이정동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 대학원 교수 leejd@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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